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삶과 전설 1
부사령관 마르코스 지음, 주제 사라마구 서문,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구경거리도 아니오, 볼거리도 아닌데 그 곳에는 세계의 시선이 모여있다. 전체 인구의 70%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50%가 영양실조이며, 3분의 2는 하수 시설이 없어 마실 물 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거기.
최저 임금보다 못한 임금에 만족해야 하며 전력도 없고, 포장 도로 조차 없는 거기에는 병원 대신 병영이, 학교 대신 감옥이, 진흙 바닥 생활을 하는 그들의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관광을 위한 숙박시설만 있을 뿐이다. 그 어느 곳보다도 결핍과 불평등이 가득하면서도 ‘고칠 수 있는 병’에 사라지는 영혼만큼은 어느 곳보다도 풍부한 곳이 바로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이다. 그곳이 세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원주민들의 위대한 저항이 10년째 계속 되고 있고(아니 500년째!), 진정한 민주사회로 대체하기 위한 혁명의 바람을 응축하고 세계 곳곳으로 전파하기 때문이다.

개발과 근대화라는 이름의 강요는 그들의 토지를 앗아가고, 정글로 깊숙이 밀어내었다. 존엄과 정의는 사라지고 그들의 이름과 존재는 가려졌기에 그들은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폭력적 혁명이 아닌 근본적이고 민주적인 대화를 통하여 ‘단지 세상을 바꾸자고 제안’한 것이 그들이 요구한 전부였고, 단지 존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군대와 백색경비대, 지주들의 폭력과 살육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던 그들은 이제 전 세계와의 연대를 통하여 미완의 혁명을 지속시키고 있다.

역사 속에는 이러한 악취가 나는 야만의 그늘이 늘 드리워져 있었다. 금덩이에 환장한 청교도 정복자들에 의해 붉은 피가 대지 위에 뿌려지고, 그 후손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박물관의 박제로 전락한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러하고, 평화롭고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을 ‘보호’와 ‘관리’라는 백인들의 정책에 의해 거리의 부랑자, 약물 중독자 같은 사회 부적격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근대화, 문명화의 탈을 쓴 야만적 행위는 19세기 식민정책에서 경쟁과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장한 21세기 ‘식민(食民)’정책에 의해 더욱 위험해지고, 노골적으로 변해버렸다. 원주민을 원시인으로 착각한 미천한 세력들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 존재, 물질, 가치를 자본의 노예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니 인류 최대의 위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말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가장 기본적인 생존과 존엄을 찾으려는 사파티스타의 당위적 요구를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여러 글을 통하여 전한다. 7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이 질리게 하지만, 끝을 보고 나면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어떻게 변하고 대처하는지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무기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매우 흥미롭다.
그들의 무기는 말이다. 무기는 본래 파괴 또는 방어의 목적을 지니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말은 소통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인류는 그토록 잔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적 가치와 존엄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설득하여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말은 가장 큰 위협이다. 그래서 그들의 무기는 말이다.
민주, 자유, 정의, 존엄을 위한 그들의 무기는 그들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주변화 된 가치와 사람들의 바람이 되어 세계로 퍼져나간다.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힘이 세계를 움직인다지만, 절벽의 꽃이 보이지 않는다 한들 향까지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내일의 나무는 누군가는 심어야 내일의 과일을 맺을 수 있는 것이고, 현재의 그늘은 그 자리를 벗어나야 지울 수 있는 것이다.

거울은 우리를 가둔 세상만큼을 비추지만, 유리는 건너편의 세상을 보여준다. 유리의 장막, 그것조차 깨버리고 건너편으로 한걸음 내딛는 힘은 끊임없는 관심과 의식의 진보, 용기 있는 실천에서 온다. 타인을 타인으로써 인정하고, 관리의 대상이 아닌 존중의 대상으로써 바라본다면 이것이 진정한 세계시민으로써 기본 자세이며 우리가 바라는 사회로 가는 정도가 아닐까? 사파티스타, 이제 멀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임을 절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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