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 정도가 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복도 끝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어서 화들짝 놀란 적이 몇 번 있었다. 동생이었다. 까무러치는 내 꼴이 우스운지 동생은 담배를 비벼 끄며 킬킬대고, 나는 멋쩍어서 짐짓 심장 떨어지겠다고 타박을 놓곤 했다. 그렇게 둘이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투닥거리다가 나란히 집으로 들어온 게 두어번 쯤 될까. 

그런데 참 모를 일이다. 언젠가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귀가할 때마다, 동생이 어두운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면, 그래서 또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었으면 하는 실없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기대는, 원래 기대라는 게 그렇듯이, 들어맞을 때도 있고 어긋날 때도 있다. 물론 어긋났다고 해서 좌절할 건 없다. 복도가 텅 비어 있다면, 동생은 틀림없이 집안에서 퀭한 눈으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았을 때 아무도 없으면 왠지 허전하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뀔 때 그것은 아무리 미소한 종류라도 어찌할 수 없는 허전함을 동반하는 것이다. 사소한 반복에도 규칙성을 부여하고 괜한 기대를 품는 버릇은 얼마나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인지. 동생은,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은, 그저 담배를 태우거나 컴퓨터를 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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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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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는 복종적인 대중이 지도자의 연설을 들을 때 발생하는 흥분, 자연현상에 압도될 때 경험하는 흥분, 종교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느끼는 흥분, 이 모든 것들이 자율신경체제의 성적 흥분(오르가즘)의 변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원시사회에서는 종교적인 것과 성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이 모두 하나의 통일체로서 존재했던 것이다. 

성적 예식과 종교 예식의 통일성이 깨지게 된 계기는 자연법칙에 기반한 가모장제 사회조직에서 가부장적 계급사회로의 이행에 있다.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 종교적 흥분은 반(反)성적인 동시에 성을 대체한다. 종교는 성을 억압하고 타락한 것으로 만들면서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성적이다. 오늘날 기독교 예배의식이 그야말로 엑스터시의 도가니인 것처럼. 

종교적 신비주의로 충만한 가부장 사회에서 인간의 성은 억압된다. 라이히는 성에 대한 억압이 인간의 가학적 충동을 강화한다고 본다. 성이 억압되었을 때 나타나는 도덕적 방어력(순수에의 열망, 순결함, 정조에의 집착)은 정치적으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행복하게 결합한 파시즘 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아버지의 권위, 억압으로 인한 성적 갈등, 수동적이고 피학적 인간으로의 퇴행, 종교적 신비주의와 같은 항목들이 라이히의 성경제학 이론에서는 놀라우리만치 정교하게 엮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 따라 8장에서 라이히는 다음 테제에 도달한다. “사회적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성적 갈등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억압 구조 속에서 성적 갈등에 빠져 있는 대중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채 오로지 에로티시즘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성적 갈등을 해소해줄 수 있는) 파시즘 정당을 지지하게 된다. 

라이히의 이론은 놀랍고도 재미있다. 그의 글을 읽어나가는 나 역시 가부장적 규율 질서의 억압 속에서 자라난 평범한 중산 계층의 전형적 신경증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 현대 사회는 오히려 성적으로 무한하게 발산할 것을 (심지어) 강요받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하지 마라’가 아니라 ‘마음껏 해라’는 사회가 아닌가. 성적 억압보다는 성적 분출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있는, 그야말로 섹스왕국이 아닌가. 이런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사회적 책임감이 없는 사람,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이 넘쳐나는 까닭을 라이히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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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1
샤를 푸리에 지음, 변기찬 옮김 / 책세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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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푸리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란, 협동농업으로 자급자족 생계를 꾸려가는 난교(亂交) 공동체다. 판타스틱하지 않은가! 이 책에서는 푸리에의 농업조합 이론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주목을 끄는 부분은 역시, ‘사랑이 흘러넘치는’ 쪽이다. 푸리에는 인간의 본성이 관능적(육체적) 쾌락과 감정적(정신적) 쾌락의 균형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일방적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흔히 전자는 사회적으로 억압되기 쉽지만, 사실상 우리는 오히려 관능적 쾌락을 통해 감정을 탁월하게 고양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영혼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먼저 그는 사랑의 형식에 대해 다섯 단계를 정의한다. 

①소박한 혹은 근본적 단계: 단순한 관능적 사랑 또는 단순한 감정적 사랑.
②혼합된 혹은 균형을 이룬 단계: 관능적 쾌락과 감정적 쾌락의 균형. 법률과 도덕에 의해 합법성과 안전성을 인정받은 일반적 사랑의 형태. 일부일처제 사회. (문명사회에서는 이 단계가 보편적인 사랑의 형식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상당하다. 즉, 고정된 남녀 커플 관계 사이에 지배와 억압 구조가 만연하고, 권태와 불쾌, 불안감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 
③폴리가미 단계 혹은 혼합된 사랑을 여러 결합에 적용하는 초월적 단계: 일부일처제 혹은 일처다부제 사회.
④총체적 혹은 통일적 단계: 프리섹스, 스와핑, 각종 도착적 섹스, 통음난무, 난교.
⑤다의적 단계: 위 모든 단계들이 혼합된 단계. 

푸리에는 마지막 5단계야말로 사랑의 모든 형식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단계라고 말한다. 5단계 사회에서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공평하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타락한 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1~2단계에만 머무르도록 강력하게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3~4단계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이미 문명에 길들여진 노예다!) 문명이 자행하는 최대의 악행을 본성의 억압으로 여긴 푸리에에게 5단계를 지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푸리에는 5단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나르키소스와 프시케의 예를 들고 있다. 나르키소스와 프시케는 시(市)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녀인데, 그들을 갈망하는 남녀가 그 시(市)에만 20쌍이 있다. 문명화된 법률은 프시케가 한 사람의 정숙한 남편에 속하고 나르키소스 또한 한 사람의 순결한 아내에 속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푸리에가 봤을 때 이것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을 독점하려는 비열한 이기주의적 발상일 뿐이다. 그는 사랑의 자유주의를 위하여 20쌍의 남녀가 나르키소스와 프시케를 성적으로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성적 공유는 전적으로 프시케와 나르키소스의 희생과 호의에 의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계기로 희생과 호의를 베풀기를 결심하게 될까. 푸리에는 이것이 전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박애정신, 보편화합을 위한 자기희생정신, 정신적 순수주의에 의해 가능하리라고 본다. 박애정신으로 무장한 프시케와 나르키소스는 그들의 몸을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내맡김으로써 순교자적 영예를 얻고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특혜를 입는다. 한편 추종자들은 ‘천사 같이 고귀한’ 프시케와 나르키소스 덕분에 고결하고 성스러운 도취 상태를 맛보게 된다. 푸리에는 한 사람을 공유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두 사람, 세 사람 또는 그 이상을 공유하는 데도 동의할 수 있다면서, 인간이 좋아하는 사람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한다. 

푸리에는 이 놀랄 만한 글의 서문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빈곤한 사람이 전혀 없고 모든 사람이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까지도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조화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루 일과 중 일정 부분을 열정에 바친다. 그래서 사랑은 조화 속에서 핵심적인 활동이 된다. 사랑은 나름의 규범, 법원, 궁정, 체제 등을 갖고 있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 <숏버스>가 기억났다. <숏버스>야말로 성적 박애주의를 몸소 구현하는 푸리에주의자들의 영화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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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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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really something" 이 책 마지막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다. 살다 보면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다. "It's really something"이라고 외칠 만한! 이 책은 그런 순간을 포착한 열두 편의 짧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미묘한 지점을 레이먼드 카버는 담담하게 낚아 올려 한 편의 이야기로 직조해 낸다. 이 소설가는 마치 행간에 여운을 거느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 같다. 그는 쓰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쓸 줄 아는 미덕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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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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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일의 역사는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충분히 성숙한 이후에도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적 이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파시즘이 태동할 무렵 독일 사회에서 중산계층은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히 비참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아닌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을 지지했다. 대중은 왜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되었을까. 물질적 궁핍 속에서 노동하는 대중들은 왜 자신들의 사회적 상황과는 괴리된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은 왜 현실에선 실패했을까. 

파시즘이 태동할 당시 독일의 중산계층은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선명하게 혁명적이거나 선명하게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혁명적 태도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도출된 두 가지 심리적 구조의 충돌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이 그의 경제적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도식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경제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역으로 경제적 발전(물질)이 이데올로기의 발전(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은 간과했다. 

합리성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대중의 심리구조라든가 이데올로기, 언어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 내밀한 욕구, 욕망, 리비도적 에너지, 주술과 광기에 의해 견고해지는, 신비주의적인 대중의 무의식적 경향성과 같은 일체의 정신의 영역이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모두 관념적 형이상학일 뿐이었다. 그들은 물질적 토대를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정신의 자체적인 힘을 사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와 경제 구조 사이의 모순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이데올로기를 역사를 추동하는 힘으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라이히는 맑스의 유물론을 통속적 맑스주의자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는 대중의 무의식적 심리 구조야말로 경제 구조와 불편한 역학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라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 구조는 경제학적 요인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구축된다. 먼저 사회적 구조의 변동은 인간의 원초적, 생물학적 요구를 변화시킨다. 구조의 변동에 맞추어 변화한 인간의 성격구조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사회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질서는 ‘대중들에 대한 지배’라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성격구조를 그 사회의 구성원인 대중들 속에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산된 이데올로기가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에게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경제 구조 뿐만 아니라 대중의 심리 구조 또한 유물론적 토대를 구성한다는 것. 통속적 맑스주의자들은 간과한 이 지점에서 라이히는 정치심리학이 필요성을 언급한다. 정치심리학은 계급사회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시대에 인간의 성격구조는 어떠한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인간 존재의 모순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인간은 이런 존재에 어떻게 대처하려 하는가 등을 탐구할 수는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심리 구조가 경제 조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유물론적 토대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탐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인간의 사고의 기저를 형성하는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고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심리구조. 라이히는 이것이 인간의 억압된 성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사회는 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성의 억제와 억압을 내면화하도록 요구한다. 권위주의적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 구조에 길들여진 인간은 권위를 두려워하고 순종적인 인간 유형으로 사회화된다. 사실상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권위주의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성적 억압을 내면화한 ‘도덕적 인간’은 열악한 노동착취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보적 변화나 현실에 대한 반역을 두려워하게 된다. 

성적 억압은 대중들을 순종적이고 억압에 익숙한 상태로 만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권위주의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심리 구조 또한 만들어 낸다. 권위주의적 질서의 첨단을 보여주는 국군주의적 의식은 얼마나 섹시한가. 파시즘이 섹시한 이유는 사실상 억압된 성욕이 제도적으로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비판능력을 무화시키고, 오히려 그에 반(反)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 독일 대중의 반동적 정치 성향의 근원을 라이히는 이러한 성의 억압 구조 속에서 발견한다.       

억압된 성 생활이 내면화된 인간, 권위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인간, 자유와 해방을 두려워하는 인간. 이런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고삐 풀린 살인충동을 만끽하는 흡혈귀’가 바로 파시즘이다. 사실 파시즘은 순수한 반동적 운동이 아니라, ‘반역적 정서’와 ‘반동적 사회사상’의 결합이다. 초자아에 대해 엄청나게 반항하는 마음과 엄청나게 복종하는 태도의 기이한 결합이 파시즘인 셈이다. 권위를 갈망하는 동시에 반역적이라는 점에서 파시스트의 심리 상태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노예상태에 있는 ‘소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 한편으로 파시즘은 종교와 닮아 있다. 파시즘은 말하자면 종교적 신비주의의 극단적 표현이다. 파시즘은 성적 도착에서 생기는 종교성을 옹호하며, 가부장적인 수난의 종교가 지닌 마조히즘적 성격을 사디즘적 종교로 변형시킨다. 그 결과, 파시즘은 종교를 고통철학이라는 ‘내세의 영역’에서 가학적 살인이라는 ‘현세’로 변화시킨다.  

*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체제, 뒤이은 분단과 냉전, 한국전쟁이 결과한 반공 규율 체제, 유신 독재 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대사는 파시즘이 일상적 분위기로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밖에 없는 비극의 역사였다. 매카시즘의 상흔이 깊게 남아있는 사회,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사회, 권위와 규율에의 복종이 익숙한 사회, 엄숙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파시즘의 망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파시즘은 사회경제적 과정이나 구조를 넘어서 대중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감정이나 정서, 내면적 심리에 그 힘의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재정권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날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잔재는 여전히 일상의 기류로 존속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으며, 선거철마다 지역주의적 선동이 반복되고,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또한 여전하다. 최근의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드러난 대중의 광기는 또 어떤가.

폴라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며, 사회는 이러한 모순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한다고 말한다. 두 가지 방식이란 다름 아닌 사회주의와 파시즘이다. 전자는 재산과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후자는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오로지 경제생활만을 남겨놓는 방법으로 모순을 극복한다. 굴곡진 한국근대사가 낳은 파시즘의 일상적 기류 속에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유례없이 견고해져가고 있다. 어쩌면 고도자본주의 사회와 파시즘의 밀월 관계를 가장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바로 이곳, 한국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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