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러 가입형 블로그 사이트들을 주유하였으나 알라딘 서재만큼 흥미로운 곳을 알지 못한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상품 후기를 남기는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심지어 후기를 남기면 돈까지 벌게 해주는 것이다. 알라딘의 세계에서는 음식이나 각종 생활 잡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사상과 철학마저 상품으로 환원된다. '맑스'와 '스위스 미스 마쉬멜로우 핫 코코아 믹스'가 동급이 되어 어우러지는 평등한 세계 속에서 소위 '알라디너'들은 끊임없이 상품 후기를 남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다. 상품 후기를 통해 제 존재를 증명해내는 소비사회 주체들의 모습을 이토록 집합적으로 보여주는 사이트가 또 있을까.

 

알라딘 서재질에 취미를 붙이면서 내가 품게 된 한 가지 허황된 야망은 내게 할당된 알라딘 서재라는 이 공간 속에서 나 스스로를 '호모 프로덕트 리뷰무스'로서 형상화시켜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체제가 요구하는 한 독특한 인간 종(種)을 가상의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체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능력이 된다면 그런 미학적 연출이 얼마나 기이한 느낌을 주는지까지도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글쓰기에 있어서는 일종의 자기 실험인 셈이며, 성공하든 못하든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자족적인 유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야망이 무색하게도 요즘들어 내 서재는 갈수록 절간처럼 고요해져 가고, 팍팍한 삶에 기적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런 소강 상태는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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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2011-04-04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들로만 봐선 서른 훨 넘은 분인줄 알았어요^^: 서른에 일에 대해 이런 가치관이 생기셨다니..정말 부러운데요.(서른 훌쩍 넘어서도 아둥바둥거리는 1인..^^)

수양 2011-04-06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로 적다보니까 그럴듯하고 번지르르하게 되었는데 막상 일하다 보면 또 마냥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아니고 때로는 열불나서 다 때려치고 싶기도 하고 그럽니다.

率路 2011-04-0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부럽습니다. 나이에 니은붙힌지도 꽤 되는데 전 아직도 왜 이모냥인지 쩝-_-;;;;

수양 2011-04-12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차 말씀드리지만-_-;; 글로 적다보니까 그럴듯하고 번지르르하게 되었지 정말 저도 사실은 뭐 이모냥이에요-ㅇ-;;;
 

그날 너는 취기가 오르자 핸드폰을 꺼내들고 최근에 내가 적은 글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신랄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 글에서 극도의 자기방어 심리와 자폐적인 에고이즘, 배타성과 공격성 같은 것들을 읽어내었고, 심지어는 내가 의도치 않은 문장에서조차 그런 것들을 찾아내어 나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그런 행동이 나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상당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즐겁게 읽히기를 바라지 낱낱이 해부되고 난도질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마치 아가씨의 경우로 말하자면, 곱게 단장을 하고 밤길을 나섰다가 겁탈을 당하고 돌아온 꼴과 다를 바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불쾌한 표정을 최대한 감추면서, 너 따위가 내 글을 분석하는 것이 불쾌할 법도 한데 내가 전혀 불쾌해 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 ‘너 따위’라고 명명될 수 있을 만한 따위마저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일러주었다. 가시 돋친 나의 말에 너는 쉽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면서 예의 그 호탕한 웃음으로 어색한 순간을 넘기려 했지만, 사실 내가 너에 대해 경계하는 여러 지점 가운데 하나는, 나에 대한 공격을 능란하고 우아하게 철회하는 바로 그런 순간인 것이다.

 

너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내 껍데기를 기습한 다음 내가 표독스런 얼굴로 돌변하면 얼른 찔렀던 칼을 도로 빼내어 칼집에 쓱 집어넣고는 짐짓 머쓱하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너는 내 껍데기를 건드림으로써 나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가? 우스워라, 나는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의지만이 나의 유일무이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는 순간이 곧 나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확신, 더불어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이야말로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심리라는 사실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로데오 경기장의 성난 황소처럼 너를 흙바닥에 처참하게 팽개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뛴다. 자폐의 성에 갇혀 한줌의 햇볕조차 두려워하는 나의 심약한 에고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며, 내 목덜미를 끌어안는 너의 위선에 대해 기력이 다할 때까지 온갖 몸부림으로 맞서겠다고 다짐한다. 너는 아는가. 이것이 위악자가 자존하는 야생의 방식이라는 것을.

 

네가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키아벨리라면, 나는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동지 대부분을 숙청해버렸던 스탈린이다. 그는 위악적인 인물의 전형이었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일수록 의심하고 경계했으며, 그러한 마음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마음을 소란하게 하는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리는 것이었다. 위악은 말하자면, 끔찍하리만치 심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보호하기 위하여 취하는 필사적인 생존의 제스처가 아닐지.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은 사랑했던 이들을 처단함으로써 그 자신은 더욱 더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모두가 그를 따랐다. 내부로는 처참한 고독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망정 그는 위악을 통해 자신의 권좌를 유지했으며, 그리하여 자신을 그 자신으로서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만인에게 사랑받은 독재자의 기이한 생존 방식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항구적 본질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는 오로지 행위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나는 위악을 행함으로써 진정한 악인이 될 것이며, 너는 위선을 행함으로써 진정한 선인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연애는 사도-마조히즘적 대결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내가 너에게 잠식당하지 않고 나를 나로서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전략은 더욱 더 악해지는 길 밖에 없을 테니.

 

너는 나를 지나치게 사랑한 죄로 숙청당할 것이며, 너는 끝내 모래바닥에 나가떨어질 운명이다. 총명한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잔혹한 선언이야말로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보내는 연애편지의 궁극의 내용이자, 생존의 위협을 느낀 자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지르는 기함이라는 것을. 그리고 애초에 이 편지는 네가 내 글을 감히 함부로 난도질한 데 대한 복수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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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21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같다고 먼저 말해 주고 싶습니다. 혀 끝에서 녹아드는 맛이 납니다. 혹여^ 중국의 쑨원 사상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지니고 있으세요^^ 철학이란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없었던 시간 속에서 글자의 의미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한 채 느낌이란 말로 눈으로 감동과 지루함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마치 쑨원 사상가가 다시 이야기를 옆에서 들려 주는 느낌이 나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민주든, 공산주의든.. 사회운동가들이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에너지가 문필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말로 전달하는 글 보단 마음으로 연결되어지는 문필이 더 강한 이유도 행동과 실천 때문이겠지요.

수양 2011-03-21 10: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쑨원은 아직 저에게는 미지의 위인인데 반이법 님 댓글 읽고 나니 궁금해집니다^^

2011-03-22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22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의 구멍 / 홍영철 

멋대로 하세요.
나는 당신 것이에요.
옷을 벗기시든지
주무르시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사랑하진 말아요.
밑지는 건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그것만은 안 되겠네요.
심각한 척도 마세요.
그냥 우리 편하게 지내요.
자, 가까이 오세요.
아니, 가까이 오시든지 마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의 욕망 앞에 나는
순진한 창녀예요.
나는 의미 없는 작은 구멍이에요.
즐거움도 아픔도 모두 껴안는
그런 작은 구멍이에요.
멋대로 하세요, 당신.
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그의 것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이제야 알겠다, 창녀야. 나의 비극은 너를 사랑한 것이었구나. 네 날카로운 입꼬리가 희미하게 들릴 때마다 나는 발정 난 짐승마냥 신음하였으나 내가 바친 순정은 한갓 통속적인 멜로에 지나지 않았구나. 나에게 한 가지 죄가 있다면 지나치게 구구했다는 것이리. 네 앞에서 나는 늘 작은 농담에도 분개하는 소년이었네. 핏발선 눈을 하고 아무데로나 돌진하는 소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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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1-03-21 20:07   좋아요 0 | URL
어익후야, 저는 오늘이 춘분인 줄도 몰랐네요.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는 걸 보면 저는 창녀를 겉으로만 사랑하나봐요:P

근데 이 시집 정말 보석 같아요. <시간의 구멍>만 옮겨적기엔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에게 미안할 정도로요+_+
 

"신성을 이야기하기에 정의-공리-정리-증명으로 이어지는 <에티카>의 서술 방식은 다소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과연 기하학적 증명이라는 서술 형식이 신의 섭리라는 내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첨단 그래픽 영상 예술이라든가 신비로운 시적 잠언, 혹은 오랜 종교적 수행에서 얻은 영성 체험과 같은 형식을 통해서 훨씬 효과적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강렬한 엑스터시의 상태에서 환상적으로 신을 체험하는 것보다 오히려 감정의 고조없이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스피노자식 접근법으로) 신성을 헤아리는 편이 일상에 내재하는 신성을 지속적으로 느끼며 살아가기에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예전에 수유너머에서 <에티카>를 읽을 때 고병권 선생님과 식사하며 나누었던 이야기다. 서가에서 단 한 권의 책을 꺼내라면 망설임 없이 <에티카>를 선택할 것이라고 하시던 선생님은 강독 시간 내내 너무나 즐겁고 신나하셨다.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특히 <에티카>에서 최고조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에티카>는 양장으로 되어 있지 않은 오래된 판본이었는데(서광사, 1990) 그렇게 너덜너덜한 책은 난생 처음 봤다. 어찌나 여러 번 펼쳐보셨는지 책 귀퉁이가 닳아지다 못해 아예 버선코처럼 들려서 가만히 놓아두어도 저절로 펼쳐지려고 막 기지개를 펴는, 무슨 정체모를 생물체 같은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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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1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끊임없이 반복한 책은 '기지개를 펴는 생물체'로 둔갑(?)하는군요.^^ (약간 으스스한데요) 고병권 선생님이 닳도록 읽은 책이 스피노자라는게 좀 의외인데요. 니체라면 모를까^^ 스피노자의 신에서 종교체험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습니다.^^; 곧 원자로가 곧 폭발할 것처럼 보도가 나오던데, 내일은 목도리로 얼굴과 손 발을 꽁꽁 감싸야 할 듯 합니다. 몸 조심하세요...^^(이건 좀 이기적인가요...)

poptrash 2011-03-18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병권 선생님이 닳도록 읽은 책은 맑스일 것도 같은데. ㅎㅎ 저도 한 번 듣고 싶네요.

수양 2011-03-1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독 때마다 나눠주신 핸드아웃만 모아도 책 한 권 나올 거 같아요. 아마도 언젠가는 스피노자에 대한 책도 내시지 않을까요^^
 

주체가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중개자. 지젝은 물신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지젝은 물신주의를 단지 현실도피적인 행동으로만 여기지는 않으며, 오히려 물신주의로부터 영웅적이고도 실존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물신주의는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이지만, 언제든지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으로 전화할 수 있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텅 빈 형식 자체를 고집하는 행동은 오히려 내용에 충실하다는 표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의 물신주의는 주체가 극한적인 상황에서 실존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의 한 예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이 1953년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이다. 당시 진압을 명령받은 군인들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쏴댔지만 노동자들은 총에 맞아가면서도 대오를 이탈하지 않고 숭고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혼비백산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농성 내내 그들이 주문처럼 합창했던 노래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단해서는 안 될, 죽음 앞에서도 매진해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시베리아의 노동자들은 노래 부르기라는 어떤 하나의 강력한 물신주의적 행위를 통해 실존적 주체성을 확립했던 셈이다. 

사람마다 물신의 대상은 다양할 것이다. 농부에게는 자연이, 자본가에게는 돈이, 광신도에게는 성상이, 얼리어답터에게는 신제품이, 그리고 내게는 아무래도 책이 물신의 대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이 나의 현실에 아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독서활동에 지적 유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거의 위악에 가까운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책읽기라는 이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독한 책을 내 나름의 분류법에 따라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공연한 만족감을 느끼는 일종의 성화(聖化) 작업 역시 결코 중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젝이 말한대로 물신주의적 태도가 상황에 따라서는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책에 대한 나의 병적인 물신주의에서도 어떤 조그만 미지의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자기합리화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물신주의의 긍정적 잠재력에 대한 지젝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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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kh 2014-05-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