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가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중개자. 지젝은 물신주의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그러나 지젝은 물신주의를 단지 현실도피적인 행동으로만 여기지는 않으며, 오히려 물신주의로부터 영웅적이고도 실존적인 행위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물신주의는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이지만, 언제든지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으로 전화할 수 있다.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텅 빈 형식 자체를 고집하는 행동은 오히려 내용에 충실하다는 표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의 물신주의는 주체가 극한적인 상황에서 실존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의 한 예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이 1953년 시베리아 노동 수용소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이다. 당시 진압을 명령받은 군인들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을 쏴댔지만 노동자들은 총에 맞아가면서도 대오를 이탈하지 않고 숭고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혼비백산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까닭은 농성 내내 그들이 주문처럼 합창했던 노래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노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단해서는 안 될, 죽음 앞에서도 매진해야 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시베리아의 노동자들은 노래 부르기라는 어떤 하나의 강력한 물신주의적 행위를 통해 실존적 주체성을 확립했던 셈이다. 

사람마다 물신의 대상은 다양할 것이다. 농부에게는 자연이, 자본가에게는 돈이, 광신도에게는 성상이, 얼리어답터에게는 신제품이, 그리고 내게는 아무래도 책이 물신의 대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이 나의 현실에 아무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독서활동에 지적 유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거의 위악에 가까운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책읽기라는 이 텅 빈 상징적 형식에 대한 허황된 고집을 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독한 책을 내 나름의 분류법에 따라 서가에 가지런히 진열해놓고 공연한 만족감을 느끼는 일종의 성화(聖化) 작업 역시 결코 중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젝이 말한대로 물신주의적 태도가 상황에 따라서는 도전적인 상징적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책에 대한 나의 병적인 물신주의에서도 어떤 조그만 미지의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자기합리화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물신주의의 긍정적 잠재력에 대한 지젝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게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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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kh 2014-05-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