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구멍 / 홍영철 

멋대로 하세요.
나는 당신 것이에요.
옷을 벗기시든지
주무르시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사랑하진 말아요.
밑지는 건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그것만은 안 되겠네요.
심각한 척도 마세요.
그냥 우리 편하게 지내요.
자, 가까이 오세요.
아니, 가까이 오시든지 마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의 욕망 앞에 나는
순진한 창녀예요.
나는 의미 없는 작은 구멍이에요.
즐거움도 아픔도 모두 껴안는
그런 작은 구멍이에요.
멋대로 하세요, 당신.
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그의 것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이제야 알겠다, 창녀야. 나의 비극은 너를 사랑한 것이었구나. 네 날카로운 입꼬리가 희미하게 들릴 때마다 나는 발정 난 짐승마냥 신음하였으나 내가 바친 순정은 한갓 통속적인 멜로에 지나지 않았구나. 나에게 한 가지 죄가 있다면 지나치게 구구했다는 것이리. 네 앞에서 나는 늘 작은 농담에도 분개하는 소년이었네. 핏발선 눈을 하고 아무데로나 돌진하는 소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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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1-03-21 20:07   좋아요 0 | URL
어익후야, 저는 오늘이 춘분인 줄도 몰랐네요.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는 걸 보면 저는 창녀를 겉으로만 사랑하나봐요:P

근데 이 시집 정말 보석 같아요. <시간의 구멍>만 옮겨적기엔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에게 미안할 정도로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