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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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에도 실상은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섞여 있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특정한 노동자의 노동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대개 집과 학교에서 학습과 사회화를 거쳐 개별 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숙련(skill)이 만들어진다. (...)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자의 ‘노동자됨’, 또는 ‘노동자다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 ‘노동자다움’이 무엇인지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가 주어진 시점에서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잘 만족시키는 사람은 취업을 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취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개인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차원을 완성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빚어낸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이유를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내가 게으른 탓으로 돌리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의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다운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에 대해 사회가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 즉 개인의 몸과 마음에 대해 작용하는 권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사회가 ‘노동자다움’을 규정짓고 설명하는 말들, 이른바 담론(discourse)의 체계를 통해서 완성된다. (...) 말하자면 자기착취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60~70년대에는 대통령이나 기업주를 아버지로 국민이나 종업원을 자녀로 은유하는 가부장주의(paternalism)였다면,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국가경쟁력 또는 개인의 역량 강화라는 명제였다. 조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온갖 고생을 감내했던 ‘산업전사’나 ‘수출역군’은 이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나 ‘좋은 인적자본의 소유자’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형태로 간주되었던 ‘이타심’이나 ‘협력’은 이제 그 거추장스러운 위장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개인과 가족의 경쟁력 안에 ‘이타심’이나 ‘협력’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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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명이 한 날 한 시에 모여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의 점수를 철저하게 서열화한 대학에 진학하는 근거로 삼는다.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직장에서조차 신입사원을 뽑을 때 토익점수를 선발 기준으로 삼는다. 이는 모두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통제하기 쉬운 사람을 뽑는다는 같은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셈이다. 영어 능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익이라는 정형화한 형태의 시험을 준비하는 지겨운 과정을 효과적으로 견뎌낸 사람을 선발함으로써 노동력을 길들이는 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만약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그 지겨움을 잘 견뎌냄으로써 토익 점수가 변별력을 잃게 된다면? 다시 새로운 기준이 고안될 것이다. 결국 노동력이 만들어지는 첫 과정, 그것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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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적 거래가 가지는 인적 속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물적 속성 사이의 관계, 계약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보다는 물 대 물, 성문화한 명시적 조항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계약만이 문제가 되는 세상으로 변화한다. 앞서 ‘관계에서 거래로’라고 말한 변화다. 이에 더해 이제 ‘일’ 자체가 익명화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OO아빠’에서 ‘OO호 아저씨’로, 그리고 다시 ‘출입카드 소지자’로의 변화다. 고용관계가 아웃소싱이라는 거래관계로 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누가 고용주고 누가 고용된 노동자인지도 불분명해진다. (...)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다른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익명성이 깨지는 것조차도 자본의 논리가 필요로 할 때라는 사실이다. 생산 담당자나 최종 검수자의 이름을 표기한 제품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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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생계비라는 측면보다는 그때그때 일한 대가라는 관점이 강화되는 흐름은 고용의 형태가 유연해진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일 자를지도 모를 노동자에게 생계비라는 개념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싶은 고용주는 없기 때문이다.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때그때 한 일에 대해 그때그때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갑자기 해고를 하더라도 도덕적 부채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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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로널드 코즈는 기업을 시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실은 마르크스가 오래 전에 이미 그러한 개념을 이해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움직여나가는 사회다. 그리고 시장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끼리 교환한다는 원리로 운영된다. 그런데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인 기업 내부에는 시장 원리가 아니라 지휘와 통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마치 군대나 관료 조직에서 상급자가 결정하여 명령하면 하급자는 그에 복종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일대일의 계약 관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고용주는 피고용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피고용자는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더구나 기업은 이른바 ‘going concern',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조직이므로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반복된다. 이렇듯 권력 관계가 반복해서 작동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신분적 위계는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 외관상 형태만 부드럽게 바뀔 뿐 권력이 행사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변화없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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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심지어 자녀 양육에서까지 나타나는 국제적 사슬(chain) 관계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리스에 사는 백인 중산층의 아기는 영어에 능통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필리핀 마닐라 출신의 이멜다(이름이야 무엇인들)가 돌본다. 그렇게 번 돈이 마닐라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된다. 그 돈 중 일부는 이멜다의 아이를 돌보는 시골 출신 보모에게 수당으로 지급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하는 ‘장거리 사랑’의 한 가지 형식이 이렇게 탄생한다. 한국에서도 중산층 맞벌이 부부의 입주 베이비시터는 대부분 가족을 두고 떠나온 조선족 중장년 여성이다. 이것은 이른바 생산의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와 같다. 즉 말레이시아에서 만들어진 부품으로 중국에서 조립된 완제품을 한국 회사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구조다. / 사실 이러한 구조는 이멜다나 조선족 여성에게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 사회의 신분 구조라 할 영주와 하인 관계가 변형된 모습을 한 채 글로벌한 규모로 다시 등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가족 형태에서 어머니가 담당하던 돌봄노동은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온 여성 노동자의 몫으로 바뀐다. 울리히 벡은 이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가 이제는 부엌과 아이 방으로까지 들어온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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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체성과 소비자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충돌은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하다. 이를테면 노동자로서 나는 열악한 작업 조건과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통받는 대형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 ‘마트 안 가기 운동’을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가 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연대를 시도한다면 불합리한 구조는 바꾸지 못한 채 소비자로서의 합리적 소비와 효용 극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연대를 포기하는 것이 이득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결국 플리트우드가 지적했듯이 이런 ‘나’들의 태도와 행동이 모여 집합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해로운 작업 조건을 유발하게 된다.”

 

“인건비가 궁극적으로 기업이 시장에서 소비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구매력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었다. 상품을 동료 자본가에게만 팔 수는 없다.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가 사주지 않으면 생산한 제품을 제대로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본가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사는 노동자에게 충분한 구매력이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개별 자본자 처지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자신은 임금을 적게 지급해 비용을 절약하고, 동료 자본가는 임금을 많이 지급해 시장에서 노동자가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게 되는 상태다. 모든 자본가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역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다. 자본가 A와 자본가 B가 모두 저임금 전략을 추구하면 경제 전체적으로는 노동자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함께 유효수요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동시에 자백한 두 명의 용의자가 모두 무거운 죄를 받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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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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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세대 주택이냐 단독주택이냐 아파트냐. 새로운 가족과 함께 할 주거형태를 두고 여전히 저울질 중인 상황에서 이 책은, 주거문화 회복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는 그 취지가 무색하게도 퍽이나 나쁘게(?) 읽힌다. 왜 아파트로 가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표가 명백해진 까닭이다. “기반시설이 허약한 도시 공간을 사유(私有) 기반시설을 갖춘 자족적 아파트 단지들로 분절 격리하고 이를 개인이 구매하도록 하는 전략”(34)을 통해 공공투자를 최소화하면서도 중간계층의 증가하는 공간 욕구를 충족시켜온 것이 저간의 한국 도시주택개발정책의 역사라면, 열심히 구매력을 길러 열악한 도시 공공공간 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私設) 오아시스인 아파트 단지”(24)로 진입해야 하겠다는 결심은 차라리 절박한 어떤 것이 된다.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공적 차원의 영역을 시장과 개인에게 내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오늘의 교육 현실과 아파트 문제를 동일선 상에 놓는다. 교육 문제에 통감하고 교육계의 변화를 바란다면 나부터 내 자식을 사교육 시장에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공공영역에 대한 시민적 책임의식을 가진 개인이 할 수 있는 개혁적 실천이 있다면 제일 먼저 아파트에 안 사는 것이겠다. 그러나 과연 내게 조금이라도 경제적 여력이 생길 때 내 자식 사교육을 안 시킬 수 있을까. 아파트에 안 살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용기와 신념과 배짱이 있지 않고서야. 여담이지만 결혼은 확실히, 인간을 한층 더 보수화시키는 것 같다. 미래에 관한 여러 가지 구상이 내 가족을 염두에 두는 순간 점점 더 안전 지향적으로, 소시민적 가족주의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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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정치학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3
홍성민 지음 / 현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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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디외의 이론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경직된 계급 환원론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 책 후반부에 간략히 소개된 질 리포베츠키의 부르디외 비판에 눈길이 간다. 리포베츠키는 <행복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소비사회를 3단계로 구분한 뒤 구별짓기 효과는 2단계에서만 국지적으로 유효한 개념일 뿐이며 소비사회 이후에는 '과소비사회'가 도래한다고 했다 한다. 과소비사회에 대한 리포베츠키의 이론을 통해서 오늘날의 덕후 문화를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3단계는 개인의 취향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소비의 패턴이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과소비사회(hyperconsumer society)의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상징적 투쟁의식이 부차적인 것이 되고,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그래서 오락적인 가치가 명예보다 중요해지고, 자아의 행복감이 계급적 ‘구별짓기’보다 우월하게 여겨지며, 감각적인 안락함이 과시적인 기호의 효과를 누르게 된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상품의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지만, 이것은 계급적 구분을 위한 기능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욕구에 걸맞은 정체성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소비사회에 팽배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동족의식을 느끼게 된다. 특히 젊은 층이 브랜드를 선택할 때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기호와 취향을 확인하며, 이를 근거로 사회적 코드를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처럼 물려받은 소속감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174쪽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심화되고 공고해져 갈수록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면의 중심축과 자기언어 같은 게 더더욱 필요할 것 같다. 계급 논리에 전적으로 수렴되지만은 않는 고유의 자기미학을 구축해 나가는 인간은, 끊임없이 독자적인 삶의 양식과 철학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인간은 (비록 그것이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미완으로 끝날 지라도) 적어도 자기소외의 상황에 매몰되지는 않을 것 같다. 덕후질이란 것도 계급 논리를 초월하여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창조함으로써 고유한 자기미학을 정립해나가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2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자본이나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적 경험이 전혀 없고 한 사회의 고유한 전통과 철학이 온전히 보존되어온, 그 사회가 자긍심을 갖고 일구어온 정통적인 문화 가치 체계가 올곧게 살아있는 유럽 국가한테나 적용 가능한 개념인 것 같다. 서구 열강과 달리 식민통치에서 뒤늦게 벗어나 졸속성장한 한국사회는 오백 년 조선왕조의 양반문화와 선비정신이 깨끗하게 증발해버리고 대신 그 빈자리에 개도국 특유의 천민자본주의 정신과 졸부정신만 들어앉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문화적 유아기 상태로의 전국민적 재부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왕조 오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일구어낸 클래식하고 귀족적인 문화와 가치와 정신이 식민지배 체제 속에서 말끔하게 전소되어버린 덕택에 전국민이 정신적 문화적으로 다 같이 평등해져버린 것이다. 일례로 우리나라는 영국처럼 계급에 따라 사용하는 어휘가 세분화되어 있다거나 국민들이 저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무한경쟁의식을 장착하고 쾌락의 평등주의를 외치면 외쳤지.  

 

경제자본의 격차에 비해 문화자본의 격차는 고만고만한 우리나라와 같은 이런 환경에서는, 경제자본의 축적이 언감생심인 처지일지라도 감히 문화자본 축적에의 야망은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급문화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문화자본의 습득이라는 것이 돈보다는 시간을 더 요구하는 특성이 있지 않나. 문화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므로. 내 생각은, 경제적 계급 상승이 구조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도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계급전복 만큼은 본인의 역량과 의지와 관심도에 따라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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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의 사회학 - 문화마당 8 (구) 문지 스펙트럼 8
권귀숙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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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분석대로 비록 신혼여행이라고 하는 퍼포먼스가 사랑이나 프라이버시의 역사처럼 지극히 근대적인 산물이며 신혼여행지에서의 사진 또한 결혼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추억의 신화화 작업에 불과할 지라도- 이왕 결혼 제도에 순응하기로 결심한 인간에게는 어찌되었든 제도 속의 삶을 견뎌나가기 위한 애틋한 신화 하나쯤 필요하지 않겠는가. 신혼여행을 앞두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는데 확실히 사회학이라는 것은 너무도 냉철한 나머지 세상의 모든 약동하는 신비를 일순 왜소하고 창백하게 동결건조 시켜버리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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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 폭력과 추방의 시대, 촛불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는다 당비의생각 2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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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현장에 나도 몇 번인가 나갔었다. 딱히 무슨 정치의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공권력을 남용하는 무식한 정부에 대한 반발심과 더불어 막연한 반(反)신자유주의 감성 같은 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집회에 나갔을 땐 아나키즘적 광란의 현장에서 오는 흥분에 도취된 나머지 이후로는 불순하게도 오로지 통제 불능의 아나키 상황을 만끽하러 몇 번인가 더 시위를 빙자하여 촛불을 치켜들었더랬다. 동기가 그러했던 만큼 촛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나도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연히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는데, 몇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게, 나는 왜 촛불을 꺼버렸을까.

 

당시 촛불에 참여했던 내 지위라든가 정체성이 전형적으로 “자발성과 비폭력성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종류의 조직이나 단체와도 무관한, 나와 가족의 식품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검역주권에 우려를 제기하는 일반 시민”(98)이었으며, “평소에 글로벌 상품을 소비하면서 소비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왔던 여성들”(205) 가운데 하나였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주체’라는 것을 의심받고 싶지” 않은, 즉 “아름다운 ‘촛불 시민’일 수는 있었어도 ‘하위주체’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은(239), “계급적 문제에 대해서는 무력했고 둔감”(221)했던 “중간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야말로 당시 촛불 현장에 있었던 시위 주체로서의 나 자신의 실체에 대한 꼼꼼한 해부도처럼 읽힌다.

 

촛불이 카타르시스의 축제가 되어버림으로써 경계를 넘어서는 수평적 연대의 쟁점이 묻혀버렸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처한 삶의 불안전함에서 출발하여 연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해나가지 않을 때 자신이 거리에 나온 이유인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전함도 극복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백승욱의 글과, 시위를 주도하였던 중간 계급이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던 ‘순수성의 모랄’(=정치색의 거부)이 정치의 현존성을 외면 내지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촛불이라는 정치적 행동을 민주적 행동 너머로 정치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반문하는 이상길의 글은 인상적이다.

 

특히 촛불은 환등상(幻燈像)이었을 뿐 ‘진리적 사건’으로 보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촛불의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쾌락의 평등주의”였다는 것, 그리고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촛불에서는 소비 생활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러한 가치관이야말로 새로운 쾌락주의의 시대에 작동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분석하는 이택광의 글은 알몸을 들킨 것 마냥 화끈거린다. 물론 알몸이 부도덕이나 치부는 아닐 게다. 다만 구태여 자랑하거나 드러내지는 않았던 내밀한 지점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니 화끈거리는 것일 뿐-ㅇ-;;

 

촛불의 경험이 내게도 그저 한때의 자족적 놀이나 축제가 아니라, 소비 주체에서 사회의 균열과 틈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적 주체로 진화하는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점점 더 위험사회가 되어가는 한국에서 자신의 안전한 미래를 스스로 보장해야 하는 보통사람”(213)의 한 명으로서 내 한 몸 건사하기조차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이 촛불을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동으로 끝내버린, 연대 의식 부족한 중산 계급의 인식론적 한계를 대변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이 나를 비롯한 386 후속 세대들에게는 당대 현실 문제라든가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준 중요한 경험이자 학습으로 기억될 만한 사건이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촛불을 통해 얻은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과 잠재력은 분명히 새로운 사회 운동의 순환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월러스틴이 1848년 혁명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고, 1968년 혁명은 1989년 사회주의 몰락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듯이, 2008년 촛불항쟁 또한 하나의 예행연습일지 모르겠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예행연습일지는 ‘경제 위기의 세계화’를 통과해가야 하는 대중들의 집단행동을 지켜보며 차후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148쪽, 김정한, <촛불의 정치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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