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노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에도 실상은 두 가지 차원의 문제가 섞여 있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특정한 노동자의 노동 능력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대개 집과 학교에서 학습과 사회화를 거쳐 개별 노동자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숙련(skill)이 만들어진다. (...)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자의 ‘노동자됨’, 또는 ‘노동자다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다. (...) ‘노동자다움’이 무엇인지는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회가 주어진 시점에서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잘 만족시키는 사람은 취업을 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취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개인적 차원에만 집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차원을 완성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빚어낸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이유를 내 능력이 부족하거나 내가 게으른 탓으로 돌리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자다움’의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다운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에 대해 사회가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 즉 개인의 몸과 마음에 대해 작용하는 권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사회가 ‘노동자다움’을 규정짓고 설명하는 말들, 이른바 담론(discourse)의 체계를 통해서 완성된다. (...) 말하자면 자기착취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60~70년대에는 대통령이나 기업주를 아버지로 국민이나 종업원을 자녀로 은유하는 가부장주의(paternalism)였다면,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는 국가경쟁력 또는 개인의 역량 강화라는 명제였다. 조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온갖 고생을 감내했던 ‘산업전사’나 ‘수출역군’은 이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인재’나 ‘좋은 인적자본의 소유자’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형태로 간주되었던 ‘이타심’이나 ‘협력’은 이제 그 거추장스러운 위장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개인과 가족의 경쟁력 안에 ‘이타심’이나 ‘협력’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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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명이 한 날 한 시에 모여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의 점수를 철저하게 서열화한 대학에 진학하는 근거로 삼는다.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직장에서조차 신입사원을 뽑을 때 토익점수를 선발 기준으로 삼는다. 이는 모두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통제하기 쉬운 사람을 뽑는다는 같은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셈이다. 영어 능력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익이라는 정형화한 형태의 시험을 준비하는 지겨운 과정을 효과적으로 견뎌낸 사람을 선발함으로써 노동력을 길들이는 데 드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만약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그 지겨움을 잘 견뎌냄으로써 토익 점수가 변별력을 잃게 된다면? 다시 새로운 기준이 고안될 것이다. 결국 노동력이 만들어지는 첫 과정, 그것은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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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적 거래가 가지는 인적 속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물적 속성 사이의 관계, 계약관계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보다는 물 대 물, 성문화한 명시적 조항들로 규정할 수 있는 계약만이 문제가 되는 세상으로 변화한다. 앞서 ‘관계에서 거래로’라고 말한 변화다. 이에 더해 이제 ‘일’ 자체가 익명화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OO아빠’에서 ‘OO호 아저씨’로, 그리고 다시 ‘출입카드 소지자’로의 변화다. 고용관계가 아웃소싱이라는 거래관계로 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누가 고용주고 누가 고용된 노동자인지도 불분명해진다. (...)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다른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익명성이 깨지는 것조차도 자본의 논리가 필요로 할 때라는 사실이다. 생산 담당자나 최종 검수자의 이름을 표기한 제품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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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생계비라는 측면보다는 그때그때 일한 대가라는 관점이 강화되는 흐름은 고용의 형태가 유연해진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일 자를지도 모를 노동자에게 생계비라는 개념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싶은 고용주는 없기 때문이다.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때그때 한 일에 대해 그때그때 대가를 지불하였으므로 갑자기 해고를 하더라도 도덕적 부채감을 가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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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로널드 코즈는 기업을 시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실은 마르크스가 오래 전에 이미 그러한 개념을 이해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이라는 제도를 통해 움직여나가는 사회다. 그리고 시장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끼리 교환한다는 원리로 운영된다. 그런데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주체인 기업 내부에는 시장 원리가 아니라 지휘와 통제의 원리가 작동한다. 마치 군대나 관료 조직에서 상급자가 결정하여 명령하면 하급자는 그에 복종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일대일의 계약 관계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고용주는 피고용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피고용자는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더구나 기업은 이른바 ‘going concern',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조직이므로 명령과 복종의 관계는 반복된다. 이렇듯 권력 관계가 반복해서 작동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종의 신분적 위계는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 외관상 형태만 부드럽게 바뀔 뿐 권력이 행사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변화없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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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심지어 자녀 양육에서까지 나타나는 국제적 사슬(chain) 관계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로스앤젤리스에 사는 백인 중산층의 아기는 영어에 능통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필리핀 마닐라 출신의 이멜다(이름이야 무엇인들)가 돌본다. 그렇게 번 돈이 마닐라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된다. 그 돈 중 일부는 이멜다의 아이를 돌보는 시골 출신 보모에게 수당으로 지급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하는 ‘장거리 사랑’의 한 가지 형식이 이렇게 탄생한다. 한국에서도 중산층 맞벌이 부부의 입주 베이비시터는 대부분 가족을 두고 떠나온 조선족 중장년 여성이다. 이것은 이른바 생산의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와 같다. 즉 말레이시아에서 만들어진 부품으로 중국에서 조립된 완제품을 한국 회사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구조다. / 사실 이러한 구조는 이멜다나 조선족 여성에게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 사회의 신분 구조라 할 영주와 하인 관계가 변형된 모습을 한 채 글로벌한 규모로 다시 등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상적인 가족 형태에서 어머니가 담당하던 돌봄노동은 가난한 나라에서 이주해온 여성 노동자의 몫으로 바뀐다. 울리히 벡은 이를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가 이제는 부엌과 아이 방으로까지 들어온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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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정체성과 소비자 정체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 충돌은 게임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하다. 이를테면 노동자로서 나는 열악한 작업 조건과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통받는 대형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와 연대해야 한다. ‘마트 안 가기 운동’을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가 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연대를 시도한다면 불합리한 구조는 바꾸지 못한 채 소비자로서의 합리적 소비와 효용 극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온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연대를 포기하는 것이 이득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결국 플리트우드가 지적했듯이 이런 ‘나’들의 태도와 행동이 모여 집합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해로운 작업 조건을 유발하게 된다.”

 

“인건비가 궁극적으로 기업이 시장에서 소비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구매력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되었다. 상품을 동료 자본가에게만 팔 수는 없다.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가 사주지 않으면 생산한 제품을 제대로 판매할 수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본가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을 사는 노동자에게 충분한 구매력이 있기를 기대하게 된다. 개별 자본자 처지에서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자신은 임금을 적게 지급해 비용을 절약하고, 동료 자본가는 임금을 많이 지급해 시장에서 노동자가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게 되는 상태다. 모든 자본가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므로 서로 눈치만 보면서 임금을 적게 지급하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 역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다. 자본가 A와 자본가 B가 모두 저임금 전략을 추구하면 경제 전체적으로는 노동자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함께 유효수요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동시에 자백한 두 명의 용의자가 모두 무거운 죄를 받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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