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도시의 근본 조건인 ‘익명성‘과 도시에서가장 중요한 공간인 ‘길‘과 길의 한 부분으로서의 ‘광장‘을 만나게 해보자. 어떤 함의가 있을까?
익명성 측면에서 보면 길이란 도시의 익명성이 최대한 표출되고 또 허용되는 공간이다......길에 나서는 행위란 공공영역에서 익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을 동등하게노출하는 행위이니 제한받지 않는다. 통행할 권리만큼은 그 누구에게서도 빼앗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것이자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이 길이다.
광장은 도시의 익명성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공간이다. 서로아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잠시믿게 된다는 뜻에서다. 

길과 광장이라고 하는 아주 당연한 도시 요소에 관해서 이렇게긴 글이 필요한지 의문하시는 독자라면,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길들이 사라지고 있는지, 광장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남아 있지는않은지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길의 매력, 골목의 매력을 다시 발견하는 시대임에는 분명하지만, 대규모 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길들이 속절없이 사라져버린다. 많은 대형 개발이 길과 광장을시민들에게 내놓지 않고 내부 영역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다니는 길들이 줄어들면 사람들의 마음도 줄어들고익명성에 대한 두려움도 더 커질 수 있다. 스스럼없이 다니는 길들이 없어지면 광장이 생길 기회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스스럼없이다닐 길이 있어야, 이왕이면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야 너른 공간, 광장도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 P58

현대의 청사들이 충분히 위엄을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위엄을 보이려 들지 않는 것은 문제다. 알게 모르게 사회 심리에 영향을 준다.
물론 공사비 등의 현실적인 문제도 있겠으나, 권력의 긍정적 측면을내보일 자신이 없으니 아예 무표정한 유니폼 아래 권력 자체를 숨기려는 동기도 작용할 것이다. 권력 스스로 자신의 정통성과 역할에자신이 없을 때 드러나는 불안감의 발로일 것이다.
- P90

도시에서 "콘텍스트를 읽으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어느 것도 홀로 서 있지 않다.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으면서 성격이 규정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도시 공간에서 감이 동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 공간이 주변과 어떤 관계를맺으면서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녹아든 듯한 자연스러움,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듯한 영원의 느낌, 놀라움, 생소함, 극한의 대비, 의외성, 이야기를 걸어오는 듯한친밀함 등 그것은 풍경과 식생과 다른 건물들과 길과 광장과 조형물들과 조화와 변조를 이어간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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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파도>라는 책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었다. 나치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할 때 왜 독일국민들은 가만히 있었을뿐만 아니라 동조하기까지 했는가?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비인간적인 행태에 동조하는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것에 대한 실험에 대한 글이었는데 실험 자체는 너무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와 비판받았지만 시사하는 바는 컸다. 집단에의 소속감을 강화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비이성적 광기로 쉽게 전화해가는가에 대한 경종을 울려주는 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모든 집단이 또는 집단적 행동이 비이성적 광기로 전화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멀리 갈것도없이 우리나라의 촛불시위라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던 혁명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이름보다 먼저 들었던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해진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였다. 사실 이 단어와 설명을 들었을 때는 감동적일 정도였다. 항상 왜 그 많은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극악한 범죄에 동조하고 일익을 담당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석의 단초를 제기해주는 이 단어는 악의 신화화에 대해서 반대한다. 악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이 악마적 인간에 의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능력을 결여˝한 보통의 인간들이 구조속에서 나는 그저 내 임무를 다했을 뿐이다라는 그 말이 바로 악을 실현하게 한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라면 ˝확장된 심성˝의 결여, 내 식대로 말한다면 나의 행동에 대한 반성적 사고 또는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의 결여가 결국 거대하누악의 일부분으로 나를 언제라도 밀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그토록 거대한 범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답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인터넷의 발달로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생각들을 보다 보면 한국의 현재가 아주 소름끼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제법 많다. 그 때는 대부분 돈과 관련될 때이다. 최근의 예로는 부산항에서 러시아 선원들의 코로나 확진이 발생했을 때 왜 그걸 우리나라에서 공짜로 치료해주느냐하는 엄청나게 많은 댓글들, 다른 나라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에 대한 항의들, 국내 거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들.... 나 개인의 돈도 아니고 국가 세금으로 진행되는 일에 대해서도 마치 내 돈인듯 분개하는 사람들의 악의에 찬 말들은 우리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있나를 되묻게 한다. 독일인들도 그랬다. 세계 대공황 이루 무너진 독일 경제를 히틀러가 강한 독일의 건설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연설했을 때 바로 거기에 열광했다. 당시 독일인의 고통이 독일인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독일인 내부에 숨어 있는 유대인같은 반독일 세력때문이라고 했을 때 열광하며 히틀러에게 기꺼이 표를 던지고 기꺼이 학살의 대열에 동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부에 대한 열망과 확장된 심성의 결여 그리고 개인의 죄를 가려주는 집단주의 이것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만날 때 너도 나도 모두가 악의 대열에 발을 담그게 되리라는 섬뜩한 경고가 한나 아렌트에 대한 이 글을 읽는 내내 떠 올랐다.

또한 앞으로 우리의 국가단위에서의 심성과 도덕성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는 어쩌면 난민에 대한 대처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도 됐다. 선구적이게도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전체가 난민이 되던 그 순간에 앞으로 난민 문제가 세계의 핵심 문제가 되리라는 것, 이것이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리라는 것을 예견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자신의 권리가 억압당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할 권리조차도 아예 없는 새로운 완벽한 무권리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했으랴. 하지만 난민문제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추방하던 그 태도와 무엇이 다를까?

읽는 동안 계속 착잡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글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런 고민을 던져주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면 한나 아렌트는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고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는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젠 어려운 책은 읽기 싫어서 이렇게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요약해서 전해주는 책만 읽는 나의 정신적 게으름을 한탄하는 것도 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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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촌에 있는 수백만 명의 난민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거나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거의 품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는 무국적 인간의 범주와 숫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은 현대 정치의 가장 문제적인 징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주요 정치사상가 중 한 명이다.
- P35

 난민과 인권 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들과 NGO들이 증가했는데도 주권 국민은 자신들이 누구를 난민으로 받아들일지 또는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결정할 "절대적" 권리를 여전히 맹렬하게 지켜내고 있다. 오늘날 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오용되고 있다. 그 개념이 주로 "바람직하지 않은 난민들을 배제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더 많고 더 큰 수용소를 만드는 일이 되었다.  - P41

권리를 갖지 못한 자의 파국은 그들이 삶, 자유, 행복 또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의견의 자유-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형식 -를 박탈당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그 어떤 공동체에도 더 이상 속할 수 없다.
는 점에 있다. 이러한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48

 아렌트는 "톱니바퀴 이론", 즉 아이히만이 거대한 관료주의 기제의 한 톱니바퀴였다는 생각도 분명히 거부했다. 자신은 단지 한 체제의 톱니이거나 바퀴 중의 하나라는 주장에 대응해 "그러면 왜 당신은 톱니바퀴가 되어 이런 방식으로 계속 기능했는가?"라고 법과 도덕의 관점에서 되묻는 것은 언제나 적절하다.
아렌트의 가장 중요한 지적은 악을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101

근자에는 새로운 형태의 거짓말이 등장했다. 이것은 아렌트가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이미지에부합하지 않으면 사실적 진리라도 배제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는 현실의 대체물이 된다. 그런 모든 거짓말은 폭력의 요소를 은닉한다. 조직적인 거짓말은 그것이 부정하려고 결심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경향을 항상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정치적 거짓말과 현대의 거짓말의 차이는 숨기는 것과 파괴하는 것의 차이다.  - P117

아렌트가 오늘날 그토록적실성을 지닌 이유는 시민이 함께하고 공동으로 행위하며, 공적 자유를 실천하고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깊은 확신에 더해, 전체주의로 결정화되었던것이 오늘날에도 현저하게 나타나는 경향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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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읽다가 발견한 사진 한장에 온몸에 쭈빗한 한기를 느낀다.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가 헌법 위반임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14세의 엘리자베스 엑포드라는 흑인 소녀는 학교에 등교할 권리를 얻게 된다. 이 어린 소녀와 다른 아이들의 등교를 막기 위해 아칸소 주정부는 무장한 주 방위군까지 투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그 무장한 주 방위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린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백인 여성들의 눈초리, 혐오의 표정, 무어라 외치는지 모르겠지만 공격일게 분명한 소리를 내지르는 여성.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악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단 한컷에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 자체보다 더 끔직한건 아마도 이 뒤에 있을 현실일 것이다. 이 사진 속 백인 여성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아마도 그들은 상냥한 아내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할 것이라는 아이러니컬한 현실. 최근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이라는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생긴 개인적인 사건일 수 없는 이유를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본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저자는 전염의 시대에 연대감 부재는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결여에서 온다고 얘기한다.(39쪽)
상상력의 부재가 나의 옆 다른이의 절실함을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책임을 다른 무고한 이에게 덮어씌움으로써 회피하게 하고, 나와 다른 이에 대한 증오는 당연하다는 환상에 갇히게 한다. 아니 어쩌면 백인과 흑인이 유럽인과 동양인이 다른 인간이라는 인식 자체가 상상력의 부재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에 다시 고개를 내미는 온갖 혐오의 시선들-단지 유럽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비하만 분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국인을 동남아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저 사진 속 백인 여성의 얼굴이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을 대하는 우라 자신의 얼굴이 아닌지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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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생애 최초 탐정물이라는 빌 호지스 3부작은 약간 특이한 구조를 갖고있다.
각권이 독립적인 것 같으면서도 1부와 3부는 완전히 연결되어 있고 2부 <파인더스 키퍼스>만이 홀로 독자적인 사건 구조를 이룬다. 미리 말한다면 나는 저 2부 <파인더스 키퍼스>가 제일 좋았다. 하지만 리뷰를 쓰기에는 읽은지가 오래 되어 기억이 가물 가물.... ㅠㅠ

1부와 3부는 퇴직형사인 빌 호지스가 사이코 테러리스트인 브래디와 대결하는 것이 이야기의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야기는 태생적 사이코인듯한 브래디의 의식을 따라가는것이 한 축을 이루고 나머지 한축은 퇴임 후 무기력해지고 있는 빌 호지스의 의식을 따라가는것이 한 축이다. 결국 이 두 인물의 매력과 그럴듯함에 이야기의 재미가 딸려있는 셈인데, 나머지 추리소설의 핵심이라 할 사건과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의 이야기적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후자 즉 이야기적 재미를 따지자면 역시 2부인 <파인더스 키퍼스>가 가장 좋다.

브래디의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1부까지는 괜찮은 캐릭터였다. 어느 날 그저 뭔가 위대해져보이고 싶다는 또는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고싶다는 충동으로 메르세데스를 훔쳐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태생적 사이코. 그리고 이후에도 막연한 다중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자살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인물이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불분명하고 그저 사이코이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뭐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가 많기도 하니 이런 설정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3부에서 식물인간 상태였던 브래디가 깨어나고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 유체이탈과 다른 육체로의 빙의를 통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이르면 이거 뭐임? 하는 생각이 든다. 브래디를 너무 살리고싶었던 작가가 너무 나간게 아닌가 싶다. 차라리 브래디가 깨어서 정신병원을 탈출해 호지스와 대결을 벌이는게 낫지 이건 뭐 장르파괴도 아니고.... 갑자기 이야기의 현실성이 훅 떨어지면서 독자를 어이없게 만들어버린다. 아 킹 아저씨 이건 아니잖아요!

빌 호지스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광고문구에 스티븐 킹판 필립 말로의 탄생이라고 본 것같은데 사실 이 문구에 낚였다. 경찰에서 퇴직하고 보니 갑자기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아내와는 이혼했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멀리 살면서 가끔 전화나 하는 무기력하고 고독한 빌 아저씨. 이만하면 조건적으로는 충분히 필립 말로가 될것도 같다. 하지만 구체적인 디테일로 들어가면 호지스 아저씨는 하드 보일드 탐정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의존적이며 따뜻하다. 거기다 자꾸 아파서 독자를 걱정시킨다. 자신의 재임 기간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메르세데스 살인범을 잡지 못한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호지스아저씨는 너무 인간적이다. 한 마디로 쿨함과는 백만광년쯤 떨어진듯하다.

어쩌면 작가는 인간적인 감정에는 완전히 백지인 브래드와 인간적 따뜻함으로 중무장한 빌 호지스의 대비를 통해 사람들간에 여전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같기도 하다. 이는 주변 인물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브래드 주변의 인물은 그의 어머니조차도 인간적 교류와는 한참 멀고 소통부재의 인물이다. 브래드는 누구와도 공감하지 않고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절대 고독의 인물이다. 하지만 빌 호지스는 옆집의 어린 소년과도 따뜻한 우정을 나누고 우연히 만난 신경쇠약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의 여인에게도 따뜻한 손을 내밀줄알고 그 따뜻함과 배려를 돌려받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캐릭터의 매력이 1권에서 끝이라는 것. 3부에서는 캐릭터의 반복 중 이야기가 우주 저멀리 어디로 광탈이동해버리는 바람에 캐릭터의 매력마저도 같이 날아가버린다. 우리 사랑스런 호지스 아저씨가 필립 말로가 될 기회도 같이 날아간다. 안녕 호지스 아저씨, 안녕 필립 말로!


브래드는 1부에서 끝을 맺고 3부는 차라리 다른 이야기로 돌아왔다면 빌 호지스 3부작이 좀 더 근사하게 완결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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