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읽다가 발견한 사진 한장에 온몸에 쭈빗한 한기를 느낀다.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의 흑백분리가 헌법 위반임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14세의 엘리자베스 엑포드라는 흑인 소녀는 학교에 등교할 권리를 얻게 된다. 이 어린 소녀와 다른 아이들의 등교를 막기 위해 아칸소 주정부는 무장한 주 방위군까지 투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그 무장한 주 방위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린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백인 여성들의 눈초리, 혐오의 표정, 무어라 외치는지 모르겠지만 공격일게 분명한 소리를 내지르는 여성.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악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단 한컷에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 자체보다 더 끔직한건 아마도 이 뒤에 있을 현실일 것이다. 이 사진 속 백인 여성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아마도 그들은 상냥한 아내 따뜻한 엄마의 모습을 할 것이라는 아이러니컬한 현실. 최근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이라는 비극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생긴 개인적인 사건일 수 없는 이유를 이 한 장의 사진에서 본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에서 저자는 전염의 시대에 연대감 부재는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결여에서 온다고 얘기한다.(39쪽)
상상력의 부재가 나의 옆 다른이의 절실함을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책임을 다른 무고한 이에게 덮어씌움으로써 회피하게 하고, 나와 다른 이에 대한 증오는 당연하다는 환상에 갇히게 한다. 아니 어쩌면 백인과 흑인이 유럽인과 동양인이 다른 인간이라는 인식 자체가 상상력의 부재의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에 다시 고개를 내미는 온갖 혐오의 시선들-단지 유럽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비하만 분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국인을 동남아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저 사진 속 백인 여성의 얼굴이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을 대하는 우라 자신의 얼굴이 아닌지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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