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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대지 위에 지어지고, 그것과 관계 맺는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리스 신전에서 이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예술철학의 초석으로 삼았다. 신전은 돌로 지은 구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신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건축이라는 예술이 한장소를 전혀 다른 세계로 변화시킨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처럼표현해보자면 예술은 대지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연다. 예술 작품의 진리 aletheia는 그렇게 드러난다.
- P12

르코르뷔지에의 무덤은 그의 건축만큼이나 세속적이다. 그는 일생 편안하고 안락한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노동자계급을 위해 집을 지었다. 동료 건축가들이 부유층을 위한 고급 주택을 지을 때 작은 공간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적 공간을 제공하려 했고, 이것이 행복의 기초가 된다고믿었다.
- P17

에두아르는 시시각각 변하는 해 질 녘 성당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피사에서그는 마치 인상주의 화가가 된 듯 오렌지색과 연보랏빛으로 물든하늘 아래 다채로운 색을 드러내는 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저녁 무렵 고색창연한 성당 파사드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노란색과 아이보리색, 군청색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조금 지나자 성당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오래된 대리석들은 갈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조화로운 빛을 뿜어냈다. 그는 한없는 평안을 느꼈다.
- P51

에두아르는 1950년대 마르세유에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ed‘Habitation‘이라는 아파트를 세우면서 이 수도원을 모델로 삼았다.
그가 "현대 도시"라 부른 에마수도원은 건축이 어떻게 삶의 문제를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생활의 조화,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공간과 구조, 아름다운 풍경과 효율적인 동선등 수도원의 모든 요소들이 훗날 마르세유의 집합 주거 건물에 담겼다. 수도원은 일생 건축가의 이상적인 모델로 자리 잡았다. 그는갈루초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삶을 건축의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아름다움과 장식뿐만 아니라 건축의 효용에 대해사유하면서 그는 비로소 건축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갓 스무 살이된 청년은 그렇게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 P59

에두아르는 전형적인 유럽 백인 남성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과 그 양식의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기하학 형태와 정돈된 비례를 선호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슬람 건축에서도기하학 형태에만 집중했다. 그의 눈에 모스크는 직사각형, 정사각형, 구 같은 기초적인 형태로 구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토스산과 아크로폴리스를 찾았을 때도 같은 감상을 드러냈다. 그의 건축이해는 밤바다 풍경 감상과 달랐다. 터키에서도 그리스에서도 그는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건축에 투영했다.
- P113

동방 여행은 에두아르를 건축가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여행을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대리석이니 철근콘크리트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덕 위 신전은 그 앞에펼쳐진 바다처럼 수천 년간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건축이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굳건히 서서 사람의마음을 사로잡고, 감각적 기쁨을 영원으로 승화시키는 시적인 건축, 동방 여행은 건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었고, 에두아르를 진정한 건축가로 거듭나게 했다. 언덕 위 신전에서 예술의 본질을 경험한 건축가는 이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P123

에두아르는 오래전 무너진 건축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의 건축은 그리스 신전 못지않게 기하학적이었고, 그 구조는 로지에의 오두막만큼이나 간결했다. 돔이노 시스템은 새 시대의건축양식과 새로운 정신의 등장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다. 에두아르는 돔이노의 건축사적 가치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의 합리성과효율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돔이노 구조가 큰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했다.
- P131

르코르뷔지에는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삶에 최적화된 집을 만들기 위해 자동차, 비행기, 대형 여객선을 모델로 삼았다. 이 기계들은 표준화, 규격화를 거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르코르뷔지에는 여기에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집이라는 ‘기계‘는 "목욕, 햇빛, 따뜻한 물,
찬물, 난방, 요리, 가족 간의 대화, 위생, 아름다운 비례" 같은 복잡한요구를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야 한다. 산업화 이후 그의 시대는 다양한 재료와 구조를 통해 그에 걸맞은 해결책을 속속 내놓고 있었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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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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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전쯤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클림트 전시회를 보러갔었다.

아 사람 사람..... 그림을 제대로 본다는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몰려왔었다.

원래 한가람 미술관의 전시방법이나 공간 배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다가 그 많은 인파때문에 솔직히 전시관람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전시의 주인공격인 작품은 <베토벤 프리즈>였는데 솔직히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3면이 막힌 공간과 그 내부의 충분한 여유공간을 둬야 할 것 같았는데 그 때 기억으로는 무슨 통로처럼 좁은 길을 만들어놓고 쭉 이어서 보는 식이었던 것 같다. 작품의 연속성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전시는 작품에 대한 몰입을 불가능하게 했다. 심지어 그 통로마저도 사람으로 꽉 차서 줄서서 지나가기 바빴으니.....

클림트 단독 전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광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클림트의 인기가 그토록 대단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때 아 클림트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빈을 가야겠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듯하다.

 

클림트가 대단한 것은 그가 어디에서도 미술사조의 계보를 그려넣을 수 없다는데 있다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앞세대에서 또는 당대의 사조에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클림트는 그 계보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니 그의 독창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클림트의 계보를 아예 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19세기 말 파리를 중심으로 모든 화가들과 예술가들이 새로운 미술, 모더니즘을 구가할 때 클림트는 아예 고대와 중세로 떠난다는 것.

 

여기에 클림트의 모순이 있다 누구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이지만클림트의 선배들은 이토록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다클림트는 19세기  분리파를 만들어 과거 스타일을 답습하는 기존 오스트리아 예술계에서 스스로를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며 혁신가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의 영감은 미래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 초기의 예술에서 왔다클림트는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화가인 동시에 가장 고답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P15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아!"하는 탄성이 나온다.

그렇구나...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가 그의 가장 중심적인 계보구나.

클림트가 그 모자이크들을 보면서 어떤 충격과 경이를 느꼈을지가 생생하게 새겨졌다.

 

 

이 그림 누구나가 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한번쯤은 본 그림일테다.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로 산 비탈레 성당 돔의 벽면에 그려져 있다.

도판으로 이 그림을 보면서 감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물들의 생동감도 없고, 표정들도 무표정이고... 아이들은 보면 그림이 웃기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나 역시 이 그림에 대해서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그러나 산비탈레 성당을 들어서서 천장을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이렇게 사진발 안받는 그림도 없을거라는 걸 깨닫고야 말았고, 이 그림을 포함한 벽면의 벽화들 앞에서 1시간을 넘게 서성이며 경탄에 경탄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돔의 벽면은 이렇게 위쪽의 예수를 중심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자이크가 배치되어 신에 대한 경배를 바치는 모습이다.

비잔티움의 모자이크는 사진으로는 절대로 그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아 여기가 신의 공간이구나, 저 분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겠구나라고 저 황금빛들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황금 모자이크가 얼마나 적절하게 신성을 유발하는지는 실제로 그 앞에 서야만 느껴지는 체험이다.

그래서 중세의 미술은 직관적이다.

보는 순간 신앞에 무릎꿇게 하고 경탄하게 하는 권위의 미술이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 미술이 걸어온 사실성과는 다른 층위의 미술이다.

 

클림트의 그림이 그토록 직관적인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구나라고 깨닫는다.

클림트의 그림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보는 순간 마음을 훅 빼앗기는 그런 힘이 있다.

그림의 내용이 무엇인지 화가의 철학은 무엇인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마음을 파고드는 힘이다.

이는 오늘날 클림트의 그림이 무수히 많은 아트상품으로 소비되어 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느끼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느낌은 뭔가 몽환적이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이다.

특히 여성의 표정은 하나같이 관능적이고 유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여성이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주체로 인정되지 못하던 시대에 클림트의 여성들은 적어도 성적으로는 능동적으로 보인다. 물론 여성에 이런 판단이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모독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는 여성관임에도 클림트의 여성은 아름답다.

역사에서는 이런 아름다움을 세기말의 공포로 허우적거리던 당대 남성들의 두려움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남성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개념과 이미지가 여기서 나온다.

클림트의 그림속 여성들은 그 팜므파탈의 이미지에 딱 맞는 분위기를 보여준다고 흔히 인용되어져 왔다.

하지만 정말 그런걸까? 클림트의 여성은 그의 남성성의 거세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었을까?

글쎄 그렇게만 보기에는 클림트의 여성들은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그녀들을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클림트의  이런 그림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자주 예술 작품을 통해  시대의 개성과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클림트의 그림에서 받는 독특한 느낌과 기묘한 불균형은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빈의 모습  자체다19세기 말의빈은 다가오는 다음 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중세 시대 사람들이그러했듯이 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욱 갈망한 도시였다클림트의 그림들은 빈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 P14

 

한 때 유럽 전체를 호령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가는 이제 몰락을 향해 가고있다.

늙은 제국은 과거의 영화만을 간직한 채 침몰하고 있는데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지역들이 산업혁명이다 제국주의다 변화를 겪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중세에 머물며 그 광대한 과거의 영화를 붙잡고 있을 뿐이다.

현재에 대해 눈감은 수도 빈은 더 화려한 예술로 치장하고 자신의 몰락에서 애써 눈돌리고 있다.

클림트는 그 제국의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미래로는 나아갈 수 없었던 딱 그 지점의 빈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보면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의 표정을 단순히 관능으로만 해석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 그러나 결코 닿지 않고 닿을 수 없는 빈의 현재가 그녀들의 표정에 드러난 것이 아닐까?

누구보다 빈을 사랑했던 인간 클림트의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그녀들을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클림트가 꿈꾸던 미래는 어쩌면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속의 그녀였을 것 같다.

 

 그가 평생토록 사랑했다고 하는 여성 에밀리 플뢰게를 그린 이 그림에서 여성은 드디어 독자적 정신과 주체성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관능이나 유혹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던 여성 에밀리의 모습이 여기 있다.

클림트가 가장 소망한 것은 이런 에밀리였고, 다르게 보면 미래를 똑바로 응시하고 나아가는 빈이 아니엇을까?

하지만 소망이 모두 현실이 될 수 없음에 항상 역사는 비극이 된다.

언제나 클림트는 간절했던 듯하다.

 

<베토벤 프리즈를 위한 스케치>에서 젊은 클림트의 간절함이 너무 절실하게 와닿는다.

그의 이런 간절함은 이후 대표작인 <키스>에서도 여전히 간절함만으로 남았다는게 그의 비극일테다.

 

 

오랫동안 클림트는 나에게는 알 수없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이 너무 좋지만 무작정 좋아하기에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는, 그래서 고민하게 하는 화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클림트라는 인간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그의 그림에서 이해되지 않던 간절함과 부조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아르떼 출판사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참 좋구나...

역시 앞으로 계속 정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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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10-1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글을 읽으니, 독창성이라는 면에서 서양 철학사의 스피노자가 연상되네요. 클림트는 「세기말 빈」과 「통찰의 시대」를 통해 접한 화가라 이번 바람돌이님의 페이퍼를 통해 더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0-10-11 10:23   좋아요 1 | URL
저는 스피노자는 사과나무밖에 몰라서....ㅠㅠ 겨울호랑이님이 말한 책들을 살펴보니 재밌을듯해요. 언젠가 읽어보려고 일단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막시무스 2020-10-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중세의 모자이크화가 클림트에 닿아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되네요! 저도 라벤나에서 중세 모자이크 벽화들을 목이 빠져라 올려다 본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나 조금 버스를 타고 나가는 곳에 위치했던 성당의 어린양 그림은 잊혀지지 않는듯 합니다! 정말이지 저런 벽화는 거기 그장소가 아니면 절대 느낌을 살릴수가 없는것 같아요! 저도 이 책이 집에 쟁여져 있는데 후기를 쓰게 된다면 빈에서 보았던 베토벤프리즈랑, 클림트와 에곤실레의 명작이 있던 레오폴트미술관, 벨데베레궁전 미술관 사진을 보태 보겠습니다!ㅎ 한가람미술관 전시때 여자친구랑 19세 미만 출입금지 전시실에 들어갔다가 무안했던 기억은 덤인가 봅니다! 즐거운 추억을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해요!ㅎ

바람돌이 2020-10-11 23:31   좋아요 1 | URL
저도 둘을 연관시키지는 못했는데 이 책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저는 볼로냐에 있으면서 당일코스로 라벤나를 방문했었기에 어린양그림이 있는 산타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성당까지는 못갔어요. 여기 교통이 좋은 편이 아니라 마지막 기차시간 안놓치려고 시내를 15분정도 전속력으로 막 뛰어 갔던 기억이..... ㅎㅎ 빈은 클림트때문에라도 꼭 가보고싶은데 일단은 막시무스님 사진으로 대리만족하겠습니다. 기다릴게요. ^^
한가람미술관 전시때 19금관은 저는 아이 둘까지 있는 아줌마였던 관계로 하나도 안 무안했습니다. ㅎㅎ

scott 2020-10-1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도시에서 살았었는데 산 비탈레 성당 돔의 벽화와 클림트의 황금빛 색채로 물든 회화를 전혀 연상시켜보지 못했네요.
해가 길어지기 시작할때쯤이면 빈 여름 궁전에 대대적으로 클림트 특별 전시가 열렸는데 그때 맞춰 클림트 화폭속에 그려진 꽃들도 궁전 정원에 가득 심어서 관람객들에 발길이 끊이지 않았어요

산 비탈레 성당 돔의 벽화가 사진발이 안받는 이유는 특수 조명을 설치 해서 카메라에서 내뿜는 빛을 차단한데요.
벽화가 손상되는걸 방지 하려고(관람객들에게 사진찍지 못하게 하는것 보다 이게 더 효과적이라고)

바람돌이 2020-10-19 20:15   좋아요 1 | URL
악 빈에서 살았단 말씀입니까? 악 갑자기 scott님이 위대해보입니다. 제 소원이에요. 아무데나 좋으니까 딴나라 가서 한 1년쯤 살아보는거.... ㅠ.ㅠ 아마도 늙어서 퇴직하면 가능해질듯요.
저도 이 책 읽기 전에는 비탈레성당과 클림트를 연결시키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 책 읽고 보니까 아 그럴수 있겠다 수긍이 가더라구요. ㅎㅎ
산비탈레 성당의 특수 조명 얘기도 처음 듣네요. 음 좋은 방법같아요. 사진이 잘 나오는 것보다 역시 유물을 보존하는게 우선 맞죠?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참 무궁무진하네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
 

우리는 자주 예술 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개성과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받는 독특한 느낌과 기묘한 불균형은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빈의 모습 그 자체다. 19세기 말의빈은 다가오는 다음 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그러했듯이 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욱 갈망한 도시였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빈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 P14

여기에 클림트의 모순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클림트의 ‘선배‘들은 이토록 먼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다. 클림트는 19세기 말, 빈 분리파를 만들어 과거 스타일을 답습하는 기존 오스트리아 예술계에서 스스로를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며 혁신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영감은 미래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 초기의 예술에서 왔다. 클림트는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화가인 동시에 가장 고답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 P15

유럽의 미술관에서 중세 시대의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인상을 받는가? 아마도 맨 처음 드는 인상 중 하나는 ‘갑갑함‘일 것이다. 안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의 그림들은 사용된 색상이 얼마 없으며, 예외 없이 성서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또한 중세의 화가들은 원근법, 즉 2차원 평면 안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이 때문에 그림의 주인공들은 어떠한 공간감도 양감도 없이 묘사되어서 그저 평평하게 보인다. 결정적으로 중세의 그림들, 특히 성모나 예수를 그린 작품에는 예외 없이 금칠이되어 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중세의 그림이 우리에게 특별한인상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 P121

이 고귀한 단순함을 발견한 순간, 클림트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먼 과거를 향해, 예술과 종교의 ‘원형‘을 향해 돌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고대와 중세 초기 미술 작품이 띠고 있는 원형의아름다움을 발견한 클림트의 눈에 인상파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이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속한 세계인 빈과 오스트리아는 파리나 런던, 프랑스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제국의 과거를, 그리고 이국의 문화를 숙명적으로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 P139

장식으로 사람의 몸을 휘감고, 사람의 몸을 지극히 평면적인 방식으로, 반면 장식은 화려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는 것,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고답적인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왜 클림트는 평면을 추종했을까. 라벤나의 금빛 모자이크들은 클림트로 하여금평면의 영원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1,500년 이상 생동감을 잃지 않고 있는 비잔티움의 모자이크 장식을 통해 클림트는 보이는그대로 묘사한다고 해서 그림이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보석 왕관과 자줏빛 가운에 휘감긴테오도라 황후처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이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영원성을 얻을 수 있었다.
- P146

실레는 열일곱 살이던 1907년에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당시 실레는 빈 미술학교 학생이었고 클림트는 이미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을 통해 오스트리아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러나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이 소년의 넘치는 재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 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가
"재능이 많아, 너무 많아" 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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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한 여자의 영혼에서 시저의 정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미술사 책을 왠만큼 봤다고 생각하는데도 이 책 속에 있는 21명의 여성 화가들 중 내가 알고 있던 이는 겨우 4명에 불과했다. 기존 미술사에서 얼마나 여성 예술가들이 폄훼되고 지워졌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여성들의 그림은 때로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으로 팔려 나가거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역사화나 종교화쪽으로는 아예 진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기만이 아니라 20세기 다다이즘의 한나 회흐조차도 남성 예술가들을 보조하는 위치만을 강요받는다.

예술이란 결국 세상을 보는 다양한 방법과 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반인 여성의 시각도 그 반만큼 중요할 것인데 권력의 역사란 항상 자신의 시각이나 생각과 다른 것을 지워온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최근에 읽은 책들을 통해 이 책을 다시 들여다 보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소수자들 - 성적소수자나 장애인, 이주자들의 예술과 시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성의 예술사가 지워졌듯이 지금의 우리는 다른 소수자들의 예술을 함께 지우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났던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앞에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여성의 눈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여성은 카라바조의 그림속 연약한 소녀일리가 없다는 것을 강렬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이 책속 화가들의 그림이 모두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들이나 젠틸레스키의 그림, 그리고 한나 회흐와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작품들은 두고 두고 다시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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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0-07-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은 아르테미스의 말이구요. 저도 멋지더라구요
여기 소개 된 화가들의 그림들은 정말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은게 안타까울 정도로 좋더라구요.

ㅇㅇ 2020-07-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다만 장애우라는 표현은 더 이상 쓰지 않는 표현이며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시각이 들어간 단어입니다. 장애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맞습니다.

바람돌이 2020-07-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고쳤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스테르 그림은 왜 할스의 작품으로 둔갑했을까?
그녀는 작품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 ‘JL‘과 별 마크로 구성된 모노그램을 남겼지만, 정작 그림은 화가였던 남편 얀 민세 몰레나르 Jan Miense Molenaer나 프란스 할스 Frans Hals 작품으로 팔려나갔다. 여성의 예술적 전문성이 남성보다 현저히 떨어진다고 인식됐던 시대이니 금전적 이익을 위해 여성 화가의 작품이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둔갑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 사망 후 미술사에서 사라졌던 결정적 이유이다.
- P60

그러기 위해서는 인체 근육 묘사에 능숙해야 했으므로누드 데생 수업은 필수였다. 그러나 남성 화가들이 남자 누드모델을 앉혀놓고 직접 드로잉하는 실기 수업에 앙겔리카 카우프만과 메리 모저는 아카데미 회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것이 의과생이 인체를 해부하며 의학을 연구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성 화가들이풍속화, 풍경화, 정물화 등 회화의 군소 영역으로 밀려나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72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들은 마치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그린 종교화의 구도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카사트가 육아를 여자라면 누구나 쉽게 해내는 그림자 노동으로 보지 않고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사회생활만큼 존중받아야 할 일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 자애로운 마돈나의 모습과 카사트의 그림 속 어머니가 다른 점이라면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적이고 정직한 일상의 어머니라는 점일 것이다.
모리조는 인상파 그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급진적이고 현대적인 미술 실험에 동참했다. 사실 마네에게 옥외에서작업하고 좀 더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도록 조언한 것도 모리조였다. 그녀의 작품은 결코 남성 인상파 화가의 작품보다 덜혁명적이지 않은데도, 여전히 섬세하고 우아한 여성성을 표현했다는 비평이 지배적이다. 카사트와 마찬가지로 그림 소재 때문에 빗어진 편견이다.
- P99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1597~1651는 최초의페미니스트 화가로 불린다.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여성으로서는 아주 독립적이었고, 전문 직업인으로도 성공했으며, 작품역시 강인한 여성상을 묘사했다. 젠틸레스키가 한 고객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한 여자의 영혼에서 시저의 정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 P131

그런데 남성 화가들이 목욕하고 있는 수잔나의 성적 매력에 초점을 맞추고, 심지어 장로들의 희롱을 은근히 즐기는 수잔나를 그렸던 데 반해, 젠틸레스키는 매우 다른 시각으로 이주제를 다루었다. 즉, 남자들이 자신을 관음적 시선으로 훑고희롱하는 것에 고통을 느끼는 수잔나를 보여준 것이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온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 P137

그런데 그녀의 정물화에는 흥미롭게도 숨은 그림이 곳곳에 있었다. 바로 정물화 속 백랍 주전자 위, 황동색 금속 고블릿 등에 자화상을 그려 넣은 것이다. 마치 언젠가 사람들이 정물에 숨은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알아봐주길 수백년 동안 기다린 듯 느껴지지 않는가?
페테르스는 포도주잔, 접시, 동전, 식기 등에 반사된 빛에 특히 매료되었다. - P147

정물화에서는 이런 세속적인 향락 문화와 더불어 바니타스의 개념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물질적 소비를 즐기는 동시에세속적 재화의 공허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 상반된 생각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즉, 바니타스 정물화는 16~17세기에 싹을 틔운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중세 금욕적 전통의갈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 물질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드러낸 미술 장르였던 셈이다. 금욕적인 신교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현세적 쾌락을 즐기고 부를 과시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바람을 정물화가 절묘하게 만족시킨 것이다.
- P159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의 누드 자화상을그린 여성 화가이다. 미술의 역사에서 여성의 몸은 오랫동안 남성의 시각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 그려져왔다. 남성 화가의 모델이 된 여성들은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대상물이었을뿐 그 자신이 주체적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우받지 못했다.
모더존 베커가 자신의 누드를 그리며 최대한 형태를 단순화하고자 했던 것은 여성의 몸이 표현하는 이러한 관능성을제거하기 위해서였다. 
- P199

이제 21세기다. 이쯤이면, 여성 미술가를 얕보고 비우호적으로대우했던 과거 성차별을 인식하고 수정해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시도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야한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혁신하려고 했던 어떤 급진적인 정치 · 사회적 운동도 남성들이 주도하는 한, 여성 문제에관해서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나 회흐가 작품에 담은 메시지가 의미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회흐는 작품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고발하고여성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애썼다. 미술계, 그리고 모든 분야의성차별은 비단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평등을 비롯한 인간평등은 문명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기때문이다. 여성이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누릴때, 남성 역시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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