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예술 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개성과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받는 독특한 느낌과 기묘한 불균형은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빈의 모습 그 자체다. 19세기 말의빈은 다가오는 다음 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그러했듯이 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욱 갈망한 도시였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빈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 P14
여기에 클림트의 모순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클림트의 ‘선배‘들은 이토록 먼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다. 클림트는 19세기 말, 빈 분리파를 만들어 과거 스타일을 답습하는 기존 오스트리아 예술계에서 스스로를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며 혁신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영감은 미래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 초기의 예술에서 왔다. 클림트는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화가인 동시에 가장 고답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 P15
유럽의 미술관에서 중세 시대의 그림들을 볼 때 우리는 어떤 인상을 받는가? 아마도 맨 처음 드는 인상 중 하나는 ‘갑갑함‘일 것이다. 안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의 그림들은 사용된 색상이 얼마 없으며, 예외 없이 성서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또한 중세의 화가들은 원근법, 즉 2차원 평면 안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이 때문에 그림의 주인공들은 어떠한 공간감도 양감도 없이 묘사되어서 그저 평평하게 보인다. 결정적으로 중세의 그림들, 특히 성모나 예수를 그린 작품에는 예외 없이 금칠이되어 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중세의 그림이 우리에게 특별한인상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 P121
이 고귀한 단순함을 발견한 순간, 클림트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새로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먼 과거를 향해, 예술과 종교의 ‘원형‘을 향해 돌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고대와 중세 초기 미술 작품이 띠고 있는 원형의아름다움을 발견한 클림트의 눈에 인상파를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의 작품들이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속한 세계인 빈과 오스트리아는 파리나 런던, 프랑스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제국의 과거를, 그리고 이국의 문화를 숙명적으로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 P139
장식으로 사람의 몸을 휘감고, 사람의 몸을 지극히 평면적인 방식으로, 반면 장식은 화려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는 것,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이렇게 고답적인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왜 클림트는 평면을 추종했을까. 라벤나의 금빛 모자이크들은 클림트로 하여금평면의 영원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1,500년 이상 생동감을 잃지 않고 있는 비잔티움의 모자이크 장식을 통해 클림트는 보이는그대로 묘사한다고 해서 그림이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보석 왕관과 자줏빛 가운에 휘감긴테오도라 황후처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이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영원성을 얻을 수 있었다. - P146
실레는 열일곱 살이던 1907년에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당시 실레는 빈 미술학교 학생이었고 클림트는 이미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을 통해 오스트리아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러나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이 소년의 넘치는 재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 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가 "재능이 많아, 너무 많아" 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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