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 지나고...... (2004.12.06 02:17 )

 
1.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7시 30분 해아의 공격이 시작됐다. 철옹성인 제 엄마를 건드리다, 훨씬 약한 나를 찍었다. 각종 톤의 '아빠'를 연발하며 10분을 괴롭힌다. 결국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예린이가 벌떡 일어나 반긴다. 혹시 저것의 사주가 아닐까? 부질없는 일인줄 알면서도 잠시 엄마를 깨웠다. 못듣는지 인내력이 강한지 버틴다. 할 수 없이 혼자 둘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2. 하나둘 셋 유치원
애들과 이것 저것 하며 놀아주다가, "얘들아 볼풀 가서 놀까" 역시 폭발적인 반응. 볼풀에 가니 이놈들의 과격한 본성이 살아 펄펄 뛴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여기에 같은 반응 보여주면 내 체력은 바닥난다. 벌써 해아와 예린이는 침대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볼풀로 다이빙 한다. "아빠도 들어와", 그러나 오늘은 강적(^^)이 기다리는 관계로 참기로 했다.

3. 엄마의 일상이 시작되다.
2시간 30분쯤 애들과 놀고나니,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엄마를 깨우기 시작했다. '밥줘'. 역시 강적이다. 1시간 걸렸다. 그것도 예린이와 해아에게 엄마 깨울 것을 사주하고 나서야.(요것도 힘들었다. 배고프지 얘들아를 10번쯤 해서 세뇌해야 가능하다)
엄마는 일어나서 예린이에게 "오늘 카레 해줄까?"하고 묻는다.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만 예린이에게만은 확인을 받는다. 물론 나는 하등 참고사항이 안된다.
늦은 아침식사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딩동", 드디어 강적의 등장이다.

4. 김유신 장군(해아의 사촌, 유빈이 동생, 5개월로 접어듬) 등장하다.
갈길 바쁜 처제는 애기를 주고는 바로 갔다. 먹던 밥은 계속먹어야 한다는 본능으로 유신이를 큰 방에 눕혔는데, 어라? 요놈이 울지를 않네.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저 밥을 먹는데, 아뿔사! 해아. 유신이를 무지 좋아하는 해아가 유신이가 온 것을 보고는 큰 방으로 뛰어가 쪽 하고 뽀뽀를 했고, 유신이의 진가는 이때부터 드러났다.

5. 장군답게 폭신한 침대보다는 돌침대를 선호한 유신이
보기만해도 폭신한 이모를 마다하고, 왜? 이 딱딱한 이모부를 선택하느냐고? 그것도 일정한 자세가 유지되지 않으면 패악을 부리며. 예린이와 해아를 합쳐 보는 것 보다 훨씬 더한 노동강도에 내 허리가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제에게 순간적으로 연민의 정이....
4시에 온다던 처제는 5시가 되어서야 왔다. 그래도 해방의 기쁨...*^^*

6. 잠시 동안의 평온함
유신이가 가고, 엄마와 아빠는 엉망진창인 거실의 조그마한 틈에 잠시 누웠다. 예린이는 기특하게도 해아를 데리고 거실로 가서 그곳이 어린이집이라고 하면서 논다. 이불과 쿠션을 가지고 가서 아주 즐겁다. 해아는 모아둔 폐지들을 모두 흩어놓으면서 논다. 그 동안 잠시 쉬었다.

7. 청소기계 아빠
잠시 쉰 후 엄마는 밥 준비를 하고, 아빠는 청소를 했다. 엉망진창인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 15분. 내 스스로 대견해하는데, 엄마의 격려 "와 이제 아빠는 내보다 청소 더 잘하네". 순간 뿌듯한 아빠의 가슴. 여자들은 남자들이 격려에 약하다는걸 아는가 몰라. 아마도 알거야 저 여자는. 일부러 나를 더욱 청소에 매진시키기 위해서...

8. 불쌍한 예린이
지칠대로 지쳐 밥을 준비해서 먹는데, 해아는 갑자기 과자만 찾고, 예린이는 아까 하던 어린이집 놀이의 연장 속에 있다. 드디어 엄마, 아빠의 하루동안의 인내가 끝났다. 이럴 경우 메멘토인 해아는 영향을 받지 않지만, 엄마 아빠의 협박에 저항하는 예린이가 타켓이 된다.
이런 저런 실랑이 속에서 예린이의 슬픈 울음이 터진다. 참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보다 강공으로 나갔다. 예린이 밥을 해아에게 준 것이다. 결국 예린이의 울음보가 터지고, 엄마 아빠의 외면 작전에 혼자서 울던 예린이......얼마 뒤 소리가 없어 가보니 졸고 있다. 이 때가 가장 맘이 아프다. 어쩔 수 없이 예린이를 안고가서 엄마가 재웠다. 그리고 해아도 비틀비틀, 잠오는 모양이다. 오늘은 얘들이 일찍 잠들려나?

9. 불났습니다.
해아도 목욕시켜 재울려고 옷을 다 벗긴 순간. 관리실에서 뭐라고 방송이 나왔는데, 무심코 지나쳤다. 엄마가 "뭐해요 불났다잖아요?" 하며 다급해진다.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불타는 냄새가 느껴진다. 황급히 해아의 옷을 다시 입히고, 엄마는 예린이를 깨워서 안았다. 아이들 파카를 입히고, 우리도 대충 옷을 챙겨입고, 빨리 나왔다. 준비성 좋은 엄마는 연기가 채일 경우를 대비해서 수건도 들고 나간다. 애들을 데리고 비상구로 내려가는데(불이날 경우에는 엘리베이터 이용은 금물이다.), 이놈의 비상구에 왜 이리 잡동사니들이 많냐. 정리좀 해야겠다. 내려가는데, 소방차가 들어오고, 불구경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벌써 꽉찼다. 다행히 불은 소방차가 오기도 전에 꺼졌고(담뱃불이 복도의 폐지에 옮겨붙은거란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예린이와 해아는 완전히 잠이 깼다.

10. 역시 형제인가보다
잠이 깬 예린이. 배고프단다. 예린이 밥을 먹이고, 다시 놀고 있는데, 해아가 잠이 들었다. 해아를 방에 누이고, 예린이는 거실에 있고, 잠시 틈을 내서 담배피러 작은방 베란다에 있는데, 엄마의 다급한 소리에 뛰어가 보니, 해아가 자다가 기침이 심해서 토했다. 해아의 옷을 벗기고, 입을 닦고, 약을 먹이고 하는데 예린이가 들어와서 보고 있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해아가 가여워"서란다. "해아한테 뽀뽀해줘"하니 조심스레 뽀뽀를 하곤 지켜본다.
해아를 달래고, 예린이까지 재우고 나니 시계가 벌써 11시20분을 가리킨다.

정말. 정말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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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하루였다. 특히 마지막의 불났습니다는 정말 아찔....

그나저나 여기에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이 너무 많이 나와 어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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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6-02-0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육아일기를 쓰신다니 무척 부럽네요.
그리고 아침 7시30분 공격 시작은 우리집과 같아요^^ 정말 길고도 다사다난한 하루였네요.

바람돌이 2006-02-0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때 울집 서방이 조금 시간여유가 있었더랬죠.... 뭐 몇번 안남았습니다. 작년 한해는 단 한번도 못썼었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 정말 힘들어요. 근데 요즘은 요것들이 저를 닮아 점점 늦잠을 자기 시작해요. 한편으로는 편해서 좋은데 슬슬 걱정이.... ^^

조선인 2006-02-06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났습니다라니... 정말 긴 하루였겠어요.
그나저나 돌침대를 선호하는 유신 장군, 호호호호.

바람돌이 2006-02-07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둘 데리고 내려가는 아파트 계단이 왜 그리 길던지요. 참고로 저희집 12층입니다. 뭐 20층보다 낫기는 하지만.... ^^ 요즘은 저 김유신 장군도 사실은 이모부보다는 이모를 더 좋아한다는.... ^^

세실 2006-02-0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빠의 생생한 육아일기 재미있습니다. 어쩜 이리도 책임감이 강하신지요.
바람돌이님도 강하십니다. 낮 2시30분 기상 맞으시지요, 3시30분 기상인가요?

바람돌이 2006-02-0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세실님 낮 2시 30분이라니요. 2시간 30분이 지나고니까 아침 10시라고요. 잉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