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가 없어졌다. 그러나 재산이라고는 진정 몸뚱이밖에 없는 그들에게 어떤 초기 정착을 위한 경제적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생산과 동시에 빚이 증가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동시에 미국의 법은 그들을 실질적인 노예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싶지 않다. 재소자 임대 제도는 흑인들을 아주 사소산 구실로 체포하게 하고 그들을 다시 농장주들에게 대여되도록 하였다. 실질적으로는 노예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189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48개 주 가운데 32개 주에서 가사서비스가 흑인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지배적인 직업이었다는 것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통념과 달라서 약간 충격이었다. 일반적으로 남북전쟁을 남부의 농장제와 북부의 공장제의 대립으로 보고 값싼 공장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는데, 1890년의 인구조사가 보여주는 것은 통념보다 미국의 자본주의 공장제 공업의 비중이 아직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남부의 노예제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흑인들이 다시 농장에서 옛 주인 밑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가사노동- 백인들의 시중을 드는 그런 것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제 흑인=노예라는 공식이 흑인=하인이라는 공식으로 대체되는데 실제 흑인들의 처지는 이전의 노예로서의 상황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흑인 여성 가정부를 두고 있는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 여성은 백화점 점원의 노동조건에는 분노하지만 자기 집의 흑인 가정부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알고싶어하지 않는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나의 주장과 나의 삶이 어긋날 때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의 필요다. 나와 나의 가족이 해야 할 노동을 대신하고 있는 흑인 가정부의 삶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면 다른 어떤 공감도 그것이 나의 삶의 편안함을 희생해야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진보적이기 힘들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지역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바라고 있다고 그래서 이 지역의 평화 역시 긍정적이라고 평해놓은 것을 봤었다. 하지만 내가 그 책의 인터뷰를 통해서 느낀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바라는 평화는 자신의 삶의 어떤 것 -현재의 편안함, 경제적 안정, 사회적 지위 등등 - 양보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빼앗은 것 어떤 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맺고싶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평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흑인 여성의 노동이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이든 그것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다면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도 평화를 말하는 것도 공허하기 이를데 없고, 위선일 뿐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흑인들이 원했던 것은 땅, 투표권, 그리고 학교였다. 해방된 흑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이 3가지였다. 땅과 투표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던 흑인들에게 남은 것은 교육이었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투쟁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백인 여성들은 자신도 갖지 못한 투표권을 흑인 남성이 가지는 것은 반대한다. 또한 흑인 투표권에 대항하여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문해력을 투표권의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인종주의일뿐만 아니라 계급차별이기도 하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누군가를 나보다 못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동정하고 돕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임을 여기서 발견한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동정하는 대상이 내가 동정할 사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권리를 가진 평등한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다 보면 오늘날 우리사회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아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다가 이 질문 자체가 역시 얼마나 인종주의적이고 오만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비공감과 편의주의, 그리고 자기애가 가지고 오는 이런 판단 미스는 실제로 우리 사회의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미국 백인여성들의 온정주의적이지만 인종주의적이고 계급차별적인 결정들이 흑인에 대한 무수한 린치, 살인들을 방조하고 오히려 그 폭력들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강화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흑인 남자가 가능한 모든 행복과 진보를 누리기를 바라지만 앵글로색슨 인종의 성역을 침범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199쪽


 이토록 직접적이고 대범한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언사에 지금의 나를 대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장애인의 처지가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그의 출근길 시위로 내가 더 빨리 집을 나서 출근해야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주 노동자는 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 댓가가 나의 지위나 급여보다 올라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동성애를 이유로 차별하는것을 반대하지만 나의 아이가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등등등..... 이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문장은 무수히 많다. 

때로는 반면교사가 더 힘이 세다. 나의 위선을 바라보는 거울이 일상에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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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2-15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인 여성이 가진 생각 한국 사람도 가지기도 하겠네요 한국 사람이라고 하다니... 저도 그렇겠습니다 이젠 한국에 한국 사람만 살지 않기도 하죠 외국인 노동자가 있어서 한국이 돌아가나 싶은 생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야죠 언제나 자신을 되돌아봐야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3-02-15 23:38   좋아요 1 | URL
조만간 한국의 인구에서 외국인이 더 많아지는 경우도 예상해야 할 거 같아요. 현재의 인구감소 추세로 볼때 우리 나라도 다인종 다민족국가가 되는게 멀지 않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면 뭐 큰일 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이걸 또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또 뭐 그렇게 큰일인가 싶기도 하구요. 그런 문제에서 언제나 나의 관점을 다시 되돌아보는 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햇살과함께 2023-02-15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부분, 흑인 여성 가정부를 둔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 여성의 모순에 크게 공감했어요!
제가 육아도우미를 고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당시 가정에서 사용자라는 나의 위치와 직장에서 사용인이라는 나의 위치에 대한 저의 대립적, 모순적 시각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기에..
책을 읽는다는 건 이런 점이 좋은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3-02-15 23:40   좋아요 2 | URL
우리는 사실 모두 나의 편안함을 위해 타인의 불편함에 눈을 감는 경향이 다 있잖아요. 이런 것을 자각하기만 해도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같은게 달라지리라 싶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이렇게 얘기도 하고 하는거잖아요. ^^

단발머리 2023-02-19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에 대한 리뷰들 중에 이 리뷰가 제일 좋았어요. 바람돌이님 이 책 리뷰들 여러 편 쓰셨는데 그 중에서도 이 리뷰가 최곱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비공감과 편의주의, 자기애에 대한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영구 보관해야 합니다!!!!!!!

바람돌이 2023-02-25 11:44   좋아요 1 | URL
여러 글들중에서 그래도 공감가는 글이 있었다고 얘기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이참에 알라딘에 명예의 전당 영구박제공간 하나 만들어달라고 졸라볼까요? ㅋㅋ
이번 달의 책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들,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더 생각하게 해줘서 저는 참 좋았습니다. 단발머리님의 리뷰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