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소설, <악당 임꺽정>을 꺼내 들었다. 사실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는 벽초 홍명희의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그의 장편작 <임꺽정>(10)은 소설의 구성 뿐만이 아니라 수려한 우리말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 임꺽정은 권력의 정의로운 실천적 가치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어떤 분들의 평가처럼 실제와는 다를 수 있지만, 의적 임꺽정이라는 이미지는 벽초의 소설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2.

2000년 소설가 구효서는 재밌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악당 임꺽정>. 소설은 임꺽정 이 그동안 철저하게 이미지화된 것을 탈색시켜 인간 그 자체로서 임꺽정의 이미지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였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밝혀둔다.

 

"옳고 그름이 세상을 어지럽게는 할 수 있을망정 사람의 마음까지는 마침내 속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시비공론은 한때의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막힐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이치는 결코 면멸하지 않는 법. 현란한 시비는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정해지고 두절된 공론은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간흉의 극악함이 세도를 잡고 살륙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충성되고 어진 자들을 대악으로 몰아 마침내 불측한 화를 빚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비록 당장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옮고 그름이 판가름나고 공평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섣부르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허망한 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쪽의 것이든, 저쪽의 것이든, 기만적인 대의명분 따위에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악이 가능하게끔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악당 임꺽정 제2, 284)

 

임꺽정의 신복이었지만 변절하다시피해서 탈출하여 밀고자가 된 서림. 그의 입을 빌어 서술한 이 마지막 이 고백은 구구절절 임꺽정이 이룬, 아니면 벽초 홍명희에 의해 철저히 이미지화된 임꺽정에 대한 반론이며, 그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 무색하지 않다.

 

3.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 구효서가 의도한 바대로 임꺽정에 대한 외전을 정, 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구효서의 소설은 임꺽정에 대한 문학적 위상의 균형을 맞췄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확보하면서 의적 임꺽정이 온전한 권력자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꿈꿨던 악의적 야망을 감춘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셈이다. 작가가 서림의 마지막 서술을 통해 들려준 이 말은 몇 번을 읽어도 구구절절 타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서술이 제시하는 가장 큰 의의는 그것이 의적 임꺽정을 비트는 자리에서 발설되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정당성, 사회적 비판을 정당화하려는 글이라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바람직한 맥락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작가는 의적 임꺽정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임꺽정에 대한 변형된 교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확고하고 정당한 이야기가 정확하게 위치해야 할 삶의 맥락, 사회적 맥락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인 듯하다. 사실 홍명희가 그려낸 의적 임꺽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로운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 저항자로서 이상형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이들에게 교리처럼 남아있다. 작가 구효서는 이 교리에 대해 의도적으로 재비판하여 '악당 임꺽정'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 역시 소설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했을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이 상반된 서술은 각자 실제 의와 악을 혼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정조준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교리화된 신념을 반영하는 바, 그것은 삶의 맥락과 사회적 자리를 벗어날 때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삶을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깊은 질문의 늪에 빠져 있는 욥을 향해, 온갖 정교한 교리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붓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그 자체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욥의 실존을 파악하는 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과 흡사하다.


5.

결국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정교한 교리와 정당하는 신념에 의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끌어가는 맥락에 잘 놓여야 할 것 같다. 모든 옳은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말이 놓인 자리가 옳아야 한다. 언론가와 종교가와 정치가와 문학가라면 이 점에서 자신의 존재 역할을 제대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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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저자의 경험담이자, 나의 어린 경험이며,

그 자신이 발견한 기쁨이며, 나의 어린 시절의 기쁨이기도 하다.


그림 저자는 글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림 속 강물은 말이며, 음악이다.
나는 지금도 이 그림책을 음악처럼 듣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말을 못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글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말과 모든 글은

이제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림이 되어

나를 즐겁게 한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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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난 - 2022년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보미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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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들이란 항상 골칫거리지.”(13)

책 제목이 재밌다는 가족들에게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읽어주었다.

기다릴 것도 없이 맞다!’라는 구호에 격한 웃음과 함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문장으로 이 사춘기 생채기 같은 제목의 책이

순식간에 지위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논의도 필요없고 남자에게는 최후 증언도 무의미했다.

남자로서 나도 동의했으니 더 이상 토론은 의미없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짐작하는대로 소설 속 여자였다’.

사실 나는 혹시라도 남자가 이 말을 했길 바랬다.

하지만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 말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여전히 남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존재일지 모른다.

 

2.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보는 눈의 진짜 용도가 될 것이다.”(75)

 

내가 이 소설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여도 좋겠다고 수용한 대목치고는 조금 진부하다.

본래 진리란 진부할 정도로 오랫동안 묵혀야 할 것이니 나는 다시 생각한다.

고로 이 소설은 한 여자아이가 어느 한 때 겪었을 내면 변화라지만,

돌이켜보면, 한 사람이 태어나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서

언제나 겪어내야 할 이야기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인간은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있다는 것, 그 속사람이.

 

3.

상식이라지만, 소설은 시점의 미학이자 관점의 수사학이다.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내가 스스로 개척하는 탐험과 같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점과 관점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현실이 아니겠지만,

현실은 모두 소설같을 수 있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 말 속에서 소설의 책임을 생각한다.

소설이 일어난 현실 사이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적절하게 섞어둔다. 이런 정교한 수작업으로 인간이 겪어낼 수 있는

몸 안과 밖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직조함으로써

인간 너머를 바라보고 생각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현실이 소설 같을 때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누구도 소설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나는 이 소설의 서사를 힘입어 소설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같다: ‘밖으로만 뻗어나가려고 하는 인간 본능에 대항하여 자기 경험 너머로 있을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며 자기 공간에 스스로 머물러내면의 뿌리를 견실하게 창작해내는 문학의 한 장르다’.

나는 소설을 가상세계에 갇힌 이야기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함께 생각한다.

소설 읽기는 가 상상한 현실을 나의 현실로 알아채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불장난은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 쯤 해봤던 실제일진대,

그 날 그 불꽃을 바라보며 희열했던 어린/어른 내가

지금 여기에 도착해 있다는 현실을 누구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소설들에서 나는 소설답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소설다움은 누구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나의 내면’(이 용어는 거의 소설화된 듯하다.)

자연스럽게 밖으로 꺼내주는 과정을 순조롭게 수행해 줄 때 두드러지는 것이 아닌가싶다.

내면이란, 어떤 사람들도 전혀 같을 수 없다. ‘사람의 내면

결국 수많은 나의 내면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한 데 묶어 말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소설은, 그 나만의 내면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모아들여

일반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나와 다른 이를 함께 사랑할 수 있도록

가장 극적인 수사법을 활용하여 창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해야 할 문학 도구일 것이다.

 

5.

소설불장난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이 글을 대상으로 선정한 과정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총평을 읽어보니,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짧은 평을 조금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긴 하다.

심사위원들 중 어떤 이는 소설과 현실이 모호해지다가 결국 완전히 뒤섞여버려

현실같은 소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며 이렇게 질문한다.

소설은 어디까지가 소설일까?’ 그리고 스스로 나에게 답한다.

소설은 소설이구나!’라는 평가가 선명할 때 비로서 독자로서 슬프긴 해도

소설은 제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6.

책을 덮고 나니 소설 창작에는 문외한같은 내가, 이 출충하다는 평가를 받은 소설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외람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소설이 현실이 되거나, 현실이 소설처럼 들리는 일은 소설 문학이 의도하지 않은 곁길을 본연의 길이라고 나 스스로 호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손보미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관해 일천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이 소설은 소설다와서 소설인 한 편 글이 될 것 같다. 소설 같은 현실을 꿈꾸는 나 같은 사람에게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면서도 이 소설이 소설다운 이야기로 현실에서 나의 이야기를 반추하고 조망할만한 보편타당한 시점과 관점을 문학적으로 권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손보미불장난」 (2021, 창작과비평가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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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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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만적 은둔의 역사』 .이 책을 읽다보면 혼자’와 ‘공동체’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삶일 때 ‘혼자’는 비로서 빛을 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서 ‘낭만'은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은둔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혼자’가 남안이 되려면 공동체 속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은둔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홀로 은둔할 자유'를 누리게 하는 그 공동체성’으로 수많은 '홀로'는 연결되어 
‘어울린다’ 

2.
어울리다는 것은 
하나 또 하나 
홀로 또 홀로 
하나 또 여럿 
홀로 또 다같이 

한 자리에 이리저리 흩어져도 
마치 하나인 듯 조화로운 상태이며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어도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상태다. 

3.
생각, 마음, 행동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면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거나 
앞서고 뒤서면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즐겁게 노는 풍경이다.
그렇게 
단독자로 있으며, 유유상종한다. 
보이지 않아도
서로서로 상대에게 깊이 영향을 주고 받는다. 

4.
은둔한다는 것은 숨는 것이 아니라 따로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당연히 그렇지만 
사람과 사물, 
사람과 동물이 더 잘 어울릴 때도 있다. 
가볍게 급히 산 옷이 내 몸에 잘 맞는 경우가 있고 
한적하게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는 강아지, 고양이와도 그렇다. 
우연히 찍은 사진 한 장 속에 바다와 산과 사람이 절묘하게 자기 자리에서 서로에게 좋은 배경이 되어주는 경우도 그렇다. 
그것은 ‘환대’와 ‘배려’로 빚어내는 균형의 아름다움이다. 
홀로 빛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빛나려면 다른 세계와 함께 ‘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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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 고정희(1948-1991). 신학, 해방문학 시, 한국여성문화운동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40대 마지막 나이에 지리산 등반 중 악천후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대중에게는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생애에서 신학은 그 삶을 지탱한 토대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신학을 문학/시로써 이 세계에 발현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시를 통해 이 굴곡진 세계에서 신학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 운동을 선택하고 그것을 촉진시켰습니다. 그의 시는 어두운 세계를 균열시키는 데 작은 빛으로도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계 문명의 심화는 문학과 시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한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자신감으로 생각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기술의 발달하는 동안 인간이 건조해져 간다는 것에는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시는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는 요절했으나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여전히 이 어두운 시대 어디서든 자기 언어를 꿋꿋하게 잘 지켜 살아내고 있습니다.

 

2.

어느 날 불연듯 그의 시가 다시 살아난 것도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내가 참여하는 단체 카카오톡 나눔 방에 그의 시 한편이 올라왔습니다. 어느 분이 아침 모빌(모닝바이블)로 공유된 시편 125절을 읽다가 개인적인 감회가 컸다는 설명과 함께 그의 시 "눈물샘에 대한 몇 가지 고백"의 후반부를 공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전략>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반복되는 어구, '사랑하지 않으면'은 시인의 의도일 것입니다. 그는 '사랑으로만', 저 감춰져 있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가까이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의 눈물샘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3.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이들에게 시편은 참 특별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마음껏 탄원하고 그 느린 응답을 항의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함께 읽고 암송하려했던 시편 125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한글개역개정>

 

이 시편의 구절을 읽는 순간 어느 분은 곧바로 시인 고정희 시를 자기 오랜 기억 속에서 현재로 소환

한 것입니다. 공감은 전이되어 곧이어 다른 한 분은 시인 박노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앞선 분의 마음에 화답해 주었습니다. 결국 아침 시편이 저녁 두 시인의 시들로 결론 내려졌습니다. 두 시인이 천착하는 시세계가 '눌림(가슴이 압박당하는)''탄식(숨막히는 상황)'으로 하루를 열고 닫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세계를 향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신학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결마무리가 좋습니다. 사실, 야훼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적절한 결론이어야 한다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정희 시인은 신학에 발을 들인 문학도답게 신학이 인간현실에 공감하는 현실참여-실천문학에 닻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시의 언어로 강하게 웅변해야 한다는 신학의 책임을 성실하게 잘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실, 저 고대의 시편을 통해 나는 함께 주목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번역에 소개된 '안전한 지대'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들으면 익숙한 구절이지만, 히브리 성경을 보자면 여러 번역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 성경이 조금 결이 다른 번역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새번역>

 

'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으로 옮겼습니다. 이 두 번역은 모두 야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상상하도록 돕는 은유입니다.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는 곧 '그가 갈망하는 구원'과 한 의미단위(semantic unit) 안에 들어있습니다. 문학으로서 은유는 적절한 상상을 촉발할 때 의미를 심화해줍니다. 이 시편도 그런 은유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했습니다. 가슴이 막히고(눌림), 숨이 막히는(탄식) 이들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이 고대 시인은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절한 구원은 그들이 보호받는 '안전한 지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은 긴밀합니다. 시인에게 야훼의 구원은 야훼가 '안전지대'를 확보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야훼 자신이 안전한 피난처, 공간으로 실현되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합니다. 최근에 김현경이 주장한 '사람에게 장소를 확보해주는 것은 그가 환대받는다는 증거'(김현경 저,사람장소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도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

 

4.

기독교가 엉망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갖기 위한 노력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질문이 여전하지만, 나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이 희망을 위해 나는 신학이 자기 규범을 되돌아보고 이 세계와 유연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노력을 지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서 신학은 문학으로써 현실에서 빛을 발하고, 신학의 상상은 문학 속 은유로서 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 설정은 사실 과장이 아닙니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법철학자)은 정치와 법으로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문학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22-46중에서 45.(황은덕 역)

출처:Martha, C, Nussbaum, “Democratic Citizenship and the Narrative Imagination”, Year-Book 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Education, 2008/107(1), pp.143-157.

 

그러므로 문학은 (시와 소설의 경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환대를

이끌어 내도록 공감하도록 안내하는 도구인 셈입니다. 그러니 신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얼마나 현실과 밀접하게 체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이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고대 시인은 자신의 신학을 이 현실에서 문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 시편 시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공감하는 신학적 문학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삶을 유지해온 많은 시인들 중에서도 시인 고정희도 그 중 한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시인 고정희가 남긴 유고 시집에는 아주 극적인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시 일부는 이렇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표제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는 시입니다.

 

이 시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무덤'이며, '죽음'입니다. 시인에 따르면, '부재(不在)',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이 죽음너머 '탄생'에 닿아 있습니다. 죽음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백'입니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입니다. 여백은 '빈 공간', '비어있는 장소'입니다. '물러남'이며, '간격'이고, '벌어짐'이며, '이완'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무덤 앞에서 상상해낸 여백은 죽음을 탄생으로 견인하는 힘입니다. 이 문학이 생성하는 상상이 이 흔들리는 세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학의 체현(體現)이라해도 좋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신학에 근거한 문학적 상상은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나침반 같습니다. 해석의 방향이자, 안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모든 것은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지라도, 신앙의 유연함에 근거한 한 편의 시는 우리가 이 세계를 어느 방향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습니다.

 

6.

우리 시대는 전염병과 세계 정치의 불안정, 정의와 공의가 엉켜버린 시대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

안전한 지대가 꼭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 예고없이 다가오는 일, 예측불가한 이야기들은 여전합니다. 나는 이 힘겹고, 무고한 싸움에 직면한 이들에게 '피난처인 야훼'를 상상해낼 힘을 제공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사실 시인들의 시로, 소설가들의 소설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산문으로 잘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신학은 신학에만 몰두한 이들에 의해 그 자체로 세계를 지탱할 위로와 권면의 힘을 스스로 소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험곡같은 현실에서 '안전한 지대'로서 야훼의 따뜻한 위로가 삶을 진솔하게 대면하는 소설로 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야훼 자신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한 편의 산문에 담기길 소망합니다. 물론 어느 것도 현실일 수 없고, 상상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비판할 수 있지만, 나는 기대합니다. 신학은 이 불가항력같은 삶에도 여백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문학의 상상을 통해 손에 잡히도록 글로 표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학적 상상이야말로 우리 현실에 대응하는 '현실적 힘'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신학이 우리가 함몰된 어떤 상황으로부터 우리에게 여백을 선물처럼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이 문학이라는 여백 안에 몸을 맡길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상상을 땅의 현실로 실현해낼 수 있다는 세속적 희망을 더 강력하게 옹호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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