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소설, <악당 임꺽정>을 꺼내 들었다. 사실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는 벽초 홍명희의 작품이 최고일 것이다. 그의 장편작 <임꺽정>(10)은 소설의 구성 뿐만이 아니라 수려한 우리말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입증되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 임꺽정은 권력의 정의로운 실천적 가치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어떤 분들의 평가처럼 실제와는 다를 수 있지만, 의적 임꺽정이라는 이미지는 벽초의 소설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2.

2000년 소설가 구효서는 재밌는 제목의 소설을 출간했다. 이름하여 <악당 임꺽정>. 소설은 임꺽정 이 그동안 철저하게 이미지화된 것을 탈색시켜 인간 그 자체로서 임꺽정의 이미지를 복원하겠다는 의지였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밝혀둔다.

 

"옳고 그름이 세상을 어지럽게는 할 수 있을망정 사람의 마음까지는 마침내 속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시비공론은 한때의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막힐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이치는 결코 면멸하지 않는 법. 현란한 시비는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정해지고 두절된 공론은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간흉의 극악함이 세도를 잡고 살륙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충성되고 어진 자들을 대악으로 몰아 마침내 불측한 화를 빚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비록 당장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옮고 그름이 판가름나고 공평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섣부르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허망한 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쪽의 것이든, 저쪽의 것이든, 기만적인 대의명분 따위에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악이 가능하게끔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악당 임꺽정 제2, 284)

 

임꺽정의 신복이었지만 변절하다시피해서 탈출하여 밀고자가 된 서림. 그의 입을 빌어 서술한 이 마지막 이 고백은 구구절절 임꺽정이 이룬, 아니면 벽초 홍명희에 의해 철저히 이미지화된 임꺽정에 대한 반론이며, 그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시도하는 작업에 무색하지 않다.

 

3.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 구효서가 의도한 바대로 임꺽정에 대한 외전을 정, 반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한 셈이다. 따지고 보면 구효서의 소설은 임꺽정에 대한 문학적 위상의 균형을 맞췄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확보하면서 의적 임꺽정이 온전한 권력자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꿈꿨던 악의적 야망을 감춘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셈이다. 작가가 서림의 마지막 서술을 통해 들려준 이 말은 몇 번을 읽어도 구구절절 타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서술이 제시하는 가장 큰 의의는 그것이 의적 임꺽정을 비트는 자리에서 발설되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교리적 정당성, 사회적 비판을 정당화하려는 글이라면 그것이 적용되어야 할 바람직한 맥락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작가는 의적 임꺽정에 대한 이미지 해체를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난점은 바로 임꺽정에 대한 변형된 교리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확고하고 정당한 이야기가 정확하게 위치해야 할 삶의 맥락, 사회적 맥락에서 비켜나 있다는 것인 듯하다. 사실 홍명희가 그려낸 의적 임꺽정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로운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 저항자로서 이상형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이들에게 교리처럼 남아있다. 작가 구효서는 이 교리에 대해 의도적으로 재비판하여 '악당 임꺽정'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 역시 소설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했을 것이다. 한 인물에 대한 이 상반된 서술은 각자 실제 의와 악을 혼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정조준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교리화된 신념을 반영하는 바, 그것은 삶의 맥락과 사회적 자리를 벗어날 때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삶을 짓밟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깊은 질문의 늪에 빠져 있는 욥을 향해, 온갖 정교한 교리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쏟아붓는 욥의 친구들의 말이 그 자체로는 하등의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욥의 실존을 파악하는 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기에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과 흡사하다.


5.

결국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정교한 교리와 정당하는 신념에 의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끌어가는 맥락에 잘 놓여야 할 것 같다. 모든 옳은 말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 말이 놓인 자리가 옳아야 한다. 언론가와 종교가와 정치가와 문학가라면 이 점에서 자신의 존재 역할을 제대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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