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 고정희(1948-1991). 신학, 해방문학 시, 한국여성문화운동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다 40대 마지막 나이에 지리산 등반 중 악천후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대중에게는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의 생애에서 신학은 그 삶을 지탱한 토대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신학을 문학/시로써 이 세계에 발현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시를 통해 이 굴곡진 세계에서 신학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 운동을 선택하고 그것을 촉진시켰습니다. 그의 시는 어두운 세계를 균열시키는 데 작은 빛으로도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계 문명의 심화는 문학과 시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한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자신감으로 생각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기술의 발달하는 동안 인간이 건조해져 간다는 것에는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시는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는 요절했으나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여전히 이 어두운 시대 어디서든 자기 언어를 꿋꿋하게 잘 지켜 살아내고 있습니다.

 

2.

어느 날 불연듯 그의 시가 다시 살아난 것도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내가 참여하는 단체 카카오톡 나눔 방에 그의 시 한편이 올라왔습니다. 어느 분이 아침 모빌(모닝바이블)로 공유된 시편 125절을 읽다가 개인적인 감회가 컸다는 설명과 함께 그의 시 "눈물샘에 대한 몇 가지 고백"의 후반부를 공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이렇습니다.

 

"<전략>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바람 부는 광장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어두운 골짜기를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서러운 강기슭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의 눈물샘을 모른다

 

반복되는 어구, '사랑하지 않으면'은 시인의 의도일 것입니다. 그는 '사랑으로만', 저 감춰져 있거나 드러내지 않으면 가까이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의 눈물샘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3.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 이들에게 시편은 참 특별한 내용입니다. 인간이 신을 향해 마음껏 탄원하고 그 느린 응답을 항의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함께 읽고 암송하려했던 시편 125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한글개역개정>

 

이 시편의 구절을 읽는 순간 어느 분은 곧바로 시인 고정희 시를 자기 오랜 기억 속에서 현재로 소환

한 것입니다. 공감은 전이되어 곧이어 다른 한 분은 시인 박노해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앞선 분의 마음에 화답해 주었습니다. 결국 아침 시편이 저녁 두 시인의 시들로 결론 내려졌습니다. 두 시인이 천착하는 시세계가 '눌림(가슴이 압박당하는)''탄식(숨막히는 상황)'으로 하루를 열고 닫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세계를 향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신학이 문학으로 이어지는 결마무리가 좋습니다. 사실, 야훼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적절한 결론이어야 한다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정희 시인은 신학에 발을 들인 문학도답게 신학이 인간현실에 공감하는 현실참여-실천문학에 닻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시의 언어로 강하게 웅변해야 한다는 신학의 책임을 성실하게 잘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사실, 저 고대의 시편을 통해 나는 함께 주목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번역에 소개된 '안전한 지대'라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들으면 익숙한 구절이지만, 히브리 성경을 보자면 여러 번역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 성경이 조금 결이 다른 번역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새번역>

 

'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으로 옮겼습니다. 이 두 번역은 모두 야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상상하도록 돕는 은유입니다.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는 곧 '그가 갈망하는 구원'과 한 의미단위(semantic unit) 안에 들어있습니다. 문학으로서 은유는 적절한 상상을 촉발할 때 의미를 심화해줍니다. 이 시편도 그런 은유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했습니다. 가슴이 막히고(눌림), 숨이 막히는(탄식) 이들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이 고대 시인은 간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절한 구원은 그들이 보호받는 '안전한 지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은 긴밀합니다. 시인에게 야훼의 구원은 야훼가 '안전지대'를 확보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야훼 자신이 안전한 피난처, 공간으로 실현되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합니다. 최근에 김현경이 주장한 '사람에게 장소를 확보해주는 것은 그가 환대받는다는 증거'(김현경 저,사람장소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도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

 

4.

기독교가 엉망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다시 새로운 기대를 갖기 위한 노력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질문이 여전하지만, 나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이 희망을 위해 나는 신학이 자기 규범을 되돌아보고 이 세계와 유연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노력을 지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서 신학은 문학으로써 현실에서 빛을 발하고, 신학의 상상은 문학 속 은유로서 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 설정은 사실 과장이 아닙니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미국법철학자)은 정치와 법으로 통치되는 이 세계에서 '공감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문학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시민의 삶에 문학이 기여하는 가장 큰 공헌은, 종종 둔감하고 무딘 상상력을 가진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이나 사고나 감성 속에서나마,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애써 인정하도록 만드는 그 능력에 있다.”

 

민주적 시민과 서사적 상상력”,오늘의 문예비평2010. 11, 22-46중에서 45.(황은덕 역)

출처:Martha, C, Nussbaum, “Democratic Citizenship and the Narrative Imagination”, Year-Book 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Education, 2008/107(1), pp.143-157.

 

그러므로 문학은 (시와 소설의 경우)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적합한 환대를

이끌어 내도록 공감하도록 안내하는 도구인 셈입니다. 그러니 신학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얼마나 현실과 밀접하게 체화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이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고대 시인은 자신의 신학을 이 현실에서 문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했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 시편 시인은 철저하게 인간의 삶을 공감하는 신학적 문학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삶을 유지해온 많은 시인들 중에서도 시인 고정희도 그 중 한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시인 고정희가 남긴 유고 시집에는 아주 극적인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시 일부는 이렇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표제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는 시입니다.

 

이 시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무덤'이며, '죽음'입니다. 시인에 따르면, '부재(不在)',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시인의 시선은 이 죽음너머 '탄생'에 닿아 있습니다. 죽음이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백'입니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입니다. 여백은 '빈 공간', '비어있는 장소'입니다. '물러남'이며, '간격'이고, '벌어짐'이며, '이완'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무덤 앞에서 상상해낸 여백은 죽음을 탄생으로 견인하는 힘입니다. 이 문학이 생성하는 상상이 이 흔들리는 세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학의 체현(體現)이라해도 좋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신학에 근거한 문학적 상상은 현실을 해석하는 하나의 나침반 같습니다. 해석의 방향이자, 안내라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모든 것은 손에 잡히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지라도, 신앙의 유연함에 근거한 한 편의 시는 우리가 이 세계를 어느 방향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일러줄 수 있습니다.

 

6.

우리 시대는 전염병과 세계 정치의 불안정, 정의와 공의가 엉켜버린 시대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

안전한 지대가 꼭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나는 일들, 예고없이 다가오는 일, 예측불가한 이야기들은 여전합니다. 나는 이 힘겹고, 무고한 싸움에 직면한 이들에게 '피난처인 야훼'를 상상해낼 힘을 제공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사실 시인들의 시로, 소설가들의 소설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산문으로 잘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신학은 신학에만 몰두한 이들에 의해 그 자체로 세계를 지탱할 위로와 권면의 힘을 스스로 소실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험곡같은 현실에서 '안전한 지대'로서 야훼의 따뜻한 위로가 삶을 진솔하게 대면하는 소설로 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야훼 자신이 피난처'라는 사실을 한 편의 산문에 담기길 소망합니다. 물론 어느 것도 현실일 수 없고, 상상일 뿐이라고 정확하게 비판할 수 있지만, 나는 기대합니다. 신학은 이 불가항력같은 삶에도 여백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문학의 상상을 통해 손에 잡히도록 글로 표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학적 상상이야말로 우리 현실에 대응하는 '현실적 힘'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신학이 우리가 함몰된 어떤 상황으로부터 우리에게 여백을 선물처럼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이 이 문학이라는 여백 안에 몸을 맡길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자기 상상을 땅의 현실로 실현해낼 수 있다는 세속적 희망을 더 강력하게 옹호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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