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자1 상상

















상상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온 몸으로 끄집어 내 보여준다. 

이야기 

상상을 손에 잡히듯 보여준다. 


상상을 실현하는 이야기, 내러티매진(내러티브+이매진) 


세계를 이해하고, 열정과 연습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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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 하늘도 오늘처럼 맑았습니다. 진녹색 산길은 물론이고, 파랑(波浪)마저 부드러운 회랑포 바닷길도 화창했습니다. 청산도 느릿한 길엔 아무도 없었고 여러 길을 나홀로 걸었습니다. 길과 나만 있던 길이었습니다. 길이 어디서 끝날 수 있나를 가볍게 생각하는 즐거움이 컸습니다. 그렇게 그 길을 걷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오래 병상에 계시던 어머니가 서둘러 숨을 멈추고 맑고 푸른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길을 걷는 것과 어머니의 귀천은 이제 나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반비, 2017/Wanderlust:the History of Walking, 2000), 화보 중>


오늘도 나는 말을 삼키고, 몸을 열어 ‘나에게 주어진 길’, 숲 길을 걸었습니다. 

리베카 솔닛의 글이 아니더라도 걷는 일은 인간, 무엇보다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진솔한 태도라는 것도 확증하고 있습니다.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낯은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21쪽)


이런 말도 몸으로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2.

운동삼아 걷는 일로부터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젠 ‘죽어가는’ 나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도 원시행동같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머니를 추억합니다. 그날 저를 찾아와 따뜻한 위로를 건넸던 분들에게 마음으로 드렸던 인사를 오늘도 다시 읽습니다.


“꽃이 순식간에 지는 건 아니지만 한번 여려진 빛은 오래 걸리지 않아 바래진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86년간 곱고 정갈하게 피었던 노란 꽃이 천천히 져버렸습니다. 이제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련다고 여린 눈만 다정하게 껌뻑이다 마침내 입술을 굳게 닫았습니다.


돌아보면 함께 했던 어간 반백년은 짧은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세월 얽히고섥혀 몸에 남겨진 흔적들은 거침없이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잘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지만 몸은 슬픔의 기미를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허나 이 행복한 이별이 가져올 부활의 소망도 슬픔의 두께만큼 견고합니다.


그 틈에 원근 벗들의 위로가 마음에 살갑게 내려앉아 평안을 햇살같이 흩뿌려 주었습니다. 품앗도 못했는데 사랑빚만 늘었습니다.”


오늘, 날이 참 좋습니다.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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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은 이야기를 마치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도서관에 좀 들러야겠어"

K는 아직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아니 도서관에 가는데 왜가 어딨어? 당연히 책 좀 보고, 대출하려는 거지...”

K는 머쓱해졌다. 식어버린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했다. 이내 마셔버렸다. 약간의 원두가루가 잔 바닥에 남아있다. 끊긴 말을 다시 이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다 주저앉았다. 몸을 한번 뒤로 젖히고 다시 의자 깊숙이 밀어넣었다. 잠시 뒤, 맞춰두었던 알람이 정확하게 울린다. 알람을 기다렸다는 듯, K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도서관 속을 좀 걸어보자.’'

사람들은 약속 시간이 조금 남거나 또는 미적한 시간을 얼른 끝내버리고 싶을 때, 또는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도서관을 선택하곤했다. 다행히 자주 실패한 결단은 아니었다.


2.

까페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는 아직 군데군데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다. 길은 여러 곳으로 갈라져있다. 까페 바깥쪽 문으로 나서서 조금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지나는 것이 가장 좋다. 좋은 길은 몸에 맞는다. L은 이미 이 길로 지나갔을 것이다. 일부러 K는 실내 문을 통해 미끄러지듯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거기서 광장으로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서고 바로 왼쪽으로 구부린다. 이내 휠체어 길로 몸을 돌린다. 사람 둘이 서면 꽉 찰 듯한 제한된 길이다. 오고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길을 가끔 온 몸이 건장한 K가 스스럼없이 선택한다는 것은 조금 멋쩍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량으로 받아줄만하다. 사실 이 길은 '도서관'에 가장 멀리 둘러가는 길이다. 동시에 가장 어울리고 멋진 길이다. K,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서 은근히 누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준다. 길 한쪽은 거대한 벽이 견고하고 다른 한쪽은 환히 열려있다. K는 이 길을 ‘사색로(思索路), 책방으로 가는 길’이라 스스로 불렀다. 도서관은 거기에 이어진 길부터 시작된다.


3.

도서관은 이 전공분야에서는 제법 크고 시설 좋기로 이름이 나있다. 문을 들어서면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 넉넉해 보이는 현대식 전산 시설들이 좌우로 보좌하듯 진열되어 있다. 그 자리는 빈틈없이 채워져있다. 그 바로 앞에 출입구가 있다. 그 앞에서 머뭇거림없이 자신의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리찍듯 올려두면 잠시 후 입장을 허락한다는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누구 눈치 볼 필요없다. 책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문을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정보실이 있다. 다시 층을 하나 내려서면 참고서적들의 방이다. 바닥층으로 내려서면 이제 책들의 집 서가다. K는 이 도서관을 이유없이 누비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어떤 서가에 한참 서서 눈에 띄는 책을 마냥 읽는다. 다시 책을 제자리에 정성껏 세워둔다. K는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즐기기 위해서 도서관을 걸었다.


4.

이 서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오래전부터, K는 따뜻한 공기에 떠밀리고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바람같이 책들 사이를 다시 한바퀴 돈다. 일종의 책들의 안녕을 묻는 의식이다. 이런 인사는 늘 그렇듯 기분이 좋다. 도서관의 책들은 언제나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 권 중 아홉 권 정도는 하루종일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도서관은 흩어진 책들을 정성껏 모아서 돌봄을 받는 책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후, 사실은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터인지 K는 일부러 자신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서가를 거르지 않는다. 그렇게 서가를 거치고, 책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다닌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한 냄새와 약간 어두운 듯한 조명아래 책들이 고요히 놓여있다. 책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그렇게 내일도 서가 밑으로 한번도 내려오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서관은 늘 그렇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들에 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훨씬 적다. 어떤 날은 드나드는 사람이 책장 하나에 가끔씩 거꾸로 잘못 꽂혀있는 책의 수보다도 적을 때가 있다. 결국 한 번도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이 지하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때문인지, K는 자기가 필요한 책 한권만 달랑 빼내서 돌아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지적충전소'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즐거운 산책이 가능한 곳, '지적산책로'라고 하는 게 적절했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길 옆으로 나무와 풀과 새와 꽃들이 있듯이, 이 눅눅한 서가에는 숱한 책들이 있다. 마치 나무와 풀과 벤치와 그늘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K는 도서관에서 책을 만난다. 책과 이야기하고, 책의 안녕을 살피고, 책에게 바깥 공기를 실어다준다. 책이 말을 걸어오면 들어주고, 멈춰준다. 책이 말해주고 싶은 삶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본다. 어느 사이 오솔길을 산책하듯 책사이를 걷는다. 지적산책로, 지적휴게소다.


5.

도서관은 책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 화려한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집이자, 별장같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들은 그를 찾아와 주는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이유를 확인한다. 그들은 말없이 그를 찾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서 '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책은 알고 있다. 누군가 그를 꺼내들었을 때, 비로소 숨을 쉬고, 살아난다. 책은 신비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가 만나는 도서관들은 어느 덧 많은 책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K는 묘지같은 서가 사이를 한참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책덕분인지 숨이 좀 열리는 듯하다. 잠시 후 다시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광장이 환하다. 잠시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어딘가를 급히 다녀오는 L이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어디 갔다와?"

"응 책 사러"

"도서관에 간다며? 빌리지?"

"책은 소장되어 있다고 나오는데 서가에 가보니 책이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구. 시간이 급해서 한권 샀어."


문득, 자리를 이탈한 책 한권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삶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면 천만 다행이지 않겠는가? 아마도 어딘가에 곱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곧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 광장의 반대편으로 해가 스르르 잠으로 떨어지듯 넘어가고 있다. 바람이 차다.


도서관, 그저 가볍게 책방이라고 하자. 그 곳은 잠시 여유가 있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이유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런 중압감은 책에도 해롭다. 내가 저 산길을 돌아 산책하며 느끼는 그 즐거움으로 충분하다. 도서관, 책방은 그저 '아낌없이 쉬어가는 책'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책방에는 오늘도 숱한 책들이 들어서고, 아쉽게도 그만큼 책세상을 떠난다. 그 떠나는 책들 중에 부디 달랑 한권이라도 마음에 새겨두자. 도서관, 책방의 책은 그저 책이 아니다. 글과 그림으로 호흡하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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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2012)


1.

언젠가, 중국문학평론가들이 위화(余华, Yú Huá)의 소설을 다룬 소논문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시점에 써놓은 글들인데도 글감으로 다루는 그의 소설들은 거의 엇비슷하다. 영화로도, 책으로도 소개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그는 우리 사회에 이례적이다. 이질적인 이념에 점철된 자기역사를 다루면서도 우리에게는 소설문학으로 꽤 잘 알려진 중국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소설도 인상적이지만, 가끔 그의 에세이를 다시 읽는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원제:十個詞彙中的中國) (문학동네, 2012)도 그 중 한 책이다.

2.

이 책은 그가 체험한 역사를 토대로 한다. 동시에 그의 사상을 은근히 드러내는 사회에

세이다. 소설가로 알려진 것에 견주면, 에세이는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중국 작가 위화를 잘 알지 못한다. 그가 1996년에 발표한 『허삼관 매혈기』(번역:푸른숲, 2007/영화 2015개봉)가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책이다. 당시 나는 ‘매혈기(賣血記)’라는 말을 한참 생각했다. ‘피를 판다’는 것이 단지 공익에 기여하는 ‘헌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슬픈 웃음으로 범벅되어 비열하다시피한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이런 저런 이유로 중국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다행히 그 여행에서 나는 중국 현대사를 거쳐 온 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몇몇 이야기들은 위화의 글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3.

그의 책『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번역본 주제목이다. 이것만 보자면 이 문장은 인문학적 출판문학이 상상해낸 결실이다. 위화가 본래 정한 제목은 부제로 달려있다. :『10개의 단어로 본 중국』. 출판사입장에서 보자면 번역본의 승리다. 아쉽게도 번역본 제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개념은 아니다. 다만 독자에게는 무거운 위화의 생각이 이런 제목으로 인해 좀 더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원제목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제목만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질문이 들었다. ‘과연 중국을 설명하는 10개의 단어들은 어떤 것들인가?’, ‘이 단어들이 거대한 중국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까?’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 기우였다. 책을 읽고나니 이 단어들이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솔직히, 여전히 중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그래도 위화의 글을 통해 어려운 퍼즐 중 몇 개는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숫자 하나와 열 단어를 보자.:5월35일.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얼핏 읽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단어들에게서 그가 지향하는 의도를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정치적인 진술이 아니라 정치문학적 진술이다. 그는 정치자체를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에 기대어 정치를 파악하고 있다. 이 열 단어는 그 분석 틀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정치, 문화, 역사를 엮어 문학으로 실현하려고 애쓴다.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문학적 기본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 단어들을 기초로 각 단락에서 자신을 포함한 당대 사람들이 겪은 개인 경험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그에 대한 진술을 엮어 공동 역사로 재구성해준다. 그가 1966년 마오 쩌뚱의 문화대혁명을 출발선으로 삼고, 이후 등소평을 거쳐 최근의 중국 사회를 아우르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4.

위화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은 하나의 문으로만 드나드는 사회로 더욱 견고하게 재편성되었다. 그 문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다. 5월35일(6월4일 천안문사태를 일컫는 말)은 그 경직된 현대중국을 상징하는 표기다. 그보다 앞서 문화대혁명시기(1966.5-1976.12)는 대체로 그의 글들이 시작되는 문학기점으로 보인다. 하여 작가의 입장에서 굳게 닫힌 천안문은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문이 되어버렸다. 개방적인 사회로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막아둔 세계다. 역설적으로 이런 그의 글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중국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바깥 사람들의 관음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매력이 곁들여져 있다. 그는 이 글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성질을 두루 갖추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초연한 서술과 절실한 삶이 책 속에서 걸어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이 열 개의 단어 속에서 호메로스와 맹자의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5.

이제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을 보자. 첫 단어는 인민, 마지막은 홀유(忽悠)다. 나는 이 열 단어들을 크게 이렇게 세 부류로 재분류해 봤다: 제1부류 <1.인민>, <2.영수>. 문화대혁명이후 중국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기틀을 보여준다. 제2부류 <3.독서>, <4.글쓰기>, <5.루쉰>.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저력으로서 글과 말의 함의다. 제3부류 <6.차이>, <7.혁명>, <8.풀뿌리>, <9.산채>, <10.홀유>. 문화대혁명과 경제대혁명을 거쳐오는 중국사회의 내면과 외형의 부조화를 지적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한 산채와 홀유라는 현상은 주목할 개념들이다. 이것들은 현대 중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중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된다.

한편 이 단어들 중에서 그가 은근히 강조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루쉰>이다. 그는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인물로 마오 쩌뚱이나 등소평을 선정하지 않았다. 중국개화기 인물인 루쉰을 전면에 세웠다. 위화 스스로 문학가로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루쉰을 이렇게 평가했다.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위화에게 루쉰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문학정치의 기본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루쉰을 공적으로 앞서나갔다.

다른 단어들도 한 가지 공통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 사회가 정치에 의존한 정치집단체제를 벗어나 경제에 의거한 정치집단체제로 이행되고 있음을 드러내려했다. (예:인생/살아간다는 것). 아이러니하게, 그의 진단에 따르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는 분열상황이나 삶의 격차를 감내해야했다. 이로써 정치사회의 표리부동이나 사회적 삶의 차이를 감수하는 사회체제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하는 일은 당연하다.


6.

여느 글도 마찬가지지만, 위화의 글을 읽는 데는 전제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소설이든, 에세이든)에서 자신이 체험한 중국 현대사를 되새김질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해석된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 겪은 일을 자기 방식으로 요리한 음식같은 것이다. 그가 자기 체험을 다룬다해도 그것은 사실을 전달하는데 활용하는 소재이면서 자기 가치 판단에 근거한 해석된 이야기다.


위화는 이 책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좀 특별하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중국을 이해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이다. 일종의 ‘개념사(槪念史)다. 아마도 그는 이 단어들이 과거로부터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 중국인들의 마음에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기술적인 능력인 셈이다. 그는 이 단어들로써 중국사회가 ‘가치개념이 흘러가는 역사’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위화가 기여한 바는 이렇다. 그는 중국을 통시적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공시적으로 읽어낼 틀을 제시했다. 이 개념들은 중국만의 특징적인 가치개념들에 불과하다해도 그것을 선택한 문학가의 글을 내가 읽는 이상 나도 그 개념들의 타당성을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떤 도전을 하며,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7.

그가 제시한 열 단어는 현대 중국사회의 아픈 현실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더 나은 세계로 이행될 때 반드시 수정되고 개정되어야 할 삶의 방식처럼 들린다. 그는 보편적인 세계가치를 열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여 나는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에 관해 내가 지향하는 보편가치를 대입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렇게 써보다.


1.인민=시민중심사회

2.영수=낮아지는 지도자

3.독서=상식과 보편윤리지침 공유

4.글쓰기=사상의 자유로운 실현

5.루쉰=역사의 중심을 유지하는 인물

6.차이=삶에 균형잡힌 질서

7.혁명=반성과 개혁

8.풀뿌리=올바른 부를 누리는 사람들

9.산채=공의와 정의의 공동체

10.홀유=표리일치의 말로 소통하는 삶


물론 이 단어들의 상관성 여부는 좀 더 면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오해일 수도 있다. 다만 이 개념들을 대조해 봄으로써 내가 머물러 살아가는 이 땅에서 현재 겪고 있는 사회와 정치의 중요한 개념들을 재고해 볼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되돌아보는 문학(과 신학)이 지향하는 인문학의 책임을 상기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8.

위화의 글을 읽다보면, 소설일 때와 수필일 때 구분없이 무거운 위트가 묵직하게 놓여있다. 가벼운 위트라도 꼭 비온 뒤에 거칠게 흐르는 개울물같은 느낌이다. 그의 글은 중국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도움이 되지만, 뜻밖에도 한국 현대사가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지나가는 비극들을 다시 살펴보는데도 유익해 보인다. 가볍게는 왜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짝퉁이 범람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산채와 홀유)


위화의 소설과 그 밖의 글을 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거시사로부터 같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인간 본연의 태도로 대하려는 미시사로의 수렴'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밖으로 향하려는 거창한 역사인식과 안으로 집약되는 미세한 인간인식을 교차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여 그가 현실참여문학가라고 해도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땅에서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이 기억해 두어야 할 시대책임을 ‘글’로써 상기시켜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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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조덕환(63세). 2016.11.14 본향으로 돌아간 사람.

밴드 들국화 기타리스트(1985-1987).

2011년 솔로 1집 The long way Home <수 만리 먼 길>발표.

2018. 10.11. 미발매곡들 중 2집 유작 <인생> 발표.(LP 발매)


<2집 수록곡>

1. 인생

2. Morning Rain

3. 새아침

4. Fire In The Rain

5. Goodbye Gloomy Sunday

6. I Don’t Wanna Sleep Here Alone Tonight

7. 봄


1.

지난 4년 전 나는 한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마침 그 기간에 또 다른 이의 장례식에도 방문해야 했던 터였습니다. 죽음으로 환송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죽음이 겹쳐지는 것은 우연일테지만, 죽음은 죽음에 이어지고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파란 하늘 아래서 한번쯤 다시 가졌습니다. 삶이 끝나가는 날이야 회색빛 같으리라 짐작하겠지만, 사실 그 날 하늘은 무척 푸르렀습니다.


2.

그 후 2년 뒤, 그의 추도일이 다가오는 즈음에 유가족들이 고인의 유작 앨범곡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음악과 더불어 평생 살았던 이가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기억이자 흔적들입니다. 앨범에는 타이틀 곡 <인생>에 이어 6곡이 수록되었습니다. 모두 7곡입니다. 나는 이 유작앨범이 무척 반가왔습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길에서조차 그는 <인생>을 희망가득한 哀歌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3.

타이틀 곡 <인생>. 이 곡은 이미 '본향'에 도착한 이가 아직 그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위한 '묵시적 기도'입니다. 이 타이틀 곡에 이어지는 여섯 노래들 모두 어쩌면 그가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죽음을 예고받으면 쏟아내고 싶었던 '노래하는 기도'였을지 모릅니다. 그가 살아서는 은닉해 두었던 기도문을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봉인해제시킨 고백이라고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4.

track1 <인생>. 피아노 선율이 옛스럽게 흐릅니다. 가사를 읊조리는 노래가 따라붙습니다. 그가 노래합니다.


"인생은 연기, 세월,바람, 순간,영원, 시간, 자연, 계절 속에

저물어가는 들녁 저녁 석양 바라보며

내 마음도 따라서 춤을 추는데

가을 잎의 노래 울려 퍼지며

내 마음도 따라 울리네

(피아노 간주)

인생은 연기, 세월,바람, 순간,영원, 시간, 자연, 계절 속에

흩어내리는 저 가을빗소리 들으며

내 마음도 따라서 춤을 추는데

가을잎의 노래 울려퍼지면

내 마음도 따라 울리네

욕망의 열차는 끝없이 끝없이

날 깨워 달려오는데

내 마음의 열차는 흔~들리면서 천천히 가려하네

(피아노 격정 1)

욕망의 열차는 끝없이 끝없이

날 깨워 오라하는데

내 마음의 열차는 흔~들리면서 천천히 가려하네

(피아노 격정 2)"


피아노 마지막 파열음 노래 끝.


5.

모든 곡을 듣고 나니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들을 스스로 녹음해 두었을 때, 그는 이 노래들이 제 발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이 노래들의 운명을 그가 알고 있었을까?' 그는 기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쉽게도 그 간절한 기대가 이뤄지기 전에 그는 삶의 행진을 마감해야했습니다.


노래 <인생>을 몇 번째 듣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낮고, 단조롭고, 거묵합니다. 나는 이 노래에서 그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는 생의 길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또박또박 봅니다. 말로 드러내지 못해도 어떤 위기감같습니다. 허나 그 목소리는 꾸며지지 않은 아이의 마음 같이 단순합니다. 따박따박 말하지만 마음은 애절합니다. 간절합니다. 말하지 않고서는 안되겠다는 여린 희망이 짙은 사투리에 실려 있습니다. 명쾌하게 떨어지는 도시 발음과는 처음부터 동떨어졌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길이어도 생의 리듬은 조화롭게, 견실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선명한 소리 속에서 이 노래들은 희망을 소생시키고 있습니다.


6.

일곱 개의 노래들은 그가 말없이 수용하며 살았을 삶을 단순히 구조화하여 보여주는 듯 합니다. 피아노 선율에 실린 첫 곡 <인생>을 지나 기타와 하모니카를 거쳐 마지막 곡 <봄>에 다라릅니다. 역시 피아노 소리에 실렸습니다. 수미쌍관처럼 두 곡은 필연적으로 조우합니다. 기타소리와 하모니카가 뒤섞인 길 위에서 다시 피아노 선율이 정갈하게 흐르는 마지막 곡으로 넘어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피아노는 격정적으로 등장했다가 다시 물이 흘러 내려가듯 조용히 페이드 아웃으로 사라집니다. 삶의 시작과 끝을 떠올립니다. 이 두 곡을 들으면 그가 '영원을 향해 가는 시공간'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침내 '푸르른 생명의 숨소리 온 세상에' 가득찬 그 길에 다다릅니다. 마치 자기 생이 그렇게 마칠 것을 예견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으로써 그는 다시 '새로운 인생'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하여 조심스럽게 나는 그가 그의 노래를 통해 죽음 앞에서 '죽음너머' 삶을 향한 분투흔적을 남겨두려고 했다고 받아들입니다. 이 두 곡 사이에 다섯 곡이 ‘길의 정점’처럼 자리합니다. 길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들입니다. '본향을 향하는 길', '내리는 비', '쏟아지는 햇살', '화사한 아침', '새로운 일요일'을 붙잡고 있습니다. 앨범<인생>은 이렇게 절망의 옷을 입은 채로 희망의 길을 걸어 궁극적으로 <봄>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가 노래하듯 겨울같은 <인생>이라도 어김없이 <봄>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빌리자면 <새로운 일요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7.

그 장례식을 마친 날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 '새로운 일요일, 축복합니다'. 그가 남긴 이 노래들은 그가 수만리 먼 길을 노래와 함께 걸어온 흔적이자, 나그네로서 자신에 대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이들을 위해 들려주고 남겨주고 싶은 유언같은 축복의 노래였습니다."


다시 몇 년이 흘렀습니다. '새로운 일요일'을 앞둔 오늘 나는 이렇게 씁니다.


"나는 그의 노래 가사처럼 '흔들리는 삶'에 늘 직면합니다. 열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그 열차의 이름이 <무한욕망>이라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흔들리는 길에서 '멈추지 않는 열차'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노래를 통해 나에게 남겨 준 유산이 있습니다. 이 무도한 열차에 저항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나는 그가 저항하는 방식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흔들리는 길에서 열차로 올라타고 싶은 유혹에 대해 노래로써 저항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그의 은닉된 노래가 기도처럼 세상에 나와 나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나는 지금, 다시 그가 부른 노래를 통해 그 저항지혜를 경각합니다."



오늘, 짙은 전염질병의 시대에 나는 나의 <인생>에서 다시 <봄>같은 <새로운 일요일>을 만끽할 채비를 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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