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L은 이야기를 마치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도서관에 좀 들러야겠어"

K는 아직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아니 도서관에 가는데 왜가 어딨어? 당연히 책 좀 보고, 대출하려는 거지...”

K는 머쓱해졌다. 식어버린 커피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했다. 이내 마셔버렸다. 약간의 원두가루가 잔 바닥에 남아있다. 끊긴 말을 다시 이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다 주저앉았다. 몸을 한번 뒤로 젖히고 다시 의자 깊숙이 밀어넣었다. 잠시 뒤, 맞춰두었던 알람이 정확하게 울린다. 알람을 기다렸다는 듯, K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도서관 속을 좀 걸어보자.’'

사람들은 약속 시간이 조금 남거나 또는 미적한 시간을 얼른 끝내버리고 싶을 때, 또는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한 방법으로 도서관을 선택하곤했다. 다행히 자주 실패한 결단은 아니었다.


2.

까페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는 아직 군데군데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다. 길은 여러 곳으로 갈라져있다. 까페 바깥쪽 문으로 나서서 조금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지나는 것이 가장 좋다. 좋은 길은 몸에 맞는다. L은 이미 이 길로 지나갔을 것이다. 일부러 K는 실내 문을 통해 미끄러지듯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거기서 광장으로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리고는 계단을 내려서고 바로 왼쪽으로 구부린다. 이내 휠체어 길로 몸을 돌린다. 사람 둘이 서면 꽉 찰 듯한 제한된 길이다. 오고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길을 가끔 온 몸이 건장한 K가 스스럼없이 선택한다는 것은 조금 멋쩍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량으로 받아줄만하다. 사실 이 길은 '도서관'에 가장 멀리 둘러가는 길이다. 동시에 가장 어울리고 멋진 길이다. K,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서 은근히 누리고 있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적당하게 불어준다. 길 한쪽은 거대한 벽이 견고하고 다른 한쪽은 환히 열려있다. K는 이 길을 ‘사색로(思索路), 책방으로 가는 길’이라 스스로 불렀다. 도서관은 거기에 이어진 길부터 시작된다.


3.

도서관은 이 전공분야에서는 제법 크고 시설 좋기로 이름이 나있다. 문을 들어서면 다른 것들에 비해 조금 넉넉해 보이는 현대식 전산 시설들이 좌우로 보좌하듯 진열되어 있다. 그 자리는 빈틈없이 채워져있다. 그 바로 앞에 출입구가 있다. 그 앞에서 머뭇거림없이 자신의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리찍듯 올려두면 잠시 후 입장을 허락한다는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누구 눈치 볼 필요없다. 책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문을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정보실이 있다. 다시 층을 하나 내려서면 참고서적들의 방이다. 바닥층으로 내려서면 이제 책들의 집 서가다. K는 이 도서관을 이유없이 누비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어떤 서가에 한참 서서 눈에 띄는 책을 마냥 읽는다. 다시 책을 제자리에 정성껏 세워둔다. K는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즐기기 위해서 도서관을 걸었다.


4.

이 서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오래전부터, K는 따뜻한 공기에 떠밀리고 이끌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바람같이 책들 사이를 다시 한바퀴 돈다. 일종의 책들의 안녕을 묻는 의식이다. 이런 인사는 늘 그렇듯 기분이 좋다. 도서관의 책들은 언제나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열 권 중 아홉 권 정도는 하루종일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할 것이다. 도서관은 흩어진 책들을 정성껏 모아서 돌봄을 받는 책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이곳에 모여든 이후, 사실은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터인지 K는 일부러 자신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서가를 거르지 않는다. 그렇게 서가를 거치고, 책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다닌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한 냄새와 약간 어두운 듯한 조명아래 책들이 고요히 놓여있다. 책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그렇게 내일도 서가 밑으로 한번도 내려오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서관은 늘 그렇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책들에 비해 드나드는 사람들이 훨씬 적다. 어떤 날은 드나드는 사람이 책장 하나에 가끔씩 거꾸로 잘못 꽂혀있는 책의 수보다도 적을 때가 있다. 결국 한 번도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이 지하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때문인지, K는 자기가 필요한 책 한권만 달랑 빼내서 돌아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지적충전소'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즐거운 산책이 가능한 곳, '지적산책로'라고 하는 게 적절했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길 옆으로 나무와 풀과 새와 꽃들이 있듯이, 이 눅눅한 서가에는 숱한 책들이 있다. 마치 나무와 풀과 벤치와 그늘처럼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K는 도서관에서 책을 만난다. 책과 이야기하고, 책의 안녕을 살피고, 책에게 바깥 공기를 실어다준다. 책이 말을 걸어오면 들어주고, 멈춰준다. 책이 말해주고 싶은 삶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본다. 어느 사이 오솔길을 산책하듯 책사이를 걷는다. 지적산책로, 지적휴게소다.


5.

도서관은 책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 화려한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집이자, 별장같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들은 그를 찾아와 주는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이유를 확인한다. 그들은 말없이 그를 찾아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서 '책'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책은 알고 있다. 누군가 그를 꺼내들었을 때, 비로소 숨을 쉬고, 살아난다. 책은 신비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가 만나는 도서관들은 어느 덧 많은 책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K는 묘지같은 서가 사이를 한참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책덕분인지 숨이 좀 열리는 듯하다. 잠시 후 다시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광장이 환하다. 잠시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어딘가를 급히 다녀오는 L이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어디 갔다와?"

"응 책 사러"

"도서관에 간다며? 빌리지?"

"책은 소장되어 있다고 나오는데 서가에 가보니 책이 없어.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구. 시간이 급해서 한권 샀어."


문득, 자리를 이탈한 책 한권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삶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면 천만 다행이지 않겠는가? 아마도 어딘가에 곱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곧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 광장의 반대편으로 해가 스르르 잠으로 떨어지듯 넘어가고 있다. 바람이 차다.


도서관, 그저 가볍게 책방이라고 하자. 그 곳은 잠시 여유가 있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이유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그런 중압감은 책에도 해롭다. 내가 저 산길을 돌아 산책하며 느끼는 그 즐거움으로 충분하다. 도서관, 책방은 그저 '아낌없이 쉬어가는 책'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책방에는 오늘도 숱한 책들이 들어서고, 아쉽게도 그만큼 책세상을 떠난다. 그 떠나는 책들 중에 부디 달랑 한권이라도 마음에 새겨두자. 도서관, 책방의 책은 그저 책이 아니다. 글과 그림으로 호흡하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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