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2012)


1.

언젠가, 중국문학평론가들이 위화(余华, Yú Huá)의 소설을 다룬 소논문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다른 시점에 써놓은 글들인데도 글감으로 다루는 그의 소설들은 거의 엇비슷하다. 영화로도, 책으로도 소개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솔직히, 그는 우리 사회에 이례적이다. 이질적인 이념에 점철된 자기역사를 다루면서도 우리에게는 소설문학으로 꽤 잘 알려진 중국작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소설도 인상적이지만, 가끔 그의 에세이를 다시 읽는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원제:十個詞彙中的中國) (문학동네, 2012)도 그 중 한 책이다.

2.

이 책은 그가 체험한 역사를 토대로 한다. 동시에 그의 사상을 은근히 드러내는 사회에

세이다. 소설가로 알려진 것에 견주면, 에세이는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사실, 나는 중국 작가 위화를 잘 알지 못한다. 그가 1996년에 발표한 『허삼관 매혈기』(번역:푸른숲, 2007/영화 2015개봉)가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책이다. 당시 나는 ‘매혈기(賣血記)’라는 말을 한참 생각했다. ‘피를 판다’는 것이 단지 공익에 기여하는 ‘헌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슬픈 웃음으로 범벅되어 비열하다시피한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이런 저런 이유로 중국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다행히 그 여행에서 나는 중국 현대사를 거쳐 온 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몇몇 이야기들은 위화의 글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3.

그의 책『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번역본 주제목이다. 이것만 보자면 이 문장은 인문학적 출판문학이 상상해낸 결실이다. 위화가 본래 정한 제목은 부제로 달려있다. :『10개의 단어로 본 중국』. 출판사입장에서 보자면 번역본의 승리다. 아쉽게도 번역본 제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개념은 아니다. 다만 독자에게는 무거운 위화의 생각이 이런 제목으로 인해 좀 더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원제목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제목만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질문이 들었다. ‘과연 중국을 설명하는 10개의 단어들은 어떤 것들인가?’, ‘이 단어들이 거대한 중국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까?’ 완전하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금 기우였다. 책을 읽고나니 이 단어들이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좋은 지침이 될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솔직히, 여전히 중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다. 그래도 위화의 글을 통해 어려운 퍼즐 중 몇 개는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숫자 하나와 열 단어를 보자.:5월35일.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얼핏 읽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단어들에게서 그가 지향하는 의도를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정치적인 진술이 아니라 정치문학적 진술이다. 그는 정치자체를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학에 기대어 정치를 파악하고 있다. 이 열 단어는 그 분석 틀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정치, 문화, 역사를 엮어 문학으로 실현하려고 애쓴다. 중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문학적 기본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 단어들을 기초로 각 단락에서 자신을 포함한 당대 사람들이 겪은 개인 경험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그에 대한 진술을 엮어 공동 역사로 재구성해준다. 그가 1966년 마오 쩌뚱의 문화대혁명을 출발선으로 삼고, 이후 등소평을 거쳐 최근의 중국 사회를 아우르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4.

위화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은 하나의 문으로만 드나드는 사회로 더욱 견고하게 재편성되었다. 그 문은 갈수록 더욱 공고해졌다. 5월35일(6월4일 천안문사태를 일컫는 말)은 그 경직된 현대중국을 상징하는 표기다. 그보다 앞서 문화대혁명시기(1966.5-1976.12)는 대체로 그의 글들이 시작되는 문학기점으로 보인다. 하여 작가의 입장에서 굳게 닫힌 천안문은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문이 되어버렸다. 개방적인 사회로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막아둔 세계다. 역설적으로 이런 그의 글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중국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바깥 사람들의 관음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매력이 곁들여져 있다. 그는 이 글의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성질을 두루 갖추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초연한 서술과 절실한 삶이 책 속에서 걸어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이 열 개의 단어 속에서 호메로스와 맹자의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란다.”


5.

이제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을 보자. 첫 단어는 인민, 마지막은 홀유(忽悠)다. 나는 이 열 단어들을 크게 이렇게 세 부류로 재분류해 봤다: 제1부류 <1.인민>, <2.영수>. 문화대혁명이후 중국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기틀을 보여준다. 제2부류 <3.독서>, <4.글쓰기>, <5.루쉰>.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저력으로서 글과 말의 함의다. 제3부류 <6.차이>, <7.혁명>, <8.풀뿌리>, <9.산채>, <10.홀유>. 문화대혁명과 경제대혁명을 거쳐오는 중국사회의 내면과 외형의 부조화를 지적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한 산채와 홀유라는 현상은 주목할 개념들이다. 이것들은 현대 중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중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된다.

한편 이 단어들 중에서 그가 은근히 강조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루쉰>이다. 그는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핵심인물로 마오 쩌뚱이나 등소평을 선정하지 않았다. 중국개화기 인물인 루쉰을 전면에 세웠다. 위화 스스로 문학가로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루쉰을 이렇게 평가했다.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


위화에게 루쉰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문학정치의 기본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루쉰을 공적으로 앞서나갔다.

다른 단어들도 한 가지 공통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 사회가 정치에 의존한 정치집단체제를 벗어나 경제에 의거한 정치집단체제로 이행되고 있음을 드러내려했다. (예:인생/살아간다는 것). 아이러니하게, 그의 진단에 따르면, 경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는 분열상황이나 삶의 격차를 감내해야했다. 이로써 정치사회의 표리부동이나 사회적 삶의 차이를 감수하는 사회체제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하는 일은 당연하다.


6.

여느 글도 마찬가지지만, 위화의 글을 읽는 데는 전제해 둘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글(소설이든, 에세이든)에서 자신이 체험한 중국 현대사를 되새김질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해석된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 겪은 일을 자기 방식으로 요리한 음식같은 것이다. 그가 자기 체험을 다룬다해도 그것은 사실을 전달하는데 활용하는 소재이면서 자기 가치 판단에 근거한 해석된 이야기다.


위화는 이 책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좀 특별하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중국을 이해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이다. 일종의 ‘개념사(槪念史)다. 아마도 그는 이 단어들이 과거로부터 현재, 앞으로 미래까지 중국인들의 마음에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감지했던 모양이다. 중국사회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자 기술적인 능력인 셈이다. 그는 이 단어들로써 중국사회가 ‘가치개념이 흘러가는 역사’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위화가 기여한 바는 이렇다. 그는 중국을 통시적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공시적으로 읽어낼 틀을 제시했다. 이 개념들은 중국만의 특징적인 가치개념들에 불과하다해도 그것을 선택한 문학가의 글을 내가 읽는 이상 나도 그 개념들의 타당성을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떤 도전을 하며,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7.

그가 제시한 열 단어는 현대 중국사회의 아픈 현실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더 나은 세계로 이행될 때 반드시 수정되고 개정되어야 할 삶의 방식처럼 들린다. 그는 보편적인 세계가치를 열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여 나는 그가 제시한 열 단어들에 관해 내가 지향하는 보편가치를 대입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렇게 써보다.


1.인민=시민중심사회

2.영수=낮아지는 지도자

3.독서=상식과 보편윤리지침 공유

4.글쓰기=사상의 자유로운 실현

5.루쉰=역사의 중심을 유지하는 인물

6.차이=삶에 균형잡힌 질서

7.혁명=반성과 개혁

8.풀뿌리=올바른 부를 누리는 사람들

9.산채=공의와 정의의 공동체

10.홀유=표리일치의 말로 소통하는 삶


물론 이 단어들의 상관성 여부는 좀 더 면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오해일 수도 있다. 다만 이 개념들을 대조해 봄으로써 내가 머물러 살아가는 이 땅에서 현재 겪고 있는 사회와 정치의 중요한 개념들을 재고해 볼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되돌아보는 문학(과 신학)이 지향하는 인문학의 책임을 상기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8.

위화의 글을 읽다보면, 소설일 때와 수필일 때 구분없이 무거운 위트가 묵직하게 놓여있다. 가벼운 위트라도 꼭 비온 뒤에 거칠게 흐르는 개울물같은 느낌이다. 그의 글은 중국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도움이 되지만, 뜻밖에도 한국 현대사가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지나가는 비극들을 다시 살펴보는데도 유익해 보인다. 가볍게는 왜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짝퉁이 범람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산채와 홀유)


위화의 소설과 그 밖의 글을 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거시사로부터 같은 공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인간 본연의 태도로 대하려는 미시사로의 수렴'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밖으로 향하려는 거창한 역사인식과 안으로 집약되는 미세한 인간인식을 교차시키려고 노력한다. 하여 그가 현실참여문학가라고 해도 타당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 땅에서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이 기억해 두어야 할 시대책임을 ‘글’로써 상기시켜주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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