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독교의 경전 중 한 부분인 신약성경 고린도전서13장은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널리 알려져 상식같이 여겨지는 그 구절 중 한 부분은 이렇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첫편지 제13장 4,11,13절-

이 노래는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 개념보다 행동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사랑한다’는 동사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사랑에 대해 관념(의식)과 행동(실증)사이를 무한 방황하는 나를 한층 곤혹스럽게 만든다.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완전하고 익숙한 끝에 다다르긴 한참 멀었다. '사랑'(*사실, 1세기 헬라어 표현에서 agape나 eros, phileo 등은 의미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은 아직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실, 나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art)이라고 말하는 E.프롬의 견해에 동의한 지 오래다. 그가 사랑을 '기술'로서 정의할 때는 단지 감정(feeling)을 경시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technic)과 감성의 조화였다. 프롬보다 훨씬 앞선 1세기 사도바울이 말한 바도 그것이다. 그의 노래를 곱씹어 읽어보면, '사랑(agape)'을 '기술'과 '감정'이 구분되지 않는 복합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완성해주는 긴밀한 연결고리라는 점을 경각시킨 것이다.


2.나는 여러 일들이 기술과 감성의 조화로 완성된다는 것을 배운다. 내가 일주일에 하루 담당하는 로스팅도 그렇다. 내가 다루는 로스터기는 은근히 신경써야 할 상황이 많다. 그러고보니 이 일은 조금 기술이 필요하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지극히 감성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실, 지난 몇 년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씩 인지한 일이다. 물론, 로스팅은 기술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숙련되고 그 시간에 비례하여 좀 더 수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로스팅은 '감성'영역으로 진입한다. 단순히 시간과 열과 공기를 한 웅큼 커피빈과 절묘하게 만나게 하고, 적절한 시간에 배출해내야 하는 기계적 기술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몸이 기계를 집중하면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은 고작 15분내외다. 기술도 필요없을 것 같다. 그저 커피콩이 익기를 잘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온도를 조절하고, 기압도 확인하며, 콩이 드럼 안에서 변화해가는 과정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조금 늦지 않도록, 너무 빠르지 않도록, 겉은 잘 익은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풋내가 아직 남아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은 일련에 로스팅되는 콩과 내가 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술이 압도해야 하지만, 콩을 대하는 나의 감성적인 마음이 오히려 적절한 로스팅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3.

내가 사는 이 땅은 갈수록 기술이 감성을 압도한다. 비정서가 주도하는 세계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 아니 이성으로 감성을 제거하는데 익숙하다. 기술을 옹호하고, 감성을 배척한다. 기술에 함몰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도 모르게 감성 제거 기술자들이 될 여지는 크다. 세계는 생존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성도 진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잇대어 있는 슬픔과 아픔을 간파하고 공유하는 깊은 감성이 이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허튼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감지한다. 그것은 능숙해져야 할 기술이 아니며, 단지 개인적 감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공동체적 기술이면서 세계의 감성이기에 나를 넘어서고, 가족을 벗어나고, 사회, 국가를 넘어서 결국 그가 누구든지 '한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한다는 말은 늘 조심스럽다. 사랑의 기술'만 편만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가 ‘타인을 위한 삶’에 기초한다고 '나는 믿는다(Credo!)'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Art)’이다. 기술과 더불어 감성이 조화로운 삶이라는 것을 내가 잊어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미래는 개인과 개인이 단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공동체성으로서만 유지될 것이다. ‘내’가 소중하듯, ‘너’도 중요하다. 그 ‘너’가 누구이든 말이다.


4.내친김에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이야기에 하나 덧붙여보자. 바울이 사랑을 기술(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말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부를 추구하고 향락에 길들여진 고린도지역 신앙인들이었다. 오죽하면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동사가 생겼을까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사랑하다’를 제시한다. 하여 ‘사랑하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기술(art) ’이 되길 바랬다. 바울에 따르면, '사랑'은 기술만은 아니다. 또한 개인 감성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기술이며 감성이다. 고린도 사회에 건강하게 확립하고 유익을 주는 삶이다. 공동체에서 사랑은 타인과 더불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언제나 모든 것에 상대를 향한/위한 삶을 지치지 않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그 사랑은 지금부터 삶의 끝이 올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마침내 부분적인 것들을 완전하게 바라보도록 유일하게 남아있는 힘이다. 바울이 노래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차별, ‘그렇지 않은 듯’ 서로를 분파로 갈라버린 고린도 사회 속 교회공동체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차별하는(혐오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힘이다. 선량한 자신이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은총이고, 위로부터 오는 공동체 생존의 ‘방식, 길’(ὁδός’,호도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어느새 5월 끝날이다. 오늘따라 초여름날씨다. 바람도 습하다. 5월이 마지못해 길을 비

켜준다. 요즘은 날씨들이 얽히고설켜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나는 계절이 혼란스런 문턱에 ‘서 있다.’ 한 때 법정(法頂)은 시대의 아픔을『서 있는 사람』(1975, 샘터사/2003 재출간)으로 상징화했다. 두 다리로 삶을 버텨야만 하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앉을 시간이 올 때까지 그들은 끝내 서 있어야 한다. 걸어야 삶이 되는 세계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숨 쉴 여유마저 없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이 시대 5월은 예측불가한 계절이 되어버렸다. 숨 가쁜 걸음을 걷고, 거칠게 다시 내뿜는 삶이 가로막힌 시대라해도 두 발로 힘차게 걷는 세계를 마저 잃을 수는 없다.


2.

내가 머문 서재는 고요하다. 나지막한 산 아래로 집 몇 채가 들어앉았을 뿐이다. 여린 바

람마저 웅성대듯 들린다. 맑은 날이 아니어서 햇살마저 사라진 날이면 ‘몇 시인지?’는 무의미하다. 고요한 공간은 시간마저 감춰버린다.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다. 소리를 삼켜 마음에 담아 두고 즐기는 또 다른 사색이다. 오후가 되니 서재엔 더욱 정적이 흐른다. 내려 둔 커피가 조금 식었다. 괜한 마음에 한 모금 들이킨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근처 푸른 하늘 아래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독립서점을 찾았다. 느슨하게 둘러 꽂힌 책들이 오히려 여유로워서 좋다. 낮은 한옥 지붕에 아담한 크기의 집 세 채가 ㄷ자로 이어져있다. 기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서가 사이를 느긋하게 산책한다. 내 책이 아니라 다른 이가 그렇게 꽂아둔 이유를 생각하며 책을 꺼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의 배열은 그의 관심사다. 오늘 나의 픽북은 여러 권이다. 그 중 첫 번째 책. 바바라 스톡, 『반고흐와 나』, (미메시스, 2019)다. 두 번째 책. 다비드 르 브르동,『느리게 걷는 즐거움』,(북라이프, 2014/2020).



3.

만화가 스톡의 책은 흥미롭다. 그래픽을 따라 반 고흐와 자신의 삶을 교차시킨다. 알선 책 『반고흐』에 대한 뒷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만화(그래픽)라는 점이 오히려 가독성을 쪼금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제와 전개는 역동적이다. 한편 브르동의 글은 오래 전『걷기예찬』(김화영 역, 현대문학, 2002)으로 처음 접했다. 그 때는 지금처럼 길을 걷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기 힘든 삶이었으니 그 때 그 길은 추상에 불과했다. 그 후 내 삶은 그 때와는 사뭇 다르다. 서점에서 다시 그의 글을 만나 가볍게 펼쳐 읽으니 기억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 다시 읽었다. 레몬차가 다 식어버렸다. 길을 걷는 즐거움을 진부할 정도로 극찬하는 브르동의 견해에 나는 적극 동의한다.


4.

석양이 멋진 서점에서 우연히 선택한 책 두 권이 묘하게 어울린다. 시대를 넘어 두 예술가들이 고뇌하는 삶과 자기 앞에 놓여진 길을 걷는 사색이 그렇다. 해가 저물어버렸다. 서점엔 주인장 외에 아무도 없다. 늘 생각하지만, 이 외진 서점까지 이 시간에 찾아오기란 쉽지 않다. 서점을 나왔다. 다시 나의 서재로 돌아왔다. 브르동의 책을 다시 펼친다. 언젠가 방영되었던 길을 걷는 삶을 소개하는 다큐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책과 다큐는 사실 같은 말을 해준 셈이다. 길을 걷는 일은 배움이자, 사색이며, 삶을 성찰하는 일이라는 것. 과장이라해도 동감한다. ‘길’을 걷는 삶에 서술한 그 다큐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또 다른 우주, 길>.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렇다. 길은 마치 우주 같다. 길은 길에 이어지고, 길은 길로 확장된다. 끝없다. ‘길을 걷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끝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여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언은 아니다. 은 무한하다. 모든 길은 뒤섞여 이어진다. ‘길의 끝’은 순례자가 멈추는 그 자리다. 길은 그가 멈추는 곳에서 끝나고, 그가 계속 걸을 때 다시 열린다. 사람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 길이 걷는 이에게 열어주는 것이다. (*나는 그 다큐제목을 이렇게 읽기도 한다. ‘길도 우주(宇宙)이다’. 사실 이 제목의 역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주는 길이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듯이 ‘길’은 도구나 수단을 상징하지 않는다. ‘길’은 사유하는 대상 그 자체다. 길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5.

'걷는다‘는 ‘길’에 적합한 행동이다. 사이사이 달릴 수도 있고, 기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테지만, ‘걷는다’보다 적확한 상징은 없다. ‘걷는다’는 그 길을 가장 길답게 만드는 숭고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말도, 손짓도, 행복한 표정도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길에서는 ‘걷는다’는 것만 유의미하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그 길을 길답게 만든다.

길은 걷는 이들로 인해 빛난다. 그들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길의 가치를 높인다. 하여 오르고 내리며, 끝없는 평지를 마냥 걷고, 내리는 비와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길을 이어나가는 이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침내 그들이 거친 숨을 내뿜고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이들이 환호한다. 거기가 끝이었기에 완전히 자기 몸을 바닥에 눕히고 성탑 끝에 이어진 하늘을 보는 이들을 나도 응시한다. 그렇게 걷는 이들이 길을 멈출 때 ‘걷기’는 끝난다. 그들이 걸음으로써 길은 생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6.

‘걷는 이’들은 위대하다. 사실 그렇게 걷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걷는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홀로 걷는다.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시작은 혼자였으되 어느새 서로서로 도반(道伴)이 된다. 물론, 그렇게 길을 걷다 어느새 그런 사람들끼리 한 곳에 머무르기도 한다. 비록 어제까진 서로 몰랐으나 오늘 이 자리에선 오랜 친구 같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아니 늦은 오후부터 이른 아침까지 그들은 ‘길을 걷는 동지’다. 물론 무례하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길을 걸음으로써 길 위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라는 동지의식이 있다. 마침내 그들은 순례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공동체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은 마침내 알게 된다. 정작 위대한 것은 순례자가 아니라 ‘길’ 자체라는 사실을.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마지막이 오면 결국 피곤한 자기 몸을 홀로 지탱해야 한다. 그래서 그 걸음은 외롭다. 사색과 질문 가득한 얼굴로 말을 아낀 채 걷기만 해야 하는 순간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길을 걷는 이들을 ‘고독한 순례자’라 부를 수밖에 없다.


7.

어느 길이든, 길은 늘 새롭다. 걷는 이들 너머로 길이 길로 이어져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자기 배낭을 메고 자기가 정한 길을 자기 발로 ‘걷고 있다’해도 누구도 길 앞과 뒤를 끝까지 볼 수 없다. 그저 한 발 앞이 전부다. 걸어온 길을 추억할 수 있다해서 나아갈 길을 완전히 연상할 수 없다. 지난 번 걸었던 길이라해서 오늘 그 길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생각해보면 길을 걷는 이들은 길이 자기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여 그들은 ‘사람이 길을 걷는다’가 ‘길이 사람을 걷게 한다’로 바뀔 때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솔직히, ‘길을 걷는다’는 말이 습관처럼 굳어있다. ‘내가 길을 걷는다’고 말하기가 쉽다. 길은 어떤 ‘대상’일 수 있으나 길이 ‘주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길이 나를 걷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발을 땅에 내딛어 놓여진 길을 오랫동안 걷는 이들은 안다. 최후 순간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결국 고백한다. ‘길이 나를 걷게 했다’고. 진정한 순례자들은 안다. 그 ‘길’이 자신을 초청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결코 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여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이 그 초대에 순응한 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길이 거기에서 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초청에 응한 한 사람이다.’ 하여 비로소 나는 ‘걸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이다.


<제주 사려니길, 5월로 들어서기 직전 어느 날 걷다>


8.

다시 말하지만, 은 무한하다. 본래 길은 끝이 없다. 인간이 삶이 끝나도 길은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 뫼비우스처럼 길은 처음과 끝이 이어지고, 끝이 처음에 잇대어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만 설명된다. 길 끝은 순례자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그가 멈추면 길은 끝나는 것이고, 그가 가면 길은 계속 열려있다. 길은 걷는 이에게 끝없이 자신을 열어준다. 하여 ‘길이 우주다’라는 명제는 생의 근원을 사색하게 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길을 걷는’ 것은 ‘철학하는 행위.’다. 근원을 배우고자 온 몸으로 기투하고, 희구하는 행위이다. 만약 그가 이 근원을 ‘신’에게서 찾아내려고 한다면 ‘걷는다’는 ‘신학하는 행위’다. 하여 ‘길의 초대에 응대한 이들에게’ 질문은 필연적이다: ‘길, 너는 무엇인가?’ 화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걷는다’는 그 길이 무엇인지를 체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걷는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9.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길을 걷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길을 걷는 일은 자신만을 위한 삶은 아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언어 중에 <할라크 hālakh>라는 동사가 있다. ‘걷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이 언어의 여느 단어들이 그러하듯 이 말도 그 의미범주(semantic range)가 생각보다 넓다. ‘할라크’는 ‘공적생활을 만들어내다(public life)’는 의미에 닿는다. 홀로 길을 걷고, 함께 걸음으로써 마침내 그 걸음은 누구나 마음에 새겨둘만한 공동의 삶을 잉태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길을 걷는 이들은 대단하다. 길 자체는 더욱 위대하다. 하여 길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선물을 건네준다. ‘겸손’이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자부심 위에 길이 자신을 걷게 해 준 것에 대해 기꺼이 ‘무릎 꿇는다.’ 어느 길이든 그 의미를 감추지 못한다. 길을 걷는 이들은 ‘겸손하고’, 자기 너머 위대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연히 무릎 꿇을 수 있다.


10.

길을 걸은 이들은 마침내 기억한다. ‘길이 말해 준 것’과 ‘길이 스스로 보여준 세계를.’ 문득 어느 날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한 것이 떠오른다. ‘길은 나다’(신약성경 요14:6). 나는 어느 날 그 말에 이렇게 답했었다. ‘나는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길을 걷듯이 글도 읽는다. 책읽기의 끝은 길로 나서는 순례이다.


길을 걸은 이들은 늘 자신에게 묻는다: 나를 걷게 한 그 길은 누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올해 들어 식이요법을 해야만 했던 나는 사실, 단식이나 절제, 급한 다이어트는 커녕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잘 먹고 지냈다. 물론 하루 세 번, 상을 차리고 치우고 다시 차리고 치우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음식재료를 구하고 다듬고 조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정도다. 재밌는 것은 처음에는 치료 목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만든 음식 자체가 맘에 든다.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따로 있다. 지금까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음식관련 책들, 특히 고혈압과 당뇨치료를 위한 식이요법 책이나 자료가 엄청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음식 종류가 매체를 통해 쏟아진다. 나 역시도 이제는 스쳐지나가던 내용들을 눈여겨 봐두기도 하고, 필요한 것들은 메모도 해 둔다. 뭐라도 놓치지 말고 ‘내 몸’에 적합한 음식을 적절하게 제공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 정말, 나에 비하면 다른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노력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알았다. 치료든 건강을 위해서든 음식에 지대한 관심을 둔 사람들은 하루하루 그 메뉴 정하기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괜찮으면 음식 가리지 않고 마음껏 먹고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쉼 없이 든다. 그 뿐만이 아니다. 건강이든, 그저 맛이든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도 음식은 대체로 한 끼 먹고 나면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건강 음식 프로그램이 여전히 생존하는 것 같다. 아무라 맛있어도 하루 세 끼, 또는 매일 꾸준히 먹기가 어디 쉬운가. 생존식은 그래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2.

여러 음식을 만들어 먹는 중에 내가 그나마 손쉽게, 영양도 챙기면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있다. 연두부야채죽이다. 이름만 들어도 싱겁기 짝이 없는 고혈압과 당뇨식을 위한 저염식 메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적절하게 간이 배이고, 무엇보다 연두부가 곁들여져 식감이 좋다.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적어도 내 입맛에는.


나는 이 음식을 이렇게 준비했다. 우선 말 그대로 죽은 죽이다.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몸에 좋다. 포만감을 너무 기대하지 않는다면 가볍게, 그러나 알차게 먹을 수 있다. 기준은 2인분정도로 하고 이런 재료를 준비하면 된다. 가급적 야채는 풍성하게 넣는다.


재료: 애호박 보통 크기 1/2, 당근 어른 손 크기 1/2, 표고버섯 3개, 송이버섯 1, 알배추 속 어린 부분 원하는 대로. 밥은 주로 잡곡밥이 좋다. 물론 치료가 아니라면 백미밥도 나쁘지 않다. 맛은 백미가 월등하다. 두 공기 정도면 충분하다. 연두부는 작은 것 1개를 준비한다. 그 밖에 들기름, 참기름, 들깨, 소금 약간(최대한 소금을 줄인다. 야채들은 고유한 맛이 있다. 그것들을 조화시키기만 해도 충분히 맛이 든다.


3. 재료를 준비한 후, 이제 직접 만든다. 

(1)먼저 야채들을 최대한 작게 썬다. 식감이 느껴질 정도면 충분하다.

(2)적절한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센 불에서 준비한 야채들을 볶는다.

(3)기름 맛이 배일 정도가 되면, 물 1L 정도를 붓는다. 야채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인다.

(처음에 물은 조금 많이 넣어도 좋다.)

(4)당근/호박이 야들야들해지면, 밥을 넣는다. 눋지 않도록 지켜보면서 저어준다.

(5)밥이 끓으면 연두부를 몇 번 나누어 넣고 저어준다.

(6)끓어오르면 불을 줄인 상태에서 계속 저어준다. 밥이 최대한 풀어져야 좋다. 야채도 딱딱한 상태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저으면서 끓인다. 물이 너무 빨리 쫄게 되면 물을 조금 붓는다.

(7)거의 끓었으면 참기름을 넣고 약불에 좀 더 둔다.

(8)다 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릇에 담고 깨를 조금 넣는다.

처음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단순한 과정이다. 이런 조리법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음식이 최고라는 건 언제나 확인할 수 있다. 달고, 부드러우며, 아삭아삭한 맛이 이 죽이다.


4.

나는 이 음식을 나처럼 저염식을 해야 했던 사람에게 한 그릇 배달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염식에 관심을 갖고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주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하다. 따뜻한 상태로 얼른 가져다주었다. 저녁 한 끼로는 충분할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맛있었다고 연락이 왔다. 곁들여 먹을 반찬으로 미역콜라비양파초무침을 보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음식이 자기 생존과 직결되는 때가 찾아올 수 있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무엇인지 모를 압박이 삶을 짓누른다.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것들을 지나쳐야 하고,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 다 별 일없이 잘 할 것 같지만, 막상 접하고 나면 하루, 이틀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경우, 음식은 그저 음식이 아니다. 배고프니 먹고, 배부르니 지나치는 정도가 아니다. 과도하지 않게, 적절한 양을 적합한 시간에 먹는 것도 음식에 한 부분이다. 설령 생존을 위한 음식이라해도 누구나 음식과 함께 끝까지 호흡하지 못한다. 음식은 인간을 유혹하고 시험하는 생존도구다. 유혹과 생존이 함께 있기에 위협적이다. 나는 음식을 통해 인간이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을 배운다. 먹지 말아야 할 것, 먹어야 할 것, 조금 먹어야 할 것, 주로 먹어야 할 것 등을 구분해나가면 삶의 방식은 저절로 바닥부터 재구성될 수 있다.


내가 건네준 음식이 한 아이의 삶에도 작은 기억으로 남겨지면 좋겠다. 누군가 식사로써 자기 생존을 위협하는 삶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싶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내가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연습해 두려한다. 이런 메뉴들로 정식 한 끼 식사를 차려낼 수 있을 어느 날을 기대한다.


5.

나의 지난한 음식 만들기 전투에 크게 기여했던 책이 있다. 수많은 책 중에서 한 끼 한 끼 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준 책이다. 병원 영양팀이 직접 참여했다.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식품영양과의 당뇨관련 이론부분이다. 읽어도 그게 그것 같아서 쉽지는 않았다. 분량이 좀 많긴 하다. 2부는 다양한 메뉴를 상황별로 제시했다. 다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자기 몸을 위해 건강한 식사를 한번 만들어 볼 수 있는 용기를 갖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잘 만들어 먹으면 정말 맛있다. 음식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잘 먹으면서 자기 몸 관리를 위한 기대치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5-30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못 뵙는 사이 요섹남이 되셨군요.ㅎ
하루 세끼를 챙겨 먹는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죠.
우리가 세끼를 챙겨 먹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던데
배꼽 시계는 정확하더군요.
오죽하면 불가에서는 먹는 것을 수행으로 보잖아요.
정말 도 닦지 않으면 못할 게 끼니 챙기는 것 같습니다.
잘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밥헬퍼 2020-05-30 19: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음식을 챙겨 먹는 것이 정말 생각보다 쉽진 않더군요. 세 끼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많이 있더군요. 경험해보니 무엇을 먹는가보다 무엇을 먹지않아야 하는지도 중요했습니다. 나름 즐거운 일입니다. 그나저나 이 서재 오래 잘 지키시네요. 좋은 글 잘 보여주시길 늘 기대합니다.^^
 















1.

나의 서재 '월서각(越書閣)'은 내가 사는 곳과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나는 이 서재를 사랑한다. 책이 압도할 만큼 많거나 자랑할 만큼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솔깃할 귀중한 자료들을 소장하는 것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학술논문이나 자료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변 환경이 한적하고 고즈넉한 것 때문만도 아니다.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2.

몇 년 전, 지인의 도움으로 집안에 두었던 서재를 집밖으로 빼냈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재를 세 번 정도 뒤집었다. 그 때마다 책들이 떠나갔고, 또 어느 새 책들이 들어오곤 했다. 집안에 서재가 있는 것과 달리 집밖에 있는 서재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아무 때나 책을 꺼냈다 꽂아두는 즐거움보다 마음먹고 마실 나오듯 해야 하는 약간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서재에 도착하기만 하면 이만한 놀이터가 없다. 오가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차를 달려 단 한 두 시간이라도 나의 책들과 즐거운 자리를 만끽했다. 나에게는 서재나들이가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3.

그러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서재에서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깊은 병으로 치료를 받는 일들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삶을 마감하시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책에 대한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서재 안에 머무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서 둘레길, 올레길, 강길, 바닷길,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훨씬 더 많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서재는 빈 공간으로 남겨진 날이 많아졌다. 물론 서재를 비워두는 일이 많았다고해서 등한히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서재에 머물더라도 책을 읽는 시간보다 커피 한잔과 밖 풍경 하나 눈에 담아두고 되돌아가는 일을 더 즐겼다. 게다가 지난 겨울 세 번째 사용하던 서재를 재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임시로 새로운 서재에 책을 옮겨두었다. 임시서재는 필요한 책들만 풀어두었다. 여러 책들이 아직 박스에 그대로 담겨 있다. 책을 넘어서보려는 나의 마음이 더 단순해 진 것 같아 마냥 좋다.


4.

나는 서재를 옮기고, 책들을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에게 가장 좋은 독서를 생각한다. 책을 보면서, 책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을 잘 배우고 있다. 책없이 책을 읽는 일은 마치 숲을 걷는 일 같다. 어제 걸은 길이 오늘 다르고, 같은 길이었으나 확연히 새롭다. 짐을 조금 가볍게 하고, 아침부터 바람을 따라 땅을 걷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 들, 강, 바다를 걷는 기분은 책에서 발견하는 환희 그 이상이다.

그렇게 길은 나에게 도서(道書)다. 숲에서, 나무 사이에서, 산꼭대기에서, 바위 위에서, 골짜기에서, 계곡에서, 비탈길에서, 평평한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길’은 곧 살아있는 책이 된다. 서재 책상에 앉아 읽었던 그 글자가 길 어디선가 되살아난다. 그 어떤 글과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을 넘어선 길은 또 새로운 길이 된다. 새로운 재미다.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서재 ‘월서각’을 제대로 향유하는 것이다.


5

오늘 날이 맑다. 서재에서 책들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 자리에서 물끄러미 오래 전 출판된 한 잡지를 꺼내 읽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창비)의 창간호(1966, 겨울호)다. 재밌게도 첫 글과 마지막 글이 절묘하게 이어진다. 편집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첫 글은 창비 창간인인 백낙청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 글은 프랑스의 문인 장 폴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수록한 글이다. (*원문에 한자어들은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다)


# 첫 번째 글.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문학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인류전체에게 무한히 귀중한 방법이요 자기 개인에게는 그것밖에 없는 방법일지 모르나 다른 조건이면 또 다른 것이 나올 수도 있는 한 가지 방법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남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자기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 되고, 자기가 문학하는 동안 영원히 따르고 싶은 길잡이일 수도 있으나 자기가 써야 하는 글,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글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가 뽑아 든 제비가 <세익스피어>인지 <헤밍웨이>인지 아니면 어떤 무명인사인지, 그것은 그렇듯 큰 문제가 아니다.” (25쪽)



# 두 번째 글, 장 폴 사르트르, Présentation des Temps Modernes (1945) 정명환 역, “현대의 상황과 지성”


“마지막으로 우리의 비평은 우리와 같은 관점에서 쓰여진 정신의학적 연구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계획은 야심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계획의 성공을 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출발한다. 만일 일 년 후에 더 많은 동지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저앉고 말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우리와 같은 관심에서 우러나오고 또한 문학적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원고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오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해 둔다. <참여문학>은 결코 <참여> 때문에 문학 그 자체를 망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은 집단을 위하여 적합한 문학을 마련함으로써 집단에 봉사함과 아울러 문학을 위하여 새로운 피를 넣어줌으로써 문학에 봉사하는데 있다는 것을.”(132쪽)


지난 날 창간사가 문학의 자리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그에 앞서 전후 유럽을 각성시키기 위해 단 나의 원고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참여’가 문학성(文學性)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새삼스럽다.


이제 시간이 흘렀다.「창작과 비평」2020년 여름호(통권 188호)가 출간되었다. 특별한 주제가 눈에 띈다. <우리 문학은 지금 무엇과 싸우는가>. 문학평론가 강경석의 글 ‘혁명의 재배치’가 이 주제에 대한 첫 글이다. 공개된 글을 읽다보니, 과거에 대한 지나친 기시감일지 모르나 지난 56년 창간호에서 토로했던 그 <문학의 자리>가 다시 떠오른다. 그는 황정은의 소설을 다루고 있다. 각설하고, 그의 글 한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요컨대 종래의 혁명이라는 관념을 지양하고 갱신하는 혁명(가령 ‘혁명의 혁명’), 그래서 읽는 이들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과 열린 가능성-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에 놓아두는 혁명, 적어도 이 작품*이 말하는 촛불혁명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 작품: 황정은,「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


어쩌면 이 전염병의 시대에 문학은 문학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학 속으로 보이지 않게 침투해서 언제 발현될 지 모르는 감염균과 대응함으로써 ‘고양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야기하는 그런 문학말이다.


5.

길과 길을 걷는 일은 나에게 서재와 같은 공간이다. 길에서 만나는 온갖 생물들은 저마다 한권 책이다. 길에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있고, 죽어가는 것들이 있다. 이 독서가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다. 하여 이 '길'이라는 책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도서(道書,길책)'는 내 발로 한걸음 한걸음씩 읽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도서는 한없이 이어진다. 이 길에서 나는 혁명한다.


또한 나는 이 길에서 행복하다. 요즘 같은 날씨에, 숲길에 들어서면 나는 희망을 가진 작은 새가 된다. 길은 내가 연약하고 낮은 자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글 쓰고, 글 읽는 이가 된다는 것을 배운다. 나이와 무관하게 조금씩 더 깊이 체험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서재 월서각을 사랑한다. 이 서재를 출발하여 그 너머 밖으로 나있는 ‘길’로 걸어 들어가는 일도 좋다.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돌아보니, 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 ‘책 너머 집’, 월서각이라는 공간을 나에게 기꺼이 열어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한 노동자다.

서재, 그 서재를 넘어 길로 나서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를 갱신시키는 나의 놀이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서령,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푸른역사, 2019/2020)


1.

어느 덧 넉 달이 지났다. 순식간이다. 무의미한 날이 있을까마는 요즘은 특히 그렇다. 뭘 바꾸기에는 짧다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적당한 기간이었다. 삶의 방식 중 하나를 돌이켰다.


2019년 12월31일.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 나는 올해 슬로건을 정했다. ‘오클라(ôkhlâ, 음식 그 너머)’.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오클라(남성명사 '오켈'의 여성형)’. 고대 히브리어에서 음식을 포괄하는 단어. 이 여성형은 단지 음식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삶의 공유, 음식을 토대로 파생해서 펼쳐지는 삶의 질서를 포괄한다. 음식은 끼니를 메우는 일을 넘어 공적(公的)의의를 담고 있다.”


‘음식’과 관련한 공적 삶을 올해 내 삶의 주제로 삼았다. 바로 그 상황이 나에게 오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뜻이었다.


2.

올해 1월7일. 정기건강검진을 받았다. 2년 전, 악성빈혈로 총체적인 검사를 받고, 치료받았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1년 만에 치료를 잘 마쳤다. 몸이 회복된 것이다. 앞으로 정기건강검진을 통해 잘 관리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다.


이른 아침, 미리 준비된 건강검진 문진표를 제출하고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원래 오늘 내가 중점을 두는 검사는 위내시경이었다. 사전 혈압검사가 필요했다. 긴장할 필요 없이 가볍게 시작된 검사는 예상치 못하게 서너 번을 반복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연신 갸우뚱했다. 조금 간격을 두고 다른 검사를 먼저 하고 다시 혈압검사를 시도했다. 결국 위내시경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취소했다. 수축기 혈압은 물론이고 이완기 혈압도 경계를 가볍게 지나쳤다. 겨우겨우 기록표에는 조금 안정된(?) 상태를 기록했다. 여전히 위험영역이다. 혈당검사도 안 좋았다. 공복혈당을 포함해서 콜레스테롤, 중성지방도 악성이다. 그동안 걷는 운동을 자주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동부족이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성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먹는 것’이었다. 이 날 검사는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숫자로 직접 묻고 있었다. 의료진은 그 숫자를 해석하여 말로 전달해주었다. 심각하진 않지만, ‘위험하다’는 것이다. 원한다면 바로 약을 먹거나 엄중한 치료를 해도 좋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평소 생각대로 ‘당분간 약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혈압으로 위내시경검사가 취소되는 특이한 경우라는 걱정스런 말씀을 뒤로하고를 뒤로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의료 일에 관여하는 한 분이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격려 겸 걱정 문자를 보내주셨다.


“검진의 의의는 질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미래 계획에 지침을 드리는 것이랍니다.”(J로부터)


병원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나였지만, ‘건강을 위한 미래 계획’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지침이었다. 그래도 이제 행동해야했다. 운동은 아니었으니 남은 것은 하나다. ‘먹는 것’이다. ‘오클라’는 결국 의도하진 않았다해도 나를 향한 삶의 지침이었다. 다만 ‘음식’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알았다. ‘오클라는 음식 그 너머’ 세계를 보게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내가 그동안 ‘먹어왔던 것’, ‘먹는 방식’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져야만했다. 그렇게 나는 약이 아니라 내 ‘생활방식 변화’를 선택했다.


3.

나는 ‘음식’에 대해 철저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오클라’는 음식과 관련하여 내 몸 안팎에 걸친 삶의 방식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의학 검진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 고혈압과 당뇨에 대한 당연한 처방이다. 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총체로서 몸’을 질적으로 변화해야 하는 내 삶의 과제다.


지난 140일 동안, 나는 두 가지를 유의했다. 먼저 그동안 진행해 온 운동을 계속했다. 일단 특정한 날 집중했던 과도한 운동을 지양했다. 모든 날에 적절하게 몸을 쓰며 가벼운 운동을 하며 집중된 운동과 병행했다. 걷는 일과 등산을 계속했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자전거를 탄다. 다음으로 ‘먹는 것’이었다. 하루 세 끼, 모든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처음 세 달은 거의 채소와 잡곡밥을 꼬박꼬박 챙겼다. 물론 가족들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내 손으로 직접 했다. 동시에 먹지 않을 것을 잘 지켰다. 라면, 쿠키, 탄산, 흰밥, 떡과 빵, 매식 등. 간식도 철저히 줄였다. 수고한 결실인지, 혈압은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혈압계, 혈당계를 직접 사서 손에 들려주며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봐주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혈당은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있다. 그 선물은 단지 기계를 넘어 내 삶을 경각시키는 은총이었다. 체중은 자연스럽게 15kg가 감량됐다. 외모는 핼쓱해 보여 가족들은 걱정하기도 하지만, 몸은 경쾌해졌다. 그렇게 숫자는 힘이 있다. 나를 경각시킨 것은 숫자였고, 나를 안심하게 하는 것도 숫자이다. 나는 이제 음식을 그리 걱정할 상태는 아니지만, 다시 예전 음식 먹는 법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각해 보면 ‘오클라(음식, 그 너머)’는 ‘끼니, 허기’를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굳이 장엄한 각오로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이 시간을 보내며, 음식의 속, 인간에 비한다면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음식에 대한 나의 특별한 행동은 혼자 조용히 잘 지켜나가면 될 일이다. 그 음식 너머 세계는 상상 이상이다. 음식 하나하나에는 기억해 둘만한 삶의 이야기가 있다. 자기 삶이 각인된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삶에 새겨진 ‘관계’의 흔적이기도 하다. 가볍게 말하듯이 음식은 무엇을 먹었는지 보다 ‘누구와’ 어떤 이야기로 그 음식을 나눴는지를 필연적으로 기억하게 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운 은총이다.


4.

나는 이 일이 발병한 후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 일은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당찬 결심이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게 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우선 지난 시간, 나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예상외로 다행스러운 일도 있었다. 고혈압과 당뇨와 관련되어 먹는 문제에 고통 받는 이들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내 생애에 그것은 그들의 문제였다. 이젠 그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들 중 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내 삶에서 일단 먹을 메뉴가 없었다. 나로서는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다. 다 잘 먹고, 가리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어떤 메뉴로도 식사를 즐겼다. 하지만 지금, 나는 한 끼를 채우기 위해서는 ‘검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자주 해 본 적이 없다. 설령 할 수 있다해도 과연 제대로 되었는지 검증할 수도 없다. 건강식이라 할 수도 없다. 문득 이런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누가 만들어주지 않으면 식사할 수 없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삶의 방식이라면 혼자 사는 이들에게 이 질병은 치유불가다. 질병은 다시 질병을 낳는다. 고치려는 의지가 있다해도 고칠 수 있는 환경이 안 된다. 내가 그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들이 한 끼 음식을 누군가로부터 잘 대접받기를 고대한다.



5.

가끔 음식처럼 김서령의 글을 꺼내 읽는다. 아무 이야기나 펼쳐서 가볍게 훑는다. 눈으로 읽지만 마음에 그려진다.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음식, 그 너머’로 자연스럽게 여행을 떠난다. 기억에 남겨진 음식은 사람과 잇대어 있다. 맛과 함께 친밀한 이야기가 살아난다. 이 책 속에서 그의 글은 늘 맛이 좋다.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단 속엔 내 앞에 차려졌던 그 음식들도 담겨있다. 자연스럽게 그 음식들에서 내 삶에 스며들었던 거룩한 사랑이 다시 나를 다독인다. 


“외로움에 사무쳐봐야 안다, 배추적 깊은 맛을.”(9쪽)



가난하고 순박했던 시절 사람들은 돌멩이나 바람결처럼 단순하고 어질었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때로 그 시절의 덤덤하고 구수한 사람들이 몹시 그리울 때가 있다. - 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