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쓰는 게 중요하다. 

 

-친구와 포 베이 (쌀국수+매운 볶음밥) ; 해후라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느낌은 거의 오래 묵은 세월을 뚫고 만난 것 같았다. 친구의 헤어 스타일이 참으로 도시적이었다. 칼로 자른 듯 그러나 한층 세련된 그 차가운 느낌. 그러나 헤어 스타일과 상관없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가서 한국식 난방으로 가동되는 아파트를 건설하라거나, 중국의 고산지역에서 매일 아침 10km의 산길을 헤치고 나아가 물을 길어오라고 해도 거뜬히 해낼 것 같은, 생존적인 매력이 있는 친구다.(뭐라 설명 할 수가 없다.) 

-혼자 서점 ; 영어 공부 하려고 영어 원서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외국인들에 흠칫 놀라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피신했다. 한국인과 함께 왔는데 'it's fine'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영어다. 왁. 나도 외국인과 친해지고 싶다. 어떤 기분일까? 그나저나 세스 고딘의 '더 딥'을 사려다가 조금 비싸서 포기했다.  

-성적 확인 ; 오늘 토익 성적 나왔다. 좌절과 조용한 환희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겠지. 나는 조용한 환희 쪽에 가까웠다. 점수가 진리인 날도 있는 것이다. 조금 기뻤다. 조금.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익 점수 너무 높은 편인 것 같다. 특히 목표 점수는 더 높다. 상향 평준화라고 하던데. 그렇다고 하향 될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지 않나. 

 -현미 ; 밥에서 떡 맛이 난다.     

 

-오늘 안과도 갔다왔다. 코가 막히는 것과 눈이 건조한 것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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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2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험에 의하면요, 점수는 늘 진리였어요. 늘.

김토끼 2011-03-22 08:00   좋아요 0 | URL
시험을 오랜만에 봐서, 잠깐 잊고 있었어요 .. 이 세상 어딘가에 모든 인간을 점수로 환산하는 기계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항목을 조합해서 뭐 체력, 리더십, 배려심, 독립심, 추진력 등등을 수치화 한 그런 것이 있지나 않을런지.. 어릴 때 프린세스 메이커를 너무 했나봐요. 몹쓸 상상력이네요.;
 

 

오랜만에 '김토끼 서재'에 들어와서 일 년 전에 쓴 글을 보았다. 

겨우 두 편의 글이었지만  

벌써 일 년 전이라니 새삼스러웠다. 

그 때도 봄이었고, 조금 추웠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거나 미치도록 미워하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 그래프에서 얼마간 수평선을 그을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면, 

나에겐 지금이 그렇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일 년 전과 지금이 100% '똑'같지는 않다. 

지난 일 년간 그 수평선 위를 걸어가며 나는  

내가 항상 원치 않는다 여기던 경험들을 했다.   

봄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를 정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에는 냉장고 같은 도서관에서 5시간씩 노트정리를 하고

가을에는 실패할 것이 뻔한 시험에 목을 매며 조급해하고 

겨울에는 영혼을 죽이고 학원가를 돌아다녔다. 

그토록 파묻혀 살던 소설과 시는 거의 읽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정말 좋아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그 수평선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나는 크게 깨달은 게 있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것.

 

하여간 나란 사람은 불과 몇 개월전까지만 해도

'젊은 사람들이 취업준비로 청춘을 학원과 도서관에서 낭비한다'고 누가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성하는 타입이었다. 나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취업준비로 청춘을 골방에서 썩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은 있다는 것이다. 

안 떠지는 눈을 비비고 새벽에 일어나 

도서관이나 학원으로 가서 종일 앉아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면 체력비축을 위해 또 운동 하고 숙제하고 잠들고 

(물론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지만, 이것도 한 순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와중에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고 

'나도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면서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당장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므로 다음날이면 다시 

안 떠지는 눈을 비비고 새벽에 일어나.......  

(그러나 이런 사이클을 맹목적으로 돌고 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여튼!!  

이런 사람들의 인생을 재미없다고 함부로 요약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게 뭐든 이 시대가 토익을 원하니까 어학연수를 원하니까 좋은 학벌을 원하니까 아름다운 미모를 원하니까 

그것을 얻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이, 완전히 무지몽매하고 자아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휩쓸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중 대부분은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이라는 순간을 헌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나도 그들도 

언젠가 이 수평선을 수직선이나 위쪽으로 올라가는 사선으로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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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03-0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오랜만이에요 김토끼 님!
그래도 종종 들러 총총 토끼발자국 남겨주세요.

김토끼 2011-03-10 16:53   좋아요 0 | URL
아안녕하세요!!
요즘도 종종 poptrash님 서재에 몰래 들어갔다 오곤하죠(흔적없이 ㅎ;;).

그나저나 누가 인사라도 걸어주면 왜이리 힘이 날까요. 하하.^0^

김토끼 2011-03-10 17:22   좋아요 0 | URL
토끼발자국 하시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요즘 ebs라디오 초급 중국어를 재미삼아서 듣는데

토끼가 깡총깡총 뛴다가
'뻥뻥티아오티아오'

에..그러니까 중국어는 참 귀엽습니다.

다락방 2011-03-10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김토끼 님!
오랜만이어요.

김토끼 2011-03-10 16:5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니이임!!
여기 너무 오랜만에 온지라 저라는 인간 이제 잊혀진 줄 알았사와요 - 감격.

사진이 바뀌셨어요. 그렇죠? 안젤리나 졸리인가요?
전 요새 매기큐가 넘 좋아요.
졸리도 좋고요^^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한때 '내려놓음'이라는 주제에 깊이 빠져서 이용규 목사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종교와 신앙을 조금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 특히 마음에 든 부분은 신의 '예비하심'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그 일을 신이 예비하셨기 때문으로 그 일은 고난일 수도 기쁨일 수도 있으며, 신은 그러한 예비하심으로 신의 어린 양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이후로 종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면서 자주 '신의 예비하심'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들을 떠올렸다. 이것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종교적으로 보면 신의 영역에 속해있지만 또 전적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발생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복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제'인간이 아니라 복제'인간'이라는 점이다.  

(스포일러 주의)
소설 전반을 정리하자면 복제인간들을 학습시키는 헤일셤에서 유년(그들에게도 유년이 있다면)을 보낸 캐시를 화자로 내세워, 캐시와 그 주변인물들인 루스와 토미, 루시 선생님과 에밀리 선생님, 마담, 코티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큰 틀이고 소설을 이끄는 문제적인 지점은 복제 인간의 '장기 기증'이다. 그러니까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된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살아가고 싶어도 애당초 그들에게 부여된 '장기 기증'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타의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서 떠도는 희망적인 소문조차 그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책(저항이나 내란)이 아니라 그것을 조금 미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절망에 익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우리는 절망적이야, 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다만 캐시와 토미의 사례를 통해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여리고 예민하며 뛰어난 것이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일단 정리를 했지만 이 소설은 복제라는 SF적인 요소나 그에 따른 일반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은 예정된 미래, 곧 그 미래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는 '공포와 슬픔' 앞에서조차 삶을 포기할 줄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인간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복제라는 미지의 소재에 천착하지 않으며(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드러나는 헤일셤과 마담의 존재에서 서스펜스가 약하다) 오직 인간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음의 사소함과 미묘함에 대해 쓰고 있다. 그것은 곧 나에게도 있는 것, 너에게도 있는 것,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인류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밥을 먹으려고 늘어선 식당의 긴 줄 안에 서 있을 때 그러한 시끄러움과 산만함 속에서 오히려 (아무도 없는 방 한 구석의 집중과 고요보다) 상대방의 비밀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주변 세상을 겁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를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독자를 두 번 세 번 돌아보게 하고 두 번 세 번 뜨끔하게 만들면서 나아간다. (아마도 좋은 작가가 때때로 독자에게 힘든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다.)

 네버 렛 미 고. 
가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은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는 것과 그 곳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 경우를 갖는다. 어느 쪽이 더 불행하고 덜 불행한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떠나고 싶지 않은 '이곳'을 가졌고 누군가는 가닿고 싶지 않은 '저곳'을 가졌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자의 경우가 훨씬 인간적인 선택 사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곳을 떠난 이후에 또 다른 '이곳'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은 그곳으로 나를 보낸다면, 나는 오직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갈 뿐이다. 그래서 네버 렛 미 고. 그러나 여기에는 인정이 없다. 소설 속 루스와 토미, 캐시는 그곳으로 갔거나 아직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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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빵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밀가루가 부풀면서 시작된 빵의 역사 같은 것 말고
나 개인적인 범주에서 빵의 시작말이다.

가장 유력한 시기는 
어머니가 제과제빵 학원에 다니면서 부터이다.
나는 그게 무엇이건 그 '맛'을 알면
그때부터 거침없이 빠져들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맛'을 안다는 것은 꽤 오묘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빵맛'을 알기 위해서 
어떤 이는 빵을 한 번 맛보면 되지만 
어떤 이는 빵을 여러 번 맛보다가 갑자기 득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자와 후자 모두에 포함된다. 

내가 빵을 두고 '천상의 음식'이라고 느낀 첫 사건은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피자트럭이 와서 피자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동네 아이들에게 무료로 그것을 나눠주던 때였다.
아주 긴 줄에 서서 기다림 끝에 받아 먹은 그 작은 피자 한 조각은 
정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맛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런 것이 있나!' 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왠지 또 다시 줄을 서서 이 피자라는 것을 두 번이나 맛본다는 것이
무례한 짓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먹고 그만 두었지만
그 뒤로도 계속 피자가 준 충격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제과제빵 학원에 다니시게 되었고 
학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이면 
우리 집은 빵세례 속에서 행복해했다.
레몬 케이크, 생크림 케이크, 도넛, 식빵, 야채뺭 등등 
잠들기 전에 그런 빵들을 계속 먹으니
살이 안 찔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가 나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의 배가 이렇게 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구나, 하고
굉장히 어린아이 다운 사고를 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빵을 맛보면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빵맛에 젖어 들고
어느새 빵이란 것을 먹지 않는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십 여년을 살면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빵을 먹다보니 
어느 날 식도염에 걸리게 되었다.
빵도 빵 나름인데
내가 워낙 이런 저런 빵을 먹다보니
꼭 원료가 좋은 빵만 먹은 게 아니었고 
당시에 외식만 하면 꼭 밀가루 음식만 먹어대서
내 위장이 조금씩 약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위장이 약해진 것은  
식도염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약해진 위장이 소화를 제대로 못시키면서
위산이 식도쪽으로 올라오게 되고 
그러면서 식도에 염증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쨌든 식도염에 걸렸고 
의사 선생님이 '빵 먹으면 안 돼요.'하고 말했을 때
내 머릿 속에는
'그럼 어떻게 살라는 건가요?'하는 말이 딩딩 울렸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식도염의 고통 속에서
(사실 고통이라기보다 답답함인데, 정말 무시무시하다.)
밀가루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두 달을 버텼다. 

'거의 완치' 판정을 받고부터 
또 빵을 먹기 시작한지 벌써 3년쯤 지났을까.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먹는 것 같다.
이것도 줄여야 할 텐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빵 대신 떡을 먹어보기도 하지만
며칠 간은 떡이 맛있다고 하다가도
역시나 빵이 줄 수 있는 것을 떡은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빵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것이 무엇이간데?) 

그래서 내가 왜 이럴까 하고 궁금하던 터에 
신문에 나온 기사 하나를 보게 되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하신 분의 인터뷰였는데
그 분이 자신은 어른이 되어서도 서구적인 음식을 더 좋아한다며
아무래도 어린 시절 전쟁 통에 구할 수 있는 먹을 거리가 빵 같은 거여서 하도 먹다보니
아예 그런 쪽으로 입맛이 길들여 진 것 같다고 하셨다.  

사람의 입맛에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녹아 있다는 게 신기하고 
안타깝고 그랬다. 나 역시 나의 시간들이 내 입맛에 쌓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안타까운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빵이라는 것은 
언제 먹든 빠져들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에게 이것은 운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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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4-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어머니가 놀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우셨는지 계란 한 판과 우유, 빵을 사들고 오셨어요.
덕분에 오늘 아침은 빵으로.

사실 저는 한국인 입맛인데, 국을 안끓여 먹으니 집에서 밥 먹기가 곤욕이에요.

김토끼 2010-04-13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국 없이 밥 먹는 걸 싫어하는데요. 오늘 아침에도 밥상머리에 앉아 최초로 한 말이 '국은?'이었다는.. 그나저나 빵은 잘 드셨는지요? 저는 아침으로 빵 먹어보는 게 소원이예요. 식도염 후에 속으로 정해놓은 기준이 있어서 '식사로 빵은 절대 안 돼' '오전 11시 이전에 빵은 절대 안 돼' 뭐 이런 게 있거든요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 연작 소설집  

이 책은 열다섯 살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정말 또렷하게. 왜냐하면 읽고 기분이 나빠서 다시는 이런 책 읽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읽는다고는 하지만 '다시 읽고 있구나' 하고 느낄 만큼 기억나는 것도 없다. 정말 아무 것도. 참 신기한 건 대학에 들어와서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나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하루키를 좋아하게 되었고-그때까지도 내가 중학생 때 읽은 책의 작가가 하루키인 줄 몰랐다- 이제 하루키 소설을 읽고 한동안 우울하고 침침하던 그 기분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소설이라고는 교과서에 실려 토막난 것들 말고 읽은 적이 없는 그때 하루키를 읽고 그런 기분이 들었지, 하고 추억할 뿐이다.(추억?) 

어쨌든 이번에 이 소설집을 다시 읽고 나의 어린 시절 독서감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예전에 헤르만 헤세를 읽고 자주 감탄했는데 지금은 뭔가 너무 거창해서 읽기에 부담스럽다고 할까, 뭐 그런 경험과 비슷하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십년 전의 감상과는 전혀 판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말 좋다. 

고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마지막에 실린 하루키의 인터뷰는 이 소설집의 정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책 테두리가 하얗게 닳아져 아주 헌 책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 낡고 초라한 책의 장정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 이렇게 책 자체에 감동하는 것도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벌꿀 파이>였다. 벌꿀이 많은 마사키치 곰과 연어가 많은 동키치 곰의 우정 이야기를 보면서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우정이라는 생각도 들고, 소설가 쥰페이와 사요코의 오랜 시간에 걸친 조용한 애정도 정말이지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로서의 위치를 다져가는 쥰페이의 모습도 좋았고, 그런 쥰페이를 보면서 나 역시 내가 바라는 것을 잃지 않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도 조금씩 꾸준히 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나면 상당히 건전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데, 그것은 그의 소설이 밝고 희망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초라한 삶이더라도 마음으로 깊이 그 삶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이 말이 초라한 삶만 줄창 써댄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열다섯 살때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 개의 단편을 보고 '더 읽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음. <벌꿀 파이>까지 읽었다면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가끔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는데, 꼭 상상의 끝에서 나는 모든 것이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벌꿀 파이>까지 바득바득 읽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그때 열다섯 살의 나는 거기까지였던 거니까. 지금의 내가 아직 여기까지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앞으로의 나도 지금의 나와는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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