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 연작 소설집  

이 책은 열다섯 살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정말 또렷하게. 왜냐하면 읽고 기분이 나빠서 다시는 이런 책 읽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읽는다고는 하지만 '다시 읽고 있구나' 하고 느낄 만큼 기억나는 것도 없다. 정말 아무 것도. 참 신기한 건 대학에 들어와서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나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하루키를 좋아하게 되었고-그때까지도 내가 중학생 때 읽은 책의 작가가 하루키인 줄 몰랐다- 이제 하루키 소설을 읽고 한동안 우울하고 침침하던 그 기분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소설이라고는 교과서에 실려 토막난 것들 말고 읽은 적이 없는 그때 하루키를 읽고 그런 기분이 들었지, 하고 추억할 뿐이다.(추억?) 

어쨌든 이번에 이 소설집을 다시 읽고 나의 어린 시절 독서감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예전에 헤르만 헤세를 읽고 자주 감탄했는데 지금은 뭔가 너무 거창해서 읽기에 부담스럽다고 할까, 뭐 그런 경험과 비슷하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십년 전의 감상과는 전혀 판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말 좋다. 

고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마지막에 실린 하루키의 인터뷰는 이 소설집의 정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책 테두리가 하얗게 닳아져 아주 헌 책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 낡고 초라한 책의 장정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 이렇게 책 자체에 감동하는 것도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벌꿀 파이>였다. 벌꿀이 많은 마사키치 곰과 연어가 많은 동키치 곰의 우정 이야기를 보면서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우정이라는 생각도 들고, 소설가 쥰페이와 사요코의 오랜 시간에 걸친 조용한 애정도 정말이지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로서의 위치를 다져가는 쥰페이의 모습도 좋았고, 그런 쥰페이를 보면서 나 역시 내가 바라는 것을 잃지 않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도 조금씩 꾸준히 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나면 상당히 건전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데, 그것은 그의 소설이 밝고 희망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초라한 삶이더라도 마음으로 깊이 그 삶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이 말이 초라한 삶만 줄창 써댄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열다섯 살때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 개의 단편을 보고 '더 읽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음. <벌꿀 파이>까지 읽었다면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가끔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는데, 꼭 상상의 끝에서 나는 모든 것이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벌꿀 파이>까지 바득바득 읽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그때 열다섯 살의 나는 거기까지였던 거니까. 지금의 내가 아직 여기까지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앞으로의 나도 지금의 나와는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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