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라트비아인 
조르주 심농
열린책들,2011 

3차 지정 도서: 모임명은 단편소설읽기모임인데, 꼭 단편소설만 읽는 것은 아니다. 책의 장르나 분량에 상관없이 읽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함께 읽기로 했으니까. 물론 아무런 필터링 없이 추천된 도서를 모두 읽는 것은 아니다. 기준이 있다면 '읽을 가치가 있는 책' 혹은 '마음이 끌리는 책' 정도일까. 원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조르주 심농 중 무엇을 읽을까 고민했는데 심농의 책이 더 얇은 관계로 이것을 읽기로 했다.(책의 장르는 모르겠으나 분량은 상관하게 된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되는 매그레 시리즈는 홍보도 많이 되어 있기 때문에,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나 역시 '매그레'나 '심농' 모두 익숙한 이름이지만 본격적으로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참고로 심농은 하루만에 한 챕터를 쓰고 그것을 사흘 동안 수정한다고 한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즉 군더더기가 없고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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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독서 목록을 정리합니다.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수상한 라트비아인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11년 12월 04일에 저장
품절

사건의 밑바닥이 아닌 인간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진짜 추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12,800원 → 11,520원(10%할인) / 마일리지 6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1년 11월 14일에 저장

어느 부분을 펼쳐도 좋던 소설이었다. 읽고나선 가난한 주인공 부부가 마음에 걸린다.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1년 11월 14일에 저장

단편소설읽기 모임 2차에서 읽은 소설. 상황의 역전으로 인한 아이러니.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삶도 없다(18)'
개그맨- 김성중 소설집
김성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1년 11월 14일에 저장

단편소설읽기 모임 1차에서 읽은 소설.
'사라져 가는 세계에서 성장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유머러스하고 상상력도 발군이지만 작가는 의외로 심각하다.
<허공의 아이들>과 <개그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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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단편 <방>과 '방'과 쓰기의 삶
 

때때로 방의 독점을 꿈꾸는 이가 '내 방을 갖고 싶다'고 희구할 때, 그/그녀에게는 고립에 대한 의지가 읽힌다. 자매/남매/형제로 구성된 그러나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공동의 '방'을 갖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나눈다는 의미 외에 개인의 내밀성이 자라날 토양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인지, 어릴 적부터 '내 방'을 갖는 게 소원인 이들이 적지 않다.(어떤 이에게는 한 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므로 더욱 그렇다.)  

또 '방'이라는 공간에 골몰해 밖으로 자주 나오지 않는 이를 오랜 만에 '바깥 세상'(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방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에서 만날 경우, 그들과 뭔가 공유하려는 것은 힘든 작업이 된다.(정말로 그것은 하나의 사무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말이 없고,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많은 부분 잊었고, 그만큼 자신에게 집중해있어, 둘의 관계에서 뭔가 시도 할 때, 나는 그들의 무심을 견뎌야 한다.) 왜냐면 그들이 혼자 '방'에서 지내는 동안 달팽이처럼 견고한 '껍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껍질은 자신을 지키는 '성벽'이기도 하지만, 성벽이 단단한 만큼 외부의 접근도 그에 비례해 빈약해진다. 곧 그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일종의 '장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방'이 장애가 되리라는 점,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견디는 데 삶의 의의를 둔다. 그리고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이 갖는 내밀한 속성 때문인지, 문학에서도 종종 '방'은 작품의 모티프로 작용한다. 글을 쓰기 위해 집/방을 점유하고 싶은 사람을 화자로 내세운 이승우의 단편 <방>도 그러하다. 애초에 쓴다는 행위는 협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때의 협업은 더 치밀하게 정의 되어야 한다. 혼자만의 행위 이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단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물질적 가치들이 과잉생산되자 인간은 '잉여 시간'을 갖게 되고, 그 잉여가 자연스럽게 예술 쪽으로 흐르게 된 역사의 전개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 그것은 시간의 잉여만이 아닌 공간의 잉여가 발생한 지점에 대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산업화와 함께 개인적인 공간이 탄생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공간은 검은 옷을 두르고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던 수도사에 한정된, 즉 수도원에서나 등장할 법한 개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계를 위해 공동생활은 필수였다. 그러나 가내/길드적 협업의 형태로 생계를 이어가던 삶의 방식은 공업의 발달로 달라졌다. 협업은 '근무시간'에만 활성되는 '근무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사무가 끝난 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방을 갈망하게 되고(곧 혼자만의 시간을 희망하게 되고), 그 공간의 협소와 침묵을 사랑하며 그곳에 머무른다.(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은 산업화로 인해 성장했다/이에 더해 내면의 발달은 책의 분량을 늘렸고,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소리 내 읽지 않는 '묵독'에 길들여졌다. 이러한 묵독은 다시 내면의 발달에 기여한다.)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런 공간을 열망한다. '쓰는 사람'들에게 '쓴다'는 행위가 주(主)가 되고, '쓰는 공간'은 객(客)이 된다 흔히 여겨지지만, 많은 경우 주(主)는 '쓰는 공간'이다. 쓰는 행위의 부속물인 '글'은 그러한 공간에서 파생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가상의 인물을 빌어 '자기만의 방'을 주창할 때, 그녀가 강조한 것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의 소유였다. 그러한 소유를 위해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돈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이승우의 단편 <방>에서도 글을 쓰는 화자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글을 쓸 공간이다. 그 공간은 단지 혼자만 남겨질 수 있는 상황을 전제할 뿐 아니라, 자신을 쓰게 할 사연/내력을 가진 공간이어야 한다.  

 



 "책상에서 눈을 들어 둘러보면 사면에 들어찬 물건들이 감시병처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간이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창고에 쟁여진 물건과 다름없이 여겨져서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자주 집에서 나와 배회했다. 일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마련하고 찻집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음은 급한데 한 줄의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바깥을 떠도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72) 

 



이승우 단편 <방>의 화자는 아내와 아이를 미국으로 떠나 보낸 뒤 10년 8개월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쓴다.(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때때로 소설을 발표한 무명의 소설가이다.) 이때 소설쓰기는 그의 정당한 목적이 아니라 핑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뒷바라지 하면서 전부터 파열되어 있던 부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뒤 원래 살던 집을 팔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화자는 집에 혼자 남게 된다. '혼자'라는 물리성만은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만 그는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 중 자신이 원래 살던 집(큰어머니의 배설물과 땀과 약물 냄새가 남아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뭔가 쓸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의 집을 아들의 신혼집으로 샀던 노인이 아들이 파혼하면서 집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화자는 부동산중개업자를 통해 노인의 허락을 구하고, 언제든 나가라고 하면 나갈 것을 조건으로 그 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비로소 화자는 뭔가 쓰게 되고, 이때 화자를 쓰게 하는 힘은 죽은 큰어머니가 살아 있던 당시 남겨 놓은 다소 역겨운 냄새다.(여기에 그간 빈 집에 들어와서 살 것이라 예상된 집없는 노인의 이야기도 들어간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이와 잠재적인 동거 형태로 살아가며, 이 공간에 익숙해져 가는 화자 역시 기괴하다.) 
 


 
"한때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큰어머니가 몸도 불편하고 정신까지 가물가물하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서울에서의 매일매일의 생활이 전투와 같아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고 해도 큰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긴 무관심은 부끄러운 일이었다."(164) 

 
"집을 팔면 되잖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때, 마치 자기 돈을 들여 산 집이니 자기에게 권리가 있다고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그것은 단순히 집을 팔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집이라는 단어를 발음함으로써 통상 은연중에 암시하는 가족으로서의 삶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꼭 집어 말하자면 집의 분해였다."(167)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반복되는 '냄새'는 화자가 짊어진 부채의식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큰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만은 아니다. 큰어머니를 투과해 보여지는 자신의 잔인성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아내를, 아이를, 큰어머니를, 아내의 부모를 언급할 때, 화자가 관계맺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자신이 옳은 듯 행동하지만, 여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씁쓸한 느낌을 남게 한다. 이런 느낌 속에는 그가 소설 곳곳에서 토로하는 죄의식이 묻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냄새로 인해 그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큰어머니의 존재만은 아닐 것이라 유추하게 된다. 냄새가 환기시키는 것은 그 자신이며,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죄의식이다.(이승우의 소설에서 '죄의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죄의식은 그의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양상이 아닌, 다른 양상으로 뻗어간다. 그것은 쓰려는 의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그를 쓰게 만들고, 화자는 그런 의지 속에 산다는 것을 즐기는 듯 하다.)  

 

  
"어느 순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상관없어졌을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소설을 한 편 썼다." (184) 

 

무언가를 위해 '수단'을 필요로 할 때 일단은 수단의 성취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성취의 영역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하고 싶다/갖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그에 대한 어려움이 수반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해결한 뒤 우리가 쉬운 상태로 들어갔을 때, 즉 그것을 지배할 힘을 가졌을 때, 그토록 원하던 무엇은 그야말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며, 우리는 종종 그 지점을 '끝'으로 착각한다. 이승우 소설에서 '방'의 성취는 화자에게 그런 환각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환각이 '쓰는 삶'을 연장시킨다.  

환각이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다는 전제에서, 환각과 쓰기의 순환을 유추할 때, 영화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수 있다.(니콜 키드먼이 만년필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가며 입술로 문장을 웅얼거리는 장면 때문에, 나는 영화를 수 차례 돌려봤다. 쓴다는 행위는, 그것의 행위자가 느끼는 것 만큼이나 지켜보는 이에게도 매혹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깊이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진실에 닿기 때문에 현실의 이면을 뜨겁게 느끼는 사람이다.(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부적응자가 된 사람들의 순수는 매력이라기보다 위협이다.) 그녀에게는 지나친 진실이 환각이고, 그 환각은 그녀에게 펜을 잡게 한다.(쓰고 싶다는 유혹에는 세상의 비밀 한 조각을 발견한 것 같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열망이 있다. 아마도 작가들은 그런 열망을 끝까지 붙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력 아래 현대를 살아가는 로라와 클라리사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열망하는 세계를 먼저 인지했다. 그래서 세상이 정한 윤리가 그들에게는 맞지 않고, 그들은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그런 억누름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폭발할 때 뿐이다. 그들이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여잡은 끈은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글'이었고, 로라 브라운에게는 '댈러웨이 부인'이었고, 클라리사 본에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환생인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 끈이 목을 조르기도 한다.)   



앞서 '방'의 필요를 강조한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보다 사적 공간을 필요로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원했던 장소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였고, 리치몬드에서의 요양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회복보다 런던의 고독을 더욱 갈망했다. 이것은 도시화 된 지역에서 사적인 공간이 필요를 동반하여 나타났다는 점과 맥락이 닿는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는 고독이라는 그림자를 갖는다. 그것의 속도가 누군가를 동반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고, 나아가는 존재 자신이 동반자를 거부하기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방을 갖고 싶다'는 발언은,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다 빠를 수 수도 느릴 수도 있으나,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릴 것이다. (방이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방을 가진 순간, 정체가 불분명한 열망에 휩싸여, 자신만의 속도로 공책을 펼치고, 자신만의 속도로 펜을 들어, 자신만의 속도로 어떤 문장을 웅얼거리며 빈 공간을 채워갈지 모를 일이다.   

 
 


 
* 인용_이승우, <오래된 일기>,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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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11-13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 소설은,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았을 뿐인데, 우연찮게도 며칠 전에 2010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집을 보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두번째 문단은 상당히 뜨끔, 한데요 ㅎㅎ

김토끼 2011-11-14 13:18   좋아요 0 | URL
'칼'이었죠? 저도 마지막 서너장을 못 보고 도서관에서 나온 기억이 있는데, 다시 봐야겠지 싶습니다. 방금 두 번째 문단을 다시 보고 왔는데 저리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저는 ㅎ 그렇지만 밖에도 종종 나오세요ㅎ 건강해야 방콕도 하죠.
 


화장실에서 오렌지색 틴트를 바르고 나오면서, 가방에 넣어야 할 틴트를 바닥에 떨쳐버렸다. 유리로 된 틴트 병이 산산조각이 났고, 바닥과 문에 주홍빛 틴트가 튀었다. 한 명의 여자아이가 립스틱을 바르다가 거울로 나를 힐긋 보았다. 휴지를 말아쥐고 바닥을 닦는데, 립스틱을 다 바른 여자 아이가 말끔한 얼굴로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나갈 때 유리조각을 조심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운동화에 점점이 물든 오렌지색 틴트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와, 며칠 만이던가, 누군가 날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버린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소문은 사실일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피로를 느끼며 나는 그 아이의 차 뒷자석에 앉았다. 조수석에는 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고, 잘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조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서로 기분이 상할 일은 없었지만 우리 사이의 공기가 평화롭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였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차 안에서 깨진 틴트 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홍색 틴트로 마음에 드는 것이었고,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데다가 용량이 적은 데 4만원이 넘는, 브랜드 제품이지만, 그것이 깨졌을 때 왠지 후련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은 웃었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때 난 뭔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과산화수소 냄새 같은 게 났었는데, 이제 그런 것을 맡을 일도 없어졌고, 본래의 입술색을 죽이고 다른 색을 덧칠하던 행동을 당분간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안도감이었다. 며칠간 화장할 시간이 없어서 맨 얼굴로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화장을 공들여 하는 타입도 아니고, 오히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베이스 메이크업만 하는 편인데, 그 정도도 하지 않고 깨끗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을 때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틴트가 깨졌을 때 어렴풋이 느끼던 홀가분함이 바로 그 기분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자의든 타의든 포기된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사실 후련한 기분 속에 상쾌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불안이 떨쳐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도착한 시내에서 우리들은 피자를 먹었다. 나는 작은 피자 두 조각 먹었다.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다. 더 먹고 싶지도 않았고 왠지 먹다가 잠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틴트가 깨졌을 때, 아마 그 때부터였을까, 난 그때부터 잠이오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잠들고 싶은 욕구 같은 건 없었지만 사람들 속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게 힘들었다. 아니면 나는 몰랐던 것이다. 소문이든 아니든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을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여튼 지금의 나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틴트가 깨졌어, 조금 불안하군, 앞으로 뭔가 운명이라는 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더 재미를 느꼈다. 

피자를 먹고 스타벅스에 갔다. 두유가 들어간 차이라떼를 시켰다. 너무 달았고, 차이 향이 강해서 정신이 없었다. 스트로우를 입에서 떼지 않고 순식간에 삼분의 이를 들이켰다. 일행은 우연히 내 앞의 컵을 손에 들어보고 그 가벼움에 좀 놀랐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게 맛있어나, 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빨리 먹었군, 대단하다, 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것이 맛있다 맛이없다를 인식할 만큼 분명한 의식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입술에 달라붙어 있는 스트로우로 뭔가를 들이켰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나는 그 시시한 이야기가 뭔가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것에 일조하면서, 이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뭐든 공부를 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게 뭐든, 계속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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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새벽 2시까지 뒤척였다.
입이 바짝 말랐고 물을 조금이라도 마셔야 잠이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몸이 무거워 물을 뜨러 갈 수 없었다.(이래서 자리끼가 필요!)
조금 더 뒤척거리다가 이대로 영영 잠 들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희미한 불빛에 비춰 물을 따라 겨우 세 모금을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누우니 바로 잠이 들었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분명히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요즘 피곤할 정도로 고민에 짓눌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어떤 문장에든 민감할 정도로 반응하고야 만다.
(내가 늘 원했던 그런 상태지만 결코 신나는 일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평소보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눈은 흰자위를 다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요즘의 내 눈은 빨갛기만 하다.)

그런 눈으로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김성중의 소설집 <개그맨>을 펼쳐 두 번째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그림자>였다. 몇 장을 읽고서 예전에 한 번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다음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러나 기억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재생시키지 못하고
한 페이지마다 다음 한 페이지를 기억하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다시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했다.
소설의 끝문장까지 읽었을 때, 아 맞다 이런 이야기였어,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시 돌아온 기억이 읽는 시간을 단축시켜준다거나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는 효율을 제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다소 맞지 않는 구절을 떠올린 것일지 모르겠으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서두를 아우르던,
'일생에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는 부분이 머릿 속을 스쳤다.
두 번을 읽고서야 정말로 읽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읽을 기회가 있다면 '두 번은 없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쿤데라의 말을 빌려 쓸 수도 있을 테다.

김성중의 단편을 겨우 두 개 읽었지만 작가의 소설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었다.
아니다. 겨우 두 개라고 할 수 없다. 그 안에 들인 작가의 공력을 생각한다면
그 두 편 속에 어쩌면 작가의 두 계절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한 계절에 단편 하나를 발표한다고 생각하다면 말이다.)
처음에 소설들이 독자를 이끌어가는 큰 요소는 '상상력'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곰곰이, 의도치 않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작가가 장악하고 있는 부분은
상상력이 아니라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존재론적 물음'이라고 나름의 답을 내리게 되었다.
  

첫 번째 단편 <허공의 아이들>에서는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26)였고
두 번째 단편 <그림자>에서는 자아라는 연속성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대체 무슨 존재란 말인가(44)였다. 
그리고 그 물음을 끌어낸 매개체 혹은 묻기 위해 발견된 상징물이 '허공'이었고 '그림자'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한 점이 시를 써보려 했을 때, 내가 흔히 겪었던 시의 메커니즘을 상기시켰다.
당시 나한테는 그런 심오한 질문 같은 것이 없었고, 그래서 빈약한 상상력과 언어의 조합에 기대려했기 때문에
쓸 때마다 자신을 소비시키는 혼곤함만 지속 될 뿐이었다.
혼돈 속에서 글쓰기라는 행위자체에 소비되지 않으려면 작가는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작가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부분이고, 좋아하는 작가들에게는 언제나 그런 것을 읽어왔다. 
 
김성중이 '좋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건 내가 부족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의 소설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림자>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를 할 생각이지만
시간을 더 갖는다고 해서 정연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대로 읽은 만큼 생각한 만큼 뒤죽박죽이 되겠지만
예전처럼 이 과정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그게 예쁘지 않다고 버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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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10-1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맨, 허공의 아이들,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맞나요...?)를 각각 다른 곳에서 보았던 기억이 나요. 김토끼 님은, 토끼니까, 빨간 눈이 어쩐지 어울려요.

김토끼 2011-10-21 09: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 세 개의 소설 모두 김성중 소설가의 작품입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눈이 시리네요. 빨간 눈이 싫어요 ㅠ 그래도 어울린다는 말은 어딘지 듣기 좋은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잠을 많이 자고 원래대로 돌아가야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