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단편 <방>과 '방'과 쓰기의 삶
 

때때로 방의 독점을 꿈꾸는 이가 '내 방을 갖고 싶다'고 희구할 때, 그/그녀에게는 고립에 대한 의지가 읽힌다. 자매/남매/형제로 구성된 그러나 부유하지 않은 가정의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공동의 '방'을 갖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나눈다는 의미 외에 개인의 내밀성이 자라날 토양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인지, 어릴 적부터 '내 방'을 갖는 게 소원인 이들이 적지 않다.(어떤 이에게는 한 번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므로 더욱 그렇다.)  

또 '방'이라는 공간에 골몰해 밖으로 자주 나오지 않는 이를 오랜 만에 '바깥 세상'(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방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에서 만날 경우, 그들과 뭔가 공유하려는 것은 힘든 작업이 된다.(정말로 그것은 하나의 사무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말이 없고,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많은 부분 잊었고, 그만큼 자신에게 집중해있어, 둘의 관계에서 뭔가 시도 할 때, 나는 그들의 무심을 견뎌야 한다.) 왜냐면 그들이 혼자 '방'에서 지내는 동안 달팽이처럼 견고한 '껍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껍질은 자신을 지키는 '성벽'이기도 하지만, 성벽이 단단한 만큼 외부의 접근도 그에 비례해 빈약해진다. 곧 그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일종의 '장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방'이 장애가 되리라는 점,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견디는 데 삶의 의의를 둔다. 그리고 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이 갖는 내밀한 속성 때문인지, 문학에서도 종종 '방'은 작품의 모티프로 작용한다. 글을 쓰기 위해 집/방을 점유하고 싶은 사람을 화자로 내세운 이승우의 단편 <방>도 그러하다. 애초에 쓴다는 행위는 협업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때의 협업은 더 치밀하게 정의 되어야 한다. 혼자만의 행위 이상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단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물질적 가치들이 과잉생산되자 인간은 '잉여 시간'을 갖게 되고, 그 잉여가 자연스럽게 예술 쪽으로 흐르게 된 역사의 전개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 그것은 시간의 잉여만이 아닌 공간의 잉여가 발생한 지점에 대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산업화와 함께 개인적인 공간이 탄생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공간은 검은 옷을 두르고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던 수도사에 한정된, 즉 수도원에서나 등장할 법한 개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계를 위해 공동생활은 필수였다. 그러나 가내/길드적 협업의 형태로 생계를 이어가던 삶의 방식은 공업의 발달로 달라졌다. 협업은 '근무시간'에만 활성되는 '근무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사무가 끝난 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방을 갈망하게 되고(곧 혼자만의 시간을 희망하게 되고), 그 공간의 협소와 침묵을 사랑하며 그곳에 머무른다.(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은 산업화로 인해 성장했다/이에 더해 내면의 발달은 책의 분량을 늘렸고,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소리 내 읽지 않는 '묵독'에 길들여졌다. 이러한 묵독은 다시 내면의 발달에 기여한다.)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그런 공간을 열망한다. '쓰는 사람'들에게 '쓴다'는 행위가 주(主)가 되고, '쓰는 공간'은 객(客)이 된다 흔히 여겨지지만, 많은 경우 주(主)는 '쓰는 공간'이다. 쓰는 행위의 부속물인 '글'은 그러한 공간에서 파생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가상의 인물을 빌어 '자기만의 방'을 주창할 때, 그녀가 강조한 것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의 소유였다. 그러한 소유를 위해 여성에게 사회적 지위와 돈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이승우의 단편 <방>에서도 글을 쓰는 화자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글을 쓸 공간이다. 그 공간은 단지 혼자만 남겨질 수 있는 상황을 전제할 뿐 아니라, 자신을 쓰게 할 사연/내력을 가진 공간이어야 한다.  

 



 "책상에서 눈을 들어 둘러보면 사면에 들어찬 물건들이 감시병처럼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간이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았다. 때때로 내가 창고에 쟁여진 물건과 다름없이 여겨져서 마음이 심란했다. 나는 자주 집에서 나와 배회했다. 일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마련하고 찻집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음은 급한데 한 줄의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바깥을 떠도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172) 

 



이승우 단편 <방>의 화자는 아내와 아이를 미국으로 떠나 보낸 뒤 10년 8개월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쓴다.(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때때로 소설을 발표한 무명의 소설가이다.) 이때 소설쓰기는 그의 정당한 목적이 아니라 핑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를 뒷바라지 하면서 전부터 파열되어 있던 부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 뒤 원래 살던 집을 팔아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화자는 집에 혼자 남게 된다. '혼자'라는 물리성만은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만 그는 쓰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런 중 자신이 원래 살던 집(큰어머니의 배설물과 땀과 약물 냄새가 남아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뭔가 쓸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의 집을 아들의 신혼집으로 샀던 노인이 아들이 파혼하면서 집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화자는 부동산중개업자를 통해 노인의 허락을 구하고, 언제든 나가라고 하면 나갈 것을 조건으로 그 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비로소 화자는 뭔가 쓰게 되고, 이때 화자를 쓰게 하는 힘은 죽은 큰어머니가 살아 있던 당시 남겨 놓은 다소 역겨운 냄새다.(여기에 그간 빈 집에 들어와서 살 것이라 예상된 집없는 노인의 이야기도 들어간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이와 잠재적인 동거 형태로 살아가며, 이 공간에 익숙해져 가는 화자 역시 기괴하다.) 
 


 
"한때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큰어머니가 몸도 불편하고 정신까지 가물가물하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서울에서의 매일매일의 생활이 전투와 같아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고 해도 큰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긴 무관심은 부끄러운 일이었다."(164) 

 
"집을 팔면 되잖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을 때, 마치 자기 돈을 들여 산 집이니 자기에게 권리가 있다고 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묘했다. 그것은 단순히 집을 팔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집이라는 단어를 발음함으로써 통상 은연중에 암시하는 가족으로서의 삶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꼭 집어 말하자면 집의 분해였다."(167)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반복되는 '냄새'는 화자가 짊어진 부채의식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큰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만은 아니다. 큰어머니를 투과해 보여지는 자신의 잔인성에 대한 죄의식이기도 하다. 아내를, 아이를, 큰어머니를, 아내의 부모를 언급할 때, 화자가 관계맺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자신이 옳은 듯 행동하지만, 여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씁쓸한 느낌을 남게 한다. 이런 느낌 속에는 그가 소설 곳곳에서 토로하는 죄의식이 묻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냄새로 인해 그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큰어머니의 존재만은 아닐 것이라 유추하게 된다. 냄새가 환기시키는 것은 그 자신이며,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죄의식이다.(이승우의 소설에서 '죄의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의 죄의식은 그의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양상이 아닌, 다른 양상으로 뻗어간다. 그것은 쓰려는 의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그를 쓰게 만들고, 화자는 그런 의지 속에 산다는 것을 즐기는 듯 하다.)  

 

  
"어느 순간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상관없어졌을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소설을 한 편 썼다." (184) 

 

무언가를 위해 '수단'을 필요로 할 때 일단은 수단의 성취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성취의 영역으로 분류되지 않기에, 하고 싶다/갖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그에 대한 어려움이 수반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해결한 뒤 우리가 쉬운 상태로 들어갔을 때, 즉 그것을 지배할 힘을 가졌을 때, 그토록 원하던 무엇은 그야말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며, 우리는 종종 그 지점을 '끝'으로 착각한다. 이승우 소설에서 '방'의 성취는 화자에게 그런 환각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환각이 '쓰는 삶'을 연장시킨다.  

환각이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다는 전제에서, 환각과 쓰기의 순환을 유추할 때, 영화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수 있다.(니콜 키드먼이 만년필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써내려가며 입술로 문장을 웅얼거리는 장면 때문에, 나는 영화를 수 차례 돌려봤다. 쓴다는 행위는, 그것의 행위자가 느끼는 것 만큼이나 지켜보는 이에게도 매혹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너무 깊이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진실에 닿기 때문에 현실의 이면을 뜨겁게 느끼는 사람이다.(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부적응자가 된 사람들의 순수는 매력이라기보다 위협이다.) 그녀에게는 지나친 진실이 환각이고, 그 환각은 그녀에게 펜을 잡게 한다.(쓰고 싶다는 유혹에는 세상의 비밀 한 조각을 발견한 것 같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열망이 있다. 아마도 작가들은 그런 열망을 끝까지 붙잡는 사람들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력 아래 현대를 살아가는 로라와 클라리사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기 이전에 스스로가 열망하는 세계를 먼저 인지했다. 그래서 세상이 정한 윤리가 그들에게는 맞지 않고, 그들은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가지만, 그런 억누름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폭발할 때 뿐이다. 그들이 폭발하지 않기 위해 부여잡은 끈은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글'이었고, 로라 브라운에게는 '댈러웨이 부인'이었고, 클라리사 본에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환생인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 끈이 목을 조르기도 한다.)   



앞서 '방'의 필요를 강조한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보다 사적 공간을 필요로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장 원했던 장소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였고, 리치몬드에서의 요양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회복보다 런던의 고독을 더욱 갈망했다. 이것은 도시화 된 지역에서 사적인 공간이 필요를 동반하여 나타났다는 점과 맥락이 닿는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는 고독이라는 그림자를 갖는다. 그것의 속도가 누군가를 동반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고, 나아가는 존재 자신이 동반자를 거부하기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방을 갖고 싶다'는 발언은,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보다 빠를 수 수도 느릴 수도 있으나,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릴 것이다. (방이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방을 가진 순간, 정체가 불분명한 열망에 휩싸여, 자신만의 속도로 공책을 펼치고, 자신만의 속도로 펜을 들어, 자신만의 속도로 어떤 문장을 웅얼거리며 빈 공간을 채워갈지 모를 일이다.   

 
 


 
* 인용_이승우, <오래된 일기>,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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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1-11-13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 작가 소설은,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았을 뿐인데, 우연찮게도 며칠 전에 2010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집을 보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두번째 문단은 상당히 뜨끔, 한데요 ㅎㅎ

김토끼 2011-11-14 13:18   좋아요 0 | URL
'칼'이었죠? 저도 마지막 서너장을 못 보고 도서관에서 나온 기억이 있는데, 다시 봐야겠지 싶습니다. 방금 두 번째 문단을 다시 보고 왔는데 저리 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저는 ㅎ 그렇지만 밖에도 종종 나오세요ㅎ 건강해야 방콕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