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오렌지색 틴트를 바르고 나오면서, 가방에 넣어야 할 틴트를 바닥에 떨쳐버렸다. 유리로 된 틴트 병이 산산조각이 났고, 바닥과 문에 주홍빛 틴트가 튀었다. 한 명의 여자아이가 립스틱을 바르다가 거울로 나를 힐긋 보았다. 휴지를 말아쥐고 바닥을 닦는데, 립스틱을 다 바른 여자 아이가 말끔한 얼굴로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나갈 때 유리조각을 조심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운동화에 점점이 물든 오렌지색 틴트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와, 며칠 만이던가, 누군가 날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버린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소문은 사실일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피로를 느끼며 나는 그 아이의 차 뒷자석에 앉았다. 조수석에는 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고, 잘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조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서로 기분이 상할 일은 없었지만 우리 사이의 공기가 평화롭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였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차 안에서 깨진 틴트 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홍색 틴트로 마음에 드는 것이었고,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데다가 용량이 적은 데 4만원이 넘는, 브랜드 제품이지만, 그것이 깨졌을 때 왠지 후련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은 웃었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때 난 뭔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과산화수소 냄새 같은 게 났었는데, 이제 그런 것을 맡을 일도 없어졌고, 본래의 입술색을 죽이고 다른 색을 덧칠하던 행동을 당분간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안도감이었다. 며칠간 화장할 시간이 없어서 맨 얼굴로 밖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화장을 공들여 하는 타입도 아니고, 오히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베이스 메이크업만 하는 편인데, 그 정도도 하지 않고 깨끗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을 때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틴트가 깨졌을 때 어렴풋이 느끼던 홀가분함이 바로 그 기분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자의든 타의든 포기된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사실 후련한 기분 속에 상쾌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불안이 떨쳐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도착한 시내에서 우리들은 피자를 먹었다. 나는 작은 피자 두 조각 먹었다.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다. 더 먹고 싶지도 않았고 왠지 먹다가 잠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틴트가 깨졌을 때, 아마 그 때부터였을까, 난 그때부터 잠이오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잠들고 싶은 욕구 같은 건 없었지만 사람들 속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게 힘들었다. 아니면 나는 몰랐던 것이다. 소문이든 아니든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을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여튼 지금의 나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틴트가 깨졌어, 조금 불안하군, 앞으로 뭔가 운명이라는 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더 재미를 느꼈다. 

피자를 먹고 스타벅스에 갔다. 두유가 들어간 차이라떼를 시켰다. 너무 달았고, 차이 향이 강해서 정신이 없었다. 스트로우를 입에서 떼지 않고 순식간에 삼분의 이를 들이켰다. 일행은 우연히 내 앞의 컵을 손에 들어보고 그 가벼움에 좀 놀랐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게 맛있어나, 라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빨리 먹었군, 대단하다, 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것이 맛있다 맛이없다를 인식할 만큼 분명한 의식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입술에 달라붙어 있는 스트로우로 뭔가를 들이켰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시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나는 그 시시한 이야기가 뭔가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것에 일조하면서, 이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뭐든 공부를 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게 뭐든, 계속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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