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관모 선생이 아마 답변을 해주실 것 같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notion에 대해서, 진선배님이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전에 읽을 때에도 그랬는데, 그 용어해설 항목의 제목은 common no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notion에 대한 설명은 적고 common notion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명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common notion이 "모든 사람(또는 다수의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인식"이라면, 즉 common notion이 일반인들에게 어느정도 공통된 관념이라면, notion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식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common이라는 말이 따로 붙어 있는 common notion에는 저러한 설명이 적절할 수 있으나 common이라는 수식이 없는 notion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나 합니다. 

왜 진선배님의 설명에서 이 두 가지가, 즉 common notion과 notion의 설명이 뒤섞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notion을 진선배님이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뒤섞임은 common notion의 번역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할 경우, common notion은 '공통의 통념' 내지 '공통통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역전앞'과 같이 동어반복적인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선배님 말처럼 common notion이 어떤 맥락에서 실천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실천적인 "합리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common notion은 단순한 통념이 아니며 또 그렇다고 개념도 아니지만(특히 {신학-정치론}의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합리적 인식"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common notion은 "공통의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notion이 갖는 가치를 지시해줄 수 있는 '기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어에는 이런 기표가 없기 때문에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과거에 '상념'으로 옮겼었는데, 제가 그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음이의어가 되고 원래 사용되는 상념의 뜻과 자신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추측이지만, 과거에도 서관모 선생이 '항상 상'자를 선택
한 것을 보면, 아마 notion이란 어떤 의미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뜻 의'자를 써서 의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한결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역량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린 것 이상을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단 용례를 보자면,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역량)와 potestas(권력)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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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x 2007-09-2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의 역능..', '자본의 역량'이라는 번역 만큼이나 많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번역이군요. potentia-puissance가 어떤 활성으로 행위를 유발케하는 잠재력을 의미하고, potestas-pouvoir가 이미 유발된 힘이 작동하는 행위로서의 현존하는 힘(권력)을 의미한다면, potentia를 '역능'이나 '역량'보다는 '추동력'(계속적으로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으로 '잠재력'이라는 번역으로는 불충분한 어감를 보충해주기에)이라고 번역하고, potestas는 '권력'으로, force는 그냥 '힘'으로, dynamique은 '동력'(힘(force)들의 연대하는 작동)으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요즘 신문의 정치난을 보자면 그냥 '능력'이라고 해도될 것을 너도나도 굳이 '역량'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것이 몹시 불편하고 그때마다 왠지모르게 얼굴도 모르는 이곳의 주인장이 생각나더군요. 철학용어의 속화는 역설적이게도 대중이 철학적 언술을 오독하게하는 부정적 효과로 귀결되지는 않을런지... 그렇다고 서관모 선생처럼 있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용어를 힘써 만들어내는 것은 더 부정적인 효과를 낳겠지요. 15년전 '이론'지 처음 나올 때 그의 글들은 내용은 백번 쫓고픈데 읽어내기에 심히 짜증나는 것으로, 사람들이 다가가다 도망가게 만드는 역능이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군요. -사족-]

upx 2007-09-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notion은 '의념'도 '통념'도 아닌 그냥 약한 의미의 '개념'으로 저는 이해하고 표현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balibar 인용문에서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이라고 번역을 한다해서 여기서의 개념이 concept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문맥상 충분히 이해 못할 바가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즉, notion은 약한'개념'(엄밀한 철학적 함의가 없는 그냥 '--이라는 말(혹은 개념)')으로, concept는 강한'개념'(엄밀히 철학적으로 정의되는)으로, 모두 '개념'으로 번역하고 그 차이는 문맥 속에서 독자가 판단하기에 지난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물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역자가 주석을 달아주면되고요). 또한 우리는 '개념'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만('개념없는 놈'등등), 이 경우의 '개념'이 꼭 concept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짱꿀라 2007-09-2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곳에 오면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글들이 참 가치가 있는 것들이 많아서 좋아요. 배우는 기분으로 글들을 잘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 2007-09-2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 님/ "자신의 개념이 공통개념이 되도록"에서 그 "개념"은 concept와 문맥상에서 구분이 안됩니다. 자신의 concept가 공통된 concept가 되도록...이라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요. 그것이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미 upx님이 공통의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능'이라는 말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미 많이 대중화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느껴지기로는, upx님의 포텐샤, 포테스타스 구분은 너무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보입니다. 즉 잠재성(potentiality, dynamis), 행위(action, activity, energeia)로요. 그리고 이건 뭐 저의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저는 서관모 선생의 글들이 항상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비해서 수월하게 읽히고 비교적 의미전달이 잘 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론지가 나올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워낙 다루는 내용이 낯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진태원 선배와 같이 용어들과 번역들을 대중들이 사용하기 좋고 의사소통하기 쉬운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정은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일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번 {대중들의 공포}가 인터넷의 어떤 사람의 말처럼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를 자극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upx 2007-09-21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자신의개념'이나 '공통개념'에서의 개념이 concept로 이해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전혀 불가능한('충분히 읽을 수'가 아니라)일인 것 같습니다. 개념이란 당연히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 철학자 마다 달리 규정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특정인에게는) 카테고리적으로 정의된 규정이고(concept de nature, concept d'homme, etc.), '나의개념'이나 '공통개념'이라고 말할 때에는 내가 (혹은 공통으로) 갖는 무엇에 대한 의미,기준,인식,등을 나타내는 약한 규정이므로 당연히 notion 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다고 저는 봅니다. 여기서 notion이란 개념이라고 명명은 되더라도 의미는 전혀 concept가 아니라 직관적이고 불확정적인 준거, 즉 '무엇 무엇이라는 말' 혹은 '어떤 것' 정도가 되리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만...
2. '포텐시아'나 '포테스타스'가 '너무 아리스토테레스적으로' 이해돼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것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스피노자 등 후세인들이 달리 특수하게 사용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아주 많이 특수하게 사용했다고도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이 특수한 경우를 예외적으로 고려하고 설명하는 것이 옳지않을까 싶군요.
3. 철학이 전혀 대중에게 공포가 아니라 친숙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걸 핑계로 말과 논리를 혼란스럽게 다룬다면 그 또한 철학이 아니겠지요. 근데 저는 그동안 남한의 철학자들 특히 진보계열 철학자들의 글에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더 많이 느꼈고 그래서 그곳으로부터(계열이 아니라 땅에서) 도망쳤습니다. (최원님이나 진태원님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역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몇몇 글에서 충분히 느꼈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 제 입장이니 오해는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최원 2007-09-22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upx님/notion de nature, notion d'homme라는 말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말입니다. nature나 homme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concept만 되고 다른 것들은 notion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두 번째 논점에서는 포텐샤/포테스타스가 스피노자에게서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dynamis가 능동/행동에 대립된다는 의미에서의 잠재성의 뜻을 갖지만, 스피노자에게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고 현대 일반 불어 용법에서 puissance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으로도, 또 스피노자의 그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일괄적으로 '역량'으로 옮기거나, 또는 일괄적으로 '추동력'이라고 옮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 다 권력이라는 측면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여러가지 말들로 마구 옮기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무슨말이 무슨말을 가리키는지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말을 활용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이 신조어를 남발해서는 안되지만, notion, puissance 등은 그 동안 논란이 매우 오래동안 있어왔고, 그래서 신조어에 대한 요구도 있는만큼, 만들어질 경우 수용력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글을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곧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수록될 용어 해설 중

하나입니다. 보통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굳이 "현전"이라는 낯선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바꿔 표현했습니다. 이 개념은 복합적인 쟁점들이

얽혀 있어서 전문적으로 다루려면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인데, 개략적으로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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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형이상학 métaphysique de la présence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데리다의 초기 작업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따라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데,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작업과 이른바 “전회Kehre” 이후(대략 니체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전개되는 후기의 작업으로 구별된다. 초기 하이데거의 작업은 현존재Dasein의 분석으로서 기초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이러저러한 측면이나 영역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는 작업으로서 모든 학문은 인간 현존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기 주위의 존재자들과 맺고 있는 실천적인 관계(후설이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특수한 존재자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 자체를 해명하려는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실존”)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바로 기초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전회 이후에 하이데거는 더 이상 인간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자체의 사태에서 출발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철학이 형이상학화되기 이전의 사상, 곧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에 나타난 존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본문에서 논의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이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현존présence”(독일어로는 Anwesen)으로서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곧 이들에게는 존재가,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나타난다(또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탈은폐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벌써 존재의 망각이 일어나서 존재는 더 이상 이러한 현존하게 해줌의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어떤 항구적인 실체로, 곧 “현존자présent”(das Anwesende) 내지 “현존성”(Anwesenheit)으로 간주된다(하이데거에 따르면 우시아ousia, 수브스탄시아substantia, 코기토cogito 등과 같은 서양 철학사의 근간 개념들은 이러한 존재 망각의 표현들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에서 탈은폐되었던 존재(곧 현존하는 것들을 현존하게 해주는 선사의 사건으로서 존재)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자체는 하이데거가 아니라 데리다가 붙인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논의를 따라 서양의 형이상학을 포괄적으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와 달리 전 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사에 속한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이데거 자신도 여전히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데리다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기의와 기표, 또는 음성과 기록의 문제로 나타난다. 곧 그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생생하게, 현존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루소나 헤겔 또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의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가 생생하게 구현되는 자연적인 매체로 음성을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심지어 배반하기도 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중심주의이자 음성중심주의를 뜻하며(나중에는 특히 라캉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는 팔루스중심주의로 확장된다), 이것이 로고스의 자연적인 발현 장소로서 음성을 특권화하는 한에서 이는 또한 기술에 대한 폄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존재의 부름l'appel de l'être”이나 “존재의 목소리voix de l'être” 같이 음성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모호한 은유에 의존하고, 또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 기록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로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는 초기 데리다의 저작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80년대 이후의 후기 작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초기 저작에서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해체”(또는 “극복Überwindung”)의 주요 개념인 “es gibt”(보통 사용되는 의미로 한다면 “~이 있다”)나 “Ereignis”(보통은 “사건”을 의미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 함축된 “고유한eigen”이라는 어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는 “장래Zukunft” 등에 대한 논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법의 힘}이나 {시간의 선사Donner le temps}(1992), {마르크스의 유령들} 또는 {아포리아}(1996) 등에서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또 변용되고 있다(“장래avenir”와 “도래à-venir”, “도착하는 이arrivant”, “선사don”, “임박함imminence”, “사건”, “전유”, “비전유”, “탈전유” 등이 그 사례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서양 형이상학 해체는 데리다 철학의 주요 원천이면서 또 가장 중요한 대결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를 자신의 유령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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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이 좀 늦었습니다. 서관모 선생이 무언가 답변을 주실까 했더니,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군요. 그래서 먼저 최원 형 댓글에 답변을 하면서 약간의 논의를 더 보충해보겠습니다. 

우선 civilité의 번역어는 정말 “시민인륜성”이 아니라 “시민인륜”이더군요. 헤겔의 Sittlichkeit가 대개 “인륜성”으로 번역되기에 무심결에 “시민인륜성”으로 봤는데, 제가 좀 부주의했네요. 어쨌든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 견해는 지난 번과 같습니다.

그 다음 puissance의 번역어인 “역능”과 notion의 번역어인 “의념”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검토하자면 상당히 오랜 논의가 될 듯해서 오늘은 다음과 같은 정도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제가 주소를 달아놓은 프랑스 사전에 나온 notion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이라는 단어에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A. “어떤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이라는 의미지요.

B. 두 번째는 “정신의 구성물, 표상”이라는 뜻으로, 관념과 동의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C. 마지막으로 철학에서 쓰이는 특수한 어법에서는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개념과 동의어로 쓰인다고 덧붙이고 있고요.


그리고 각각의 항목에 대해 몇 가지 사례들이 나와 있고, 또 각각의 항목에서 약간의 변이형도 보여주고 있지요.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엄밀한 정의라기보다는 이런저런 용례들에 대한 규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러한 정의들은 불어에서 쓰이는 notion에 대한 용법들을 상당히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전의 정의에 대해 제 나름대로 몇 가지 논평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otion에 관한 불어의 용법에서는 일상적인 의미로 쓰이는 notion과 철학에서 전문적으로 쓰이는 notion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독일어에서 notion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어의 용법은 불어와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불어의 용법에 비해, 모호함, 확실한 증거 없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신뢰를 보내는 관념 같은 의미가 좀더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사전들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www.hydroponicsearch.com/spelling/simplesearch/query_term-notion/database-!/strategy-exact; http://dict.die.net/notion/)

일상적인 용법으로 본다면 notion은 사실 별도의 번역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가 쓰이는 상황에 따라, “관념”이라든가 “개념”, “용어”라든가, 또는 그냥 “말”이라고 번역해주면 무난하겠지요. 가령 “la notion d'espace”나 “la notion de cause” 같은 것들은 “공간 개념”이나 “원인 개념”으로 번역해도 좋고 아니면 “공간이라는 관념”이나 “원인이라는 관념” 또는 “공간이라는 용어”나 “원인이라는 용어” 같은 식으로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그런 게 자연스럽기도 하죠.

이 경우 각각의 경우에 “의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한다면, 사실 매우 어색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반면 “통념”이라는 단어를 대체해본다면, 적어도 “의념”이라는 단어보다는 훨씬 덜 어색하게 들리리라고 봅니다. 그건 그만큼 통념이라는 말이 훨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고, 이 경우에 notion이라는 불어 단어가 불어권에서 쓰이는 용어법과 좀더 가까운 용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뒤에서 더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철학적인 용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전의 정의는 상당히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전에서는 notion을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함축하는 것”으로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념”이라고 규정하면서 개념과 동의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실 굳이 notion에 대한 다른 용어를 고려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개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충분합니다. 

이 사전은 철학 사전이 아니므로, 사실 어떤 점에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불어 사전임에도 불구하고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 다시 말해서 알튀세르나 푸코, 또는 바디우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 상당히 널리 통용되고 있는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초기 바디우(특히 “Le concept de modèle” 같은 저작)에서 notion은 전과학적ㆍ이데올로기적인 표상들, 관념들을 가리키는 반면, concept는 과학적 개념, 인식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뜻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바슐라르가 창시하고 알튀세리엥들이 개조한 “절단coupure” 및 “단절rupture”의 인식론에 의거하고 있는 용어법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 {이론} 95년 겨울호를 참고할 수 있겠죠.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발리바르의 원래 논문 제목은 “coupure épistémologique”인데, 서관모 선생은 번역본에서 이를 “인식론적 절단”이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서관모 선생은 162쪽에 붙인 역주에서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 개념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바슐라르의 rupture를 coupure로 개명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알튀세르 자신도 80년대에는 별도로 coupure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rupture라는 용어를 쓴다”고 지적하면서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단절”이라고 번역하고 있지요. 그 대신 양자를 구별하기 위해 원어를 병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좀 사실과 어긋납니다. 알튀세르는 단순히 rupture를 coupure로 대체한 게 아니라, 두 개념을 구별해서 함께 쓰고 있습니다(Éci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에 수록된, “Sur la philosophie”라는 장을 보십시오. 특히 pp. 318 이하). 이건 발리바르도 마찬가지지요(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중에서 3장 “coupure et refont” 참조). 물론 두 사람이 이 두 가지 개념을 가공하는 방식에는 얼마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합니다.  

따라서 “coupure”와 “rupture”는 서로 구별되는 용어로 번역하는 게 옳을 것 같더군요. “coupure”라는 단어가 “자르다”는 뜻을 지닌 “couper” 동사에서 나온 말이므로, “절단”이라는 번역어가 괜찮다고 봅니다. 언젠가 Gregory Elliott의 글을 보니까 “coupure épistémologique”를 “epistemological cut”이라고 옮기던데, 상당히 정확한 번역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 번역문에서 서관모 선생은 notion을 “상념(常念)”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왜 “상념”이라는 번역어가 “의념”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로 대체되었는지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서 선생은 이때부터 계속 notion의 번역어에 대해 관심을 가져오신 듯합니다.

다시 원래 논점으로 돌아가자면,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concept와 notion의 의미상의 차이는 서 선생이 “용어 해설”에서 인용하는 두 개의 사전에서 좀더 잘 드러난다고 봅니다. 곧 concept는 엄밀하고 정확한 이론적인 구성물에 해당하는 반면, notion은 이러한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서관모 선생은 두 개의 사전을 인용하면서, notion의 또 다른 의미에 주목합니다. 곧 서 선생은 notion은 제한된 집단이나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은 서 선생의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념”이라는 역어는 notion에 “通”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總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통념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 생각”,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인데, notion 일반은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다”는 한정/특정과 무관하다.”(11쪽)

그런데 왜 서 선생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서 선생이 인용하는 사전에 나오는 다음 밑줄 친 구절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상적인 프랑스어에서 concept는 과학, 철학, 이론의 엄밀하고 정확한 구성물에만 사용되고, 일반적으로는 조직화되고 통제된 지식 활동에 사용된다. ... notion은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사용되나, 엄밀하거나 정확한 정의를 전제로 [p. 10] 사용하지는 않는다.”(Alain Rey, La terminologie, PUF, 2001)”(9쪽)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번역어 대신 “의념”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notion은 결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conception 또는 한 사회 집단에 의해 수용된 conception>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 선생이 <용어 해설> 마지막에서 “[의념은] “총념”이나 “통념”에 비해 훨씬 덜 한정된 “념”이기에 notion의 역어로 상대적으로 무난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하면 중국에서 이 단어가 최근 notion의 번역어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가적인 논거인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는 좀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Alain Rey가 notion에 대해 저런 식의 정의를 제시할 때 염두에 두는 notion이 과연 어떤 용례로 사용된 것인지는 인용된 부분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구절 하나에 의거해서 notion이 제한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서관모 선생이 인용하는 첫 번째 사전에서는 notion이 ““정신이 획득한 일반적인 관념, 이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제공하지만 그러나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그러한 관념이다.”(La notion philosophique 2, PUF, 1990, p. 1771)”(9쪽)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관모 선생은 첫 번째 사전을 인용하기 전에 “현대 프랑스어에서 notion의 사전적 정의는”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지금 인용된 이 내용은 현대 불어의 용법이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notion 또는 notio가 가리키는 의미를 뜻합니다. 이 인용문은 La notion philosophique 2에 나오는 “notion” 항목의 첫 번째 대목을 옮긴 것인데, 이 항목에서는 스토아학파에서 칸트에 이르는 notion의 내용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고, 이 대목은 스토아학파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서관모 선생이 “통념”이라는 역어 대신 “의념”을 제안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서 선생의 주장과는 반대로 notion은 오히려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단 이 때 “받아들인다”는 말은 엄밀하게 학문적인 논증을 거쳐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개념적으로, 예컨대 아인슈타인이 부여하는 개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또 사용하고 있을까요? 물리학자들의 전문적인 학술회의나 대화에서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야말로 “통념적”으로 쓰는 거지요. 곧 사람들 각자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해하는 어떤 관념, 어떤 통념에 따라 그 말을 쓰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는 대개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개의 사람들은 시간은 1초, 2초, 3초, 1분, 2분, 3분, 1시간, 2시간 등등과 같이 정해진 단위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흐름으로, 공간은 어떤 물리적인 실재들이 들어 있는 텅 비어 있는 틀로 이해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시간과 공간 개념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식의 철학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갈릴레이가 상대성 개념을 도입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단절한지 대략 400여년의 시간이 흘렀고, 아인슈타인이 다시 이를 엄밀한 물리학적 개념으로 개조한지는 100여년이 흘렀지만, 보통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여전히 “통념적인” 상태, “notionnel”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튀세르가 concept와 notion을 구별할 때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푸코에서도 이와 비슷한 용법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푸코는 알튀세르와 상당히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가령 [정신착란의 초월성transcendance du délire]라는 제목이 붙은(국역본에는 [정신착란의 선험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광기의 역사} 2부 2장(및 3-4장)을 보면, “notion”에 관한 상당히 체계적인 용법이 나옵니다. 여기서 푸코가 notions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전주의 시기에 의사나 철학자들이 광기를 분류하고 치료법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비과학적인 명칭들(과학으로서 정신의학은 19세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을 가리킵니다. 푸코는 이러한 명칭들을 가리키기 위해 아주 체계적으로 no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요. 예컨대 다음 구절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notions은 의학적 사유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기능보다는 오히려 의학적 사유의 실제적 작용에 더 가깝다. 윌리스의 노력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notionsdlsep, 그는 조광증과 우울증의 순환주기에 관한 커다란 원칙을 그 notions에 입각하여 세울 수 있게 된다. ... 그것들은 엄격한 개념정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상적 응집성에 의해 안정된 형상을 강요하면서 의학의 작업과 일체가 되었으며 ...”({광기의 역사} 이규현 옮김, 나남사, 2003, 340-41쪽)

지나가는 김에 지적한다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역자는 notion을 전부 “선험적 개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자는 특별히 역주를 하나 붙여서 여기서 notion은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 말하는 ‘오성의 산물’”(340-41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혀 그릇된 설명이지요. 칸트에서 no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칸트의 용법은 매우 특수할뿐더러 푸코가 사용하는 notion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자의 그릇된 설명 때문에 국내 독자들이 {광기의 역사} 2부 2-4장에 나오는 푸코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이 책의 번역 상태는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지만, 주요한 철학적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꽤 많은 오역들이 있어서, 이 번역본을 기초로 학문적인 논의를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하루빨리 상당한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푸코의 용법은, 바슐라르 이래 프랑스 철학자들, 특히 구조주의-과학철학 노선에 속하는 철학자들에게 concept와 notion의 구별은 나름대로 상당히 일반화된 용법이었다는 점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통념”이 적합하며, 굳이 “의념” 같은 단어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저는 “의념”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단학을 하는 분들이 사용하는 용어더군요. 그 분들은 이 단어에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마음을 어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더군요. 그래서 서 선생이 이런 의미를 아시고 “의념”이라는 단어를 제안하신 것인지, 또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더군요.

puissance에 관해 보자면, 저는 인터넷 서점에 나온 간략한 소개글에 “역능”이라는 단어가 보이길래 puissance를 이 단어로 번역했나보다 생각했는데, 스피노자의 맥락에서는 “역량”으로, 보통의 맥락에서는 “역능”으로 번역했나 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스피노자 때문에 puissance를 “역능”으로 번역해서 쓰는데, 최원 형이나 서 선생의 경우는 반대군요. ㅎㅎ

어쨌든 간에 저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역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봅니다. 스피노자가 이 개념에 대해 얼마간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에게만 고유한 번역어를 따로 쓴다든지, 스피노자 때문에 “역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잠재태나 가능태와 다른 의미에서 puissance라는 개념은 상당히 오랜 전통을 지닌 개념이고, 스피노자를 포함해서 이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얼마간의 차이는 있지만, dynamis/potentia/puissance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전통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대해서만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가령 스토아학파나 플로티누스, 또는 브루노나 니체 등에 대해서도 각각 상이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게 될 경우 dynamis/potentia/puissance가 갖는 개념적인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최원 형은 “역능”이라는 단어가 일부 국어사전에 나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이 단어는 주로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만 사용하는 용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일부 국어사전에 수록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어떤 학문 분야에서 모종의 필요상 이런 단어를 만들어서 쓴 것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합니다(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정서심리학에서 capacity를 “역능”이라고 번역해서 쓰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네그리나 들뢰즈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제외하고 이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그 용어가 실질적인 “용어”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요컨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역량”이라는 용어가 “역능”이라는 번역어보다 더 나은 점은 이 말이 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쓸 경우 어색함이라든가 거부감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론을 하는 분들은 이 점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번역어라는 것이 널리 쓰이기 위해서 만든 용어라면 이런 화용론적인 측면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번역어나 철학 개념으로 채택되면,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 용어는 몇몇 전공 학자들의 테두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일례로 칸트 철학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도입된 철학이지만, 칸트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그들만의 용어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예취”라든가 “통각” 또는 “오성” 같은 것들이 그렇죠. 현상학에서 사용하는 “충전성(充全性)”이나 “현전”, “현성(現成)”, “시숙(時熟)” 같은 용어들도 그런 예가 되겠죠. 좀 나쁘게 말한다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용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단어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이 용어들이 사용된다 해도 그것은 일부의 들뢰즈, 네그리 전공자들, 또 발리바르 연구자들의 테두리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최원 형은 마지막에서 “관개체성”, 곧 “transindividualité”라는 개념을 언급했는데, 이 개념은 puissance나 notion이라는 개념과는 처지가 좀 다르죠. “transindividualité”는 “trans-”라는 접두어를 추가해서 만든 신조어인 반면, puissance나 notion은 흔히 쓰이는 일상적인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조어도 가능한 한 일상 생황에서 쓰이는, 좀더 자연스럽고 편한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득이 새로운 말로 표현해야겠지만 ...

notion이나 puissance에 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벌써 상당히 이야기가 길어졌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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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중들의 공포}의 출간을 환영하면서, 이 번역본에서 사용된 몇몇 용어들에 대해

간단한 몇 가지 의문을 밝힌 바 있다. 그 글에 대해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최원 씨가 바로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좀더 활발하게 진행해보자는 뜻에서 새로

"토론"이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외국의 이론이나 사상에 많이 의존하는 곳에서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 그 개념이나 용어가

지닌 뜻을 되도록 정확히 전달하면서 동시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번역어를 고안하고 정착시키는 일은, 외래 사상을 토착화하는 데서나 국내의 논의를 좀더

활성화하는 데서 근간이 되는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러한 토론이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지난 1980년대 이래 국내에 많이 수용되어온 현대 사상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연구자는 저마다 상이한 번역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이에 따라 동일한 한 가지 외국어 용어나 개념이 2-3개 또는 심할 경우에는 6-7개의

상이한 우리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이한 번역어들의 존재는

개념에 대한 연구자들의 상이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적인

다양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좀더 공개적이고 진지한 토론이

없이는 상이한 번역어들이 제시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며, 이 경우 상이한 여러 번역어들의 존재는 독자들의

혼란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어떤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어를 모색하고 고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이나 용어가 담겨 있는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역으로 정확하고 편리한 번역어는 그만큼 그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고 다른 학문, 다른 사상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해줄 수 있다.

그만큼 정확한 번역어를 찾고 만들어내는 일, 또 그것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이론적, 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럽철학어휘사전}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지적했던 것처럼

(http://blog.aladin.co.kr/balmas/655361)

어떤 의미에서 서양 철학사는 전승된 개념들 및 외래의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의

시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토론"이라는 게시판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며칠 뒤면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될 것이며 앞으로도 내가 번역한 몇 권의 책들이

계속 나올 예정이다. 최대한 오역을 줄이고 원래 텍스트의 내용들을 정확히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오역은 번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더욱이 내가

이런저런 개념이나 용어들에 대해 새로 제시한 번역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 쉽고 편리

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다. 사실 번역어의 생명은 제안자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독자들, 대중들에게 달려 있는 한, 내 스스로 장담하고 어쩌고 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관심 덕분에 오역이나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이런저런  번역의 문제, 이론의 문제에 관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독자들과 더불어 큰 기쁨으로 생각하겠다.  

아무쪼록 새로 만든 이 "토론" 게시판이 번역어와 번역 문장, 더 나아가 이론이나

사상 일반에 관한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게

열어놓았으니까, 굳이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분들은 이 항목에 글을 써주시기 바란다.

단 상업적인 광고나 도배 문구, 그리고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되는

글들은 삭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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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9-1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밌는 게시판을 만드셨군요. :) 저는 그저 오가며 그냥 개인적인 생각 던져놓는 정도로만 가끔 참여하게 될 거 같습니다. 학문적인 의미에서 무게있는 이야기를 할 입장은 아닌지라. 근데 관련 종사자(?)들께서 많이 생각을 피력해주시면 좋을텐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요.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작 {대중들의 공포}가 마침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오랫동안 이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려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발리바르의 이 책은 지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5년 동안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책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본다면 이 책은 단순한 논문모음집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해명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아포리아와 모순들을 개조하고 전위하려는 발리바르의 이론적인 작업을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놀라운 이론적 엄밀함, 현실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 풍부하고 창의적인 문제설정들을 고루 갖춘 이 책은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최후의 걸작 중 하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 하나하나는 웬만한 책 한 권 이상의 깊이와 집약적인 논점들을 포함하고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작업들이다. 따라서 오늘날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향방에 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겠지만, 되풀이해서 읽고 토론하고 학습한다면 그만큼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해도 이 책은 지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한 권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나 장-뤽 낭시의 {세계의 의미Sens du monde},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기술과 시간Le temps et la technique}, 자크 랑시에르의 {불화La mésentente} (및 몇몇 철학사 저작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을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서관모 교수와 최원 씨 두 역자의 노고 덕분에 이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두 사람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의 상태에 대해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발리바르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고 오랫동안 그의 사상을 연구해온 역자들이기 때문에, 번역이 꼼꼼하게 잘 됐을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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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글을 쓴 김에,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의 번역에 관해 한두 가지 의문점을 적어보고 싶다.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다소 성급할지도 모르겠지만, 알라딘에서 제공되는 책 내용 보기 서비스를 통해 읽어본 바로는 이 책에서는 civilité라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시민인륜성>으로 번역하고 있고, notion이라는 단어는 <의념(意念)>으로, puissance는 <역능>으로 옮기고 있는 것 같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경우는, 선뜻 완전히 찬동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대안으로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civilité라는 개념은 번역하기 매우 까다로워서 그동안 국내에서는 <예의바름>이나 <예절>(일상적인 의미로 본다면 이 용어들이 적절할 것이다) 또는 <시민성>이나 <시민윤리> <시민문명>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 바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음만 따와서 <시빌리테>라고 사용되기도 했다(사실 썩 마음에 드는 번역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방법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의 특징은 헤겔의 개념인 Sittlichkeit의 번역어로 널리 쓰이는 <인륜성>이라는 말에 <시민>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데 있다. 이는 Sittlichkeit와 civilité의 연관성을 고려하면서도 civilité가 지닌 정치적인 함의를 좀더 강조해보려는 의도인 것 같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어로서는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어인 civilité는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단어인 데 비해 이 번역어는 국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합성어라는 데서 이러한 어색함이 생겨나는 것 같다. 번역어는 무엇보다도 쉽게 쓰일 수 있는 용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민인륜성>이라는 번역어가 지닌 어색함은 적지 않은 문제점일 수 있다.

더욱이 헤겔의 Sittlichkeit 개념이 이미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개념인 데 비해,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는 이런 함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이 번역어는 얼마간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민인륜성>이라고 번역했을 때, <인륜성>이라는 말이 지닌 비역사적이거나 비정치적인 함의가 civilité에 그대로 따라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 염려가 된다.   

그러나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현재로서는 역자들의 제안을 그냥 물리칠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당분간은 번역어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의념>이나 <역능>이라는 번역어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notion(또는 라틴어로는 notio)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관해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한 편의 논문으로(http://blog.aladin.co.kr/balmas/1059302) 내 의견을 밝힌 적이 있고, 또 조만간 서관모 선생이 제안한 이 번역어에 대해 몇 가지 반대의 논거를 제시해보고 싶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해두고 싶다.

우선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의념>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하는 논거가 그리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제안은 프랑스의 두 개의 사전에 나오는 간략한 설명과, 중국의 몇몇 학자들이 최근 notion을 이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먼저 사전은 어떤 용어나 개념에 대한 충분한 정의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그 용어의 용례들을 모아놓은 책일 뿐이라는 존 오스틴의 주장을 상기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사전은 그 용어가 어떤 용례로 쓰이는 보여주는 참고자료일 뿐이며, 좋은 사전은 그 용례를 좀더 많이, 풍부하게 보여주는 사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 선생이 전거로 제시한 사전들은 그리 좋은 사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notion 개념이 불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좀더 풍부한 용례를 보려면 오히려 다음 사전을 참조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5/advanced.exe?8;s=1169875485;) 
확인을 해봤더니 이 주소에서는 화면이 뜨지 않는데, 아래 주소로 가서 위쪽에 있는

검색창에 notion을 입력하면 해당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atilf.atilf.fr/dendien/scripts/tlfiv4/showps.exe?p=combi.htm;java=no;


더 나아가 notion이라는 용어, 특히 철학 개념으로서 notion에 대한 번역어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어떻게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고, 또 그 개념적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좀더 엄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더욱이 notion이라는 용어는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 푸코에 이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전통에서 상당히 체계적인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 선생의 “용어 해설”은 문제를 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일본이나 중국 학자가 notion을 어떤 용어로 번역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참고할 만한 것이기는 해도 그대로 우리말 번역어로 채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에 “총념”이나 “의념” 같은 말이 존재하며, 또 과거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이 한자문화권이기는 하지만, 각 나라의 문화적 전통이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다른데, 이런저런 용어를 굳이 가져다 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적어도 그것이 좀더 우리 사회, 우리 문화에 맞는 이론 작업을 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언어, 특히 단어들은 대중과 지식인이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인이 외국의 용어나 개념들에 대한 번역어를 정하기 위해 이런저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소수의 지식인들끼리의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늘 듣는 말 중 하나가 철학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고, 이런저런 개념들의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번역해서 쓰는 서양의 철학 개념들 중 상당수가 우리나라 대중들이 일상에서 쓰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언젠가 독일 유학생 중 하나가 우스개 소리로 한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어느 날 그가 집에 있을 때 창 밖에서 “Aufheben!”이라는 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다고 한다. 이 단어는 알다시피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Aufhebung, 곧 “지양”이라는 개념의 동사형이다. 헤겔을 전공하던 이 사람은 깜짝 놀라 혹시 철학자 모임이 있나 해서 창밖을 내다봤더니, 청소차가 다니면서 내는 소리였다고 한다. “쓰레기 수거!”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a priori”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철학 용어로서 “선험적”이라는 말이나 “아프리오리”라는 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를 “우선”, “먼저”라는 뜻으로 무시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양의 철학자들이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 언어의 용법과 철학 개념 사이의 연관성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파악되기 어려운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형편에 굳이 일상생활에서 쓰이지도 않는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이유가 있을까? 간혹 도가 지나쳐서 모든 철학 용어들을 한자가 아닌 순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지나친 순혈주의는 논외로 한다고 해도 불필요하게 신조어를 남발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일부에서 쓰이고 있는 <역능>이라는 용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스피노자와 정치}에 수록된 “용어해설”이나 몇몇 논문에서 <역량>이라는 번역어를 제시한 적이 있지만, 굳이 이 용어를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더 적절하게 puissance나 potentia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번역어가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채택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역능>처럼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내서 번역어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왜 굳이 이 용어를 puissance나 potentia의 번역어로 쓰는지, 어떤 점에서 이 용어가 이 철학 개념을 적절하게 옮겨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용어를 쓰는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이 왜 이런 용어를 쓰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potentia가 <능동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potentia 또는 희랍어로는 dynamis라는 개념을 <능동적인> 힘의 의미로(곧 잠재태나 가능태가 아닌 의미로) 쓴 것이 스피노자 혼자뿐인지, 또 스피노자가 과연 그 최초의 인물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사실 이는 스토아학파에서 플로티누스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의 브루노에 이르는 장구한 전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독특성이라면 오히려 이를 <내재적>으로 또는 <관계론적>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능력>을 거꾸로 뒤집어서 <역능>이라고 번역하면, 이 단어가 그대로 능동적인 힘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notion이나 puissance 같은 개념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오랫동안, 또 널리 쓰이게 될 용어인 만큼 용어 번역에는 좀더 신중한 검토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는 먼저 puissance나 potentia를 <역능>이라는 번역어로 옮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옮기는 좀더 정확하고 명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나도 <의념>이라는 말이 notion에 대한 번역어로 왜 부적합한지 조만간 글을 하나 써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런 의문점들 때문에 이 책을 번역한 두 역자들의 값진 노고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쉽지 않은, 하지만 국내 좌파의 이론적, 정치적 논의를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이 책을 번역하느라고 애쓴 역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이 책에 좀더 많은 독자들의 손때가 묻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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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7-09-1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처음 들어오는 서양철학의 경우 거의 역자에 의해서 용어가 굳어지는거 같아요. 역서에서 그렇게 써버리면 이후에 다른 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워지고. 그래서 결국은 후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도 처음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고. 어렵습니다.

balmas 2007-09-1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ㅎㅎ 사실 그렇게 썩 바람직한 방식은 아니죠. 그런데 외국에서도 간혹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좀처럼 번역하기 어려운 다른 나라의 용어들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외국어로 쓰는 거죠. 가령 하이데거의 독일어 개념인 Gestell(우리말로는 "몰아세움"이나 "닦달", "작업틀" 등으로 번역되는데)은 영미권이나 프랑스에서 독일어 단어 그대로 사용하죠. 데리다의 "differance"도 그렇구요. ㅎㅎ
아프락사스님/예, 그런 경우가 많죠. 그래서 사실 번역자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중요한 개념일수록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죠. :-)

람혼 2007-09-1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ufheben"의 일화는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짐짓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로군요.^^ 쓰레기를 '지양'하라!! ㅎㅎ

최원 2007-09-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지적들 감사합니다. 용어들을 제안하고 설명해주신 서관모 선생이 진태원 선배님의 문제제기에 직접 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지만(아마 나중에 해주시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답변 드릴 수 있는 것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먼저 civilite의 번역어는 '시민인륜성'이 아니라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무래도 말의 경제성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빌리테'의 네 음절을 초과해선 안될 것 같아서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시빌리테'라는 말을 원어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사용하는 것은 그 말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제껏 발리바르의 시빌리테라는 문제설정이 잘 전달되지 못해온 것도 용어를 번역하지 않은 채 그냥 쓴 데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합성어이긴 하지만 그 말이 쉽게 정치/시민권 개념과 헤겔의 인륜 개념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을 고려하여 택한 것입니다. 다음, puissance (potentia)의 경우는 스피노자 논문에서는 진선배님의 설명을 받아들여 모두 '역량'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만 스피노자의 논의 맥락이 아닌 puissance가 일반적으로 양 개념으로 일관되게 사고될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 우려가 되고, 또 우리나라 말에서 '역량'이라는 말은 오히려 capacite의 의미에 더 부합하기 때문에 puissance를 역량으로 일관되게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역능'이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새로 만들어낸 신조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지요. 능력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다만 능력이라는 말은 puissance에 있는 의미들(세력, 위세, 권세, 권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의념'의 경우야 말로 말을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인데, 신조어가 야기할 수 있는 폐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notion이 이제껏 통념, 관념, 개념 등으로 번역되는 데에서 오는 혼란과 폐해를 생각해볼 때는 저는 개인적으로 괜찮은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notion의 '가치'를 정확히 가리킬 언어가 없어서 생겨나는 혼란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든 신조어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모험이고 실패할 확률이 확실히 높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근거가 있고, 또 그 말이 대중화될 경우(따라서 서관모 선생의 입장은 대중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 대중들의 언어와 다른 지식인들만의 언어를 만들자는 뜻은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생겨날 수 있는 이득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관개체성'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 합니다.

balmas 2007-09-16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ㅎㅎㅎ Aufheben에 관해 뭔가 일화가 있으셨나 봅니다.

최원님/ ㅎㅎㅎ 좀 놀라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몇 가지 용어들에 관해 딴지를 걸고 넘어가서 불쾌했을지도 모르겠고요. 혹시 그런 점이 있었다면 사과드릴게요.

사실 개념이나 용어는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관해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걸리는 문제인데, 그동안은 별 토론도 없었고 다소 즉흥적이고 편의적으로 만들어지고 쓰인 게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반면 서관모 선생은 그동안 여러 용어나 개념에 관해 좋은 제안을 많이 해주셨고 최원 형도 마찬가지죠. 앞으로 발리바르 저작들(그리고 바라는 바이지만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속속 번역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계기로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들에 관해 좀더 신중하고 엄밀하게 논의해보자는 뜻에서 문제제기를 해봤습니다.

이런 토론을 좀더 체계적으로 해보자는 뜻에서 “마이페이퍼”에 <토론>이라는 항목을 새로 추가했으니까, 앞으로 이 문제는 그 항목에서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최원 2007-09-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빨라서 조금 놀랐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만, 기분이 불쾌한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 책에 관심을 보여주시다니 하면서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토론란을 여신 것은 의도도 좋고 블로그가 갖는 일방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보완되고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서관모 선생께도 진선배님의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간단히 어제 이메일로 알려드렸고 아마 별다른 사정이 없으시면 여기 주소도 알려드렸으니 한 번 와서 보실 것 같습니다.

열매 2007-09-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Masses, classes, ideas--studies on politics and philosophy before and after Marx"라는 책 아닌가요? 국역본의 부제와 동일한 영역본을 구했는데, 한국어역본과 차이를 보이는군요. 몇편은 소개되어 있고, 몇편은 없는 식으로. 어떤 연유인지 혹 아신가요^^? 역자해제에도 별 말씀이 없으시니 물을 때도 없네요^^;

최원 2007-09-1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 책내용 보기(Let's Look) 서비스를 보면 '저자 서문'이 있는데, 거기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영역본(masses, classes, ideas)이 먼저 나왔고, 그 책이 훨씬 더 확장되어 불어본(la crainte des masses)이 나왔는데, 이때 불어본에 추가된 글들과 또 다른 글이 묶여서 나중에 영역본이 하나 더 따로 나왔습니다(politics and the other scene). 불어본과 영어본은 구성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지만 각각의 논문들 자체도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어 본은 영어본을 참조했지만 불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열매 2007-09-19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후자의 영역본을 검색해보니 176쪽인데, 꽤나 많은 글들이 보충되었나 봅니다.
역자님의 상세한 설명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