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곧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수록될 용어 해설 중
하나입니다. 보통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개념인데, 굳이 "현전"이라는 낯선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바꿔 표현했습니다. 이 개념은 복합적인 쟁점들이
얽혀 있어서 전문적으로 다루려면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인데, 개략적으로는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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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형이상학 métaphysique de la présence
현존의 형이상학 또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데리다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사용되는 대표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이 개념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데리다의 초기 작업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따라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데, 간략히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하이데거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작업과 이른바 “전회Kehre” 이후(대략 니체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진 1930년대 후반 이후)에 전개되는 후기의 작업으로 구별된다. 초기 하이데거의 작업은 현존재Dasein의 분석으로서 기초 존재론을 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이러저러한 측면이나 영역들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려는 작업으로서 모든 학문은 인간 현존재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기 주위의 존재자들과 맺고 있는 실천적인 관계(후설이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로 이해할 수도 있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특수한 존재자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 자체를 해명하려는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은 이러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실존”)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바로 기초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반면 전회 이후에 하이데거는 더 이상 인간 현존재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려 하지 않고 대신 존재 자체의 사태에서 출발하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철학이 형이상학화되기 이전의 사상, 곧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단편에 나타난 존재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본문에서 논의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이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현존présence”(독일어로는 Anwesen)으로서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곧 이들에게는 존재가,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 나타난다(또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탈은폐된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벌써 존재의 망각이 일어나서 존재는 더 이상 이러한 현존하게 해줌의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어떤 항구적인 실체로, 곧 “현존자présent”(das Anwesende) 내지 “현존성”(Anwesenheit)으로 간주된다(하이데거에 따르면 우시아ousia, 수브스탄시아substantia, 코기토cogito 등과 같은 서양 철학사의 근간 개념들은 이러한 존재 망각의 표현들이다). 따라서 서양의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에서 탈은폐되었던 존재(곧 현존하는 것들을 현존하게 해주는 선사의 사건으로서 존재)가 점차로 망각되어온 역사이며, 이는 니체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명칭 자체는 하이데거가 아니라 데리다가 붙인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논의를 따라 서양의 형이상학을 포괄적으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와 달리 전 소크라테스 철학자들의 단편에서 존재가 원초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고 보지 않으며, 철학사에 속한 철학자들의 저작 속에서만 서양 형이상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이데거 자신도 여전히 현존의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데리다에서 현존의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기의와 기표, 또는 음성과 기록의 문제로 나타난다. 곧 그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의미나 진리의 생생한 현존으로서 로고스를 추구해왔으며, 이러한 로고스는 음성을 통해서 생생하게, 현존 그대로 드러난다고 간주해왔다. 이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오래된 철학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루소나 헤겔 또는 후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 그리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20세기의 인문과학자들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로고스가 생생하게 구현되는 자연적인 매체로 음성을 특권화하고 대신 문자나 기록 일반은 이러한 음성을 보조하는 데 불과한(심지어 배반하기도 하는) 부차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론에서는 어디서든 현존의 형이상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에게 현존의 형이상학은 로고스중심주의이자 음성중심주의를 뜻하며(나중에는 특히 라캉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는 팔루스중심주의로 확장된다), 이것이 로고스의 자연적인 발현 장소로서 음성을 특권화하는 한에서 이는 또한 기술에 대한 폄훼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체 작업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존재의 부름l'appel de l'être”이나 “존재의 목소리voix de l'être” 같이 음성 중심주의를 함축하는 모호한 은유에 의존하고, 또 존재의 의미는 기호들, 기록들의 연관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로서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는 초기 데리다의 저작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80년대 이후의 후기 작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반면 초기 저작에서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해체”(또는 “극복Überwindung”)의 주요 개념인 “es gibt”(보통 사용되는 의미로 한다면 “~이 있다”)나 “Ereignis”(보통은 “사건”을 의미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단어에 함축된 “고유한eigen”이라는 어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또는 “장래Zukunft” 등에 대한 논의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법의 힘}이나 {시간의 선사Donner le temps}(1992), {마르크스의 유령들} 또는 {아포리아}(1996) 등에서는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또 변용되고 있다(“장래avenir”와 “도래à-venir”, “도착하는 이arrivant”, “선사don”, “임박함imminence”, “사건”, “전유”, “비전유”, “탈전유” 등이 그 사례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서양 형이상학 해체는 데리다 철학의 주요 원천이면서 또 가장 중요한 대결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를 자신의 유령이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