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관모 선생이 아마 답변을 해주실 것 같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생각해 볼만한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notion에 대해서, 진선배님이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전에 읽을 때에도 그랬는데, 그 용어해설 항목의 제목은 common no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notion에 대한 설명은 적고 common notion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설명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common notion이 "모든 사람(또는 다수의 사람)이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인식"이라면, 즉 common notion이 일반인들에게 어느정도 공통된 관념이라면, notion도 '통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식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common이라는 말이 따로 붙어 있는 common notion에는 저러한 설명이 적절할 수 있으나 common이라는 수식이 없는 notion을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지 않나 합니다.
왜 진선배님의 설명에서 이 두 가지가, 즉 common notion과 notion의 설명이 뒤섞이고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notion을 진선배님이 '통념'으로 옮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뒤섞임은 common notion의 번역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notion을 '통념'으로 번역할 경우, common notion은 '공통의 통념' 내지 '공통통념'이 되는데, 이는 마치 '역전앞'과 같이 동어반복적인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선배님 말처럼 common notion이 어떤 맥락에서 실천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실천적인 "합리적인 인식"이라는 점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common notion은 단순한 통념이 아니며 또 그렇다고 개념도 아니지만(특히 {신학-정치론}의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합리적 인식"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common notion은 "공통의념"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윤리학}이 “나는 사고한다”[cogito―데카르트]가 아니라 “인간은 사고한다”라고 공리화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의 의념들이 공통의념들로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점을 보여주는지 이해한다."
여기서 notion을 통념으로 옮기면 이상한 말이 됩니다. "인간의 통념이 공통통념일수록 인간은 더 많이 사고한다"(진선배님 번역, 198쪽)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통념은 이미 공통된 관념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면, 공통된 관념이 공통된 관념이 되는 만큼만 사고한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notion이 갖는 가치를 지시해줄 수 있는 '기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어에는 이런 기표가 없기 때문에 '의념'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해보자는 것은 괜찮은 시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서관모 선생이 notion을 과거에 '상념'으로 옮겼었는데, 제가 그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음이의어가 되고 원래 사용되는 상념의 뜻과 자신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추측이지만, 과거에도 서관모 선생이 '항상 상'자를 선택
한 것을 보면, 아마 notion이란 어떤 의미의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뜻 의'자를 써서 의념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한결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역량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드린 것 이상을 말씀드리기는 어렵군요. 단 용례를 보자면,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맑스는 자본의 역능이(한계 없어 보이는 그것의 파괴성뿐 아니라 항상 증가하는 그것의 생산성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여기서 puissance를 역량으로 번역하면, 너무 중립적이거나 너무 긍정적인 뉘앙스로 읽힙니다. 즉 '권력'이라는 뜻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스피노자적 맥락과 다른 맥락을 상대적으로 구별해야하는 것은, 스피노자적 맥락에서는 potentia(역량)와 potestas(권력)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