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중들의 공포}의 출간을 환영하면서, 이 번역본에서 사용된 몇몇 용어들에 대해
간단한 몇 가지 의문을 밝힌 바 있다. 그 글에 대해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최원 씨가 바로
답글을 달아주셨는데,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좀더 활발하게 진행해보자는 뜻에서 새로
"토론"이라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외국의 이론이나 사상에 많이 의존하는 곳에서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 그 개념이나 용어가
지닌 뜻을 되도록 정확히 전달하면서 동시에 좀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번역어를 고안하고 정착시키는 일은, 외래 사상을 토착화하는 데서나 국내의 논의를 좀더
활성화하는 데서 근간이 되는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러한 토론이 그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지난 1980년대 이래 국내에 많이 수용되어온 현대 사상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연구자는 저마다 상이한 번역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이에 따라 동일한 한 가지 외국어 용어나 개념이 2-3개 또는 심할 경우에는 6-7개의
상이한 우리말로 번역돼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이한 번역어들의 존재는
개념에 대한 연구자들의 상이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적인
다양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좀더 공개적이고 진지한 토론이
없이는 상이한 번역어들이 제시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 각각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며, 이 경우 상이한 여러 번역어들의 존재는 독자들의
혼란만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어떤 개념이나 용어의 번역어를 모색하고 고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개념이나 용어가 담겨 있는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역으로 정확하고 편리한 번역어는 그만큼 그 이론이나 사상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고 다른 학문, 다른 사상과의 소통도 원활하게 해줄 수 있다.
그만큼 정확한 번역어를 찾고 만들어내는 일, 또 그것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이론적, 철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유럽철학어휘사전}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지적했던 것처럼
(http://blog.aladin.co.kr/balmas/655361)
어떤 의미에서 서양 철학사는 전승된 개념들 및 외래의 용어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의
시도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토론"이라는 게시판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필요를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며칠 뒤면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될 것이며 앞으로도 내가 번역한 몇 권의 책들이
계속 나올 예정이다. 최대한 오역을 줄이고 원래 텍스트의 내용들을 정확히 전달하려고
노력했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오역은 번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더욱이 내가
이런저런 개념이나 용어들에 대해 새로 제시한 번역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 쉽고 편리
하게 쓸 수 있는 것인지 장담할 수가 없다. 사실 번역어의 생명은 제안자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독자들, 대중들에게 달려 있는 한, 내 스스로 장담하고 어쩌고 할 성질의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독자들의 관심 덕분에 오역이나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이런저런 번역의 문제, 이론의 문제에 관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독자들과 더불어 큰 기쁨으로 생각하겠다.
아무쪼록 새로 만든 이 "토론" 게시판이 번역어와 번역 문장, 더 나아가 이론이나
사상 일반에 관한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게
열어놓았으니까, 굳이 번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분들은 이 항목에 글을 써주시기 바란다.
단 상업적인 광고나 도배 문구, 그리고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되는
글들은 삭제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