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아님께



아포리아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죠.


“저기 질문드릴 게 있어서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국제주의'에 관한 세미나를 하는데, 이번엔 [We, the People of Europe?]에 나온 8/10번 글을 합니다. 내용이 주로 주권에 관한 거여서 이에 관한 다른 글들도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는데, 저번에 선생님께서 [법의 힘] 후기에서 언급도 하셨고 발리바르도 '잔혹' 관련한 논문에서 인용하길래 아감벤의 [Homo Sacer]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제 느낌에 아감벤은 슈미트적인 주권 개념을 특권화하는 것 같습니다(확실친 않지만요...). 반면 발리바르는 보댕적(나아가 루소적) 주권 개념을 상세히 살피면서 그것과 슈미트적 주권 개념 사이에서 쟁점을 만들려 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근데 그 쟁점이 정확히 뭔지, 또 왜 이런 식으로 쟁점을 만드는지가 잘 안 잡힙니다. 어쨌든 느낌일 뿐이니까요. 제가 주권 문제에 관한 논의 지형을 전혀 모르는 탓도 클 것 같습니다.

결국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주권에 대한 아감벤의 사고와 발리바르의 사고 간에 쟁점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지, 한편 서로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것인지 등입니다.”


중요한 쟁점이고,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좀더 체계적으로 검토해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안돼서 몇 가지 간단한 요점들만 정리해보겠습니다.


  조르지오 아감벤Gio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성스러운 인간] 정도가 될 텐데 이 때의 ‘성스러운’은 보통 말하는 ‘the sacred’와는 상이한 의미이니까 조심해야겠죠―는 알다시피 최근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논의되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이탈리아어 판본이 1996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이후 곧바로 영어, 독어, 불어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고, 각종 서평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죠(우리나라에서는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에 이 책에 관한 소개 논문이 한 편 실려 있더군요). 이 책이 이처럼 화제가 된 이유는 물론 이 책이 지닌 이론적 독창성과 깊이 때문인데요, 아감벤은 정말 놀라울 만큼의 박학과 이론적 정교함, 빼어난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보기드문 철학자입니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 threshold)로서 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을 이루는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bare life의 의미를 해명하는 게 우선이겠죠. 아감벤이 말하는 bare life는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법의 힘, 164쪽 이하)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키죠.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bios”와 “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키는 용어죠.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bios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아감벤에 따르면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감벤은 bare life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homo sacer는 아감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입니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homo sacer에서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말하자면 신의 법에서 배제되어 있는 셈이죠),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homo sacer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따라서 인간의 법에서도 제외가 된 셈이죠), 그의 삶은 bios가 아니라 zoē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바로 이 “zoē”, homo sacer가 법적, 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근대에서야 비로소 homo sacer의 “bare life”가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감벤은 먼저 영국에서 1679년에 제정된 인신보호법(habeas corpus)이 바로 bare life가 법과 정치의 근본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ㆍ이론적 논거는 좀 취약한 편입니다. 아감벤이 좀더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인권선언]에 담겨 있는 생명정치biopolitique적 함의입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와 아렌트의 작업을 결합하고 있는데, 푸코의 경우에는 생명 정치 또는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이, 아렌트의 경우에는 전체주의 비판과 인권 개념의 개조 작업이 문제가 됩니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에 등장하는 “인간”과 “시민”이라는 개념, 특히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bare life”를 가리킵니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bare life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bare life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감벤이 푸코의 생명권력에 관한 작업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의 분석을 변형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킵니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하죠.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감벤의 [인권선언] 재해석은 아렌트의 이런 통찰(하지만 아렌트가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을 위와 같은 푸코의 생명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시킴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아포리아님은 아감벤이 슈미트를 특권화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실제로 그는 실제로 주권에 대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이 책의 첫머리부터 강조하고 있지요. 하지만 아감벤이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슈미트의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권 개념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 슈미트의 주권 개념의 특권화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에 대한 아감벤의 분석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죠. 아감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치는 1933년 정권을 장악한 이후 공포한 “국민과 국가의 보호에 관한 법령”에서 예외상태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없이 기본권을 유예시키고 있지요.


그런데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인데,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됩니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됩니다. (3)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감벤은  zoē와 haplōs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 곧 ban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성스러운 인간들”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아감벤에 따르면 강제수용소, 곧 camp는 bare life가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 수용하고 있는 장소 역시 일종의 camp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공식적인 법적 기관(경찰이 되었든, 외무성 직원들이 되었든 간에)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bare life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 정도가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대략적인 논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나 그 외 다른 글들에서 수행하고 있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은 아감벤과는 상이한 이론적 전제와 지향점들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아감벤과는 좀 다른 결론들에 도달합니다. 우선 두 사람은 지향점이나 스타일 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지요. 아감벤이 정치적인 쟁점들을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으로(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감벤은 벤야민보다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듯합니다) 다루고 있는 데 반해,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는 이런 문제들을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다루는 것을 매우 꺼리는 편이죠. 발리바르는 실천적인 문제들에 관한 자신의 이론적 작업들(예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개조였다면, 최근에는 민주주의와 정치 개념 일반의 개조와 전환이 중심 주제겠지요. 물론 이 양자는 모두 역사 유물론의 전환/개조라는 일반적 문제설정 속에 포함되겠지요)을 늘 논의의 중심에 놓고,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한에서 형이상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또는 좀더 ‘순수 철학적인’ 주제들을 별도로 다루곤 합니다. [Nous, citoyens d'Europe?](2001) 또는 이 책의 영어판본인 [We, the People of Europe?]도 이런 경향을 썩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이 책의 두 장에 걸쳐 주권에 관해 치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만, 아감벤에 비하면 논의의 범위가 매우 분명하게 한정되어 있죠.   


  논의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특히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합니다. 곧 발리바르의 경우 논의의 지평을 근대성, 곧 장 보댕 이후에서 칼 슈미트를 거쳐 유럽 연합의 구성에 이르는 시기로 한정하고 있는 데 비해(물론 그리스의 politeia 개념에 대한 분석이 잠깐 나오긴 합니다만), 아감벤의 경우는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더 나아가 헤시오도스에서부터 슈미트, 벤야민, 데리다, 네그리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전역사를 자신의 논의의 범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감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는 bare life가 주권, 곧 정치의 근본 대상이 됨으로써 근대성이 근대성으로서 구성되는 양상에 있지만, 이러한 구성의 개념적, 형이상학적 기초를 희랍철학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매우 광범위한 구도를 설정하고 있고, 이 때문에 자칫 목적론적이거나 종말론적인 쪽으로 빗나갈 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감벤 입장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논의는 좀 지엽적인 문제들에 경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군요.^^


  발리바르의 주권 개념 분석은 이중적인 출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세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유럽 연합의 구성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본다면 소위 “민족국가의 위기”가 그 출발점이 되겠는데, 발리바르가 여기에서 문제삼는 것은 소위 “주권론자들”과 “유럽론자들” 사이의 추상적 대립입니다. 이러한 대립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를 민족, 민족국가로 한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권 개념을 법적 개념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불모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관점에 따르면 주권이란 무엇보다도 국가의 독립적인 정치적 권리를 지칭하는 게 되고, 따라서 이러한 권리가 법적으로 올바르게 대표되고 적법하게 행사되는 절차에 대한 분석이 주요한 과제가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국가 주권의 기초로서 인민 주권이라는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권의 한계를 구성하는 국경/경계(frontière) 개념이 하나의 이론적 문제로 제기되지 못하고 맙니다(경험적이거나 실천적 문제로는 제기될 수 있겠지만).

 

  따라서 실천적 출발점은 발리바르의 이론적 출발점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발리바르의 주권 개념은 그가 제시하는 민족 형태form nation 개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는 고전적인 역사유물론의 한계 중 하나를 민족 개념에 대한 이론적 분석의 부재에서 찾고 있죠. 마르크스에서 알튀세르에 이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 위에서 상부구조 또는 국가를 규정하거나 도출하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을 역사유물론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이해했지만,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항상 민족 형태를 매개로, 또는 민족 형태로서 존재했다는 거지요. 따라서 민족 또는 민족 형태는 자본주의 개념 자체로부터 연역이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자본주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바로 민족 형태라는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 형태는 근대 정치의 제도적 틀(보통 민족국가라고 불리지만 발리바르가 좀더 엄밀하게 “사회민족국가”라고 부르는)이 구현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개인성/주체성이 형성되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역시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민족 형태는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또는 상징 구조)라는 세 가지의 심급 내지는 인과성이 상호 작용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죠.  


  민족 형태라는 개념이 주권 개념 분석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국가 주권과 인민 주권의 상호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적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민족 국가는 주권 개념이 지닌 이중적 측면(인민 주권과 국가 주권)의 모순적 통일체인데, 인민이라는 추상적인 정치 개념이 구체적/제도적으로 실현된 형태가 바로 민족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이처럼 인민을 국민으로 형성/포섭(또는 호명)함으로써 근대의 정치 제도가 자신의 인간학적/주체적 기초 위에서 제도적 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 대한 분석은 세 측면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개인-주체의 형성/호명이 어떻게 민족 형태를 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 (2) 집합적인 봉기적ㆍ변혁적 주체로서의 인민이 국민/민족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 (3) 자본주의적 경제가 작용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로서 영토가 민족국가에 의해 전유되는 방식 및 이것이 국경의 문제와 맺고 있는 관계의 문제가 그것들입니다. 


첫 번째 측면은 민족 형태 개념에 기초해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구체화하려는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개인들의 주체들로의 호명을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본질적 기능을 간주했는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호명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준거가 바로 민족이라고 보는 거지요. 다시 말해 근대는 처음으로 개인으로서의 개인, 또는 추상적 개인이 발명된 시대인데, 이 개인은 그 이전까지의 일체의 소속, 곧 가족이나 친족의 구성원이나 특수한 신분이나 지위의 보유자라는 정체성들identités(근대 이전의 개인들은 이러한 구체적 소속들에서 얻게 되는 정체성들에 따라 규정되었지요)과 독립해서 바로 개인 자체로서 고유한 지위와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 개인에게 일차적인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바로 민족입니다. 각각의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한국인 등등으로 정체화되고, 이러한 정체성/동일성 위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차적인 소속/정체성들을 얻게 되지요. 따라서 발리바르의 관점에 따르면 개인의 발명과 민족국가의 탄생은 (시간상으로가 아니라면 적어도 구조적으로) 항상 같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를 좁은 의미(또는 통용되는 의미)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것 자체는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근대 민족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은폐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특히 서양인들에게 고유한 편견 내지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에 횡행했던 민족주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으며, 20세기 후반기 이후 민족주의는 제 3세계나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프랑스에 고유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공화주의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지적하지요. 곧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래 다른 민족/국민과는 달리 늘 보편적 대의를 추구해왔다는 거지요.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 때문에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첫째,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은 항상 보편적 상징 위에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민족(주의)적 보편성은 외부의 다른 보편성들만이 아니라 내부의 이질적인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데, 이러한 보편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한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주제, 곧 집합적인 봉기적ㆍ변혁적 주체로서의 인민이 국민/민족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서양) 근대의 상징적 모체는 [인권선언]에서 표현된 인간과 시민의 동일성입니다. 인간은 이러저러한 특수한 속성, 곧 계급, 신분, 국적, 인종,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 의해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은 누려야 하며, 반대로 인간이 누려야 할 이러한 권리들은 집합적인 시민의 활동의 결과이며, 또 항상 그러한 활동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인 셈이죠. 그리고 이 때 시민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인민people인데, 인민은 두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민들 전체라는 총칭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둘째는 소수의 특권 계급이나 지배층과 구분되는 기층민중 또는 다중multitudo 및 더 나아가 약소자, 소수, 불량배들 등과 같이 기존의 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지요. 그리고 발리바르 자신은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의미의 인민 개념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 시민들의 총칭으로서의 démos와 이것이 함축하는 대중 또는 다중polloï이 그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와 아감벤 사이에는 bios/zoē라는 개념쌍과 démos/polloï라는 개념쌍의 차이가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아감벤 자신은 bios와 zoē의 관계가 인민 개념의 두 가지 측면 사이의 관계와 상동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양자 사이에 과연 이러한 상동성이 성립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자면,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bios/zoē라는 개념쌍은 아감벤의 주장과는 달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렇게 명시적인 대립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지나치는 김에) 지적하지요. 대신 데리다는 démos/polloï라는 개념쌍에 좀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난점은 인간과 시민은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개념들이 구체적인 현실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적인 매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제도적 매개의 근대적 형태가 바로 민족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데모스demos로서의 인민은 다시 에트노스ethnos로서의 인민, 곧 민족으로 분화됩니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인민의 종족화ethnicization of the people"라고 부르죠. 곧 집합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민(하지만 사실 이 때의 인민은 그 자체가 이미 폴로이, 곧 다중으로서의 인민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고 그와 분화된 인민입니다)이 한 국가의 성원으로 소속되는 것은 동시에 이 인민을 상상적인 과거 역사 속에 기입하는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적 기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통일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소급 작용을 통해 근대 민족 국가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역사적 실체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각각의 성원들을 호명/통합/재생산하는 활동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민족은 내적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은 한편으로는 인민이 나타내는 보편적인 시민성의 구현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성을 실현하기 위해 외적, 내적 통합 및 배제의 작용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대한 계급적, 성적, 인종적 차별 및 제국주의적 활동 및 투쟁은 민족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내적 갈등/괴리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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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11-04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아포리아님에게 논문 한 편을 써야 이 문제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했는데, 제대로 이야기를 못한 가운데, 글의 길이는 거의 논문 한 편에 가까운 분량이 되어 버렸군요.-_-;;;
글이 제대로 정리가 안돼서 사실 올리고 싶지 않은데(문장들도 어색한 데가 많은 듯;;;), 지금 안 올리면 언제 올릴 수 있을지 몰라서, 그냥 무턱대고 올립니다. 행간의 뜻(???)을 잘 읽고 이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2-3쪽 정도 되는 2편이 아직 남아 있는데, 예의 "다싫기쓰글" 바이러스 때문에 2편을 언제 올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Shimba에게는 이 글이 간접적인 답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메일을 한 번 줘.

aporia 2004-11-0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무식해서) '용감한' 물음에 이렇게 상세하게 답해 주시니 죄송함을 넘어 부끄러움마저 느끼게 됩니다. 다른 일도 많으신데 너무 폐를 많이 끼친 것 아닌지 걱정이네요. 하지만 다른 많은 분들께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고 또 선생님도 한번 정리하실 생각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면서, 애써 죄송함을 덜어보려고 합니다...
이게 더 귀찮게 해 드리는 건지, 아니면 선생님의 노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지 잘 구별은 안 됩니다만, 저 나름대로는 후자 쪽에 좀더 무게를 두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번에 말씀드렸듯 저같은 경우는 발리바르의 이번 글을 이해하려고 하던 중 도움이 될까 해서 아감벤의 글을 봤고, 그가 주권 문제를 다룰 뿐만 아니라 푸코적인 '생명정치'(아마 발리바르의 '인간학적' 접근과 통할)를 언급하고, 게다가 제가 볼 때 최근 발리바르가 말하는 '잔혹' 및 '경계/국경'(저는 아감벤이 '수용소'라고 말하는 것이 발리바르적인 경계/국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등과도 직결되는 듯한 언급을 보고서 아감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나니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하여튼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단점'들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일단 그건 '스타일'의 문제(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에 제가 '슈미트'와 '보댕-루소' 간의 차이라는 말로 어렴풋이 지시하려던 것도 실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도식적으로 얘기해 보자면 아감벤이 정상성의 '이면'으로서 주권을 말한다면, 발리바르는 정상성의 '토대'로서 주권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때 후자는 전자가 말하는 계기를 '잔혹'이라 부르고 이를 '주권의 실패' 상황에서 벌어지는 말 그대로 '예외상태'로 보는 것 같구요.
사실 이 점은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각자의 수용방식과도 관련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푸코를 잘 모르긴 하지만, 아감벤의 논의를 보면서는 푸코와는 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푸코의 생명정치와 훨씬 더 친화적인 것 같아요(물론 발리바르는 푸코와 달리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 즉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중시하니까 이 점에서 생명정치 안에 한층 더한 모호함을 기입할 것 같지만요). 반면 아감벤이 여기서 생명정치의 주요 계기로 이르는 것을 발리바르는 차라리 '부정적 생명정치'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던 기억도 잠시 나네요. 이는 제가 양자의 관심 상의 차이점을 과도하게 벌려놓는 것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아감벤이 주권(추방/배제라는 의미에서)을 고대 서양에서부터 시작되는 정치의 원초적 계기(물론 근대 특히 나치적인 실천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로 파악하는 반면, 발리바르는 주권을 최대한 근대적인 구성물로 국지화시키면서 그것의 '대체보충'(완전히 우연적이지 않지만 또 완전히 필연적이지도 않다는 의미에서)으로서 민족형태 및 국경/경계 제도를 분석하고 있다는 식으로요. 이렇게 볼 때 전자에게 주권은 기본적으로 잔혹하거나 최선의 경우라도 (푸코적인 의미에서) '권력'(발리바르가 말하는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라는 계기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에 불과한 반면, 후자에게 주권은 국가주권과 인민주권 간의 내적 갈등이 관통하고 있고 또 그 대체보충으로서 민족형태 및 국경/경계 제도로부터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따라서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실천(예컨대 인민주권의 실천)을 허용할 수 있게 되겠지요. 사실 이는 제가 아감벤을 처음 읽고 나서 든 느낌을 나름대로 문자화해보려 노력한 것인데, 그때 전 그렇다면 주권 개념을 (개조를 전제로 하겠지만)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니냐 고 느꼈고 이는 제가 발리바르 독서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정리는 잘 안 되는군요. 사실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번 글에서 (3)이라고 말씀하신 부분, 결국 주권과 국경/경계 부분의 관계를 설명해 주시면 좀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발리바르의 국경/경계 개념과 아감벤의 '수용소' 개념 간에 어떤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지, 발리바르는 슈미트를 어느 선까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느 선에선 어떤 식으로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것인지, 국경/경계와 '잔혹'은 어떤 관계이며 만일 내재적인 연관을 설정할 수 있다면 이런 '비정상성'이 '정상성'과 맺는 관계는 어떤 것인지(그리고 이 점에서 아감벤이 설정하는 식의 관계와 쟁점이 있는 것인지) 등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일요일이 세미나인데 지금대로라면 저부터가 정리가 전혀 안 되서 논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복잡해져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제 질문 자체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걸 지적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만일 몇 가지 측면에서 얘기해 볼 만 하다면, 선생님 시간 되실 때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hoyami 2004-11-0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h my God, so you expect me to understand all this? I'll take it as a very long and sophisticated way to say "No, I'll never write to you back"... T.T

Let me rephrase my previous letter this way: so you and all the brilliant "Hahc-Ja" seem to consider a nation as an imagined community. But I guess that you were really into the soccer matches during the World Cup 2002 just like any other people. So what would you call this fanatic kind of passion to go for the Korean team no matter what? What made you go crazy over the victories just like anyone else, when you so much believe in this cool and scientific kind of defnition of nation? Oh I really hate to write in English... Is my message clear enough? You see what I mean? If not, please use your imagination...

balmas 2004-11-0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미안, Shimba. 내가 메일 한번 보낼게.

아포리아님은 "행간"을 잘 읽으셨군요.

아마도 너무 잘 읽어서 질문이 더 많아진 듯한데,

당분간 답변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세미나, 토론에서 좋은 성과를 얻길 바랄 뿐입니다.^^
 


 

 

 

http://www.spiked-online.com/

Article7 October 2004

It's mutual hatred, stupid
Both Democrats and Republicans are taking their disappointment with politics out on each other.

by George Blecher

서로 간의 어리석은 증오
민주당원들과 공화당원들 양측은 정치적 지배에 대한 실망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by George Blecher


Pundits pouring over the latest election polls miss the point that the average American seems to get: polls or no polls, the popular vote is likely to be as close as it was four years ago. Though most American voters describe themselves as 'moderate', psychologically we've hardened into two armed camps of equal strength. In this climate, issues matter far less than allegiances. The Iraq war, the economy, the military records and personalities of the candidates, 9/11 - none of it matters as much as which side you're on.

최근 선거에 열성적인 전문가들은 보통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각, 즉 투표냐 아니냐 하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투표는 4년 전과 비슷할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중도'라고 말함에도, 우리들은 심리적으로 같은 힘을 가진 두 무장 캠프로 굳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헌신보다 이슈가 적잖이 중요하다. 이라크 전쟁, 경제, 군사기록과 입후보자들의 인품, 9/11-이 중에 어느 것도 당신이 어느 편인가 하는 것만큼 많이 중요하지는 않다.

Seeing ourselves as liberal or conservative has become more central to our identities than our religions or where we live. In a time of virtual rather than actual community, we feel safe with those on our side, threatened by and furious at those on the other side. Actually, we don't even see the other side. At best, they're certifiably insane; at worst, monstrously inhuman.

우리 스스로를 자유(개혁) 혹은 보수로 보는 것은 종교나 거주지보다 우리의 정체성에 더 관련된 것이다. 현실 공동체보다 오히려 가상 공동체의 시간에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우리편에 대해서는 안전을, 상대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낀다. 실제 우리는 다른 편을 보지도 않는다. 잘 봐줘야 그들은 비정상적으로 미쳤거나, 나쁘게 말하면 소름끼치도록 비인간적이다.

Two personal examples: four years ago, I heard a well-known conservative intellectual, a speechwriter for President George Bush senior, speak at a university club in New York. She was relaxed and charming, felt that she was among friends and shared not only opinions, but feelings as well. 'At the beginning of the campaign', she said, 'my colleagues and I felt pretty good about [Democratic nominee Al] Gore. We didn't agree with most of what he said, but we could live with that. He seemed like somebody you could talk to. But now we realize that he's just like Clinton - crazy!'. When I told the incident to a friend on the Left, she said: 'Well, I'm not surprised. But I disagree with you on one point: there are no intellectuals on the Right.'

두 사람의 예를 들어 보겠다. 4년 전 나는 유명한 보수 지식인이자,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어느 연설문 작성자가 뉴욕의 한 대학 클럽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관대했고 매력적이었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여러 의견들뿐만 아니라, 감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말했다. '선거 초기에, 내 동료들과 나는 [민주당 후보자 엘] 고어에 대해 아주 좋은 느낌을 가졌다. 그가 한 말 대부분에 우리가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여러분들 중 누군가와 얘기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가 단지 미치광이 클린턴과 같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좌파인 한 친구에게 그 일을 말했을 때 그녀는, '글쎄, 난 놀랍지 않은데. 하지만 한 가지 네게 동의하지 않는 게 있어. 우파엔 지식인이 없다구.' 라고 말했다.

A few months later, I was crossing a snowy Manhattan street with my young son. A van with Jersey plates made a tight turn and missed my son by a couple of inches. I ran after the van and started bawling out the driver, who took one look at my fur hat and designer glasses, rolled down his window and sputtered: 'You, you, you…liberal!'.

몇 달 후 나는 내 어린 아들과 함께 맨하탄街를 걷고 있었다. 밴 한 대가 저지Jersey 구역으로 바짝 붙어 돌더니 2 인치 옆에서 내 아들을 비켜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밴을 뒤따라가 운전자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는 내 모피 모자와 고급 안경을 한 번 보더니, 차창을 내리고는 지껄였다. '당신, 당신, 당신은...자유(개혁)주의자!'.

We don't merely disagree with each other; we hate and fear each other. What do Republicans hate about Democrats? They're sneaky, compromising, ready to barter away hard-earned money and freedom to win the approval of decadent Europeans and perverse fringe groups. They're effeminate cowards, unwilling to stand up and fight for their beliefs. One of the more popular Republican labels for people on the left - latte-drinking, Volvo-driving liberals - isn't frivolous in the least. A fondness for lattes and Volvos is a nod to the inherently foreign and devious - a latte's very name is Euro-pretentious, to say nothing of its price; and driving a Volvo suggests that one values safety over design, power and speed. Worst of all, Democrats are hypocrites, professing to help the poor and spread the wealth around while making sure that their kids go to the right schools and avoid military service.

우리는 그저 서로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원들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을 무엇일까? 그들은 비열하고 의심스러우며, 퇴폐적인 유럽인들과 괴팍한 극단적 부류의 동의를 얻기 위해 힘들게 번 돈과 자유를 맞바꾸려 한다. 그들은 신념을 위해 일어서서 싸우려고도 하지 않는 나약한 겁쟁이들이다. 좌파 진영의 사람들에 대해 좀 더 흔한 공화당의 구호 중 하나인 '라떼Latte를 마시고 볼보를 모는 자유(개혁)주의자들'은 최소한 천박하지는 않다. 라떼와 볼보에 대한 선호는 본래 외제이고 솔직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의인데, 라떼라는 바로 그 이름은 그 가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젠체하는 유럽인에 대한 동의이고, 볼보를 모는 것은 디자인, 힘 그리고 속도 상에 있어서 안전이라는 가치를 암시한다. 그중 최악은 민주당원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제대로 된(엘리트 코스?) 학교를 다니게 하고 병역을 피하게 하는 동안, 부를 축적하면서도 빈민을 구제한다고 공언하는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All this may be obvious, but what is more subtle is what Republicans fear about Democrats. The look in that van driver's eye was fear, and not just that I might turn him in. He feared that I was of a higher class - which I suppose I was - and therefore had powers that he couldn't imagine. To a great number of Republicans, Democrats have come to represent privilege - the kind of self-righteous, impersonal, abstract pseudo-generosity ready to give away rights that less privileged people have fought hard for.

이 모든 게 분명하겠지만, 더 교활한 것은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원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 밴 운전자의 눈이 두려워하는 시선, 한데 나는 괜히 그를 몰아세운 것이 아니다. 그는 내가 보다 높은 계층-내 생각이지만-이고 그래서 그가 상상도 못할 힘을 가진 것을 두려워했다. 대다수 공화당원들에게 민주당원들은 덜 특권적인 사람들이 어렵게 싸워 얻은 권리를 양보할 준비가 된, 독선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관념적인 거짓 관용과 같은 특권을 의미한다.

What do Democrats hate about Republicans? Their stupidity and love of violence, their selfishness, aggressiveness, ruthlessness. Republicans are bullies and cheaters, who'll use any tactic, dirty or not, to get what they want. They're isolationists full of hate and prejudice. You can't reason with them because they regard reasoning as a sign of weakness. They're Mr Hyde to the Democrats' dedicated, humanistic Doctor Jekyll; Id to the Democratic Ego, but not a healthy, sexualised Id. On the contrary, their macho swagger masks grave insecurities about their potency. At heart no Republican has any sense of morality or decency; they're ruled either by greed or fanaticism.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원들에 대해 무엇을 증오할까? 그들의 폭력적인 어리석음과 사랑, 그들의 이기심, 공격성, 무정함(그들의 폭력, 이기심, 공격성, 무정함에 대한 어리석음과 사랑). 공화당원들은 추잡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전략도 사용할 뚜쟁이들이고 사기꾼들이다. 그들은 증오와 편견으로 가득 찬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추론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인간적인 지킬 박사인 민주당원들에게 하이드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적인 에고Ego에 대한 이드Id이지만, 건강하고 섹슈얼한 이드는 아닌 것이다. 이에 반해, 그들의 남성적인 허풍은 그들 권력의 심각한 불안을 감춘다. 실제로는 어떤 공화당원들도 도덕이나 품위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즉 그들은 서로 탐욕이나 광신에 지배받고 있다.

Democrats fear Republicans for much the same reason that their counterparts fear them: they fear their enemy's superior power. High in their corporate offices, Republicans pull the strings of the country. The plebs of the radical right are merely a convenience that the party elite need to get themselves elected and then redirect to hopeless causes, like overturning the Roe vs. Wade decision on abortion, or passing a Constitutional amendment against same sex marriage.

민주당원들은 그들의 짝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공화당원들을 많이 두려워한다. 그들은 적의 강력한 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 단체의 높은 관직에 있는 공화당원들은 국가의 줄을 당긴다(국가를 심하게 뒤흔든다). 극우 평당원들은 단지 당 간부가 그들에게 선출되고, 그런 후 낙태에 대해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낙태에 관한 판결문은 http://chunma.yu.ac.kr/%7Ej9516088/case_02.ht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을 제안하거나 동성결혼에 대한 헌법 개정 통과와 같은 절망적인 결과에 대해 재심할 때나 필요로 하는 편익인 것이다.

Underneath the hate and fear, however, I think there's an even more basic - and shared - emotion: disappointment. Disappointment in one's public and private life, and disappointment in the democratic process. Judging by the diminishing number of voters in European elections, it would appear that this disappointment isn't limited to the USA.

하지만 나는 증오와 두려움 이면에 실망이라는 보다 기본적인-그리고 공통의- 감정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공적이고 사적인 삶에서의 실망,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의 실망. 유럽의 여러 선거에서 투표자 수가 줄어드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러한 실망이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Over the past 50 years, the Republican/conservative vision of self-reliance and upward mobility through hard work has been clouded by everything from the complexities of foreign trade to unionism to regulatory agencies to perceived inequities in the educational and welfare systems. The Democratic vision of benevolent centralised government working for equal opportunity has likewise been compromised - by corporate arrogance, lobbyists, and a sense that the gap between rich and poor has grown to unprecedented proportions. Because the solutions to these problems aren't within our grasp - and because to a great extent we have lost faith that the democratic process can work to solve the problems - we've chosen to take it out on each other. Winning has become everything. If we can't live a good life, at least we can make sure that the others don't either.

과거 50년 이상, 열심히 일하는 것을 통한 자립과 지위 향상에 대한 공화당/보수적 비전은 대외 무역의 복잡함에서부터 교육과 복지 제도에서 감지되는 불평등을 감시하는 기관을 위한 노조에까지 모든 것에 의해 어두워졌다. 똑 같은 기회로 일하는 인정 많은 중앙 정부의 민주적 비전 역시 집합적 오만, 로비스트들, 그리고 부자와 빈자의 간격이 유례가 없을 만큼 벌어졌다는 느낌 때문에 위태로워졌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은 우리의 통제 내에 있지 않기 때문인데, 우리는 민주화 과정이 우리가 서로 취사 선택해온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렸다. 승리가 모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삶을 살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In November's presidential elections we won't vote for any issue or candidate; we'll vote against those on the other side. As Walt Kelly's cartoon character Pogo put it many years ago: '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어떤 이슈나 후보에 대해 투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편의 그러한 것들에 대항해 투표할 것이다. 수년 전 월트 켈리Walt Kelly의 만화 캐릭터 Pogo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라는 적을 만났다.'

George Blecher is based in New York, and reports for a number of European publications about American politics and culture.

George Blecher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미국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유럽의 여러 출판사에 기고하고 있다.

 

- 분량상 얼마 안 되는 번역임에도 게으름과 피곤으로 시일이 좀 늦었다. 자처한 과제임에도 늘 이렇게 나를 드러내는 일에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나 보다. 사실 번역은 벌써 다 끝냈다. 그러나 몇 가지 번역상 애매한 부분 때문에 여지껏 늑장을 부렸던 것이다. 끝내 스스로도 결정하지 못한 번역은 위에 보듯 괄호()로 처리했으니, 판단해보시길 바란다. 덧붙여 원문에 이탤릭체로 표기된 것은 볼드로 처리했다. 허접한 번역에 눈살 찌푸리시게 되더라도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내 능력은 여기까지.

발마스님, 데리다 인터뷰는...으...시일이 더 걸릴 듯...ㅜ.ㅜ 전 데리다 전공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철학 전공도 아니니 그 부분은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냥 심심해서 하는 것이니...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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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30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6-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실진 모르겠지만, 퍼갑니다. ^^ 노파님이 번역하신 거군요.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되었군요. [형이상학] 전체의 번역이 아니라 발췌 번역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에 따라 본문을 번역하고 해설과 주석을 붙여 놓아서, 전공하지 않는 분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더 편할 듯합니다.

어쨌든 서양 철학의 거대한 발원지 중 하나인 [형이상학]이 국내에 소개되어 더할 수 없이 기쁘군요.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명제론]도 이제이북스에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서양 고전학을 전공하는 분들이나 철학도들에게는 매우 기쁜 가을이 아닐 수 없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지은이)

 


 

 

 

 

 

소개글
서양철학사의 고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소개하는 안내서. <형이상학>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들, 있는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있으며, 그것들의 궁극적인 근거는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중점적으로 다룬 고전이다.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모아 후대의 편집자 안드로니코스가 붙인 'ta meta ta physika',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의미와 사용 경위를 추적하고 <형이상학>의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또한 주된 내용에 따라, '존재론, 제일 철학, 신학', '존재론과 실체론', '<형이상학>과 신학'의 세 장으로 나누어 <형이상학>의 본문을 번역, 해석하고 주석을 덧붙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핵심은 실체(ousia)에 대한 이론이다. 실체는 있는 것들 가운데 첫째로 있는 것(proton on)이요 다른 것들은 모두 그것에 의존해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에 대한 탐구는 실체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의 기본 관점이다. 그런 뜻에서 <형이상학> Ⅶ권 1장, 1028b2-7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탐구 대상이 되고 언제나 의문거리인 것, 즉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니......, 우리는 가장 많이, 가장 먼저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그런 뜻으로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 본문 88쪽에서

저자소개
조대호 -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4년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로 있다.

작가의 말
서양 철학을 받아들인 한 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날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수용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는 셈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서양 철학 수용의 깊고 넓은 틈새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이런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목적으로 썼다. <형이상학>을 올바로 소개하려면 책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이 일을 하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겠기에 그 준비 작업의 하나로서 이 주해서를 꾸미게 되었다. - 조대호



 책속으로


차례

역해자의 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1.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삭항>: 이름과 내용
1. ta meta ta physika와 형이상학
2. <형이상학>의 내용

2. 존재론, 제일 철학, 신학
1. 지혜: 보편적인 첫째 원인과 원리들에 대한 앎
<형이상학> Ⅰ권 1장-2장
2.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
<형이상학> Ⅳ권 1장-2장(부분)
3. 자연학, 수학, 제일 철학
<형이상학> Ⅵ권 1장과 ⅩⅠ권 7장

3. 존재론과 실체론
1. 실체의 일반적 본성과 종류
<형이상학> Ⅶ권 1장-2장
2. 실체와 기체
<형이상학> Ⅶ권 3장
3. 실체와 본질
<형이상학> Ⅶ권 4장-6장
4. 실체와 생성
<형이상학> Ⅶ권 7장-9장
5. 본질과 정의
<형이상학> Ⅶ권 10장-11장
6. 본질과 정의: 정의의 통일성
<형이상학> Ⅶ권 12장과 Ⅷ권 6장
7. 실체와 보편자
<형이상학> Ⅶ권 13장-16장
8. 실체: 존재의 원인
<형이상학> Ⅶ권 17장
9. 가능성과 현실성
<형이상학> Ⅸ권 6장(부분)과 8장

4. <형이상학>의 신학
1. 영원한 원동자의 존재와 작용
<형이상학> ⅩⅡ권 6장-7장
2. 신적인 정신: 사유의 사유
<형이상학> ⅩⅡ권 9장
3. 선의 원리와 자연 세계의 질서
<형이상학> ⅩⅡ권 10장

참고 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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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이북스가 서광사의 뒤를 잇는군요

balmas 2004-10-2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를 이을지는 좀더 두고봐야죠.
서광사는 20여년 동안 수백권의 책을 낸 곳인데 ...

瑚璉 2004-10-2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렇게 살 책이 많아지면 곤란한데요 (-.-;).

balmas 2004-10-2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호련님,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그래도 좋은 책은 ... 어쩔 수 없죠???
새벽별님, 조대호 씨는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이고,
제가 듣기로는 외국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연구자라고 하니까
믿고 구입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째 책 외판원 같은 느낌 ... ㅋ)

MANN 2004-10-3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드디어...;;

...몇 년 전, 수능 보고 나서 아리스토텔레스 읽어 볼까하고 서점을 뒤져 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이 거의 없다는 것에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떠오르네요.
이름은 못 들어 본 사람이 없을 듯한 유명한 철학자인데 정작 책은 없다는 게...

반가운 일이네요. ^^

balmas 2004-10-3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한번 사보라구. 나 학부 다닐 때는 희랍철학 관련해서는
정말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는데, 앞으로는 점점 더 번역도 많이 나오고 좋은 연구서도
많이 나올 것 같아. 반가운 일이지.^^
 

 

 

‘21세기판 니체’ 슬로터다이크의 ‘도발’


  관련기사

  • 슬로터다이크?

  • “유전공학 통해 새 인간성 창조” 주장

    지난 20일,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배아복제 연구 재개를 선언했다. 최근 막을 내린 인간복제금지협약을 위한 유엔회의는 끝내 찬반논쟁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유럽국가들과 함께 ‘치료적 복제 허용안’을 제출해 찬성론에 가담했다. 선구자적인 한 유전공학자의 노력 덕택에 이제 한국은 이 세계사적 논쟁의 첨단에 서있다.

    유전공학을 철학전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

    이런 급박한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 인문학계에 독일의 한 철학자가 찾아 왔다. 28일부터 11월2일까지 네차례에 걸쳐 국내 강연을 펼칠 페터 슬로터바이크(56·독일 카를스루에 조형대학 총장)가 주인공이다. 때맞춰 그의 사유를 소개하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과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 두 권의 책도 동시에 발간됐다.

    슬로터다이커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적 논쟁의 진앙지 노릇을 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나찌즘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있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등 출간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기획’이라 불릴만 하다.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의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다.

    철학·과학자 연합한 초인 필요성 주장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의 적극적인 활용을 요구한다. 심지어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의 필요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나찌를 기억하는 현대의 지식인을 ‘경악’시킨 그의 사유는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되지 않았다. 이번 방한 강연의 주제가 ‘세계의 밀착-지구화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네차례 강연

    분명한 것은 프랑스의 해체주의 이후 별다른 지적 자극을 받지 못했던 국내 인문학계가 모처럼 논쟁적 철학자를 만났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서구 ‘사상’의 수입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사유’할 계기까지 품고 있다. 철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인간복제의 기술적 선두 주자가 바로 한국이기에 그렇다. 이제 우리의 인문학계가 응답할 때다. 한국철학회(회장 성진기) 주최 제8회 다산기념철학강좌의 하나로 열리는 그의 강연은 28일 서울 언론재단회관에서 열린 데 이어, 30일 한남대, 11월1일 계명대, 11월2일 서울대 등에서 계속된다. (02)820-0370.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슬로터다이크?

     

    “니체의 초인이론 변형시킨 파시즘적 수사”
    언론비판 맞서 대논쟁

    슬로터다이크의 유명세는 독일 언론을 통해 전개된 이른바 ‘슬로터다이크 논쟁’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논쟁은 인간복제를 둘러싼 현대 철학의 논점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인문학과 저널리즘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발단은 99년 7월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슬로터다이크가 발표한 강연문이었다. 그 내용에 대해 〈차이트〉가 “니체의 초인이론을 유전공학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파시즘적 수사”라며 비판기사를 싣자, 슬로터다이크가 “저널리스트 주제에 내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긴 했느냐”며 반박글을 기고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하버마스의 사주’로 단정하고, 하버마스에게 보내는 장문의 서한도 언론에 실었다. 여기서 그는 하버마스의 후기비판이론을 “자신만이 윤리적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유전공학을 둘러싼 논란이 근대적 합리성을 넘어서려는 두가지 기획(비판이론과 포스트휴머니즘론)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 셈이었다.

    〈차이트〉 〈슈피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독일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이후 1년4개월 동안 30여차례에 걸쳐 하버마스 등 유력 학자들의 기고와 대담, 관련 학술 기사들을 통해 이 논쟁을 다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잘못된 환상 △인간성의 우열을 나눌 기준의 자의성 등이 비판의 근거로 등장했다. 동시에 △유전자 조작이 반드시 인간 존엄성의 훼손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유전자 의존도는 얼마나 큰 것인가 △도덕성 함양을 위해 왜 인간은 (유전자 조작이 아닌) 교육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인간은 왜 불완전한 자연생식을 통해서만 출현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도 제기됐다.

    이번에 발간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등을 통해 이 논쟁을 소개한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과)는 슬로터다이크를 “계몽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계몽작업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위험한 문제를 위험한 방식으로 다루는 탓에 여러 오해를 ‘자초’하고 있지만, 그 지평은 ‘계몽’과 ‘비판’에 잇닿아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한국일보

     

    獨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 방한
    "생명복제 무조건 반대는 유아적 발상"

    인간 생명 및 존엄성을 절대시하는 인문주의적 학풍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생명복제 등 유전공학을 옹호, 독일 지성계에 충격을 주었던 페터 슬로터다이크(57) 칼스루에 조형대 총장이 한국을 방문해 2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올해로 8회째인 한국철학회 다산기념철학강좌에 초청돼 방한한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한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3년 발간한 ‘냉소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철학자다. 그는 특히 99년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들’라는 논문을 발표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들과 격렬하고도 감정적인 논쟁을 벌이며 “비판이론은 죽었다”고까지 선언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고전적 휴머니즘과 인문주의적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야수성을 길들여온 프로젝트는 실패했다며 그 대안으로 유전공학을 통해 엘리트를 선별하고 배양함으로써 미래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하자는 생각의 단초를 제시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독일 학계와 언론들은 니체가 말한 초인의 탄생에 빗대어 ‘차라투스트라 기획’이라고 부를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두고 생명공학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를 배제한 극우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거세지만,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생명공학에 대해 불안만 가질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직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생명복제를 반대하는 종교계 등에서는 수정 이전 줄기세포 단계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아적 발상”이라며 “심지어 인간의 유전병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자학적 발상이 아닌가. 생명공학을 통해 유전적 고통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고 반문했다.

    최근에는 세계화와 관련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점검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는 그는 미국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국가들의 일방적인 영역 확장의 역사가 끝나고 세계의 역학구도가 평형을 찾아가고 있으나, 미국은 이 같은 역사적 흐름에 역행하며 군사적 기초 위에서 일방주의를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이날 오후 프레스센터에서‘수정궁:자본주의적인 안락과 테러리즘’을 주제로 강연한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지구화의 완성:지구라는 기호의 승리’(30일 오후2시ㆍ대전 한남대) ‘응축불가능성:지역의 재발견’(11월1일 오후3시ㆍ대구 계명대) ‘미국은 예외인가:어떤 유혹의 해부’(2일 오후3시ㆍ서울대) 등 모두 4차례 강연을 한다.

    방한에 맞춰 그의 대표 논문 3편을 번역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과 그의 생명복제 논쟁을 이진우 계명대 교수 등 국내 학자들이 분석한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도 나왔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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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케 현상 2004-10-29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들고 가서 읽어 볼게요^^

    MANN 2004-10-30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강연회 포스터를 본 듯 한데...
    이것만 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름이 한겨레 기사 두 번째 문단에선 슬로터바이크,
    세 번째 문단에선 슬로터다이커라고 되어있네요;;
    기사에서 사람 이름을 두 번이나 틀리다니;;)
     

     

     

     

    음악, 문학, 그리고 맥주가 생활 속에…

     

    동유럽 여행기 <1>체코 프라하

    이상희 <ishtarfor@hanmail.net>
              
    ▲ 유람선에서 본 밤의 프라하.  ⓒ 이상희

    석양이었습니다, 프라하는….

    밤에 도착한 공항은 처음인가? 기분 탓인 지 프라하 공항은 애잔한 느낌을 주네요. 시설이나 디자인은 아주 세련됐는데….

    위협적이거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변과 어울린, 보기 드문 공항 건물입니다. 공항 주차장 조명이 녹색 창과 아이보리색 벽에 부딪혀 따뜻하고 친근해 보이네요.

    사실 공항들 다 비슷하고 거기서 거기지만 버스를 기다리고 앉아있으니 전에 김해공항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도 혼자 해지는 시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요….

    참, 제가 비행기로 여행을 다니니 '웬 호사?'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으실 듯합니다. 저도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저가 항공사들이 엄청 많습니다.
    GO-FLY, EASYJET., RYANAIR….

    물론 시시각각 요금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터넷을 잘 두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행 한 코스를 마치고 와서, 싼 표를 찾아서 돌아다니다, 좋은 조건을 찾으면 바로 떠나는 그런…. 아무튼 좀 황당한 방식으로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프라하도 영국까지 왕복항공료가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였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서 런던까지 기차 타고 가는 것보다 싼 가격입니다.

    ▲ 유람선에서 본 프라하.  ⓒ 이상희

    프라하는…. 너무 반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깨끗하고 이쁘고…. 근데 사람들이 저마다 가장 인상적인 도시로 꼽는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부다페스트 쪽이 더 좋았거든요. 좀 더 아담하고 따뜻한 느낌, 관광객이 적어서 그런가…. 사람 사는 데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프라하보다 좀 더 가난한 느낌이지만.

    영어 식으로 프라그라고 부르는 게 듣기 싫데요. 도시들 이름 그 나라 식으로 제대로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이탈리아 쪽도…다 영어 식으로…. 오죽했으면 밀라노에서 나오는 가이드북 이름이 <밀란 이즈 밀라노>…. 거꾸로였나?

    제가 아무리 방향치일지라도, 한 도시에서 이틀쯤 지나면 대강 윤곽이 잡히고, 다니는 데 별 문제가 없어집니다. 근데 프라하에서는 나흘이 넘어가도 계속 헤매고 다녔습니다. 작은 지역들은 익숙해지는데, 그것들이 결합이 안되는 겁니다. 심지어 가이드 투어까지 했는데 말이죠. 이유를 모르겠어요….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강에는 다리가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유명한 다리는 '카를 다리'입니다. 프라하성이랑 시내 쪽을 연결하는 다리지요. 이 다리에는 아주 근사한 조각들이 많이 있는데,게 중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조각이 있지요.

    ▲ 체코 성인 Jan Nepomucky의 조각상.  ⓒ 이상희
    Jan Nepomucky라는 체코 성인의 조각상입니다. 조각상 아래 쪽에 조각되어 있는, 순교하는 성인의 모습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주신다네요.

    우리네 부처님들이랑 비슷하지요. 그 옆의 개의 조각을 붙잡고 기도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일생, 자신에게 충실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요? 그 얘기를 프라하 가기 전부터 들어서, 계속 고민하다 카를 다리를 한참 가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만 들어준다니까 뭘 원해야 되는지 도저히 고를 수가 없더라구요. 그냥 구경하고 다시 가면 될텐데 인간이 고지식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비겁하게 두리뭉술한 소원을 만들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남해 금산 보리암 갔을 때도 소원 하나 들어주신다고 해서 전날 밤부터 계속 고민했었는데…. 하여간 인간이 얄팍해요…하하.

    프라하 성내의 성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 글래스가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창은 보통 스테인드 글래스 분위기인데 창 하나가 선명한 채색화의 느낌을 줍니다.

    창 옆의 벽에도 그림이 인상적인데, 프레스코화도 아닌 것 같고 마치 판박이를 붙여놓은 느낌이었습니다. 성 조지 교회당은 천장이 나무로 격자무늬 모양으로 짜놓아서 독특해 보였습니다. 미사 의자도 이때까지 다녀본 중에 가장 질이 좋아보이더군요.

    성내의 황금 소로는 예전에 연금술사들이 연구하던 집들이라네요. 카프카가 잠시 집필했던 집도 있구요. 지금은 공예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로 꾸며져 있는 집들을 구경했습니다.

    그 집들 낮은 2층은 쭉 연결되어 갑옷이나 창들을 전시해 놓았더군요. 근데 그런 건 별로 재미없고 벽에 있는 창이 아주 독특하데요. 통나무를 잘라 중간에 사각으로 홈을 파서 끼워 놓은…잘 설명이 안되네요. 어쨌든 재미있는 창이었습니다.

    프라하에는 카프카의 흔적이 참 많네요. 하긴 카프카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 조각들을 그냥 생활로 받아들이는구나 싶을 정도로 문화적인 분위기입니다.

    ▲ 프란츠 카프카가 살던 집.  ⓒ 이상희

    전에 프라하를 다녀오신 분이 저더러 꼭 프라하 가야한다고 하셨는데 이유를 알겠더군요. 프라하는 맥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입니다. 오리지널 버드와이저를 비롯해…. 버드와이저나 미켈롭이 체코의 지방 이름이라네요.

    다양한 종류의 맥주가 많습니다. 저는 부드러운 라거 보다 비터 쪽을 좋아하는 편이라 영국 쪽 맥주가 더 입에 맞지만 워낙 다양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으니 종류별로 맛보는 재미로 마시게 됩니다. 밥 먹으면서도 한잔, 길 가에 앉아 쉴 때도 한잔, 목마를 때도 맥주 한 캔…하루종일 맥주를 달고 다닙니다.

    프라하에서 밥 먹고 물론 맥주도 마시고…숙소로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맞고 가든지 기다려 보려고 하는데 제대로 비를 피할 곳도 마땅찮고 계속 더 심해지데요.

    그 핑계 대고 가까운 펍으로 뛰어들었는데…이 집 참 좋더라구요. 테이블 다섯 개 정도의 작은 가게인데 아주 관록있는 느낌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참 편하게 해주시더군요.
    낯선 나라에서 처음 간 곳인데도 늘 다니던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낮에는 웬만히 혼자 있어도 밤에 혼자 술집에 가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지요.

    체코 물가가 싸다고 하지만 서유럽 사람들 기준으로 그런 것 같고, 그냥 우리랑 비슷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체코 음식들은 먹을 만 하구요. 전통 스프라는 건 스코틀랜드 홈메이드 스프랑 거의 흡사합디다.

    ▲ 프라하 성내의 황금 소로.  ⓒ 이상희

    기름기가 약간 많은 게 차이랄까? 닭 같은 걸로 육수를 내는 것 같고 감자, 당근, 샐러리 같은 야채를 잘게 썰어서 푹 끓였는데 거기다 보리 비슷하게 생긴 곡식을 같이 넣었더군요. 국에 밥 말은 것 같은 식이었습니다.

    체코는 웨이터들이 우리 1년치 영수증 모으는 지갑처럼 칸이 많이 나눠진 지갑을 들고 다니며 바로 계산을 해줍니다. 돈의 단위가 워낙 많아서 그런 걸 사용하나본데 볼 때마다 좀 우습더군요.

    제가 워낙 수치에 약하다 보니 체코랑 헝가리에서는 화폐의 단위나 가치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고생하다가 그냥 환산하는 걸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습니다. 도대체 유로화 전에는 어떻게 유럽 여행을 했는 지 존경스럽더군요. 그때 여행자들….

    밤에 유람선을 탔습니다. 강을 따라 서너 시간 내려가는 코스였는데 좀 어설프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도 있구요. The Girl From Ipanema, La Vie En Rose 같은 곡들을 연주하는데 공간이 넓으니 소리가 다 퍼져버리네요. 다리 밑을 지나갈 때는 소리가 울려 제법 들을만 합니다. 역시 울림판이 중요하군요.

    이 많은 사람들 중 일행 없는 혼자는 또 저 하나네요. 이제 적응도 되어가지만 특히 이런 밤 유람선 같은 데는 워낙 다정한 사람들이 많아서 강바람이 더 춥게 느껴집니다..

    강 중간쯤 갔다 다시 돌아오는데 요즘 해가 늦게 지니 프라하성 조명이 켜지는 걸 기다리느라 배가 일없이 빙빙 돌고 있네요.

    ▲ 성 비투스 성당.  ⓒ 이상희

    마지막날은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에 갔습니다. 이곳은 동화 속 마을 같았습니다. 처음 이 도시로 접어들 때, 숲 속에 작은 성 같은 호텔과 예쁜 집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모습이 참 이쁘더군요.

    마침 영화제가 한창이었는데 김기덕감독전이 있어서 거리에 영화를 소개하는 대형포스터 중에 '나쁜남자'도 보이더군요. 워낙 광적인 분위기의 부산국제영화제 밖에 영화제를 본 적이 없는지라, 영화제 때문에 복잡하다고 하는 데도 그냥 느긋한 관광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작은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온천수가 나오는 곳들이 있어서 도자기로 된 전용컵으로 오며가며 마시고 다닙니다. 거리 중간에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많은 도로는 그 길에서 담배를 필 수도 없고 개를 데리고 다니지도 못하게 해놓았더군요.

    모든 여행길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있기 마련이지만 들어나 봤습니까? 투어버스 운전사가 차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얘기…. 황당하더군요. 프라하에서 다시 차가 와서 태우고 간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프라하로 돌아가는 일 밖에 없는 듯 느긋했지만 저는 그날 밤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를 타야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도 미안하다는 얘기만 하고…예정보다 세 시간쯤 늦게 출발해서 정말 열심히 달리는데… 세상에 우박이 쏟아지데요. 정말 차 지붕, 창에서 툭탁툭탁 소리가 나도록 큰 우박들이….

    ▲ 황금 소로의 통나무 창.  ⓒ 이상희

    겨울에는 지름 2,3 cm의 우박들이 온다고 하네요. 와이퍼를 움직여도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을 만큼 내리는 상황에서 당연히 거북이 걸음…어쨌든 기차 타기는 탔습니다. 진땀났지요.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 가는 기차는 침대칸이었습니다. 3인용 객실이었는데 출발할 때까지 다른 손님이 없더군요. 마침 승무원아저씨도 너 혼자 쓰는 거라고 얘기하셔서 횡재다 생각하고 대강 싼 배낭 짐 풀고 세수하고 난리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막 두드립디다.

    3중으로 잠궈놓은 자물쇠를 겨우 열었더니 아까 그 승무원아저씨 안면을 바꾸시고 딱딱한 표정으로 니 자리는 꼭대기라고 하시는데…. 그 뒤로 서너살된 꼬마랑 젖먹이 아기를 안고 산만한 배낭을 진 엄마가 들어옵니다.

    부랴부랴 짐을 삼층으로 쓸어 올리고 인사를 하는데, 그 시끄럽고 답답한 침대칸에 갓난아이가 탔으니…애기 엄마는 미안해 하지만 어쩌겠어요. 다들 고생하고 가는 수밖에….

    근데 이 열차가 체코에서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로 들어가니 겨우 애 재울 만하면 국경 통과하는 검문소입니다. 나가고 들어가고 도합 4번의 여권검사로 다들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 프라하 전경.  ⓒ 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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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무비 2004-10-2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의외로 굉장히 섬세한 분이시군요.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전 생각난 김에 따우님 방에 가서 알래스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거든요. 따우님은 안 계셨지만......
    그런데 프라하 기행문을 쓴 이상희 씨가 <잘 가라 내청춘>의
    그 시인 이상희 씨는 아니겠죠?
    담담한 여행기와 사진이 마음에 듭니다.
    고마워요, 발마스님.^^

    balmas 2004-10-29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의외라니요??
    평소에 얼마나 둔감해 보였으면 ...(ㅋㅋ)
    시인 이상희 씨인지는 확인이 안되는데요.

    릴케 현상 2004-10-29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이 여행안내를 시작하셨네요^^

    balmas 2004-10-29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는 저도 한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balmas 2004-10-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 마련하셔서 꼭 가보세요.
    저도 언젠가는 ...^^
    (헉, 원고청탁 거절했다는 소식이 따우님 귀에까지 들어갔군요.
    저는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바쁘기도 하고 데리다 추모글은
    벌써 쓸 만큼 썼는지라 ...)

    숨은아이 2004-10-2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를로비바리라면 베토벤도 애용했다는 온천지네요. 가보고 싶어라. 그렇게 먼 곳에서 김기덕 감독전을 하는군요!

    balmas 2004-10-30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죠, 베토벤도 애용했던 곳이죠.
    (마치 잘 안다는 듯이 ... ㅋㅋㅋ;;;)

    딸기 2004-11-05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져요. 프라하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런데 저 여행기는 퍼오신 것 같은데, 발마스님도 프라하에 가보셨던 거예요?

    balmas 2004-11-0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스트롱베리님,

    저 같이 게으르고 돈없는 촌놈이 프라하 같은 데 가봤을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언제 가봐야겠다, 벼르고 있을 따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