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판 니체’ 슬로터다이크의 ‘도발’
“유전공학 통해 새 인간성 창조” 주장
지난 20일,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배아복제 연구 재개를 선언했다. 최근 막을 내린 인간복제금지협약을 위한 유엔회의는 끝내 찬반논쟁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유럽국가들과 함께 ‘치료적 복제 허용안’을 제출해 찬성론에 가담했다. 선구자적인 한 유전공학자의 노력 덕택에 이제 한국은 이 세계사적 논쟁의 첨단에 서있다.
유전공학을 철학전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
이런 급박한 변화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 인문학계에 독일의 한 철학자가 찾아 왔다. 28일부터 11월2일까지 네차례에 걸쳐 국내 강연을 펼칠 페터 슬로터바이크(56·독일 카를스루에 조형대학 총장)가 주인공이다. 때맞춰 그의 사유를 소개하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과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 두 권의 책도 동시에 발간됐다.
슬로터다이커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적 논쟁의 진앙지 노릇을 하고 있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나찌즘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있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등 출간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기획’이라 불릴만 하다.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의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다.
철학·과학자 연합한 초인 필요성 주장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의 적극적인 활용을 요구한다. 심지어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의 필요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나찌를 기억하는 현대의 지식인을 ‘경악’시킨 그의 사유는 그러나,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되지 않았다. 이번 방한 강연의 주제가 ‘세계의 밀착-지구화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네차례 강연
분명한 것은 프랑스의 해체주의 이후 별다른 지적 자극을 받지 못했던 국내 인문학계가 모처럼 논쟁적 철학자를 만났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서구 ‘사상’의 수입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사유’할 계기까지 품고 있다. 철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인간복제의 기술적 선두 주자가 바로 한국이기에 그렇다. 이제 우리의 인문학계가 응답할 때다. 한국철학회(회장 성진기) 주최 제8회 다산기념철학강좌의 하나로 열리는 그의 강연은 28일 서울 언론재단회관에서 열린 데 이어, 30일 한남대, 11월1일 계명대, 11월2일 서울대 등에서 계속된다. (02)820-0370.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슬로터다이크?
“니체의 초인이론 변형시킨 파시즘적 수사”
언론비판 맞서 대논쟁
슬로터다이크의 유명세는 독일 언론을 통해 전개된 이른바 ‘슬로터다이크 논쟁’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논쟁은 인간복제를 둘러싼 현대 철학의 논점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인문학과 저널리즘이 어떻게 서로에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발단은 99년 7월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슬로터다이크가 발표한 강연문이었다. 그 내용에 대해 〈차이트〉가 “니체의 초인이론을 유전공학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파시즘적 수사”라며 비판기사를 싣자, 슬로터다이크가 “저널리스트 주제에 내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긴 했느냐”며 반박글을 기고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하버마스의 사주’로 단정하고, 하버마스에게 보내는 장문의 서한도 언론에 실었다. 여기서 그는 하버마스의 후기비판이론을 “자신만이 윤리적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유전공학을 둘러싼 논란이 근대적 합리성을 넘어서려는 두가지 기획(비판이론과 포스트휴머니즘론)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 셈이었다.
〈차이트〉 〈슈피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독일의 주요 언론매체들이 이후 1년4개월 동안 30여차례에 걸쳐 하버마스 등 유력 학자들의 기고와 대담, 관련 학술 기사들을 통해 이 논쟁을 다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잘못된 환상 △인간성의 우열을 나눌 기준의 자의성 등이 비판의 근거로 등장했다. 동시에 △유전자 조작이 반드시 인간 존엄성의 훼손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유전자 의존도는 얼마나 큰 것인가 △도덕성 함양을 위해 왜 인간은 (유전자 조작이 아닌) 교육에만 매달려야 하는가 △인간은 왜 불완전한 자연생식을 통해서만 출현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도 제기됐다.
이번에 발간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등을 통해 이 논쟁을 소개한 이진우 계명대 교수(철학과)는 슬로터다이크를 “계몽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계몽작업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위험한 문제를 위험한 방식으로 다루는 탓에 여러 오해를 ‘자초’하고 있지만, 그 지평은 ‘계몽’과 ‘비판’에 잇닿아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獨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 방한
"생명복제 무조건 반대는 유아적 발상"
인간 생명 및 존엄성을 절대시하는 인문주의적 학풍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생명복제 등 유전공학을 옹호, 독일 지성계에 충격을 주었던 페터 슬로터다이크(57) 칼스루에 조형대 총장이 한국을 방문해 2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올해로 8회째인 한국철학회 다산기념철학강좌에 초청돼 방한한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한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3년 발간한 ‘냉소적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철학자다. 그는 특히 99년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들’라는 논문을 발표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제자들과 격렬하고도 감정적인 논쟁을 벌이며 “비판이론은 죽었다”고까지 선언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고전적 휴머니즘과 인문주의적 교육을 통해 인간의 야수성을 길들여온 프로젝트는 실패했다며 그 대안으로 유전공학을 통해 엘리트를 선별하고 배양함으로써 미래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하자는 생각의 단초를 제시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독일 학계와 언론들은 니체가 말한 초인의 탄생에 빗대어 ‘차라투스트라 기획’이라고 부를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두고 생명공학과 관련한 윤리적 문제를 배제한 극우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거세지만,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생명공학에 대해 불안만 가질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직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생명복제를 반대하는 종교계 등에서는 수정 이전 줄기세포 단계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유아적 발상”이라며 “심지어 인간의 유전병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자학적 발상이 아닌가. 생명공학을 통해 유전적 고통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고 반문했다.
최근에는 세계화와 관련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점검하는 데 관심을 쏟고 있는 그는 미국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2차 대전을 전후해 유럽 국가들의 일방적인 영역 확장의 역사가 끝나고 세계의 역학구도가 평형을 찾아가고 있으나, 미국은 이 같은 역사적 흐름에 역행하며 군사적 기초 위에서 일방주의를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이날 오후 프레스센터에서‘수정궁:자본주의적인 안락과 테러리즘’을 주제로 강연한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지구화의 완성:지구라는 기호의 승리’(30일 오후2시ㆍ대전 한남대) ‘응축불가능성:지역의 재발견’(11월1일 오후3시ㆍ대구 계명대) ‘미국은 예외인가:어떤 유혹의 해부’(2일 오후3시ㆍ서울대) 등 모두 4차례 강연을 한다.
방한에 맞춰 그의 대표 논문 3편을 번역한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과 그의 생명복제 논쟁을 이진우 계명대 교수 등 국내 학자들이 분석한 ‘인간복제에 관한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도 나왔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