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은 오는 11월 5일 (토)부터 경향신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입니다.

신문에는 지면상 다소 축약된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새롭게 번역된 책이 또 상당한 오역본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좀더 책임감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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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08년 방한할 때까지 국내에 랑시에르를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방한과 함께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출간된 이후 불과 2년여만에 10여권의 저작이 소개되고 문학계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왜 랑시에르가 이렇게 주목받을까? 그것은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가 깊이 있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집약된 책이 [불화]라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최근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장-클로드 밀네르, 베니-레비 등)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가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원죄 내지 도착(倒錯)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전에는 전체주의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적 개인주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평등한 집단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자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곧 독재나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69쪽-번역은 수정)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아니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개인의 권리 보호, 사유재산 보장, 법치, 주기적인 선거, 권력 분립 등으로 꼽는다. 중요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현재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흔히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말하는 서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금융 권력이 거대한 부를 독점하고, 인종주의 테러와 이민자 추방, 정치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현상들이 나타날까?

따라서 랑시에르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곧 “우리의 “민주주의들”이 겪고 있는 악은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156쪽)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 그럼에도 과두제 국가에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량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민이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대의제가 과두제 권력의 단순한 도구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민이 행위를 통해 실질적 대표성이 관철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다.”(158쪽) 민주주의란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행위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같은 출판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심각한 오역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출판사 스스로 수거ㆍ폐기한 바 있다. 그럼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사정이 훨씬 좋아졌을까? 평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번 오역본보다는 상태가 다소 좋지만 학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번역이다. 이런저런 다수의 오역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뿐더러, “이중구속”을 뜻하는 “double bind”를 같은 페이지에서 한번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한번은 “이중적 연계”(74쪽)라고 번역하거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를 “프랭크 갈브레이스”(60쪽)로, 울리히 벡을 “율리츠 벡”(193쪽)으로 표기하는 등의 사례도 보인다. 이는 역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출판사 편집부의 기본 소양에서 비롯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역자보다 편집부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읽기 위해서는 세 번째 번역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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