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들의 모방: 원초적 계약의 불가능성

 

  하지만 우리는 아직 공통의 정서들, 곧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 어떤 공통의 피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이 어떻게 해서 홉스 및 󰡔신학정치론󰡕에서 계약이라는 관념이 수행했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봐야 할 차례인데, 여기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사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이래 이룩한 이론적 성과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정서론에서의 발전이다.

  󰡔신학정치론󰡕의 정념론에 비하면 󰡔윤리학󰡕의 정념론 또는 정서론은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윤리학󰡕에 나타난 정서 개념은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가 수동적인 것, 곧 정념적인 것들에 국한되지 않고 능동적인 정서들도 포함하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제시된 정서론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서 개념 및 능동과 수동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나 홉스의 정념론과 단절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에 이르러 비로소 역량의 관점에서 정서들을 연역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 그 결과 󰡔윤리학󰡕 이후에 스피노자는 더 이상 정서들을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이성을 좀더 광범위한 능동화의 역량의 한 계기로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정치론󰡕의 정서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신학정치론󰡕과 비교해볼 때 󰡔윤리학󰡕의 정서론이 지니는 또다른 특징은 바로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있다. 사실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스피노자가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인 인간학적 원리로서, 바로 이 개념에 기초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사회화 및 반사회화의 경향들을 단일한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당대의 정치학의 흐름과 상이한 기반 위에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었다.

  우선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윤리학󰡕 3부 정리 27에서 제시되는데, 이 정리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을 통해 3부의 논의의 한 가지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2).


만약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를 겪는 것을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의해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된다3).


정서들의 모방이 제시되기 이전까지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스피노자는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서들의 분자구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코나투스로서의 욕망은 우리의 존재 및 행위역량이 증대되고 촉진되거나 아니면 감소되고 저해받는 이중적 경향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전자와 후자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다. 나머지 다른 정서들은 이 분자 구조가 변형되고 복잡화된 형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는 정리 26에 이르기까지 정서들의 관계를 대상과의 관계로서 전개하고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 소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곧 외부원인들에 대한 표상과 결부된 기쁨과 슬픔으로서의 사랑과 미움이 나오는 정리 12-13에서부터 정서의 시간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희망과 공포가 제시되는 정리 20에 이르기까지는 개별적인 주체와 어떤 대상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정리 21에서 26까지는 이러한 대상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리 27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정서와 대상의 직접적인 관계를 해체한다는 점에 있다. 곧 이 정리 이전까지 전개된 정서론에서 모든 정서는 항상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생겨난 반면, 정리 27은 직접 어떤 대상에 대한 정서를 겪지 않고서도, 우리와 비슷한 실재4)가 이 대상에 대한 정서들을 겪게 되면, 또는 그것이 그러한 정서들을 겪는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실재와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되는 정서적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서들의 모방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과의 직접적인 변용을 통해 이러저러한 정서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가 이전까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대상과 맺는 정서적 관계들을 모방함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서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들, 또는 정서적 연관망을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빼어내서, 이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관계와 관련시킨다.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메커니즘이 등장하면서, 이제 정서들의 일차적인 생산자는 우리가 대상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간접적 관계, 모방적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서들의 모방에서는 정서들이 진행되는 방향의 전환이 발생한다. 곧 이제 더 이상 정서들의 진행방향은 나에서 시작해서 다른 실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재에서 나에게로 진행한다. 이제 나는 정서들의 출발점, 정서들의 중심이 아니며,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적 관계에서 (말하자면) 탈주체적, 탈자아적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러한 모방이 의식적으로 실행되는 모방이 아니라는 점, 곧 정서들의 모방 메커니즘에서 내가 타자의 정서들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의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힘과 효력은 바로 이러한 비의식적이고 비의지적인 성격에 있기 때문이다5).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합치의 힘은 스피노자가 3부 정리 29 및 그 주석에서 ambitio라고 부르는 정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암비치오는 현대어에서 쓰이는 “야망”이나 “야심”과는 좀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다. 현대어에서 “야망”이 “무언가를 크게 이루어보려는 희망”을 의미하고, “야심”은 “이를 이루려는 마음”이나 좀더 부정적으로는 “이를 이루기 위해 남을 해치려는 마음” 곧 “음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암비치오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곧 자신의 이익이나 기쁨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6)


정리 29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기쁘게 간주할 만한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주석

이처럼 단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피하려는 노력은 암비치오[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ambitio이라 불린다. 특히 우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삼가는 일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우중vulgus을 기쁘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때 그렇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암비치오,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하려는 노력과는 다른 것이다. 암비치오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다른 사람들, 특히 대중에게 잘 보이고,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이처럼 암비치오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면, 곧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면, 사람들 사이에 합치를 이루는 것, 더 나아가 조화를 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서들의 모방은 이와는 또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방향적인 관계만을 살펴봤는데, 사실 정서들의 모방은 A → B만이 아니라 B → A라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정서적 관계는 정서들의 모방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정서들의 모방을 동반하지 않는, 곧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서적 관계들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모든 측면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서들의 모방이 어떻게 해서 갈등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지는 좀더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가 “마음의 동요fluctatio animi”라고 부르는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의 동요는 “두 가지 대립하는 정서에서 생기는 정신의 상태mentis constitutio quae scilicet ex duobus contrariis affectibus oritur”(E III P17s)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보통solet 슬픔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실재가, 우리를 보통 같은 크기의 기쁨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다른 실재와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이 실재에 대해 미움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랑하게 될 것이다.”(E III P17) 따라서 마음의 동요, 또는 정신의 동요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동시에 상반된 정서들을 느낄 때 겪게 되는 혼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동요가 정서들의 모방과 결부되면, 앞에서는 합치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던 암비치오가 이번에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리 31은 이처럼 정서들의 모방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제시해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는odio habere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한다고 상상하면, 이로써 우리는 이것을 더욱 확고하게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그가 싫어하거나aversari 또는 그 역의 경우라고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겪게 될 것이다.”(E III P31) 이 정리에서 첫 번째 문장에서는 두 가지의 정서적 관계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생겨나는 정서적 관계(나-어떤 실재, 어떤 실재-타인)며, 다른 하나는 타인과 나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서적 모방의 관계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가지 정서적 관계는 같은 방향으로, 곧 내가 사랑하는 것을 그도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은 그도 미워하는 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나의 정서적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똑같이 두 개의 정서적 관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대상과의 정서적 관계와 타인과의 정서적 모방의 관계가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동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정서들의 모방이 결부될 경우 이러한 탈출의 노력은 예기치 않은 전환, 심지어 전도를 낳게 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31의 따름정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부터, 그리고 3부 정리 28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곧 각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게끔 노력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quantum potest 노력하게 된다. ... 자기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려는 이러한 노력은 사실은 암비치오/잘 보이려는 욕망이다(3부 정리 29의 주석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 각자는 본성상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열망하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pariter 이를 열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똑같이 장애물이 되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E III P31c)  


이를 전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이 경우에는 거꾸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욕망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첫 번째 암비치오의 경우 화합, 또는 적어도 일치의 동력으로 나타났던 정서들의 모방이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갈등과 증오의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종류의 암비치오, 곧 “명예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E III app.41)으로서 암비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동일한 욕망을 갖도록 욕망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증오와 갈등을 낳는다는 점에서 (마트롱이 말하듯이) 단순한 명예욕을 넘어서는 지배에 대한 욕망이라 할 만한 것이다7).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정치학의 문제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기에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1)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자들(특히 홉스)의 가정과 달리 인간들은 원초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동일성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점,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8).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할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암비치오의 첫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정서들의 모방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라는 목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로를 따라 이야기하자면9), 사람들이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하려고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인간의 본성이 욕망인 한, 인간들은 욕망하지 않고서는, 정서적 활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인간들이 항상 이미 정서들의 모방의 연관망 속에 들어 있는 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 정서들을 모방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본질을 이루는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정서적 관계는 개인들의 동일성/정체성에 내재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관개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정치론󰡕의 인간학적 특성, 곧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의 구체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이처럼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관계, 특히 정서들의 모방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정체와 자연권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적인 개인들의 우선성을 존재론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더 이상 이론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 대신 스피노자 정치학은 새로운 대상, 새로운 문제는 갖게 된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대상은 바로 대중들multitudo10)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고유한 개념도, 스피노자가 가장 먼저 사용한 개념도 아니며, 이미 홉스의 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개념은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하지만 홉스의 정치학 체계 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해야 하는) 개념,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홉스 정치학의 유령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1편에서도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대중들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擬人, person)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강조는 홉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뒤, 곧바로 대중들은 “단일한 실재singular entity”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하나의 의인, 곧 법적 인격체로서의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고11), 따라서 소유도 권리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유효한 행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이처럼 대중들을 다수의 사람들,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함으로써 대중들의 정치적 유효성을 박탈할 경우에만 (홉스의 의미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DC 12장 8절, p. 137)


홉스의 정치학에서는 계약의 주체로서 개인들 또는 의인들과,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권력의 주체로서의 주권자 이외의 다른 정치적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들만이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만약 대중들이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갖게 된다면 홉스의 정치학은 근저로부터 위협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홉스는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홉스가 이처럼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첫 번째 질문으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역으로 대중들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유효한 실재라는 것, 대중운동이 정치적 질서에 대해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중들이라는 개념이 홉스 정치학의 유령이라는 말이 그리 부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스피노자는―다음 절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 보겠지만―대중들을 원초적인 정치적 실재로서 긍정한다. 이는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으로 이루어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들에 선행하고 개인들의 정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더러, 이러한 관계가 국가, 따라서 정치의 기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은 개인들을 결합하고 대립시키는 이러한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3) 이처럼 대중들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함에 따라, 스피노자 정치학의 과제 역시 󰡔신학정치론󰡕과 달라지게 된다. 󰡔신학정치론󰡕이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실은 자유다Finis ergo reipublicae revera libertas est”(TTP 20장 6절, p.636)라고 선언했다면, 󰡔정치론󰡕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보존이라는 문제, 평화와 안전이라는 문제가 국가의 핵심 과제로 제시된다. “시민사회의 목적은 평화 및 안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TP 5장 2절) 이렇게 평화와 안전이 국가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한 주요 위험은 바로 내부의 시민들에 있다는 주장은 󰡔신학정치론󰡕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해소하는 길을 우중들을 규율하는 데서 찾고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대중들 바깥에서, 곧 어떤 초월(론)적 준거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도 않다. 사실 대중들, 곧 정서들과 관념들의 복합적인 연관망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면, 대중들 바깥에서 정치학의 기초를 찾는 것은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거나(TP 1장 1-2절 참조) 참주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TTP 「서문」 외 여러 곳). 그런데 이처럼 우중 또는 대중들이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 설정되어 대중들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으로서만 간주될 수 없다면, 대중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이며, 이들에게 항상 수반되는 정서적 동요들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첫째,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질서의 존재론적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둘째,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셋째, 󰡔정치론󰡕에 나타나는 민주주의 개념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제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주)

 

1) 이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학위논문, [스피노자에서 관계의 문제] 6장을 참조하라.

 

2)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윤리학󰡕 3부의 논증 과정에서 이룩하고 있는 단절의 의미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Matheron 1969, pp. 151 이하 및 Macherey 1995, pp. 214-226을 각각 참조하고, 홉스의 인간학과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Lazzeri 1998, pp. 77 이하 참조. 단 마슈레의 경우는 정리 27보다는 정리 21 이하의 단절을 더 중시하는데, 이는 정리 21 이전까지는 대상, 실재와의 관계만이 문제가 되었다면, 정리 21부터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3) “Ex eo, quod rem nobis similem, & quam nullo affectu prosecuti sumus, aliquo affectu affici imaginamur, eo ipso simili affectu afficimur.”

4) 여기에서 “res”란, 현대어로는 대개 “thing”이나 “Ding”, “chose”로 번역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현대의 용법과는 달리 인간 또는 생명체와 대립하는 의미의 무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정리 27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리와 비슷한 실재rem nobis similem”는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res”를 “사물”이라고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다. 그런데 “res”에서 파생한 “realitas”라는 단어는 현대어로는 “reality”나 “Realität”(또는 “Wirklichkeit”), “réalité”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는 “실재성”이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이 단어 및 이와 관련된 단어들(“real”, “realism” 등)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 “res”는 “실재”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5) 이는 (초기) 마트롱이나 네그리에서 나타나는 목적론적 경향과 비교를 위해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 논점이다.

6) 대개의 󰡔윤리학󰡕 불역본이나 영역본에서는 이를 어원에 따라 “ambitio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바르투샤트Bartuschat의 최신 독역본(Spinoza 1999c)에서는 이를 “공명심”이나 “명예심”이라는 뜻을 지닌 “Ehrgeiz”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고 강영계의 국역본에서는 “명예욕”(158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독역본이나 국역본의 번역은 고전 라틴어의 ambitio가 지니는 의미를 비교적 잘 살려주고 있으나, 이런 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의미를 표현해주기에는 좀 미흡하다. 왜냐하면 명예욕이라는 것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제안하는 “잘 보이려는 욕망désir d'être bien vu”라는 역어(Macherey 1995, p. 235)가 스피노자의 ambitio가 지닌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ambitio를 이렇게만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ambitio라는 개념의 핵심적 중요성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하는 욕망으로 전도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경우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명예욕”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ambitio가 지니고 있는 이 이중적 의미, 전자의 의미에서 후자의 의미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정서들의 모방의 이해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트롱이 ambitio를 “ambition de gloire”와 “ambition de domination”으로, 곧 “명예욕”과 “지배욕”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구분은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상이한 유래를 갖는 것이 아니라, ambitio라는 동일한 하나의 원천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 번째 ambitio를 “명예”와 관련짓고 두 번째 ambitio는 “지배”와 관련짓는 것은 얼마간 주체중심적인 관점인데, 왜냐하면 ambitio의 근본적인 함의는 주체의 지향적 구조를 해체한다는 데 있지만, 이 두 가지 번역은 이러한 지향적 구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ambitio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첫 번째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으로 번역하겠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지배욕”으로 번역할 것이다. 

7) 하지만 이러한 지배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가 타인들을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하는 그만큼, 타인들 역시 나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타인들을 나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타인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그 중 한 가지 경우로 나는 좌절하게 된다. 이 때 나는 타인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내가 타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그들을 나의 욕망,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와 같은 기질, 같은 욕망을 가질 경우 그들은 나와 동일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데,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대개 공유 불가능한 것(돈, 명예, 성적 대상 등)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특히 우리가 이성적 능력이 결여된 정서적인 삶을 살아갈 경우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을 나의 경쟁자로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이 진짜로 나의 욕망을 따를까 봐 두려워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다시 또 마음의 동요에 빠지게 된다. 결국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했지만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8) 관개체성 개념에 기초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으로는 특히 Balibar 1993; 1996을 참조.

9) 특히 Moreau 2003 pp. 133 이하 참조.

10) 용어 번역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글(및 제 1부)에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multitudo”라는 용어를 줄곧 “대중들”이라고 번역했다. 네그리 연구자들은 이 개념을 주로 “다중”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뒤에서 좀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적어도 스피노자 자신의 용법을 고려할 때 물티투도는 집합적인 명칭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든 (정치적)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제안하듯이 물티투도 개념은,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수성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masses”, 우리말로는 “대중들”로 번역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1) 홉스의 “의인” 개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 140-1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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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서론: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요소들(자연상태 개념,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의 원리로서 계약, 계약의 결과로서 주권)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은 매우 특이한 수용으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의 사회계약론의 기본 전제들을 비판하거나 심지어 전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정치론󰡕에 나타난 계약론 수용 및 변용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의 단절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권이 지배하는 곳이다. (2) 이에 따라 사회계약은 홉스와는 달리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 곧 인공적 질서로서 국가를 정초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역량에 의해 조건지어지며, 권리의 범위는 역량의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 역시 그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3)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계약은 역사적 계약으로 나타나며, 더욱이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곧 정치적 계약과 이를 보충하는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된다. 이때 종교적 계약은 사회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개인들의 자연권, 곧 정념들을 순화하거나 규율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관한 고찰들을 통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신학정치론󰡕보다 6년 뒤에 집필된, 하지만 스피노자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이 책은 민주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11장 4절까지 서술된 상태에서 중단되어 있다)에서는 사회계약론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1) 󰡔신학정치론󰡕의 논의에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계약론이 불과 몇 년 뒤에 쓰여진 저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의 정세에 개입하려는 스피노자 자신의 시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 그 시도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교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곧 스피노자는 공화파 지도자인 드 비트 형제의 정치적 노선을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신학정치론󰡕은 이러한 정치적 태도의 이론적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정치론󰡕에서 스피노자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이는 불충분한 타협책에 불과하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

  하지만 이는 좀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정치론󰡕이 견지하고 있던 이론적 불충분함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자신의 저술의 목표를 공표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들의 사고와 판단(그리고 더 나아가 발언3))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훌륭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판단 및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근본 원리 또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유는 사고와 판단에 국한되어야지 행위에까지 확장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우중 및 우중을 이루는 개인들의 이성적ㆍ정치적 역량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인민의 지배 또는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인민 전체 또는 그 중 가장 큰 부분에 의해 조화롭게 유지되는 민주주의”(TTP 20장 2절; p. 634))가 가능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말과 행동, 사고와 행위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역시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신학정치론󰡕에 도입된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바로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곧 법적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중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개인들을 규율할 수 있는 보충적인 장치가 필요하며, 스피노자는 히브리 국가의 설립과 운영의 기초가 되었던 이중적인 계약에서 이것의 전형적인 모델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론적 문제설정은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치의 대상이자 복종의 주체/신민subjectus으로서만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주창하는 민주주의적 관점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모세 사후에 곧바로 히브리 국가가 분열과 갈등 속에 빠져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적인 안정성에 기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봤을 때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는 중요한 이론적 관점의 변화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론󰡕에는 󰡔신학정치론󰡕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 곧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우중vulgus이나 평민plebs 같은 단어들과 달리 󰡔신학정치론󰡕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개념,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을 대체하는 개념이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정치론󰡕에서 이 개념들이 전면에 등장해서 중요한 이론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곧 이 개념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요한 대상이 바로 이 질문들이다.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 󰡔신학정치론󰡕의 정정


  1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은 비관적 현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첫째,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이 정서와 이성,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서와 이성이 대립적으로 파악되면 정서들은 내적 변이와 개조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쉽게 외부의 원인들, 특히 운세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정서들이 한결같이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탐욕libido/concupiscentia으로서의 욕망cupiditas, (운세fortuna에 좌우되는) 헛된 희망spes과 공포metus, 오만jactantia, 증오odio, 분노irae, 적의inimicitias, 간계dolos 등). 둘째, 이에 따라 정서들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인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 분열, 곧 반사회화의 기초로 작용하여 인간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을 뿐, 사회화의 인간학적 기초를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연속성, 곧 자연권의 지속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반계약론적 관점을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계약론과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토대 및 작용을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치론󰡕 서두에서부터 인간의 자연권이 지니고 있는 공동적 성격,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1장 5절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이는 아주 확실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어 있으며, 불행한 이들을 동정하고 행운을 누리는 자들을 질투하도록, 그리고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복수에 이끌리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TP 1장 5절)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명시적으로 󰡔윤리학󰡕에 준거하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된다”(E III P1)는 그의 인간학의 근본 공리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종교의 가르침, 곧 “각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시 말해 각자는 타인의 권리를 자기자신의 권리처럼 옹호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정서들에 대해서는 거의 힘을 지니지 못한다”(같은 곳)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입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1장의 마지막 7절의 결론, 곧 “국가의 자연적 원인들 및 기초들은 이성의 가르침에서 이끌어내서는petenda 안되며 인간의 공통 본성 내지는 조건communi natura seu conditione에서 연역해야deducenda 한다”(강조는 필자)는 원리를 예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다음 스피노자는 2장 15절에서 자신의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2장의 9절에 따라) 자연상태에 있는 각각의 사람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동안에만 자신의 권리 아래 있기sui juris sit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 혼자서unus solus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연권은 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nullum esse 사실이 따라나온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sed magis opinione quam re constare인데, 왜냐하면 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아무런 확실한 방도도 존재하지 않기nulla ejus obtinendi est securitas 때문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근대 자연권 이론에서 볼 수 있는 원자론적 관점을 “공상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아야 “자신의 권리 아래” 있을 수 있는데, 곧 자신의 자연권을 가질 수 있는데, 고립된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타인들을 적으로 둘 수밖에 없으므로 혼자서는 자신을 돌볼 수 없고4), 따라서 자신의 자연권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립된 각자의 자연권(“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의 자연권)이라는 관점은 공상적,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권이란 원초적으로 독립해 있는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 타자들과의 매개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권리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서만 각자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립할 수 있고, 각자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같은 절 뒷부분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권은 인간들이 공동의 법률을 갖고 있고 그들이 거주하고 경작할 수 있는 공동의 토지를 갖고 있는 곳,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모두의 공통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거의 생각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2장 13절에 따라) 서로 연합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은 모두 함께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스콜라철학자들이, 자연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자신들의 권리 아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려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마지막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주장하는 스콜라철학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스피노자는 자신의 전제조건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곧 그가 스콜라철학자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인간들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인간들이 생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5).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에 관한 스피노자의 마키아벨리주의적 입장에 대해 지적한 것6)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곧 정서들의 인간학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홉스의 편에 서 있지만, 정서들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따라서 원자론적ㆍ개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서들의 원초적인 사회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홉스에 맞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개, 곧 각자가 자신들의 자연권을 얻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 매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6장 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따라 인도되기 때문에, 대중들은 이성의 인도가 아니라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하게 되며ex communi aliquo affectu naturaliter convenire,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듯이, 곧 (우리가 3장 9절에서 말한 것처럼)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에 의해, 또는 어떤 피해에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에 의해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더욱이 사람들 모두는 고립을 두려워하고 누구도 고립 속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적/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며statum civilem homines natura appetere,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nec fieri posse ut homines eundem unquam penitus dissolvant는 점이 따라나온다. (󰡔정치론󰡕 6장 1절-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성보다 정서에 따라 인도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과 달리 “합치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들을 오직 부정적인 것으로, 곧 반목과 분열, 갈등의 동력으로서만 사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정서는 개인들 각자가 혼자서 느끼는 개별적인 정서가 아니라 공통의 정서이며, 이 공통의 정서는 대중들이 자연적으로, 본성적으로 합치하게 해주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합치convenientia”는 “화합concordia”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성적 조화나 통합의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con-venire”, 곧 “함께-오다”, “함께-모이다”는 의미, 따라서 어떤 일이나 행동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함께 모이다”는 의미를 갖지만, 이성이 아니라 정서가 공동의 행동과 생활의 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는 2장 15절의 논의와 일관되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학정치론󰡕 이래 스피노자의 일관된 테제는 자연권은 사회상태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회상태 속에서 자연권이 지속된다는 것은, 정서들이 부정적인 힘으로, 곧 반목과 불화, 갈등의 힘으로 정의되고 있는 이상 사회상태 속에서 갈등과 분열, 반목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 곧 사회 속에는 근본적인 반사회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인용하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당신들이 내부의 배신과 내 주위의 음모에 맞서 나의 안전을 보증해줄 때 나는 두려움 없이 전쟁과 전투의 위험을 감당해낼 것이다. 필립대왕은 극장보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더 안전했다. 그는 적들의 타격을 곧잘 피했지만, 자기 측근들은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들이 다른 왕들의 최후를 숙고해본다면, 그들 가운데는 적들보다 자기편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TTP 17장 5절; p.542)


따라서 스피노자는 마케도니아와 로마, 영국 등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국가를 위협하는 위험들의 원인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는 시민들이다. 왜냐하면 좋은 시민들이란 드물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또한 주권자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ㆍ제도적 질서 내로 사람들을 이끌어들일 수 있는 그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1편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러한 테제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단절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테제는 그 자체로는 사회상태, 국가의 형성에 관해 어떤 실정적인 내용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우리는 위에서 이러한 한계는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핵심을 이루는 정서론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반대로 6장 1절의 결론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할 뿐만 아니라,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신학정치론󰡕에 빠져 있는 사회상태, 국가 형성의 기초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만약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면, 이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항상 이미 사회성의 경향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경향이란 어떤 신비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의, 또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표현방식들로서의 정서들이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상호개인적 관계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들이 실존하고 행위하는 이상 인간들은 항상 이미 이러한 관계망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테제는 󰡔신학정치론󰡕 이래 지속되어온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테제를 보완하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인간학적 기초를 완결하는 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두 가지 테제가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할 때 우리는 왜 스피노자에게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단절이라는 관점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계약이라는 관념이 사회체의 형성에 관한 설명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잘 보여준다.


주)

 

1)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들의 빈도와 용법에 관한 표준적인 참고문헌으로는 Giancotti 1970을 참조하고, 특히 사회계약론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어법상의 차이에 관해서는 Matheron 1990을 참조.

 

2)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 나타난 네덜란드 연합주, 특히 홀란드에 관한 스피노자의 평가는 󰡔신학정치론󰡕 19-20장과 󰡔정치론󰡕 9장 14절을 참조하라. 네덜란드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에 관한 고찰로는 Balibar 1997a 1장 및 Prokhovnik 2004를 각각 참조.

 

3)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20장에서 한편으로 사고와 판단, 다른 한편으로는 발언과 소통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곧 사고와 판단의 자유는 조건 없이 허용되어야 하는 반면, 발언과 소통의 자유의 경우에는 “단순히 말하거나 가르치는[또는 정보를 전달하는]doceat 데 국한하고, 간계와 분노, 증오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고 자기 결정의 권위에 따라ex authoritate sui decreti 국가 안에 어떤 것을 도입하려는 의도를 품지도 않고, 오직 이성에 따라 자신을 변호한다”(TTP, 638)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이는 발언과 소통만이 아니라 사고 역시 고립된 개인에 의해 단독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와 대비되는 “인간은 생각한다homo cogitat”(E II A7)는 󰡔윤리학󰡕의 공리다)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좋은 평주로는 Balibar 1997a 2장 참조.

4) 󰡔윤리학󰡕 4부 공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연 안에는 더 힘있고 강한 어떤 것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어떠한 독특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실재가 주어져 있을 때에는 이 실재가 그것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더 강한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

 

5) 반대로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면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우연”일 뿐, 자연적 필연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서로의 동료가 되려고 하고 서로 연합하는 것을 기뻐하는지에 관한 원인들을 좀더 상세히 고찰해본다면, 이런 일은 본성에 의해by nature, 달리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by chance 일어난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DC 1장 2절)

 

6) Macherey 2004, 10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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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12-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군요...! 논문 때문에 내년이나 되야 볼 수 있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너무 기쁩니다. 몇 가지 질문도 생기고 하는데, 아마 당분간 답해주시긴 어렵겠죠?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몇 자 써 볼까 합니다. 다만, 이 다음 글 각주 10에 나오는 두 번째 따옴표 "대중들"은 아마 "다중"을 잘못 쓰신 게 아닐까 싶네요.

선생님 논문 심사는 언제 하세요? 괜찮으시다면 구경 가고 싶은데(실은 하루라도 빨리 논문을 보고 싶어서요. ^^). 과방에 앉아 있을 때 조교형들이 이런 데 오라고 동원하면 어떻게든 도망가곤 했는데, 누가 오라고도 하지 않는 다른 과 논문 발표엔 가고 싶은 생각이 드니 좀 재밌네요. 오늘이 제일 춥다는데, 공부하시다가 몸 상하지 마시고 끝까지 건강 잘 챙기세요! 선생님의 논문이 나올 내년이 정말 기대되네요!

balmas 2004-12-2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 몇 군데는 좀 보충도 하고 내용도 바꾸어야 하는데, 당분간 그렇게 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일단 관심 있는 분들 참조하시라고 올렸습니다.

논문 심사 일정은 아직 좀더 두고 봐야 알 것 같군요.

어쨌든 아포리아님이 늘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고 격려해 줘서 힘이 됩니다.^^
 

 

2) 계약의 이중화: 복종의 장치로서의 계약


  16장의 논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주목할 만한 차이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16장만으로는 홉스의 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스피노자가 계속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히 [신학정치론] 17장과 18장(및 3장과 5장)에 나타나는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의를 참조해야만 한다.

    우선 17장 첫머리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앞장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와, 각자의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문제를 살펴봤다. 이러한 논의가 실제와 아주 잘 합치한다 해도, 그리고 이러한 논의와 좀더 근접하도록 실제를 규제한다 해도, 이는 많은 경우 순전히 이론적인 것으로mere theoretica 남게 될 것이다.”(TTP 17장 1절; 모로판, 534)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논의는 “실제와 아주 잘 합치한다 해도”, 곧 경험적으로 아주 잘 입증된다 해도, 원칙적으로는 이론적인 것으로 남게 되는가? 16장의 논의가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라는 말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직접적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누구도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그칠 정도로ut homo esse desinat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potentiam, 따라서consequenter 자신의 권리jus를 양도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TTP 같은 곳) 그런데 이러한 논거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6장의 논의와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는 이미 16장에서 권리 또는 역량의 완전한 양도란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새로운 논거라기보다는 16장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했던 논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17장의 새로운 논거, 새로운 논의는 바로 이러한 논점에 근거하여 제시되는 다른 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신학정치론]만이 아니라 [정치론]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다. “국가가 시민들―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한 시민들이라 할지라도―보다 적들로 인해 더 큰 위험을 겪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같은 곳, p. 536) 그 다음 바로 2절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우리의 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국가의 권리와 권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권력이 결코 사람들을 공포로 강제하는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고,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들 일체를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민을 만드는 것은 복종의 이유가 아니라 복종[한다는 사실 자체]이기 때문이다.”(같은 곳―강조는 필자)

  이 두 가지 언급은 앞에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역량의 논리에 관해 말했던 것을 입증해주면서 새로운 주제, 복종이라는 주제를 도입한다.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역량이란 무력과 강권이라기보다는 신민, 또는 시민을 복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무력과 강권이 될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있는 스피노자의 인간학적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국가 또는 주권자의 권리에 복종하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상태에서도 지속되는 사람들의 자연권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바로 그들의 자연권, 그들의 정념들의 힘을 활용하여 안정된 통치를 확립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따라서 주권자의 명령과 일치하는 신민의 모든 행동은, 그가 사랑에 의해서 이렇게 하든 아니면 공포로 강제되어 하든, 또는 (이것이 훨씬 더 빈번한 경우인데) 희망과 공포 양자 모두에 의해 하든 관계 없이 [...] 자기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권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다시, 복종은 외적인 행위보다는 마음의 내부 작용과 더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확인하게 해준다. 이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의 명령들에 복종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민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은 가장 큰 지배권을 보유하게 된다.”(같은 곳, p. 538)1)

  이러한 논의는 왜 스피노자가 홉스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변형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정치론]에서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계속 채택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피노자가 16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계약론의 요소들은 매우 추상적인, 또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전히 이론적인 것mere theoretica”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16장의 논의는 홉스의 계약론처럼 형식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실제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또는 존재했던 계약에 관한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17장에서 제시되는 계약론은 구체적인데, 이는 17장(및 18장)의 주요한 분석 대상이 히브리 국가의 역사, 정확히 말하면 이중적인 계약을 통해 창설된 히브리 국가의 역사적 전개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어진 국가가 자신의 형태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2). 그리고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조건들은 일차적으로 신민들의 복종을 확보하는 것, 신민들이 이유야 어떻든 간에 “주권자의 명령에 일치하게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히브리 국가의 분석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시되는 스피노자의 언급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히브리인들의 역사의 전개과정을 검토해볼 생각인데, 이는 국가의 안전 및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해 주권자가 신민들에게 일차적으로 허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국가의 보존은 본질적으로 신민들의 충성심과 유덕함, 그리고 명령들을 수행하는 굳건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은 경험과 이성이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것이다.”(같은 곳, p. 540) 

  그렇다면 왜 하필 히브리 국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가? 이는 무엇보다도 히브리 국가가 실제로 계약을 통해, 더욱이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이 결부된 이중적 계약을 통해 창설된 매우 드문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이다3). 사실 스피노자가 히브리 국가의 역사를 분석하는 절차는 정확히 자연상태에 대한 묘사,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 그리고 이 계약을 성립하게 된 주권적 권력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 국가에 대한 분석은 스피노자가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계약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먼저 스피노자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우선 자연상태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빠져 나와 자유의 몸이 된 상태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이미 5장에서 이에 관해 서술한 적이 있으며, 17장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함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다른 민족의 법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 마음대로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입법의 지혜와 권력을 공동으로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들 모두는 비참한 노예 생활로 인해 심성이 상하고 미개인 같은rudis 기질을 하고 있었다.”(TTP 5장 10절; p. 222) “미개인 같은”이라는 매우 보기 드문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상태를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모습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 계약의 절차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의 참기 힘든 억압에서 일단 해방된 이상 어떤 계약pacto도 더 이상 그들을 다른 유한한 존재자에 묶어두지 않게 되어,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연권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각자는 새롭게 이 자연권을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포기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자연상태에 놓이게 된 이들은 그들이 매우 신뢰했던 모세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권리를 더 이상 유한한 존재자에게 양도하지 않고 신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 모두는 주저하지 않고 한 목소리로 신의 모든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이며, 신 자신이 예언자의 계시를 통해 설립한 것과 다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TTP 17장 7절; p. 544) 이렇게 해서 모세를 포함한 히브리인들 전체가 신과 맺은 첫번째 계약이 성립하게 된다.

  이 계약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신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스피노자는 이에 관해 다섯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는 이 계약이 일반적인 계약과 동일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신과의 계약은 사람들이 신의 절대적인 역량을 경험한 이후에 이루어졌음(출애굽기 19장 4-5절)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성립한 히브리 국가, 곧 신의 법과 시민법이 일치하고, 신은 히브리 국가의 왕이고 히브리 백성은 신의 백성이며, 신의 명령은 곧 국법이 되는 이 국가를 스피노자는 “신정국가imperium theocratia”라 명명하고 있다. 넷째, 그런데 스피노자는 곧바로 이것이 “사실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이는 스피노자가 1장 이하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서사들은 실제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라기보다는 히브리 백성들의 기질과 상상에 부합하는 의견들(곧 허구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은 스피노자가 신과의 계약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 역시 허구적인 상상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무의미하다거나 현실적인 효과를 낳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상상에 기초하여 실제로 히브리 국가를 구성했고, 또 히브리 국가는 이러한 상상에 기초하여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언급은 한편으로는 [성경]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신학자들의 편견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히브리 국가가 오랫동안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상상적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신정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유사성에 관해 지적하고 있다(TTP 17장 7절; p. 548). 왜냐하면 두 국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권리와 역량을 양도함으로써 성립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구성원들 모두는 평등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 국가의 경우 이 단계에서는 아직 신과 인간들 사이의 “명시적 중개자 없이nullo expresso mediatore”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이러한 첫 번째 계약에 관한 논의 다음 두번째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스피노자가 그대로 인용하는 [성경]의 구절(신명기 5장 23-27절)에 따르면 신의 명령을 들으러 산에 올라간 사람들이 신의 목소리를 듣고 공포와 두려움에 젖게 되어, 다시는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신의 모든 말씀의 중개자, 해석자로서 모세를 설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신의 법의 공표자이자 해석자, 따라서 또한 누구도 그를 판단할 수 없는 최고판관으로 남게 되고, 히브리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신의 자리를 지키게 된다. 곧 주권자”(TTP, 같은 곳)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계약은 모세에게서 통일되었던 이러한 권력들을 분할하는 계약이다. 곧 신의 말씀을 계시받고 해석하는 일은 아론을 비롯한 레위족에게 맡겨졌고, 군대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히브리 국가의 권력, 특히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제도적 분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일은 우리의 논의 목표가 아니므로, 이제 이러한 히브리 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 특히 계약의 과정들에 대한 분석의 의미를 정리해보기로 하자. 스피노자의 분석은 그가 홉스식의 사회계약론이 보여주는 인공주의 내지는 법률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계약의 모델을 찾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홉스식의 계약론은 사람들의 자연권이 사회 속에서도 집요하게 계속된다는 점을 간과한 채(또는 오히려 그것을 법적 모델을 통해 가상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인공적 절차를 통해 주권을 설립하려고 하지만, 정념들에 좌우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본성상 이러한 절차는 효과적인 국가 설립의 수단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스피노자가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들의 정념과 상상에 기초하여 안정된 국가를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상상과 정념에 기초하여 전능한 신 야훼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야훼의 국가로, 또 자신들을 야훼의 백성으로 간주했지만, 오랫동안 안정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념과 대립하는 이성, 또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된 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어리석은 이러한 표상과 믿음이 역설적으로 매우 유익한 결과, 제도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모세가 [...] 우중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신앙심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국가 안에 종교를 도입했기”(TTP 5장 11절; p. 222) 때문이다. 곧 사람들의 정념과 상상, 신앙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들을 국가의 발전에 활용할 수 있었던 모세의 정치적 능력이 히브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4).

  이는 곧 사회계약, 또는 국가의 구성과 보존을 위해서는 홉스식의 인공적인 법적 절차, 또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계약만으로는 부족하며, 각각의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보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5). 그리고 스피노자는 히브리 백성들이 신과 맺는 계약에서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히브리인들이 신과 맺는 계약은 집합적인 계약이기 이전에, 히브리인들 각자가 신과 맺는 계약, 곧 야훼를 자기의 신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이며, 그에게 헌신과 절대적 복종을 다짐하는 계약이다. 모세의 정치적 능력은 이러한 개별적인 종교적 계약을 국가를 안정시키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곧 정치적 계약으로 활용했다는 데 있으며, 이것의 핵심은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드는 기술에 있다.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설립에서 볼 수 있는 계약은 종교적 계약이면서 정치적 계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6), 바로 이러한 계약의 이중성 때문에 히브리 국가는 백성들의 “미개인 같은” 심성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히브리 국가의 설립에서 나타난 계약은 매우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있다. 이는 홉스식의 인공주의적인 절차 없이도 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계약의 진정한 본질은 “미개인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곧 탐욕과 공포, 기만과 분노 등과 같은 정념들에 좌우되어 살아가는 다중이나 우중들vulgus을 국가의 법이나 주권자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홉스의 계약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대중들의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 따라서 국가의 보존의 수단들을 제시해주는 한에서, [신학정치론]에서 계약론의 틀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주)

1) 하지만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마음animus”이라고 한 것을 데카르트가 확립한 용어법과 같은 의미에서의 “정신mens”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mens”가 “신체” 또는 “물체”를 가리키는 corpus와 질적으로 구분되는(곧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것으로 주로 인식론적 기능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면, “animus”는 욕망 또는 정서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용어다.

2) 따라서 Matheron 1988; Bové 1996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히브리 신정국가는 고유한 의미의 민주주의에는 미달하지만, 정치적 공동체가 부재하거나 와해된 상태인 자연상태나 국가의 안전이 국왕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군주정에 비해 우월한 국가형태라고 할 수 있다.

3) 이에 관해서는 Balibar 1985 및 Zac 1979을 참조.

4) 이에 관해서는 Zac 1979 및 Bové 1996 8장 참조.

5)  이런 점에서 볼 때, 알튀세르의 유명한 호명이론이 󰡔신학정치론󰡕 17장에 나타난 신과 (모세를 중개로 한) 히브리 인민의 계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알튀세르 1991; Althusser 1996 참조.

6) 이러한 계약의 이중성에 관해서는 특히 Balibar 1985 참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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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 On the Citizen, Richard Tuck ed. & trans.,Cambridge University Press(DC로 약칭).

      (1999). Human Nature and De Corpore Politico, J.C.A. Gaskin ed., Oxford University Press(EL로 약칭).

Spinoza, Benedictus de(1925). Spinoza opera, 4vols, Carl Gebhardt, ed., Carl Winter(G로 약칭).

      (1999a). Tractatus-Theologico-Politicus/Traité théologique-politique, Fokke Akkerman ed., PUF.


2.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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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루이(1991).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Althusser, Louis(1996). Sur la reproduction, PUF.

Ashcraft, Richard(1978). “Ideology and Class in Hobbes' Political Theory”, Political  Theory, vol.6 no.1.

Balibar, Etienne(1985). “Jus, Pactum, Lex: Sur la constitution du sujet dans le Traité théologico-politique”, Studia Spinozana 1.

      (1997a). Spinoza et la politique, PUF(19851).

      (1997b). “La crainte des masses. Spinoza-l'anti-Orwell”, in Idem, La crainté des masses, Galilée.

Borot, Luc(1992). “Le vocabulaire du contrat, du pacte et de l'alliance: Quelque enjeux lexicaux”, in Zarka(1992a).

Boucher, David & Kelly, Paul(1994). The Social Contract from Hobbes to Rawls, Routledge.

Bové, Lauren(1996). La straté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ésistance chez Spinoza, Vrin.

Foisneau, Luc(2001). “Contrat social, souveraineté et domination chez Hobbes”, in Zarka(2001).

Gough, J. W.(1957). The Social Contract, Oxford: Clarendon Press(1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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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12-2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학정치론>의 국역본은 언제쯤(이나) 나오는지 아시는지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역은 솔에서 나온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인지요? 더불어 '스피노자 정치학'의 현재적 의의(액츄얼리티)에 대해서 참고할 만한 문헌도 소개해주시길...

balmas 2004-12-22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학정치론]이 언제쯤 번역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빨리 나오면 좋겠지만,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게 좋을 테니까 한번 기다려보죠. 후배들하고 같이 [신학정치론]을 한 1년 읽었는데, 제대로 번역하려면 고대 히브리 역사나 [성경]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고, 라틴 수사학 전통에 대한 공부도 상당히 필요해서 쉽게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저도 번역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긴 한데, 언제쯤 착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 국역본은 [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실린 게 유일하죠. 그런데 이 논문이나 같은 책에 실린 [프로이트와 라깡] 번역은 오역들이 좀 있어서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피노자 정치학의 현재성에 관한 좋은 책은, 책광고 같아서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제가 번역해서 내년에 나올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가 추천할 만합니다. 물론 네그리의 저작들, 곧 [야생의 별종]이나 [전복적 스피노자](이 책은 조만간 갈무리에서 나올 것 같던데요. 번역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 같은 책들도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구요. 요즘에는 영어로 된 책들도 꽤 나온 편인데, 호주의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이 쓴, G. Lloyd & M. Gatens, Collective Imagining, Routledge, 2001이나 Warren Montag의 Bodies, Masses, and Power, Verso, 1998도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사량 2004-12-2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는 백의에서 1991에 나온 [레닌과 철학]에도 실려 있습니다. 번역상의 차이를 판단할 능력은 없습니다만, 단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약자를 표기할 때 두 번역본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솔에서 나온 것은 ISA(영어식)였는 데 반해, 백의에서 나온 것은 AIE였나? 아무튼 그랬습니다. -_-;;

balmas 2004-12-2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예전에 그런 번역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이데올로기 ...] 논문이 있었군요.
 

 

2. [신학정치론]과 사회계약론의 변형


  지금까지 살펴본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 등장하는 계약론은 홉스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 및 요소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홉스의 계약론 같은 형식적 통일성을 보여주지 않을 뿐더러, 그 내용 자체도 중대하게 변형되어 있다.


1) 홉스의 사회계약론과의 차이점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비교해볼 때 [신학정치론] 16장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1) 무엇보다도 [신학정치론]에 나타난 계약론에서는 자연상태status naturalis와 사회상태status civilis 사이에 아무런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의 계약론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또는 국가 사이에 엄격한 단절을 설정한다는 데 있다. 반면 16장, 더 나아가서 [신학정치론] 전체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단절, 또는 이행의 과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절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점이다. 옐레스Jarig Jelles에게 보내는 유명한 5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선생이 질문하신, 정치학과 관련한 홉스와 저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곧 저는 항상 자연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어떤 국가이든 간에 주권자는 그가 신민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신민에 대한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상태에서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G IV, 238-239)


따라서 스피노자가 “가령 물고기는 본성상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물고기가 물에서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potiuntur, 그리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최고의 자연권에 의한 것이다.”(TTP 16장 2절; p. 504-505)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사회상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상태 안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또한 사회상태 안에서도 여전히, 자연상태를 지배하고 있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고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약의 절차를 고안해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회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의 절차를 통해서도(이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자연상태를 지배하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홉스와 비교해볼 때 [신학정치론]을 특징짓는 점은 스피노자의 비관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는 ([신학정치론]에 특징적인)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공포metum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기를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각자가 모든 것을 자기 기분대로 하도록 허용되는 한, 그리고 증오odio와 분노irae보다 이성에게 더 많은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적의inimicitias와 증오odia, 분노iram, 간계dolos의 한 가운데에서는 근심 없이non anxie, 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이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안전하게, 그리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로 화합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만물에 대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권리를 집단적으로 보유해야 하고, 이러한 권리가 각자의 힘vi과 충동appetitu보다는 그들 모두의 역량potentia과 의지voluntate에 의해 더 많이 규정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충동이 권유하는 것만 따르고자 한다면 이는 헛된 일이 될 터인데, 왜냐하면 충동의 법칙들은 사람들 각자를 상반된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TTP 16장 5절; p. 510)1)


  이 구절에서는 주목해야 할 것은 정서들이 모두 부정적인 정서들, 또는 수동적인 정서 내지는 정념들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정서를 수동 정서와 능동 정서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 두 가지 정서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능동 정서가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이성으로부터 따라나오는 정서라는 점에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윤리학] 5부 정리 4의 주석2)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동일한 정서는 수동적일 수도 능동적일 수도 있으며, 이 정서를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성의 힘, 또는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삶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신학정치론]에서는 정서들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또 바로 이 때문에 이성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권은 정서들과 다르지 않은데, 이성이 정서들과 외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 또는 역량과 외재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단 하나의 자연의 지배 하에 살아간다고 간주되는 한, 아직까지 이성을 모르거나 유덕한 습관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자기 삶을 이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끌어가는 사람과 동일한 최고의 권리로 오직 충동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같은 책; pp. 506-507) 이성적이든 무지하든, 유덕하든 배덕하든 간에 모든 사람의 삶을 이끄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은 바로 충동의 법칙인 것이다.

  (2) 이처럼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정치론] 16장에는 원초적 계약에 관한 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몇 가지 점들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먼저 스피노자의 논의에는 홉스의 논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전도가 존재한다. 앞서 본 것처럼 홉스에서 원초적 계약은 자연상태의 각 개인들이 제 3자에게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권력potestas, 이러한 명령의 권리jus imperandi는 시민들 각자가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모든 역량potentia을 양도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 이는 저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연적으로는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DC 5장 11절, pp. 73-74) 따라서 홉스에서는 사회계약의 체결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주권자의 절대적 권력이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나타난다. 곧 그는 권리의 양도 대신 역량의 양도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권리의 정도는 역량의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권은 오직 각자의 역량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을 이미 확립했기 때문에, 각자가 지닌 역량을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vel vi vel sponte 타인에게 양도하는 정도만큼 필연적으로 각자는 이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넘겨준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라서 만인 가운데 최고의 권리[주권]을 지닌 이 사람은 만인을 힘으로 강제할 권력, 모두가 보편적으로 두려워하는 최고 형벌에 대한 공포로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p. 514).


이러한 역량의 논리는 스피노자가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이 지속된다고 보는 것의 논리적 결과이다3).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홉스에게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권을 제 3자에게 양도함으로써 공동의 권력을 설립하는 것은 자연상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에서든 사회상태에서든 자연권이 계속 지배하고 있고, 따라서 홉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연권의 양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역량은 왜 양도하는가? 사람들은 강압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을 양도하는 것인가? 하지만 스피노자는 분명히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 따라서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가? 

  우선 스피노자에게 전면적인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할 정도까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내어줄 수는 없다”(TTP 서문; p.72) 이는 곧, 국가 내에서도 시민들은 계속 저항권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홉스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주권자의 역량이 약화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주권이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에게 넘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게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가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계약이 성립하는 것은 항상 유용성utilitas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역량이나 권리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이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손해보다 크다고 생각할 때, 계약을 체결하고 실행하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약이란 그것이 가져올 유용성의 힘에 의해서만 힘을 지닐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 유용성이 사라지면 그와 동시에 계약도 철폐되며 무효가 된다.”(TTP 16장 7절; p. 512)

  이는 처음 보기에는 홉스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것 같다. 홉스에서도 역시 사람들은 미래에 얻을 이익에 대한 희망(평화와 안전) 때문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홉스의 경우 계약의 주요 동기는 이익에 있지 않다. 이는 유명한 수인의 딜레마 논변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여러 홉스 연구자들, 특히 영미권의 상당수 연구자들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결코 홉스식의 계약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수인의 딜레마 논변을 동원해왔다4). 곧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utility-maximizer”로서, 각자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상호 권리의 양도를 통한 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변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5)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홉스적 인간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인 자연상태의 파국상황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시 이러한 파국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방식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홉스 계약론의 규범적 성격을 간과한 반론이다6). 만약 홉스적 인간이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국가를 해체하거나 적어도 다른 국가로 변경하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홉스는 신민들이나 시민들이 주권자에 대해 반역하는 행위는 (규범적으로) 성립할 수 없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계약의 체결의 결과로 주권자가 자신의 절대적 권한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계약 체결 자체 내에 포함된 복종의 약속으로 인해 주권자의 통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이의나 반역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적인 인간을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논변은 홉스 계약론이 포함하고 있는 규범적 함축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처럼 계약의 규범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홉스는 계약과정이나 계약의 실행 이후 기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기만을 자연권 속에 포함시킨다. 다음 구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각자는 저마다 쾌락에 이끌리며, 정신은 그토록 자주 탐욕, 명예심, 질투심, 분노 등에 점령되어 더 이상 이성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확실한 신실함의 징표로 약속을 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한들, 이러한 약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덧붙여지지 않는 한 아무도 아주 확실하게 타인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권에 의해 각자는 기만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오직 더 큰 선에 대한 희망이나 더 큰 악에 대한 공포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약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TTP, 16장 7절; pp. 512-514―강조는 필자)


사실 모든 계약의 동기에 유용성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이성보다는 충동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좀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피해를 막기 위해 계약에서 기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스피노자는 이처럼 계약이 유용성에 의거해 있고, 자연권에 의해 기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사회상태에서도 항상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제든지 주권적 권력은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홉스는 계약을 통해 확립한 주권적 권력은,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당시에 약속했던 복종의 약속을 영속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교체될 수 없으며 교체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계약은 협정이나 신약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사실 [신학정치론]에서는 계약contractus이라는 단어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7), 그 용법 역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동맹 조약이나 협정, 또는 신과의 계약(16장 19절; p. 528)이나 이스라엘 부족 사이의 맹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국가를 창설한다든가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의미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pactum이라는 용어(이는 총 12번 사용되고 있다), 곧 홉스가 협정이나 신약의 의미를 부여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볼 때 스피노자가 계약의 근본 동기로 유용성을 제시하는 것은 홉스의 계약론과의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홉스 계약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난점, 곧 국가의 설립은 권리의 상호양도로서 계약의 체결과 이행을 전제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계약은 도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8)

  (3) 또한 16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주권자의 권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규정에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에서 주권자가 갖는 절대적 권위는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권리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홉스와 달리 원초적 계약의 절차들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주권자의 권력 역시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인공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획득될 수 없다고 본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의 정도에 비례하고, 주권자는 충분한 역량을 지니는 한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p. 514). 이 주장은 마치 스피노자가 원칙적으로 강권정치나 참주정치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스피노자의 주장은 그보다는 좀더 미묘하다9).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강권정치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10), 그리고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추구하고 있는 근본 목표는 “각자에게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들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는 것”(TTP 서문; p. 72)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역량에 대한 스피노자의 강조는 강권의 옹호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오히려 스피노자가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를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신학정치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왜 이러한 자유와 권한을 허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한다. 첫째, 인간학적 논거들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견해가 범죄적인 것으로 최급받고, 신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행동을 유발시킨 것이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럴 경우 그들은 법을 혐오하게 되고,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배덕한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로 판단하게 되어, 결국은 선동적인 운동과 폭력을 시도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의 견해에 거슬러 제정된 법률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ingenui을 위협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국가imperium를 커다란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집행될 수 없다(TTP 20장 11절; p. 644).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가 의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를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 권리, 또는 정념적인 힘들은 인공적인 수단들을 통해 외재적으로 금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상태, 국가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은 지속된다는 스피노자의 집요한 논리에서 따라나오는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의견 및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규범적으로 부당하다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본성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금지된다고 할 수 있다11).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판단 및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이를 국가 보존에 유용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주권자의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둘째, 역사적 논거들이 있다. 스피노자는 17장 이하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특히 17장과 18장을 통해 고대 히브리 국가들에서 왕과 사제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역사 및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로마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 또는 영국왕과 개신교 종파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에 관해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권자가 성무(聖務)결정권(“jus circa sacra”)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역사적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종교적인 지도자들(그들이 사제이든 교황이나 주교, 목사이든 간에)이 국가의 법적 통제 없이 개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 성향(이는 개인들의 정념의 수동성에 근거하고 있다)에 의거하여 자신의 고유한 조직을 구성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국가의 정치적 문제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는 곧 국가의 심각한 혼란과 소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는 “종교는 [정치적] 명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의 결정에 의해서만 법적인 힘을 획득하며, 신은 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특정한 인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TTP 19장 3절; p. 606)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곧 주권의 양분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절대주의의 진의가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역량의 논리, 주권자의 역량에 대한 강조는 강권정치에 대한 옹호로 이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비이성적, 비도덕적 본성은 사회상태에서도 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홉스처럼 인공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제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들의 정념적인 본성을 민주주의적으로 규율하고 활용하려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학정치론]의 계약론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곧바로 우리를 다음의 논의로 인도한다.

주)

1)그 외에도 16장 2절; 16장 4절; 19장 4절 등도 참조하라.

2) “사람은 하나의 동일한 충동에 의해 능동적이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수동적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 본성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을 때(4부 정리 37의 따름정리 및 정리 37의 두 번째 증명을 보라), 이성이 인도하지 않는 이 충동은 분명 정념으로서, 야심이라고 불리며, 거만함과 거의 다르지 않다. 반대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는 능동 내지는 덕목이며, 동정심이라 불린다.”

3)  이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특히 Matheron 1985a; 1985b를 참조.

4)  홉스 해석에서 수인의 딜레마 논변을 사용하는 좋은 사례로는 Hampton 1986 3장 및 6장을 참조.

5) 이에 관해서는 특히 Ryan 199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김용환 2001, 158쪽 이하 참조.

6) 홉스 계약론의 규범적 함의에 관해서는 특히 Foisneau 2001 참조.

7) 총 4번 사용되고 있다. 16장 16절(G III 196); 16장 19절(G III 198); 16장 22절(G III 200); 17장 14절(G III 210).

8) 이런 의미에서 홉스 계약론의 난점에 관해서는 Ueno 1991 참조. 단 우에노는 수인의 딜레마에 관한 논변에 의거하고 있지만, 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홉스 자신의 관점에 충실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9) 이에 관해서는 Matheron 1985b 참조.

10)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주권자들이 터무니없게 명령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중시하고 매사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말하듯이 누구도 폭력으로는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TTP 16장 9절; 모로판, 516) 또한 “나는 주권자가 원칙적으로는 가장 폭력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며, 극히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시민들을 처형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통치에서 건전한 이성의 판단이 무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주권자도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이렇게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가 이러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그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권자의 권리란 그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TTP 20장 3절; 모로판, 634)”.

11) 이에 관한 좋은 평주로는 Balibar 1997a 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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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홉스 사회계약론의 요소들


  근대 사회계약론은 세 가지의 이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자연적 존재조건으로서 자연상태라는 병리적 상황, 또는 반사회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병리적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국가라는 인공적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론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계약의 도출과 체결에 관한 이론이다. 셋째, 사회계약론은 또한 이렇게 해서 구성된 국가의 권력과 제도의 체계에 관한 이론, 곧 주권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홉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 또는 한 홉스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계약이론의 발명가”(Terrel 2001, p. 135)로 간주될 수 있다. 방금 지적한 사회계약론의 세 가지 계기에 따를 경우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자연상태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 홉스


  홉스는 자연상태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로 간주될 수 있다. 홉스 이전에 그로티우스의 저작에서 계약에 관한 논의가 엿보이고, 장 보댕의 저작에서 근대적인 주권 개념의 단초가 마련되지만,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홉스에 의해 비로소 철학적, 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한다1). 자연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실존에 함축되어 있는 병리적 조건이 해명될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보존이라는 인간학적 공리와 결부되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곧 계약을 통해 사회상태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과제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 개념은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자연상태 개념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는 이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철학에서 나타나는 정치사상의 핵심 원리로서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과 단절했다는 점에 있다. 사실 홉스는 1642년 처음으로 출간된 [시민론De Cive]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어온 정치철학의 원리들2)을 과학적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그 자신이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이라고 부르는 근대 과학의 방법을 채택하여 “사회철학(또는 정치철학)civil philosophy”을 구축하고자 했다3).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위계화된 우주론적 질서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이라는 규정에서 유래한다)은 일체의 목적론을 배제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홉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근대 정치철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홉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 대신 자연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살아가는 자연상태라는 가설적 조건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시작한다. 홉스가 그리고 있는 이 자연상태는 몇 가지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4). 첫째, 자연상태는 모든 개인이 모든 사물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전제했던 것과 달리 홉스에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며, 각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이나 능력을 동원할 권리 또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둘째, 이처럼 자연상태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동등하게 절대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기 때문에, 공동의 법률이나 규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정의롭고 부정의한지 판단해줄 수 있는 공통의 척도나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과 정의, 불의를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위하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상태로 특징짓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첫째, 자연상태가 희소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곧 생존을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는 불가피하게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홉스가 “공포” 또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diffidence”라고 부르는 정념도 이것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홉스가 말하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는, 자원이 결핍되어 있고 객관적인 안전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자가 언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 비록 지금 내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피해도 입지 않고 있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으며, 이 공격이 치명적인 피해, 곧 죽음을 야기시킬 경우 나는 그에게 반격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에 빠져 있는 자연상태의 인간에게 최선의 행동방식은 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된다5). 마지막으로 “헛된 공명심vain glory”이나 “자부심pride” 역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평화를 위협하고 전쟁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2) 법적 계약이론의 창안


  홉스를 사회계약론의 발명가로 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가 계약이론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계약이라는 관념 자체는 홉스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를 통해 사회의 성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존재했지만6), 홉스는 사회계약을, 자연상태와의 전면적인 단절을 통해 인위적으로 시민사회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상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계약에 대한 관념에 따라 지레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홉스의 계약 개념은 일의적이지 않으며,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먼저 홉스는 계약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들을 구분하고 있다(EL 1부 15장, DC 2장, L 14장 참조). 홉스는 계약contractus/contract을 매우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다. “권리의 상호 양도가 사람들이 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DC 2장 9절; L 14장 9절, p. 82) 이에 비해 홉스가 “협정pactum/pact” 또는 “신약(信約)covenant”이라고 부르는 것은 권리의 일방적인 양도로 특징지어진다. “계약자들 중 한쪽이 계약된 것을 이행하고 다른 한쪽이 일정한 기간 이후에 자기편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남겨둘 때(그리고 그 동안 그를 신뢰할 때), 이행자 편에서 보면 이 계약은 협정 또는 신약이라 불린다.”(L 같은 곳) 또는 홉스는 [법의 원리] 같은 곳에서는 이를 좀더 세분해서 말하고 있다. 곧 1) 계약의 두 당사자가 현재 계약의 내용을 이행하는 경우가 있고, 2) 한 당사자는 계약 내용을 즉각 이행하고 다른 한 쪽은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만 해두는 경우가 있으며, 3) 두 당사자 모두 현재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고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경우가 있다(EL 1부 15장 8-9절). 이 세 가지 경우 중 첫번째 경우가 홉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에 해당하고, 나머지 두 경우는 협정 또는 신약에 해당한다.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7). 홉스는 두 가지의 절차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첫번째 절차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맺어지는 “예비 계약”으로서, 이는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자연상태에 만연해있는 갈등과 위험,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처한 개인들은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곧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홉스는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제1 자연법이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과 유익을 추구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의 계율 또는 일반 규칙이다. 이 규칙의 첫번째 부분은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는 자연의 첫번째 근본적인 율법을 포함한다. 두번째 부분은 자연권의 요약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이다.”(L 14장 4절, p. 80―강조는 홉스)8) 그리고 이 제1 자연법에 뒤이어 평화를 달성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으로서 제2 자연법이 도출된다. “평화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모든 것에 대한 이 권리[곧 자연권]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포기해야 하며,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허용한 자유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허용한 자유에 만족해야 한다.”(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러한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 곧 자연권을 포기하거나 유보하자는 데 동의를 하게 되며, 이러한 동의는 계약을 지켜야 할 의무를 낳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이 어떠한 강제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 역시 강제되지는 않는다. 이 의무는 자연법의 명령으로부터 유래한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연히 이 예비적 계약은 쉽게 파기되거나 위반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원래의 계약의 목표인 평화와 안전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지닌 제 3자를 설정해서 개인들 사이의 상호 권리 양도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처럼 제 3자, 곧 주권적인 권력의 보유자를 세우는 것이 바로 두번째 단계의 계약이며, 이것을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또는 정치적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외적의 침입이나 [성원들] 상호간의 침해로부터 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 공동의 권력을 세우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회의체에 부여하는 것이다.”(L 17장 13절, p. 109) 이 두번째 계약은 각각의 개인이 서로간에 어떤 사항이나 권리와 관련하여 맺는 계약 또는 신약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모든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권력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권력 및 힘을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에게 양도한다는 점에서 첫번째 단계의 계약과 구분된다. 홉스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를 좀더 명확하게 부연하고 있다. “이는 동의나 합의 이상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맺는 신약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동일한 의인(擬人, person)으로 모든 사람을 실재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모든 권리를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주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나 자신을 통치하는 권리를 그에게 양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 곧 하나의 동일한 의인에게 자신의 권력과 힘을 양도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부여했을 때, 자연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공동의 권력이 창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신으로서의 리바이어던, 국가이며, 이를 통해 주권자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에 복종과 통치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3) 홉스 주권 이론의 독창성


  세번째로 홉스는 주권에 관한 개념화에서도 독창성을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계약의 과정은 홉스에 따르면 동시에 주권자에게 “권위부여하기authoriz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위부여하기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홉스는 의인person에 관한, 따라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L 16장 1절, p. 101) 의인에는 자연적 의인과 인공적 의인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될 때, 또는 귀속되는 것으로 인정될 때를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를 가리킨다. 홉스의 의인 이론은 홉스의 정치철학이 갖는 법적 인공주의를 잘 보여준다.

  홉스의 의인 이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신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체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행동이 늘 같은 존재자에 의해 수행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동일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를 이 신체, 또는 그가 수행하는 이러저러한 행동의 주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자연권과, 시민사회 또는 국가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인공적 권위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다. 곧 자연권은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뜻하는 반면,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는 권리”(L 16장 4절, p. 102)로 정의되는 권위는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 법적으로 규정된 의인이라는 개념을 전제하며, 따라서 상호개인적 관계를 함축한다. 따라서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9) 이처럼 어떤 동일성을 상정하고 그에게 말이나 행위를 “귀속시키는attribute” 법적 절차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국가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표나 권위부여를 통한 공동의 권력의 설립도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권위부여의 절차가 갖는 중요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의 권위가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한 권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홉스는 장 보댕Jean Bodin과 마찬가지로10)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연법에 근거하여 주권자의 권한을 확립하려고 했던 보댕과 달리 홉스는 주권자의 권위를 피통치자, 곧 신민 또는 인민의 동의에 근거지으려고 했다. 곧 홉스의 주권자는 각각의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양도하는 권리들 이외의 독자적인 역량이나 권력을 지니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발적 양도를 통해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홉스의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에 대해 법적 규범성을 부여하려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다11).

  둘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홉스의 주권이론의 목표 중 하나가 대중들multitudo/croud을 해체하고 이를 인민으로 구성하는 또는 포섭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홉스는 [시민론]이나 [리바이어던] 같은 저작에서 인민과 대중들에 대한 엄격한 구분의 필요성을 여러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시민론]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민대중들을 충분히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회체제, 특히 군주정에 대해 해롭다. 인민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다. 여러분은 이것에게 하나의 행위를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대중들에 대해서는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DC 12장 8절, p. 137―강조는 홉스) 또한 [시민론] 6장에서는 대중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대중들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가 대중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통일성이 존재해야 비로소 공동의 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에 따라 평화와 안전이 성립할 수 있는데, 대중들은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또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행위를 귀속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홉스는 대중들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또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행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인간들로 해체되어야 하며, 이들 각각이 자신의 권리와 힘을 양도함으로써 하나의 동일한 의인, 곧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같은 책, p.76).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중들이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일 수 없다면, 그리고 대중들은 다수의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인민과 대중들을 구분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시민론] 12장 8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홉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p. 137)

  “역설적이게도”라는 삽입구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자신의 구분법이 사람들에게 기묘하게 들릴 수 있음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집요하게 인민과 대중들을 구분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 또는 대중들이 국가에 반역하고 통치권을 찬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홉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들이 충분히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라는 사실, 사실은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여서 국가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도 있는 행위자라는 사실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12). 따라서 홉스가 권위부여의 절차를 통해 주권자의 절대적 권한,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 하고, 대중들이 법적 의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는 대중들이라는 위협적인 정치적 행위자를 해체하고 법적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에 관해서는 특히 Strauss 1952, p. 15 이하 참조.

2)

그는 키케로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및 프란시스코 수아레즈에 이르는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이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C 「서문」 참조.

3)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홉스의 비판은 특히 「헛된 철학과 공상적인 전통에서 유래하는 어두움에 대하여Of Darkness from Vain Philosophy and Fabulous Traditions」라는 신랄한 제목이 붙은 󰡔리바이어던󰡕 46장을 참조하고, 홉스 정치철학의 과학적 기초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특히 Herb 1996을 참조.

4)

이에 관해서는 특히 L 13장을 볼 것.

5)

홉스에게는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 시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홉스의 인간학 및 정념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Moreau 1994, p. 407 이하 및 Lazzeri 1998 1장을 참조할 수 있다.

6)

 이에 관해서는 Terrel 2001, 1-3장 및 Matheron 1984를 참조.

7)

홉스 계약론의 절차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Kavka 1986, p. 179 이하 및 Terrel 1994, 8장, 특히 p. 214 이하 참조.

8)

홉스에서 자연법은 총 19가지([시민론]에서는 20가지)가 있는데, 제1, 2 자연법, 특히 제1 자연법이 그 핵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김용환 교수가 홉스의 정치사상을 “평화애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일리가 있다. 김용환 2001, 170쪽 이하 참조.

9)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전유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인정받는다면, 그는 자연적 의인이 되는 셈이며, 그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대표한다면, 그는 인공적 의인이 된다.

10)

보댕은 1576년 출간된 󰡔공화국 6서Six Livres de la République󰡕라는 저서에서 국가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주권이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공화국 또는 국가란 “주권적인 군주 아래 존재하는 인민의 통합체”이며, 따라서 주권은 국가의 “부분들” 또는 “지체(肢體)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집하는 통합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국가의 진정한 “토대이자 축”이라고 할 수 있다(Bodin 1993, pp. 65-69). 아울러 주권을 정의하고 있는 1권 8장에서는 주권을 다음과 같이 좀더 정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주권이란 국가에 부여된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을 가리키며, 로마 사람들은 이를 ‘마예스타템majestatem’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p. 111) 주권자의 권한 또는 “진정한 표시vraies marques”를 다루는 10장에서는 주권자의 권한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주권에는 법을 제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힘, 평화와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 법원의 판결에 대해 청문할 수 있는 권리, 공직의 임명과 해임권, 조세권, 특권의 부여권, 화폐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충성 서약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된다.”(같은 책, pp. 160 이하) 이러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보댕이 이 책을 저술한 목표는 주권의 절대성을 이론적으로 확립함으로써 프랑스 군주정에 교의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

11)

보댕의 주권 개념과 홉스의 주권 개념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Goyard-Fabre 1992 및 김용환 2001, 236-239쪽을 참조하고, 홉스 주권 개념의 규범적 성격에 관해서는 Foisneau 2001을 참조.

12)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저술한 시기는 1647-48년 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홉스는 자신이 󰡔리바어이던󰡕을 저술하게 된 이유는 다중들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고 위험에 빠진 국왕의 주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리처드 애쉬크라프트Richard Ashkraft는 홉스의 원전들을 인용하면서 이 점을 매우 명료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주권이 쟁탈되고” 국가 안에는 어떠한 “주권”도 평화도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다. 영국은 “각자의 이성 내지는 각인된 빛이 제안하는 바에 따라 아무것이든 자행하는 분산된 다중들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내전이 존재하는 곳에는 ... 법도 공동체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무법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중만이” 존재할 뿐인데, 다중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은 “어떠한 의식의 복종도 없이 자신의 사적 이익”에 따라 인도된다. ... 동시에 홉스는 “[리바이어던]은 왕의 세속적이고 영적인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Ashkraft 1978, p. 30. 그 이외에 홉스의 정치학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대해서는 퀜틴 스키너의 연구들도 매우 좋은 참고자료들이다. 특히 Skinner 1972, 200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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