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학정치론]과 사회계약론의 변형
지금까지 살펴본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 등장하는 계약론은 홉스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 및 요소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홉스의 계약론 같은 형식적 통일성을 보여주지 않을 뿐더러, 그 내용 자체도 중대하게 변형되어 있다.
1) 홉스의 사회계약론과의 차이점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비교해볼 때 [신학정치론] 16장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1) 무엇보다도 [신학정치론]에 나타난 계약론에서는 자연상태status naturalis와 사회상태status civilis 사이에 아무런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의 계약론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또는 국가 사이에 엄격한 단절을 설정한다는 데 있다. 반면 16장, 더 나아가서 [신학정치론] 전체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단절, 또는 이행의 과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절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점이다. 옐레스Jarig Jelles에게 보내는 유명한 5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선생이 질문하신, 정치학과 관련한 홉스와 저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곧 저는 항상 자연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어떤 국가이든 간에 주권자는 그가 신민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신민에 대한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상태에서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G IV, 238-239)
따라서 스피노자가 “가령 물고기는 본성상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물고기가 물에서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potiuntur, 그리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최고의 자연권에 의한 것이다.”(TTP 16장 2절; p. 504-505)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사회상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상태 안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또한 사회상태 안에서도 여전히, 자연상태를 지배하고 있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고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약의 절차를 고안해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회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약의 절차를 통해서도(이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자연상태를 지배하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홉스와 비교해볼 때 [신학정치론]을 특징짓는 점은 스피노자의 비관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는 ([신학정치론]에 특징적인)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할 수 있는 한 공포metum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기를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각자가 모든 것을 자기 기분대로 하도록 허용되는 한, 그리고 증오odio와 분노irae보다 이성에게 더 많은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적의inimicitias와 증오odia, 분노iram, 간계dolos의 한 가운데에서는 근심 없이non anxie, 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이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안전하게, 그리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로 화합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만물에 대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권리를 집단적으로 보유해야 하고, 이러한 권리가 각자의 힘vi과 충동appetitu보다는 그들 모두의 역량potentia과 의지voluntate에 의해 더 많이 규정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충동이 권유하는 것만 따르고자 한다면 이는 헛된 일이 될 터인데, 왜냐하면 충동의 법칙들은 사람들 각자를 상반된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TTP 16장 5절; p. 510)1)
이 구절에서는 주목해야 할 것은 정서들이 모두 부정적인 정서들, 또는 수동적인 정서 내지는 정념들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정서를 수동 정서와 능동 정서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 두 가지 정서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능동 정서가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이성으로부터 따라나오는 정서라는 점에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윤리학] 5부 정리 4의 주석2)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동일한 정서는 수동적일 수도 능동적일 수도 있으며, 이 정서를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성의 힘, 또는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삶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신학정치론]에서는 정서들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또 바로 이 때문에 이성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권은 정서들과 다르지 않은데, 이성이 정서들과 외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 또는 역량과 외재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단 하나의 자연의 지배 하에 살아간다고 간주되는 한, 아직까지 이성을 모르거나 유덕한 습관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자기 삶을 이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끌어가는 사람과 동일한 최고의 권리로 오직 충동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같은 책; pp. 506-507) 이성적이든 무지하든, 유덕하든 배덕하든 간에 모든 사람의 삶을 이끄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은 바로 충동의 법칙인 것이다.
(2) 이처럼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정치론] 16장에는 원초적 계약에 관한 논의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몇 가지 점들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먼저 스피노자의 논의에는 홉스의 논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전도가 존재한다. 앞서 본 것처럼 홉스에서 원초적 계약은 자연상태의 각 개인들이 제 3자에게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권력potestas, 이러한 명령의 권리jus imperandi는 시민들 각자가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모든 역량potentia을 양도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 이는 저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연적으로는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DC 5장 11절, pp. 73-74) 따라서 홉스에서는 사회계약의 체결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주권자의 절대적 권력이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는 정반대의 논리가 나타난다. 곧 그는 권리의 양도 대신 역량의 양도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권리의 정도는 역량의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권은 오직 각자의 역량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을 이미 확립했기 때문에, 각자가 지닌 역량을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vel vi vel sponte 타인에게 양도하는 정도만큼 필연적으로 각자는 이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넘겨준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라서 만인 가운데 최고의 권리[주권]을 지닌 이 사람은 만인을 힘으로 강제할 권력, 모두가 보편적으로 두려워하는 최고 형벌에 대한 공포로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p. 514).
이러한 역량의 논리는 스피노자가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이 지속된다고 보는 것의 논리적 결과이다3).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홉스에게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권을 제 3자에게 양도함으로써 공동의 권력을 설립하는 것은 자연상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에서든 사회상태에서든 자연권이 계속 지배하고 있고, 따라서 홉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연권의 양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역량은 왜 양도하는가? 사람들은 강압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을 양도하는 것인가? 하지만 스피노자는 분명히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 따라서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가?
우선 스피노자에게 전면적인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할 정도까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내어줄 수는 없다”(TTP 서문; p.72) 이는 곧, 국가 내에서도 시민들은 계속 저항권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홉스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주권자의 역량이 약화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주권이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에게 넘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게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가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계약이 성립하는 것은 항상 유용성utilitas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역량이나 권리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이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손해보다 크다고 생각할 때, 계약을 체결하고 실행하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약이란 그것이 가져올 유용성의 힘에 의해서만 힘을 지닐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 유용성이 사라지면 그와 동시에 계약도 철폐되며 무효가 된다.”(TTP 16장 7절; p. 512)
이는 처음 보기에는 홉스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것 같다. 홉스에서도 역시 사람들은 미래에 얻을 이익에 대한 희망(평화와 안전) 때문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홉스의 경우 계약의 주요 동기는 이익에 있지 않다. 이는 유명한 수인의 딜레마 논변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여러 홉스 연구자들, 특히 영미권의 상당수 연구자들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결코 홉스식의 계약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수인의 딜레마 논변을 동원해왔다4). 곧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utility-maximizer”로서, 각자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상호 권리의 양도를 통한 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변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5)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홉스적 인간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인 자연상태의 파국상황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시 이러한 파국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방식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홉스 계약론의 규범적 성격을 간과한 반론이다6). 만약 홉스적 인간이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국가를 해체하거나 적어도 다른 국가로 변경하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홉스는 신민들이나 시민들이 주권자에 대해 반역하는 행위는 (규범적으로) 성립할 수 없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계약의 체결의 결과로 주권자가 자신의 절대적 권한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계약 체결 자체 내에 포함된 복종의 약속으로 인해 주권자의 통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이의나 반역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적인 인간을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논변은 홉스 계약론이 포함하고 있는 규범적 함축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처럼 계약의 규범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홉스는 계약과정이나 계약의 실행 이후 기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기만을 자연권 속에 포함시킨다. 다음 구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각자는 저마다 쾌락에 이끌리며, 정신은 그토록 자주 탐욕, 명예심, 질투심, 분노 등에 점령되어 더 이상 이성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확실한 신실함의 징표로 약속을 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한들, 이러한 약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덧붙여지지 않는 한 아무도 아주 확실하게 타인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권에 의해 각자는 기만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오직 더 큰 선에 대한 희망이나 더 큰 악에 대한 공포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약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TTP, 16장 7절; pp. 512-514―강조는 필자)
사실 모든 계약의 동기에 유용성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이성보다는 충동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좀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피해를 막기 위해 계약에서 기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스피노자는 이처럼 계약이 유용성에 의거해 있고, 자연권에 의해 기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사회상태에서도 항상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제든지 주권적 권력은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홉스는 계약을 통해 확립한 주권적 권력은,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당시에 약속했던 복종의 약속을 영속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교체될 수 없으며 교체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계약은 협정이나 신약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사실 [신학정치론]에서는 계약contractus이라는 단어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7), 그 용법 역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동맹 조약이나 협정, 또는 신과의 계약(16장 19절; p. 528)이나 이스라엘 부족 사이의 맹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국가를 창설한다든가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의미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pactum이라는 용어(이는 총 12번 사용되고 있다), 곧 홉스가 협정이나 신약의 의미를 부여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볼 때 스피노자가 계약의 근본 동기로 유용성을 제시하는 것은 홉스의 계약론과의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홉스 계약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난점, 곧 국가의 설립은 권리의 상호양도로서 계약의 체결과 이행을 전제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계약은 도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8).
(3) 또한 16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주권자의 권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규정에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에서 주권자가 갖는 절대적 권위는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권리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홉스와 달리 원초적 계약의 절차들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주권자의 권력 역시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인공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획득될 수 없다고 본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의 정도에 비례하고, 주권자는 충분한 역량을 지니는 한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p. 514). 이 주장은 마치 스피노자가 원칙적으로 강권정치나 참주정치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스피노자의 주장은 그보다는 좀더 미묘하다9).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강권정치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10), 그리고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추구하고 있는 근본 목표는 “각자에게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들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는 것”(TTP 서문; p. 72)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역량에 대한 스피노자의 강조는 강권의 옹호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오히려 스피노자가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를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신학정치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왜 이러한 자유와 권한을 허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한다. 첫째, 인간학적 논거들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견해가 범죄적인 것으로 최급받고, 신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행동을 유발시킨 것이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럴 경우 그들은 법을 혐오하게 되고,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배덕한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로 판단하게 되어, 결국은 선동적인 운동과 폭력을 시도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의 견해에 거슬러 제정된 법률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ingenui을 위협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국가imperium를 커다란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집행될 수 없다(TTP 20장 11절; p. 644).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가 의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를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 권리, 또는 정념적인 힘들은 인공적인 수단들을 통해 외재적으로 금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상태, 국가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은 지속된다는 스피노자의 집요한 논리에서 따라나오는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의견 및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규범적으로 부당하다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본성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금지된다고 할 수 있다11).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판단 및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이를 국가 보존에 유용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주권자의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둘째, 역사적 논거들이 있다. 스피노자는 17장 이하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특히 17장과 18장을 통해 고대 히브리 국가들에서 왕과 사제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역사 및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로마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 또는 영국왕과 개신교 종파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에 관해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권자가 성무(聖務)결정권(“jus circa sacra”)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역사적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종교적인 지도자들(그들이 사제이든 교황이나 주교, 목사이든 간에)이 국가의 법적 통제 없이 개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 성향(이는 개인들의 정념의 수동성에 근거하고 있다)에 의거하여 자신의 고유한 조직을 구성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국가의 정치적 문제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는 곧 국가의 심각한 혼란과 소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는 “종교는 [정치적] 명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의 결정에 의해서만 법적인 힘을 획득하며, 신은 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특정한 인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TTP 19장 3절; p. 606)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곧 주권의 양분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절대주의의 진의가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역량의 논리, 주권자의 역량에 대한 강조는 강권정치에 대한 옹호로 이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비이성적, 비도덕적 본성은 사회상태에서도 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홉스처럼 인공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제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들의 정념적인 본성을 민주주의적으로 규율하고 활용하려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학정치론]의 계약론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곧바로 우리를 다음의 논의로 인도한다.
주)
1)그 외에도 16장 2절; 16장 4절; 19장 4절 등도 참조하라.
2) “사람은 하나의 동일한 충동에 의해 능동적이라고도 불리기도 하고 수동적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 본성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을 때(4부 정리 37의 따름정리 및 정리 37의 두 번째 증명을 보라), 이성이 인도하지 않는 이 충동은 분명 정념으로서, 야심이라고 불리며, 거만함과 거의 다르지 않다. 반대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는 능동 내지는 덕목이며, 동정심이라 불린다.”
3) 이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특히 Matheron 1985a; 1985b를 참조.
4) 홉스 해석에서 수인의 딜레마 논변을 사용하는 좋은 사례로는 Hampton 1986 3장 및 6장을 참조.
5) 이에 관해서는 특히 Ryan 199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김용환 2001, 158쪽 이하 참조.
6) 홉스 계약론의 규범적 함의에 관해서는 특히 Foisneau 2001 참조.
7) 총 4번 사용되고 있다. 16장 16절(G III 196); 16장 19절(G III 198); 16장 22절(G III 200); 17장 14절(G III 210).
8) 이런 의미에서 홉스 계약론의 난점에 관해서는 Ueno 1991 참조. 단 우에노는 수인의 딜레마에 관한 논변에 의거하고 있지만, 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홉스 자신의 관점에 충실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9) 이에 관해서는 Matheron 1985b 참조.
10)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주권자들이 터무니없게 명령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선을 중시하고 매사를 이성의 인도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말하듯이 누구도 폭력으로는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TTP 16장 9절; 모로판, 516) 또한 “나는 주권자가 원칙적으로는 가장 폭력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며, 극히 사소한 문제들 때문에 시민들을 처형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통치에서 건전한 이성의 판단이 무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주권자도 국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이렇게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가 이러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그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권자의 권리란 그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TTP 20장 3절; 모로판, 634)”.
11) 이에 관한 좋은 평주로는 Balibar 1997a 2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