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홉스 사회계약론의 요소들


  근대 사회계약론은 세 가지의 이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자연적 존재조건으로서 자연상태라는 병리적 상황, 또는 반사회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병리적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국가라는 인공적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론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계약의 도출과 체결에 관한 이론이다. 셋째, 사회계약론은 또한 이렇게 해서 구성된 국가의 권력과 제도의 체계에 관한 이론, 곧 주권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홉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 또는 한 홉스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계약이론의 발명가”(Terrel 2001, p. 135)로 간주될 수 있다. 방금 지적한 사회계약론의 세 가지 계기에 따를 경우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자연상태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 홉스


  홉스는 자연상태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로 간주될 수 있다. 홉스 이전에 그로티우스의 저작에서 계약에 관한 논의가 엿보이고, 장 보댕의 저작에서 근대적인 주권 개념의 단초가 마련되지만,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홉스에 의해 비로소 철학적, 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한다1). 자연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실존에 함축되어 있는 병리적 조건이 해명될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보존이라는 인간학적 공리와 결부되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곧 계약을 통해 사회상태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과제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 개념은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자연상태 개념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는 이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스콜라철학에서 나타나는 정치사상의 핵심 원리로서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과 단절했다는 점에 있다. 사실 홉스는 1642년 처음으로 출간된 [시민론De Cive]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어온 정치철학의 원리들2)을 과학적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그 자신이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이라고 부르는 근대 과학의 방법을 채택하여 “사회철학(또는 정치철학)civil philosophy”을 구축하고자 했다3).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위계화된 우주론적 질서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이라는 규정에서 유래한다)은 일체의 목적론을 배제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홉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근대 정치철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홉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 대신 자연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살아가는 자연상태라는 가설적 조건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시작한다. 홉스가 그리고 있는 이 자연상태는 몇 가지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4). 첫째, 자연상태는 모든 개인이 모든 사물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전제했던 것과 달리 홉스에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며, 각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이나 능력을 동원할 권리 또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둘째, 이처럼 자연상태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동등하게 절대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기 때문에, 공동의 법률이나 규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정의롭고 부정의한지 판단해줄 수 있는 공통의 척도나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과 정의, 불의를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위하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상태로 특징짓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첫째, 자연상태가 희소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곧 생존을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는 불가피하게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홉스가 “공포” 또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diffidence”라고 부르는 정념도 이것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홉스가 말하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는, 자원이 결핍되어 있고 객관적인 안전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자가 언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 비록 지금 내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피해도 입지 않고 있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으며, 이 공격이 치명적인 피해, 곧 죽음을 야기시킬 경우 나는 그에게 반격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에 빠져 있는 자연상태의 인간에게 최선의 행동방식은 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된다5). 마지막으로 “헛된 공명심vain glory”이나 “자부심pride” 역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평화를 위협하고 전쟁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2) 법적 계약이론의 창안


  홉스를 사회계약론의 발명가로 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가 계약이론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계약이라는 관념 자체는 홉스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를 통해 사회의 성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존재했지만6), 홉스는 사회계약을, 자연상태와의 전면적인 단절을 통해 인위적으로 시민사회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상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계약에 대한 관념에 따라 지레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홉스의 계약 개념은 일의적이지 않으며,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먼저 홉스는 계약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들을 구분하고 있다(EL 1부 15장, DC 2장, L 14장 참조). 홉스는 계약contractus/contract을 매우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다. “권리의 상호 양도가 사람들이 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DC 2장 9절; L 14장 9절, p. 82) 이에 비해 홉스가 “협정pactum/pact” 또는 “신약(信約)covenant”이라고 부르는 것은 권리의 일방적인 양도로 특징지어진다. “계약자들 중 한쪽이 계약된 것을 이행하고 다른 한쪽이 일정한 기간 이후에 자기편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남겨둘 때(그리고 그 동안 그를 신뢰할 때), 이행자 편에서 보면 이 계약은 협정 또는 신약이라 불린다.”(L 같은 곳) 또는 홉스는 [법의 원리] 같은 곳에서는 이를 좀더 세분해서 말하고 있다. 곧 1) 계약의 두 당사자가 현재 계약의 내용을 이행하는 경우가 있고, 2) 한 당사자는 계약 내용을 즉각 이행하고 다른 한 쪽은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만 해두는 경우가 있으며, 3) 두 당사자 모두 현재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고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경우가 있다(EL 1부 15장 8-9절). 이 세 가지 경우 중 첫번째 경우가 홉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에 해당하고, 나머지 두 경우는 협정 또는 신약에 해당한다.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7). 홉스는 두 가지의 절차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첫번째 절차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맺어지는 “예비 계약”으로서, 이는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자연상태에 만연해있는 갈등과 위험,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처한 개인들은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곧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홉스는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제1 자연법이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과 유익을 추구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의 계율 또는 일반 규칙이다. 이 규칙의 첫번째 부분은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는 자연의 첫번째 근본적인 율법을 포함한다. 두번째 부분은 자연권의 요약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이다.”(L 14장 4절, p. 80―강조는 홉스)8) 그리고 이 제1 자연법에 뒤이어 평화를 달성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으로서 제2 자연법이 도출된다. “평화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모든 것에 대한 이 권리[곧 자연권]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포기해야 하며,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허용한 자유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허용한 자유에 만족해야 한다.”(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러한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 곧 자연권을 포기하거나 유보하자는 데 동의를 하게 되며, 이러한 동의는 계약을 지켜야 할 의무를 낳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이 어떠한 강제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 역시 강제되지는 않는다. 이 의무는 자연법의 명령으로부터 유래한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연히 이 예비적 계약은 쉽게 파기되거나 위반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원래의 계약의 목표인 평화와 안전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지닌 제 3자를 설정해서 개인들 사이의 상호 권리 양도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처럼 제 3자, 곧 주권적인 권력의 보유자를 세우는 것이 바로 두번째 단계의 계약이며, 이것을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또는 정치적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외적의 침입이나 [성원들] 상호간의 침해로부터 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 공동의 권력을 세우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회의체에 부여하는 것이다.”(L 17장 13절, p. 109) 이 두번째 계약은 각각의 개인이 서로간에 어떤 사항이나 권리와 관련하여 맺는 계약 또는 신약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모든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권력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권력 및 힘을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에게 양도한다는 점에서 첫번째 단계의 계약과 구분된다. 홉스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를 좀더 명확하게 부연하고 있다. “이는 동의나 합의 이상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맺는 신약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동일한 의인(擬人, person)으로 모든 사람을 실재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모든 권리를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주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나 자신을 통치하는 권리를 그에게 양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 곧 하나의 동일한 의인에게 자신의 권력과 힘을 양도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부여했을 때, 자연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공동의 권력이 창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신으로서의 리바이어던, 국가이며, 이를 통해 주권자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에 복종과 통치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3) 홉스 주권 이론의 독창성


  세번째로 홉스는 주권에 관한 개념화에서도 독창성을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계약의 과정은 홉스에 따르면 동시에 주권자에게 “권위부여하기authoriz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위부여하기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홉스는 의인person에 관한, 따라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L 16장 1절, p. 101) 의인에는 자연적 의인과 인공적 의인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될 때, 또는 귀속되는 것으로 인정될 때를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를 가리킨다. 홉스의 의인 이론은 홉스의 정치철학이 갖는 법적 인공주의를 잘 보여준다.

  홉스의 의인 이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신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체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 행동이 늘 같은 존재자에 의해 수행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동일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를 이 신체, 또는 그가 수행하는 이러저러한 행동의 주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자연권과, 시민사회 또는 국가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인공적 권위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다. 곧 자연권은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뜻하는 반면,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는 권리”(L 16장 4절, p. 102)로 정의되는 권위는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 법적으로 규정된 의인이라는 개념을 전제하며, 따라서 상호개인적 관계를 함축한다. 따라서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9) 이처럼 어떤 동일성을 상정하고 그에게 말이나 행위를 “귀속시키는attribute” 법적 절차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국가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표나 권위부여를 통한 공동의 권력의 설립도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권위부여의 절차가 갖는 중요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의 권위가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한 권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홉스는 장 보댕Jean Bodin과 마찬가지로10)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연법에 근거하여 주권자의 권한을 확립하려고 했던 보댕과 달리 홉스는 주권자의 권위를 피통치자, 곧 신민 또는 인민의 동의에 근거지으려고 했다. 곧 홉스의 주권자는 각각의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양도하는 권리들 이외의 독자적인 역량이나 권력을 지니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발적 양도를 통해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홉스의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에 대해 법적 규범성을 부여하려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다11).

  둘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홉스의 주권이론의 목표 중 하나가 대중들multitudo/croud을 해체하고 이를 인민으로 구성하는 또는 포섭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홉스는 [시민론]이나 [리바이어던] 같은 저작에서 인민과 대중들에 대한 엄격한 구분의 필요성을 여러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시민론]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민대중들을 충분히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회체제, 특히 군주정에 대해 해롭다. 인민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다. 여러분은 이것에게 하나의 행위를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대중들에 대해서는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DC 12장 8절, p. 137―강조는 홉스) 또한 [시민론] 6장에서는 대중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대중들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가 대중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통일성이 존재해야 비로소 공동의 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에 따라 평화와 안전이 성립할 수 있는데, 대중들은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또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행위를 귀속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홉스는 대중들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또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행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인간들로 해체되어야 하며, 이들 각각이 자신의 권리와 힘을 양도함으로써 하나의 동일한 의인, 곧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같은 책, p.76).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중들이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일 수 없다면, 그리고 대중들은 다수의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인민과 대중들을 구분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시민론] 12장 8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홉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p. 137)

  “역설적이게도”라는 삽입구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자신의 구분법이 사람들에게 기묘하게 들릴 수 있음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집요하게 인민과 대중들을 구분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 또는 대중들이 국가에 반역하고 통치권을 찬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홉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들이 충분히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라는 사실, 사실은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여서 국가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도 있는 행위자라는 사실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12). 따라서 홉스가 권위부여의 절차를 통해 주권자의 절대적 권한,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 하고, 대중들이 법적 의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는 대중들이라는 위협적인 정치적 행위자를 해체하고 법적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에 관해서는 특히 Strauss 1952, p. 15 이하 참조.

2)

그는 키케로에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및 프란시스코 수아레즈에 이르는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이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DC 「서문」 참조.

3)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홉스의 비판은 특히 「헛된 철학과 공상적인 전통에서 유래하는 어두움에 대하여Of Darkness from Vain Philosophy and Fabulous Traditions」라는 신랄한 제목이 붙은 󰡔리바이어던󰡕 46장을 참조하고, 홉스 정치철학의 과학적 기초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특히 Herb 1996을 참조.

4)

이에 관해서는 특히 L 13장을 볼 것.

5)

홉스에게는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 시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홉스의 인간학 및 정념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이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Moreau 1994, p. 407 이하 및 Lazzeri 1998 1장을 참조할 수 있다.

6)

 이에 관해서는 Terrel 2001, 1-3장 및 Matheron 1984를 참조.

7)

홉스 계약론의 절차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Kavka 1986, p. 179 이하 및 Terrel 1994, 8장, 특히 p. 214 이하 참조.

8)

홉스에서 자연법은 총 19가지([시민론]에서는 20가지)가 있는데, 제1, 2 자연법, 특히 제1 자연법이 그 핵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 김용환 교수가 홉스의 정치사상을 “평화애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일리가 있다. 김용환 2001, 170쪽 이하 참조.

9)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전유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인정받는다면, 그는 자연적 의인이 되는 셈이며, 그가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대표한다면, 그는 인공적 의인이 된다.

10)

보댕은 1576년 출간된 󰡔공화국 6서Six Livres de la République󰡕라는 저서에서 국가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주권이 국가의 본질을 이루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공화국 또는 국가란 “주권적인 군주 아래 존재하는 인민의 통합체”이며, 따라서 주권은 국가의 “부분들” 또는 “지체(肢體)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집하는 통합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주권은 국가의 진정한 “토대이자 축”이라고 할 수 있다(Bodin 1993, pp. 65-69). 아울러 주권을 정의하고 있는 1권 8장에서는 주권을 다음과 같이 좀더 정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주권이란 국가에 부여된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을 가리키며, 로마 사람들은 이를 ‘마예스타템majestatem’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p. 111) 주권자의 권한 또는 “진정한 표시vraies marques”를 다루는 10장에서는 주권자의 권한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주권에는 법을 제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힘, 평화와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 법원의 판결에 대해 청문할 수 있는 권리, 공직의 임명과 해임권, 조세권, 특권의 부여권, 화폐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충성 서약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된다.”(같은 책, pp. 160 이하) 이러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보댕이 이 책을 저술한 목표는 주권의 절대성을 이론적으로 확립함으로써 프랑스 군주정에 교의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

11)

보댕의 주권 개념과 홉스의 주권 개념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Goyard-Fabre 1992 및 김용환 2001, 236-239쪽을 참조하고, 홉스 주권 개념의 규범적 성격에 관해서는 Foisneau 2001을 참조.

12)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저술한 시기는 1647-48년 사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홉스는 자신이 󰡔리바어이던󰡕을 저술하게 된 이유는 다중들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고 위험에 빠진 국왕의 주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리처드 애쉬크라프트Richard Ashkraft는 홉스의 원전들을 인용하면서 이 점을 매우 명료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이 시기는 “주권이 쟁탈되고” 국가 안에는 어떠한 “주권”도 평화도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다. 영국은 “각자의 이성 내지는 각인된 빛이 제안하는 바에 따라 아무것이든 자행하는 분산된 다중들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내전이 존재하는 곳에는 ... 법도 공동체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무법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중만이” 존재할 뿐인데, 다중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은 “어떠한 의식의 복종도 없이 자신의 사적 이익”에 따라 인도된다. ... 동시에 홉스는 “[리바이어던]은 왕의 세속적이고 영적인 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Ashkraft 1978, p. 30. 그 이외에 홉스의 정치학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대해서는 퀜틴 스키너의 연구들도 매우 좋은 참고자료들이다. 특히 Skinner 1972, 200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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