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들의 모방: 원초적 계약의 불가능성

 

  하지만 우리는 아직 공통의 정서들, 곧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 어떤 공통의 피해에 대해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이 어떻게 해서 홉스 및 󰡔신학정치론󰡕에서 계약이라는 관념이 수행했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봐야 할 차례인데, 여기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스피노자가 󰡔윤리학󰡕 3부 정리 27 이하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개념이다. 사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이래 이룩한 이론적 성과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정서론에서의 발전이다.

  󰡔신학정치론󰡕의 정념론에 비하면 󰡔윤리학󰡕의 정념론 또는 정서론은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윤리학󰡕에 나타난 정서 개념은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가 수동적인 것, 곧 정념적인 것들에 국한되지 않고 능동적인 정서들도 포함하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이하에서 제시된 정서론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서 개념 및 능동과 수동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데카르트나 홉스의 정념론과 단절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윤리학󰡕에 이르러 비로소 역량의 관점에서 정서들을 연역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 그 결과 󰡔윤리학󰡕 이후에 스피노자는 더 이상 정서들을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이성을 좀더 광범위한 능동화의 역량의 한 계기로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은 󰡔정치론󰡕의 정서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신학정치론󰡕과 비교해볼 때 󰡔윤리학󰡕의 정서론이 지니는 또다른 특징은 바로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있다. 사실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스피노자가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인 인간학적 원리로서, 바로 이 개념에 기초하여 스피노자는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사회화 및 반사회화의 경향들을 단일한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당대의 정치학의 흐름과 상이한 기반 위에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었다.

  우선 정서들의 모방 개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간단히 살펴보자.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윤리학󰡕 3부 정리 27에서 제시되는데, 이 정리는 정서들의 모방 개념을 통해 3부의 논의의 한 가지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2).


만약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그리고 그것에 관해 우리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를 겪는 것을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의해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된다3).


정서들의 모방이 제시되기 이전까지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스피노자는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서들의 분자구조를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코나투스로서의 욕망은 우리의 존재 및 행위역량이 증대되고 촉진되거나 아니면 감소되고 저해받는 이중적 경향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전자와 후자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쁨과 슬픔이라는 정서다. 나머지 다른 정서들은 이 분자 구조가 변형되고 복잡화된 형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는 정리 26에 이르기까지 정서들의 관계를 대상과의 관계로서 전개하고 있다. 이는 다시 두 가지 소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곧 외부원인들에 대한 표상과 결부된 기쁨과 슬픔으로서의 사랑과 미움이 나오는 정리 12-13에서부터 정서의 시간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희망과 공포가 제시되는 정리 20에 이르기까지는 개별적인 주체와 어떤 대상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정리 21에서 26까지는 이러한 대상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분석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리 27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정서와 대상의 직접적인 관계를 해체한다는 점에 있다. 곧 이 정리 이전까지 전개된 정서론에서 모든 정서는 항상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생겨난 반면, 정리 27은 직접 어떤 대상에 대한 정서를 겪지 않고서도, 우리와 비슷한 실재4)가 이 대상에 대한 정서들을 겪게 되면, 또는 그것이 그러한 정서들을 겪는다는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실재와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되는 정서적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서들의 모방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과의 직접적인 변용을 통해 이러저러한 정서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가 이전까지 아무런 정서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실재가 대상과 맺는 정서적 관계들을 모방함으로써 그와 비슷한 정서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들, 또는 정서적 연관망을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빼어내서, 이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관계와 관련시킨다. 정서들의 모방이라는 메커니즘이 등장하면서, 이제 정서들의 일차적인 생산자는 우리가 대상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실재들과 맺는 간접적 관계, 모방적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정서들의 모방에서는 정서들이 진행되는 방향의 전환이 발생한다. 곧 이제 더 이상 정서들의 진행방향은 나에서 시작해서 다른 실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재에서 나에게로 진행한다. 이제 나는 정서들의 출발점, 정서들의 중심이 아니며, 따라서 정서들의 모방은 정서적 관계에서 (말하자면) 탈주체적, 탈자아적 효과를 산출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러한 모방이 의식적으로 실행되는 모방이 아니라는 점, 곧 정서들의 모방 메커니즘에서 내가 타자의 정서들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의식적인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의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힘과 효력은 바로 이러한 비의식적이고 비의지적인 성격에 있기 때문이다5).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이 갖는 합치의 힘은 스피노자가 3부 정리 29 및 그 주석에서 ambitio라고 부르는 정서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암비치오는 현대어에서 쓰이는 “야망”이나 “야심”과는 좀 다른 의미를 갖는 단어다. 현대어에서 “야망”이 “무언가를 크게 이루어보려는 희망”을 의미하고, “야심”은 “이를 이루려는 마음”이나 좀더 부정적으로는 “이를 이루기 위해 남을 해치려는 마음” 곧 “음모”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비해, 스피노자가 말하는 암비치오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곧 자신의 이익이나 기쁨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6)


정리 29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기쁘게 간주할 만한 모든 것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반대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주석

이처럼 단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피하려는 노력은 암비치오[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ambitio이라 불린다. 특히 우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삼가는 일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우중vulgus을 기쁘게 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할 때 그렇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암비치오,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추구하려는 노력과는 다른 것이다. 암비치오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다른 사람들, 특히 대중에게 잘 보이고,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이처럼 암비치오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면, 곧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피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면, 사람들 사이에 합치를 이루는 것, 더 나아가 조화를 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서들의 모방은 이와는 또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방향적인 관계만을 살펴봤는데, 사실 정서들의 모방은 A → B만이 아니라 B → A라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정서적 관계는 정서들의 모방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정서들의 모방을 동반하지 않는, 곧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서적 관계들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모든 측면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서들의 모방이 어떻게 해서 갈등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지는 좀더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가 “마음의 동요fluctatio animi”라고 부르는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 마음의 동요는 “두 가지 대립하는 정서에서 생기는 정신의 상태mentis constitutio quae scilicet ex duobus contrariis affectibus oritur”(E III P17s)를 가리키는 것으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보통solet 슬픔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실재가, 우리를 보통 같은 크기의 기쁨의 정서로 변용시키는 다른 실재와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이 실재에 대해 미움을 가지면서 동시에 사랑하게 될 것이다.”(E III P17) 따라서 마음의 동요, 또는 정신의 동요는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동시에 상반된 정서들을 느낄 때 겪게 되는 혼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동요가 정서들의 모방과 결부되면, 앞에서는 합치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던 암비치오가 이번에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리 31은 이처럼 정서들의 모방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를 제시해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는odio habere 것을 어떤 사람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한다고 상상하면, 이로써 우리는 이것을 더욱 확고하게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그가 싫어하거나aversari 또는 그 역의 경우라고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겪게 될 것이다.”(E III P31) 이 정리에서 첫 번째 문장에서는 두 가지의 정서적 관계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생겨나는 정서적 관계(나-어떤 실재, 어떤 실재-타인)며, 다른 하나는 타인과 나 사이에서 성립하는 정서적 모방의 관계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가지 정서적 관계는 같은 방향으로, 곧 내가 사랑하는 것을 그도 사랑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은 그도 미워하는 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이전보다 나의 정서적 강도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똑같이 두 개의 정서적 관계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와는 달리 대상과의 정서적 관계와 타인과의 정서적 모방의 관계가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동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정서들의 모방이 결부될 경우 이러한 탈출의 노력은 예기치 않은 전환, 심지어 전도를 낳게 된다. 스피노자는 3부 정리 31의 따름정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로부터, 그리고 3부 정리 28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곧 각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게끔 노력하고,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quantum potest 노력하게 된다. ... 자기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려는 이러한 노력은 사실은 암비치오/잘 보이려는 욕망이다(3부 정리 29의 주석을 보라).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 각자는 본성상 다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열망하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pariter 이를 열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 대해 똑같이 장애물이 되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E III P31c)  


이를 전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이 경우에는 거꾸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욕망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첫 번째 암비치오의 경우 화합, 또는 적어도 일치의 동력으로 나타났던 정서들의 모방이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보편적인 갈등과 증오의 동력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종류의 암비치오, 곧 “명예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E III app.41)으로서 암비치오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동일한 욕망을 갖도록 욕망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증오와 갈등을 낳는다는 점에서 (마트롱이 말하듯이) 단순한 명예욕을 넘어서는 지배에 대한 욕망이라 할 만한 것이다7).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정치학의 문제에 대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기에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1)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자들(특히 홉스)의 가정과 달리 인간들은 원초적인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의 동일성에 대해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점, 곧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관개체적(貫個體的)transindividual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8).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할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암비치오의 첫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다. 정서들의 모방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라는 목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로를 따라 이야기하자면9), 사람들이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욕망을 갖게 하려고 욕망하는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인간의 본성이 욕망인 한, 인간들은 욕망하지 않고서는, 정서적 활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인간들이 항상 이미 정서들의 모방의 연관망 속에 들어 있는 한,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 정서들을 모방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본질을 이루는 욕망이 타인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정서적 관계는 개인들의 동일성/정체성에 내재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관개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서들의 모방 개념은 우리가 앞 절에서 살펴본 󰡔정치론󰡕의 인간학적 특성, 곧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의 구체적 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이처럼 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정서적 관계, 특히 정서들의 모방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정체와 자연권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적인 개인들의 우선성을 존재론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더 이상 이론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 대신 스피노자 정치학은 새로운 대상, 새로운 문제는 갖게 된다. 󰡔정치론󰡕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대상은 바로 대중들multitudo10)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고유한 개념도, 스피노자가 가장 먼저 사용한 개념도 아니며, 이미 홉스의 정치학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개념은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하지만 홉스의 정치학 체계 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바깥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해야 하는) 개념,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홉스 정치학의 유령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1편에서도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들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대중들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擬人, person)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대중들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강조는 홉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 뒤, 곧바로 대중들은 “단일한 실재singular entity”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중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하나의 의인, 곧 법적 인격체로서의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고11), 따라서 소유도 권리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유효한 행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홉스의 정치학을 가능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이처럼 대중들을 다수의 사람들,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함으로써 대중들의 정치적 유효성을 박탈할 경우에만 (홉스의 의미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DC 12장 8절, p. 137)


홉스의 정치학에서는 계약의 주체로서 개인들 또는 의인들과,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권력의 주체로서의 주권자 이외의 다른 정치적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들만이 국가를 구성한다. 따라서 만약 대중들이 고유한 정치적 실재성을 갖게 된다면 홉스의 정치학은 근저로부터 위협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홉스는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대중들을 다수의 개인들로 해체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홉스가 이처럼 자신의 정치학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첫 번째 질문으로 대중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역으로 대중들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유효한 실재라는 것, 대중운동이 정치적 질서에 대해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중들이라는 개념이 홉스 정치학의 유령이라는 말이 그리 부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스피노자는―다음 절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 보겠지만―대중들을 원초적인 정치적 실재로서 긍정한다. 이는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으로 이루어진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들에 선행하고 개인들의 정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더러, 이러한 관계가 국가, 따라서 정치의 기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은 개인들을 결합하고 대립시키는 이러한 정서들과 관념들의 연관망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3) 이처럼 대중들이 스피노자 정치학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함에 따라, 스피노자 정치학의 과제 역시 󰡔신학정치론󰡕과 달라지게 된다. 󰡔신학정치론󰡕이 “따라서 국가의 목적은 실은 자유다Finis ergo reipublicae revera libertas est”(TTP 20장 6절, p.636)라고 선언했다면, 󰡔정치론󰡕에서는 사회적 관계의 보존이라는 문제, 평화와 안전이라는 문제가 국가의 핵심 과제로 제시된다. “시민사회의 목적은 평화 및 안전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TP 5장 2절) 이렇게 평화와 안전이 국가의 핵심 과제로 등장하는 이유는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기 때문이다. 갈등이 사회적 관계에 구성적이며, 이에 따라 국가에 대한 주요 위험은 바로 내부의 시민들에 있다는 주장은 󰡔신학정치론󰡕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신학정치론󰡕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해소하는 길을 우중들을 규율하는 데서 찾고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더 이상 대중들 바깥에서, 곧 어떤 초월(론)적 준거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도 않다. 사실 대중들, 곧 정서들과 관념들의 복합적인 연관망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면, 대중들 바깥에서 정치학의 기초를 찾는 것은 스피노자가 보기에는 유토피아적 환상에 빠지거나(TP 1장 1-2절 참조) 참주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TTP 「서문」 외 여러 곳). 그런데 이처럼 우중 또는 대중들이 사회적 관계의 기초로 설정되어 대중들이 더 이상 통치의 대상으로서만 간주될 수 없다면, 대중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이며, 이들에게 항상 수반되는 정서적 동요들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첫째,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질서의 존재론적 위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둘째, 대중들의 역량과 주권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며, 셋째, 󰡔정치론󰡕에 나타나는 민주주의 개념의 특징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문제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주)

 

1) 이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학위논문, [스피노자에서 관계의 문제] 6장을 참조하라.

 

2) 정서들의 모방 개념이 󰡔윤리학󰡕 3부의 논증 과정에서 이룩하고 있는 단절의 의미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Matheron 1969, pp. 151 이하 및 Macherey 1995, pp. 214-226을 각각 참조하고, 홉스의 인간학과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Lazzeri 1998, pp. 77 이하 참조. 단 마슈레의 경우는 정리 27보다는 정리 21 이하의 단절을 더 중시하는데, 이는 정리 21 이전까지는 대상, 실재와의 관계만이 문제가 되었다면, 정리 21부터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3) “Ex eo, quod rem nobis similem, & quam nullo affectu prosecuti sumus, aliquo affectu affici imaginamur, eo ipso simili affectu afficimur.”

4) 여기에서 “res”란, 현대어로는 대개 “thing”이나 “Ding”, “chose”로 번역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현대의 용법과는 달리 인간 또는 생명체와 대립하는 의미의 무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정리 27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리와 비슷한 실재rem nobis similem”는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res”를 “사물”이라고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다. 그런데 “res”에서 파생한 “realitas”라는 단어는 현대어로는 “reality”나 “Realität”(또는 “Wirklichkeit”), “réalité”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는 “실재성”이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이 단어 및 이와 관련된 단어들(“real”, “realism” 등)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 “res”는 “실재”라는 말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5) 이는 (초기) 마트롱이나 네그리에서 나타나는 목적론적 경향과 비교를 위해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 논점이다.

6) 대개의 󰡔윤리학󰡕 불역본이나 영역본에서는 이를 어원에 따라 “ambitio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바르투샤트Bartuschat의 최신 독역본(Spinoza 1999c)에서는 이를 “공명심”이나 “명예심”이라는 뜻을 지닌 “Ehrgeiz”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고 강영계의 국역본에서는 “명예욕”(158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독역본이나 국역본의 번역은 고전 라틴어의 ambitio가 지니는 의미를 비교적 잘 살려주고 있으나, 이런 점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의미를 표현해주기에는 좀 미흡하다. 왜냐하면 명예욕이라는 것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제안하는 “잘 보이려는 욕망désir d'être bien vu”라는 역어(Macherey 1995, p. 235)가 스피노자의 ambitio가 지닌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ambitio를 이렇게만 번역하기에는 좀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ambitio라는 개념의 핵심적 중요성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하는 욕망으로 전도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경우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은 물론이거니와 “명예욕”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ambitio가 지니고 있는 이 이중적 의미, 전자의 의미에서 후자의 의미로 전환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정서들의 모방의 이해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마트롱이 ambitio를 “ambition de gloire”와 “ambition de domination”으로, 곧 “명예욕”과 “지배욕”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구분은 두 가지 경향이 서로 상이한 유래를 갖는 것이 아니라, ambitio라는 동일한 하나의 원천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첫 번째 ambitio를 “명예”와 관련짓고 두 번째 ambitio는 “지배”와 관련짓는 것은 얼마간 주체중심적인 관점인데, 왜냐하면 ambitio의 근본적인 함의는 주체의 지향적 구조를 해체한다는 데 있지만, 이 두 가지 번역은 이러한 지향적 구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ambitio의 의미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첫 번째 ambitio는 “잘 보이려는 욕망”으로 번역하겠지만, 두 번째의 경우는 “지배욕”으로 번역할 것이다. 

7) 하지만 이러한 지배의 욕망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근본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욕망인데,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가 타인들을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하는 그만큼, 타인들 역시 나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경우 타인들을 나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게 하려는 나의 노력은 타인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그 중 한 가지 경우로 나는 좌절하게 된다. 이 때 나는 타인들의 기질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째, 내가 타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그들을 나의 욕망, 나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와 같은 기질, 같은 욕망을 가질 경우 그들은 나와 동일한 것을 욕망하게 되는데,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대개 공유 불가능한 것(돈, 명예, 성적 대상 등)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특히 우리가 이성적 능력이 결여된 정서적인 삶을 살아갈 경우에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사람을 나의 경쟁자로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이 진짜로 나의 욕망을 따를까 봐 두려워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다시 또 마음의 동요에 빠지게 된다. 결국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했지만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8) 관개체성 개념에 기초한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으로는 특히 Balibar 1993; 1996을 참조.

9) 특히 Moreau 2003 pp. 133 이하 참조.

10) 용어 번역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글(및 제 1부)에서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multitudo”라는 용어를 줄곧 “대중들”이라고 번역했다. 네그리 연구자들은 이 개념을 주로 “다중”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물티투도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는 네그리의 관점이 많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뒤에서 좀더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적어도 스피노자 자신의 용법을 고려할 때 물티투도는 집합적인 명칭이기는 하지만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든 (정치적)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제안하듯이 물티투도 개념은,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수성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masses”, 우리말로는 “대중들”로 번역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1) 홉스의 “의인” 개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4, 140-1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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