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서론: 󰡔신학정치론󰡕에서 󰡔정치론󰡕으로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요소들(자연상태 개념,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의 원리로서 계약, 계약의 결과로서 주권)을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은 매우 특이한 수용으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의 사회계약론의 기본 전제들을 비판하거나 심지어 전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정치론󰡕에 나타난 계약론 수용 및 변용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의 단절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권이 지배하는 곳이다. (2) 이에 따라 사회계약은 홉스와는 달리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 곧 인공적 질서로서 국가를 정초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역량에 의해 조건지어지며, 권리의 범위는 역량의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 역시 그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3)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계약은 역사적 계약으로 나타나며, 더욱이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곧 정치적 계약과 이를 보충하는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된다. 이때 종교적 계약은 사회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개인들의 자연권, 곧 정념들을 순화하거나 규율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관한 고찰들을 통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신학정치론󰡕보다 6년 뒤에 집필된, 하지만 스피노자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은 󰡔정치론󰡕(이 책은 민주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11장 4절까지 서술된 상태에서 중단되어 있다)에서는 사회계약론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1) 󰡔신학정치론󰡕의 논의에서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회계약론이 불과 몇 년 뒤에 쓰여진 저작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당대의 네덜란드 연합주 공화국의 정세에 개입하려는 스피노자 자신의 시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 그 시도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교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곧 스피노자는 공화파 지도자인 드 비트 형제의 정치적 노선을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신학정치론󰡕은 이러한 정치적 태도의 이론적 표현이다) 네덜란드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정치론󰡕에서 스피노자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이는 불충분한 타협책에 불과하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

  하지만 이는 좀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정치론󰡕이 견지하고 있던 이론적 불충분함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자신의 저술의 목표를 공표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들의 사고와 판단(그리고 더 나아가 발언3))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훌륭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판단 및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국가의 근본 원리 또는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유는 사고와 판단에 국한되어야지 행위에까지 확장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우중 및 우중을 이루는 개인들의 이성적ㆍ정치적 역량을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인민의 지배 또는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인민 전체 또는 그 중 가장 큰 부분에 의해 조화롭게 유지되는 민주주의”(TTP 20장 2절; p. 634))가 가능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말과 행동, 사고와 행위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역시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신학정치론󰡕에 도입된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바로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곧 법적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중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개인들을 규율할 수 있는 보충적인 장치가 필요하며, 스피노자는 히브리 국가의 설립과 운영의 기초가 되었던 이중적인 계약에서 이것의 전형적인 모델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론적 문제설정은 우중 또는 대중들을 통치의 대상이자 복종의 주체/신민subjectus으로서만 사고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주창하는 민주주의적 관점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모세 사후에 곧바로 히브리 국가가 분열과 갈등 속에 빠져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도적인 안정성에 기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봤을 때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는 중요한 이론적 관점의 변화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론󰡕에는 󰡔신학정치론󰡕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 곧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대중들이라는 개념은, 우중vulgus이나 평민plebs 같은 단어들과 달리 󰡔신학정치론󰡕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 데 반해, 󰡔정치론󰡕에서는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론󰡕에서 사회계약론의 부재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개념,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을 대체하는 개념이 바로 대중들 및 대중들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정치론󰡕에서 이 개념들이 전면에 등장해서 중요한 이론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지, 곧 이 개념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스피노자의 이론적 관점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는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요한 대상이 바로 이 질문들이다.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 󰡔신학정치론󰡕의 정정


  1편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은 비관적 현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첫째,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이 정서와 이성,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서와 이성이 대립적으로 파악되면 정서들은 내적 변이와 개조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쉽게 외부의 원인들, 특히 운세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학정치론󰡕에 나타나는 정서들이 한결같이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탐욕libido/concupiscentia으로서의 욕망cupiditas, (운세fortuna에 좌우되는) 헛된 희망spes과 공포metus, 오만jactantia, 증오odio, 분노irae, 적의inimicitias, 간계dolos 등). 둘째, 이에 따라 정서들은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인들 사이의 반목과 갈등, 분열, 곧 반사회화의 기초로 작용하여 인간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을 뿐, 사회화의 인간학적 기초를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연속성, 곧 자연권의 지속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반계약론적 관점을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계약론과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토대 및 작용을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정치론󰡕 서두에서부터 인간의 자연권이 지니고 있는 공동적 성격,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1장 5절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이는 아주 확실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되어 있으며, 불행한 이들을 동정하고 행운을 누리는 자들을 질투하도록, 그리고 연민을 느끼기보다는 복수에 이끌리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TP 1장 5절)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명시적으로 󰡔윤리학󰡕에 준거하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서들에 예속된다”(E III P1)는 그의 인간학의 근본 공리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종교의 가르침, 곧 “각자는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시 말해 각자는 타인의 권리를 자기자신의 권리처럼 옹호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정서들에 대해서는 거의 힘을 지니지 못한다”(같은 곳)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도입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는 1장의 마지막 7절의 결론, 곧 “국가의 자연적 원인들 및 기초들은 이성의 가르침에서 이끌어내서는petenda 안되며 인간의 공통 본성 내지는 조건communi natura seu conditione에서 연역해야deducenda 한다”(강조는 필자)는 원리를 예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다음 스피노자는 2장 15절에서 자신의 관점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2장의 9절에 따라) 자연상태에 있는 각각의 사람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 동안에만 자신의 권리 아래 있기sui juris sit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 혼자서unus solus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연권은 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nullum esse 사실이 따라나온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공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sed magis opinione quam re constare인데, 왜냐하면 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아무런 확실한 방도도 존재하지 않기nulla ejus obtinendi est securitas 때문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근대 자연권 이론에서 볼 수 있는 원자론적 관점을 “공상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지 않아야 “자신의 권리 아래” 있을 수 있는데, 곧 자신의 자연권을 가질 수 있는데, 고립된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타인들을 적으로 둘 수밖에 없으므로 혼자서는 자신을 돌볼 수 없고4), 따라서 자신의 자연권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립된 각자의 자연권(“각자의 역량에 의해 규정되고 각자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의 자연권)이라는 관점은 공상적,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권이란 원초적으로 독립해 있는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 타자들과의 매개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권리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서만 각자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립할 수 있고, 각자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같은 절 뒷부분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이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권은 인간들이 공동의 법률을 갖고 있고 그들이 거주하고 경작할 수 있는 공동의 토지를 갖고 있는 곳, 그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모두의 공통적인 판단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거의 생각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2장 13절에 따라) 서로 연합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그들은 모두 함께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스콜라철학자들이, 자연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자신들의 권리 아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려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 대해 어떤 반론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론󰡕 2장 15절-강조는 필자)


마지막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주장하는 스콜라철학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스피노자는 자신의 전제조건을 분명히 해두고 있다. 곧 그가 스콜라철학자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인간들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인간들이 생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하는 한에서 그런 것이다5).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슈레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에 관한 스피노자의 마키아벨리주의적 입장에 대해 지적한 것6)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곧 정서들의 인간학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는 홉스의 편에 서 있지만, 정서들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따라서 원자론적ㆍ개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서들의 원초적인 사회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홉스에 맞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개, 곧 각자가 자신들의 자연권을 얻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 매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6장 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정서에 따라 인도되기 때문에, 대중들은 이성의 인도가 아니라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하게 되며ex communi aliquo affectu naturaliter convenire,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듯이, 곧 (우리가 3장 9절에서 말한 것처럼) 공통의 희망이나 공통의 두려움에 의해, 또는 어떤 피해에 보복하려는 공통의 욕망에 의해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더욱이 사람들 모두는 고립을 두려워하고 누구도 고립 속에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적/본성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하며statum civilem homines natura appetere,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nec fieri posse ut homines eundem unquam penitus dissolvant는 점이 따라나온다. (󰡔정치론󰡕 6장 1절-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성보다 정서에 따라 인도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신학정치론󰡕과 달리 “합치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은 “어떤 공통의 정서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정서들을 오직 부정적인 것으로, 곧 반목과 분열, 갈등의 동력으로서만 사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정서는 개인들 각자가 혼자서 느끼는 개별적인 정서가 아니라 공통의 정서이며, 이 공통의 정서는 대중들이 자연적으로, 본성적으로 합치하게 해주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이 때의 “합치convenientia”는 “화합concordia”이라는 단어와는 달리 이성적 조화나 통합의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con-venire”, 곧 “함께-오다”, “함께-모이다”는 의미, 따라서 어떤 일이나 행동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함께 모이다”는 의미를 갖지만, 이성이 아니라 정서가 공동의 행동과 생활의 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는 2장 15절의 논의와 일관되게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학정치론󰡕 이래 스피노자의 일관된 테제는 자연권은 사회상태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사회상태 속에서 자연권이 지속된다는 것은, 정서들이 부정적인 힘으로, 곧 반목과 불화, 갈등의 힘으로 정의되고 있는 이상 사회상태 속에서 갈등과 분열, 반목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 곧 사회 속에는 근본적인 반사회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인용하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당신들이 내부의 배신과 내 주위의 음모에 맞서 나의 안전을 보증해줄 때 나는 두려움 없이 전쟁과 전투의 위험을 감당해낼 것이다. 필립대왕은 극장보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더 안전했다. 그는 적들의 타격을 곧잘 피했지만, 자기 측근들은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들이 다른 왕들의 최후를 숙고해본다면, 그들 가운데는 적들보다 자기편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TTP 17장 5절; p.542)


따라서 스피노자는 마케도니아와 로마, 영국 등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국가를 위협하는 위험들의 원인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는 시민들이다. 왜냐하면 좋은 시민들이란 드물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또한 주권자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ㆍ제도적 질서 내로 사람들을 이끌어들일 수 있는 그의 역량에 따라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1편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러한 테제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전제들과 단절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테제는 그 자체로는 사회상태, 국가의 형성에 관해 어떤 실정적인 내용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우리는 위에서 이러한 한계는 󰡔신학정치론󰡕의 인간학의 핵심을 이루는 정서론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반대로 6장 1절의 결론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사회상태를 욕망할 뿐만 아니라,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신학정치론󰡕에 빠져 있는 사회상태, 국가 형성의 기초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만약 사회상태의 완전한 해체란 있을 수 없다면, 이는 인간의 본성 안에 항상 이미 사회성의 경향이 내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경향이란 어떤 신비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의, 또는 인간 본성의 다양한 표현방식들로서의 정서들이 항상 이미 사회적 관계, 상호개인적 관계를 통해 매개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인간들이 실존하고 행위하는 이상 인간들은 항상 이미 이러한 관계망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상태를 완전히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테제는 󰡔신학정치론󰡕 이래 지속되어온 “자연권은 사회상태 속에서도 지속된다”는 테제를 보완하면서 스피노자 정치학의 인간학적 기초를 완결하는 테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두 가지 테제가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할 때 우리는 왜 스피노자에게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단절이라는 관점이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테제는 󰡔정치론󰡕에서는 󰡔신학정치론󰡕과 달리 계약이라는 관념이 사회체의 형성에 관한 설명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잘 보여준다.


주)

 

1)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들의 빈도와 용법에 관한 표준적인 참고문헌으로는 Giancotti 1970을 참조하고, 특히 사회계약론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어법상의 차이에 관해서는 Matheron 1990을 참조.

 

2)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에 나타난 네덜란드 연합주, 특히 홀란드에 관한 스피노자의 평가는 󰡔신학정치론󰡕 19-20장과 󰡔정치론󰡕 9장 14절을 참조하라. 네덜란드 당대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정세에 관한 고찰로는 Balibar 1997a 1장 및 Prokhovnik 2004를 각각 참조.

 

3)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20장에서 한편으로 사고와 판단, 다른 한편으로는 발언과 소통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곧 사고와 판단의 자유는 조건 없이 허용되어야 하는 반면, 발언과 소통의 자유의 경우에는 “단순히 말하거나 가르치는[또는 정보를 전달하는]doceat 데 국한하고, 간계와 분노, 증오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리고 자기 결정의 권위에 따라ex authoritate sui decreti 국가 안에 어떤 것을 도입하려는 의도를 품지도 않고, 오직 이성에 따라 자신을 변호한다”(TTP, 638)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이는 발언과 소통만이 아니라 사고 역시 고립된 개인에 의해 단독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간주하는 스피노자의 근본적인 인간학적 원리(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와 대비되는 “인간은 생각한다homo cogitat”(E II A7)는 󰡔윤리학󰡕의 공리다)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신학정치론󰡕의 이론적 난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좋은 평주로는 Balibar 1997a 2장 참조.

4) 󰡔윤리학󰡕 4부 공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연 안에는 더 힘있고 강한 어떤 것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어떠한 독특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실재가 주어져 있을 때에는 이 실재가 그것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더 강한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

 

5) 반대로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면서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우연”일 뿐, 자연적 필연성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사람들이 서로의 동료가 되려고 하고 서로 연합하는 것을 기뻐하는지에 관한 원인들을 좀더 상세히 고찰해본다면, 이런 일은 본성에 의해by nature, 달리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연에 의해by chance 일어난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DC 1장 2절)

 

6) Macherey 2004, 10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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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12-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군요...! 논문 때문에 내년이나 되야 볼 수 있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너무 기쁩니다. 몇 가지 질문도 생기고 하는데, 아마 당분간 답해주시긴 어렵겠죠?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몇 자 써 볼까 합니다. 다만, 이 다음 글 각주 10에 나오는 두 번째 따옴표 "대중들"은 아마 "다중"을 잘못 쓰신 게 아닐까 싶네요.

선생님 논문 심사는 언제 하세요? 괜찮으시다면 구경 가고 싶은데(실은 하루라도 빨리 논문을 보고 싶어서요. ^^). 과방에 앉아 있을 때 조교형들이 이런 데 오라고 동원하면 어떻게든 도망가곤 했는데, 누가 오라고도 하지 않는 다른 과 논문 발표엔 가고 싶은 생각이 드니 좀 재밌네요. 오늘이 제일 춥다는데, 공부하시다가 몸 상하지 마시고 끝까지 건강 잘 챙기세요! 선생님의 논문이 나올 내년이 정말 기대되네요!

balmas 2004-12-23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 몇 군데는 좀 보충도 하고 내용도 바꾸어야 하는데, 당분간 그렇게 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일단 관심 있는 분들 참조하시라고 올렸습니다.

논문 심사 일정은 아직 좀더 두고 봐야 알 것 같군요.

어쨌든 아포리아님이 늘 이렇게 관심을 가져 주고 격려해 줘서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