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알튀세르를 공부해보려다가 좌절을 겪었군. ^-^

그레고리 엘리어트 책은 본 지가 꽤 오래 돼서 지금은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으니,

어쩌지? 그래도 이런 얘기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어트 책은 알튀세르의 여러 문헌들을 섭렵한

바탕 위에서 서술한 책이기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알튀세르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서 중 하나로 꼽히지.

하지만 이 책은 지난 1987년에 나왔고 (내 기억으로는 ... ;;;) 20대 후반의 젊은 연구자, 더욱이 철학자

라기보다는 역사학자로 볼 수 있는 연구자가 쓴 책이야.

1987년이라는 시간이 의미있는 것은, 그 때는 알튀세르가 부인을 살해한 뒤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

할 때였고 더욱이 알튀세르의 유고 같은 것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이지.

엘리어트의 책은, 사실 발리바르의 [계속 침묵하십시오, 알튀세르여!]라는 글(우리말로는, 아마

 [루이 알튀세르] 윤소영 옮김(민맥, 1991)에 번역, 수록되어 있는 것 같아)과 상당히 유사한 관점,

더욱이 발리바르의 글보다 좀더 외재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 글의 공통점은 알튀세르의 후기 작업을 초기 저작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작업, 더욱이 절망스러운

 해체 작업으로 본다는 데서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 오랫동안 긴밀하게 작업했

던 사람이기  때문에, 알튀세르 작업의 복합성과 다양한 면모를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 그래서 그 뒤에 쓴 몇 차례의 알튀세르에 대한 글에서는 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이 지니는 긍정

적이고 새로운 측면들에 좀더 주목하지. (가령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나 [철학의 대상: 절단

과 토픽] 같은 글들이 그렇지.)

이런 관점에 따르면 후기의 알튀세르는, 초기의 작업에 대한 절망적인 자기파괴를 수행한 사람이 아니

이전의 작업이 지닌 과학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측면을 좀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부단히 정정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지.

물론 발리바르가 보기에 알튀세르가 극복하지 못했던 한계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야. 가령 발리바

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 "국가 바깥의 정치" 라는 테제를 받아들이지 않지.

그대신 인권의 정치와 민족 형태라는 개념, 그리고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개념을 가지고 알튀세르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고 있던 한계, 다시 말하면 "이론적 무정부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어쨌든 사실 90년대 중반 이후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공개되면서 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이 어떤 맥락에

유래했는지 좀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후기의 알튀세르는 좀더

 광범위한 구도에 따라 초기 자신의 사상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개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지.

알튀세르가 말년에 말한 "불확실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 같은 것들은, 물론 지극히 개략

적이고 때로는 모호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자기 파괴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어트의 평가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1980년대 영미권에서 알튀

세르를 수용하던 한 가지 방식(그것도 상당히 우호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거야.


알튀세르에 관한 개설서는 엘리어트 정도를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또는 발리바르가 쓴 몇몇

 글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보다는 [마르크스를 위하여]나 [아미엥에서의 주장] 같은 것들을

읽어보면 어떨까? 알튀세르가 쓴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묶은 [마키아벨리의 고독] 같은 책을 한번 꼼

꼼히 읽어보는 것도 좋고. 알튀세르 작업의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자본을 읽자] 같은 책하고

유고로 나온 몇몇 중요한 글들을 읽어야 하는데, 지금은 좋은 번역서들이 없으니 일단 그나마 읽을 만

한(물론 좋은 번역이라는 뜻은 아니야) 위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알튀세르 저작은 하나도 번역을 못했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슐라르"가 겪

좌절감의 일부는 나한테도 책임이 있네. 이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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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님의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함께 하실 분들"

돌바람님, 오늘 대추리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충돌이 있을 것으로 알고 준비 단단히 하고 갔는데,

(사실 별 준비한 건 없지만 ... -_-a) 

아무 충돌 없이 너무 평온한 마을 풍경만 보고와서 좀 허탈했습니다.

물론 이건 오늘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모였기 때문이죠.

어쨌든 논갈이는 무사히 시작되었고 앞으로 며칠 계속 될 예정인 듯합니다.

내일 들어가실 때도 별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마을버스가 버스 시간표대로 잘 오지 않아서 좀 애를 먹었습니다.

안정리에 가는 20번 버스(이건 자주 다닙니다)를 타고 종점에 가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게(한 4천원 가량 나옵니다) 훨씬 더 빠를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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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3-18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온한 마을풍경, 이라니 맘 한편 편해지지만... 이런 일에는 결과에 연연하게 됩니다. ;;

balmas 2006-03-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결과라 하심은??

chika 2006-03-2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탑동 매립 반대에 목숨걸었었지만, 결국 매립되었고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약속이 있었지만 지금 그곳엔 상가와 호텔만 들어섰지요. 결과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은, 투쟁과 투쟁의 성과,에 맘 아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그런거지요.(벌써 회의주의자가 되어가는 소심한 시민 치카올림;;;;;)

balmas 2006-03-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뜻이었군요. 자기가 애쓴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누구나 낙담하기 쉽죠.
이번 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해봐야죠. 화이팅!!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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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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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3-0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실' 수가 있나요?
읽기도 쉽지 않은데요...(제 문제인가요 ^^;;)
무지 존경하는 마음으로 추천 날리고 갑니다~

balmas 2006-03-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키티님, 읽기가 쉽지 않으셨군요. ;;;
아무래도 생소한 내용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ㅠ-ㅠ)
정말 잘 아는 사람은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는 데, 음...
(어쨌든 추천은 고맙습니다. ^^;;)

2006-03-03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3-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주인장에게만 보이기로 말씀해주신 선생님,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 특히 [천 개의 고원]의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이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은 말이 안돼죠. 제 이야기는 들뢰즈/가타리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반오이디푸스]의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영향받은 일부 이론가들이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개체와 관계의 문제에 관해 애매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제 논문에서 지적하고 싶었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입니다.

나중에 따로 출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학위 논문을 많이 인쇄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원하는 분들에게 한 부씩 드리기가 어렵네요. 올해 안에 출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논문을 좀더 추가 인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언제쯤 서비스가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3월 안으로는 서비스가 될 것 같은데, 이전보다 좀더 저작권 보호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할 생각인 것 같더군요.
 

날짜를 보니 무영님이 방명록에 질문을 남긴 게 2월 2일인데, 거의 한 달이 다되어서 몇 줄 안되는

답변을 올리게 되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은 며칠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입장들] 불어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더 늦어지고 말았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없더니, 역시 도둑 맞은 편지처럼, 책은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ㅜ_ㅜ

(ㅎㅎㅎ 이게 변명이 되나요?)

어쨌든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질문하신 걸 보니까 상당히 꼼꼼하게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 대목을 읽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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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님의 질문


책을 읽다 궁금한 대목이 있어 여쭙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은 아닙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이라는 국역본 대담집 중 「함의」 부분 입니다.


1) 앙리 롱스가 차이(差移) 개념에 대해 데리다에게 묻는 대목인데요. 데리다는 차이(差移)가 경제 자체라고 말한 후,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이항 대립 …… 의 요소"(32)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이는 동일한 것과 구분됩니다)의 요소"(같은 쪽)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差移) 개념이 왜 '동일자'의 요소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동일한 것'과 구분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2)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가 차이(差移)를 유한하게 결정짓는 것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존재사유의 차이(差移) 은폐는 "예를 들어 수많은 '음성적' 비유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위나 늘 '진리의 실행'으로서의 예술로 연결되는 예술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인지"(34)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입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진리의 실행이 예술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로고스나 음성과의 …… 연계"(같은 쪽)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예술들은 '예술의 본질'인 시의 공간이나 '언어'와 '말'의 공간 속에 펼쳐진다는 사실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건축과 조각은 말하기와 명명하기의 통로 속에서만 일어나며 그에 의해 지배되며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낭독법(혹은 발성법)과 노래에 매우 고전적으로 부여된 탁월한 가치나 문학에 대한 경멸은 이런 식으로 설명됩니다. 하이데거는 "낭독법을 문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같은 쪽)


저는 이 말들이 재구성이 잘 안 되는데요. 우선 1)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들이 '말(=음성)'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고 보았다. 2) 이것은 시라는 문학예술 이외에 건축/조각예술의 경우―어쩌면 예술 일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요약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경멸"은 오히려 엉뚱하게 들리거든요. 그럼 시와 문학은 서로 다른 범주인 것인지, 아니면 문학에'만' 적용되었던 낭독법이라는 가치는 다른 예술들에까지 펼쳐놓아야 하기에 경멸스럽다는 건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문학에 대한 철학의 일반적인 경멸을 오히려 정당화해준다는 건지, 어쨌든 이해가 안 됩니다 T.T


3)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의 논의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앙리 롱스는 데리다의 해체론적 작업이 문학과 맺는 친화적인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학적' 실천"(35)이라는 말에서 '문학적'이라는 부분에 인용부호를 붙이며, "왜 문학적이란 말에 인용부호를 붙여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애매모호함을 여기서 제거해야 하는가를 이해"(같은 쪽)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문학적' 실천이란, 어떤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같은 쪽)합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은, 문맥으로 볼 때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적 예술관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예술론의 음성중심주의적 성격에 반대하는 '문학적' 실천이 가지는 함의란, 차이(差移)로서의 기록을 부각시키는 예술론을 지지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렇게 단순화시켜서만 말할 수밖에 없네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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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관한 답변


역자가 “동일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각각 “du même”와 “l'identique”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하이데거가 쓰는 두 개념에 상응하는 불어 단어들이죠. 하이데거는 “Selbigkeit"와 "Gleichheit 또는 Identität”를 구별하지요. 전자가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이라면(하이데거는 “나누어 놓으면서 묶음Zusammenhalten im Auseinanderhalten” 이라는 식으로 뜻을 풀이합니다), 이 후자는 차이와 대립하는 동일성을 가리키죠. 따라서 데리다는 하이데거 식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봐야겠죠.

 

다만 différance는 “동일성의 요소이기도 하다”고 말할 때 데리다는 “공통된 근원으로서”라고 한정을 하고 있죠. 이것은 différance가 이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그 이전에 이미 différance는 첫째로 “유예, 위임, 연기, 이송, 우회, 지연, 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2)에 관한 답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지만, 맥락은 이런 것 같습니다. 번역본에서 “낭독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불어로는 “diction”, 독어로는 “Dichitung”의 번역입니다. “Dichitung”은 원래 “시(詩)” 또는 “시작(詩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상에서 (특히 횔덜린의 시를 숙고하면서) 근원적인 사유를 “Dichtung”, 곧 “시작”과 동일시하지요. 시인들만이 주관과 객관의 구별에, 학문의 논리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세계 또는 존재의 근원적인 시원을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불어로 번역한다면 “poésie”가 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Dichitung”은 어원상 “diction”, 곧 “구술하다/말로 불러서 받아 적게 하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사실 하이데거 자신이 “Dichtung”과 “Diktat”를 결합해서 사용합니다. 시는 시인이 혼자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씌어진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권화는 음성에 대한 특권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문학”, 곧 “littérature” 또는 독어로는 “Literatur”는 어원상 “littera”, 곧 “문자”, “글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시”와 “문학” 또는 “Dichtung”과 “Literatur”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에는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보는 셈이죠.


(3)에 관한 답변


세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내용과 관련된 것이죠. 데리다는 “문학적”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쓰고 있고, 그 이유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한다고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와 형이상학의 역사의 연결, 양자의 연루는 반드시 하이데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좀더 넓은 맥락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우선 문학적인 것을 이른바 “belles lettres”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적인 것”을 시와 수사학, 미학 또는 비평이론 같이 순수한 또는 고급한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태도는 “belles lettres”야말로 좀더 고귀하고 본질적인 어떤 내용을 표현하거나 재현하고, 따라서 진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죠. 또는 시가 소설보다 아니면 소설이 시보다 좀더 본질적인 문학적 형태, 문학적 장르를 이룬다는 태도도 마찬가지겠죠.

 

  데리다가 (당대의 텔켈 그룹을 포함하여) 말라르메나 바타이유, 아르토 같은 전위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구분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령 황지우(나 오규원) 같은 시인들이 80년대 초에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자고 하면서, 이것과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구체적으로 신문의 “사람을 찾습니다”에 난 문안을 그대로 시로 옮겨적거나 글자의 크기를 달리 하거나 연의 배열을 파괴하는 등의 실험을 했던 적이 있죠. 이런 것들은 문학의 장르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규범과 규칙 속에 포함시키기 힘든 것들인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죠.

 

* 좋은 질문에 비하면 좀 부족한 답변인데, 혹시 추가 질문이 있으면 더 말씀해주세요.

이번에는 빨리 답변을 드릴게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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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2-2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넘 감사드립니다. 불어와 독어까지 덧붙여주시니까 확 들어오네요! ^-^
다음에 또 질문 거리 생기면 또 올릴께요. 너무 감사드려요~

balmas 2006-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o^

cplesas 2006-03-0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의>부분을 다시 읽다 보면서 자잘하게 놓쳤던 의문이 다시 한 둘 떠오릅니다.
우선 저번 질문의 연장선에서 첫번째 답변해주신 부분인데요,

1)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 그리고 차이와 대립되는 동일성이 구분되는 주장은, 왠지 하이데거의 책인 <동일성과 차이>에 담겨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서 더 힌트를 주신다면 어떤가요. 복잡하다면 제가 찾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

2) 3번의 답변에 대한 질문도 있는데, 이건 제가 생각을 조금 가다듬어 다시 여쭐께요;;

3) <함의>의 번역본 바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특히 대담자인 앙리 롱스가 <기록과 차이>의 각주에 있다고 하는 구절을 말하면서 이어지는 말라르메의 책(Livre)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까지가요;

4) 이건 좀 찾아보고 안 여쭤보려 했는데,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 또 나오는 듯 보여서, 그리고 제 무능력으로 인해 그냥 여쭙습니다. 앙리 롱스가 옐름슬레우의 '표현실질'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내용은 이해되는데 정작 표현실질과 기표/기의 관계란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각주를 봐도 잘 모르겠네요;;

balmas 2006-03-0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에 대한 답변

예,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를 보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이 나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구별이 아니니까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3)에 대한 답변

롱스는 “문제점을 이동시켜놓는 작업은 틀림없이 어떤 체계를 이룬다.”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은 당시에 데리다가 출간한 세 권의 책, 곧 󰡔목소리와 현상󰡕, 󰡔기록과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 세 권의 책은 서로 상이한 주제, 상이한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것”, 또는 좀더 불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하나의 질문을 계속 전위(轉位)시키는 것”(ce qui reste le déplacement d'une ques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게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들은 물론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이동으로서 그리고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작업으로서 이러한 체계는 자신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불확정적인 수단을 향해 어딘가에서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라고 답변하지요. 또는 약간 고쳐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겠죠. “그것들은 분명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전위로서, 그리고 하나의 질문의 전위로서 이러한 체계는 이 체계를 작동시키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을 향해 어떤 부분이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un certain système ouvert quelque part à quelque ressource indécidable qui lui donne son jeu).”


곧 데리다의 답변의 요점은, 세 권의 책이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체계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에 의해 작동되는 체계이고, 따라서 이 원천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체계, 말하자면 자신의 타자 또는 자신의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체계라는 뜻입니다.


4)에 대한 답변

음, 이 질문은 사실은 대답하기가 좀 곤란한데요. 옐름슬레우의 이론을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 ;;;

그리고 저같은 문외한이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알기 쉽고 명쾌하게 해설해놓은 글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인철 교수가 쓴 글들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박인철, [옐름슬레우], 김치수, 박인철 외, 󰡔현대 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박인철, 󰡔파리 학파의 기호학󰡕 민음사, 2003 중, 1장 2절, 63-99쪽.

(참고로 책값은 위의 책이 훨씬 싸고, 내용 설명은 아래의 책이 좀더 간명합니다. ^^)




cplesas 2006-03-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번역하신 대목들은 왜 이렇게, 좋죠?;;;
 

좋다!

 

 

Marie-Louise Mallet, Ginette Michaud ed, Jacques Derrida , Herne (7 octobre 2004)

Collection : Les Cahiers de l'Herne
Format : Broche- 628 pages
ISBN : 2851970984
Dimensions (en cm) : 21 x 3 x 27

이 책은 Herne 출판사에서 내는 Cahiers de l'Herne[카이에 드 레른느]라는 총서 중 

한 권이다. 매 권마다 유명한 작가나 철학자, 사상가 한 사람을 골라서 그에 대한

글들과 그 사람의 미발표 글들을 함께 묶어서 내는 책이다.

횔덜린이나 랭보, 프랑시스 퐁주, 베케트,예이츠, 브레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작가들도 있고,

 시몬 볼리바르나 마오처퉁 같은 정치가도 있고,

쇼펜하우어나 레비-스트로스, 리쾨르 같은 철학자들도 있다. 데리다는 83번째 주제인 셈이다.

 

값은 50 유로 ...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하면 약 6만원. 5유로 할인을 했으니까, 약 5만 5천원 정도.

그런데 판형도 크고 좋은 글들이 아주~ 많다.

데리다 지인들이 데리다에 대해 쓴 짧은 회고담이 한 10여편 되고,

데리다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들이 쓴 논문들이 한 40여편(발리바르의 글도 한 편 있구나)

미발표된 데리다의 원고가 한 6편 정도 ...

이 정도면 본전을 뽑고도 남을 만하다.

책 판형이 크고(보통 책 두 배쯤 되네) 분량도 많은 편이니까 양적으로도 그렇고.

어느 것부터 읽어볼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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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24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피면, 페이지가 줄줄줄 흐르는거 아니에요?

balmas 2006-01-24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듯 ...
하지만 아니올시다. 이번 책은 실로 단디 묶었음.

balmas 2006-01-24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표지를 들여다봤더니,
사진을 너무 실물감 있게 찍어서, 깜딱 놀랐음 ...

아영엄마 2006-01-24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저는 처음에 그림보고 발마스님이 담배파이프 사신 줄 알았슴다..^^;;

balmas 2006-01-24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담배 파이프 ...

Kitty 2006-01-24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교양이 줄줄줄 ^^;;
오늘도 늦게 주무시는군요~ 반가워요~!

하이드 2006-01-2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키티님, 반가워요~! 키티님 스토커 하이드!

balmas 2006-01-24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두 분의 극적인 상봉을 보니 눈물이 ... ^^;
키티님/ 오, 대단한 통찰력. 데리다 얼굴에서 교양이 줄줄 흐르는 게 보이삼? ^^
저는 오늘은 아직 두어 시간 더 있다가 잘 것 같음~~

비로그인 2006-01-2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서는 주로 어디에서 사세요? 아마존? JPC?

숨은아이 2006-01-2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아자씨가 저렇게 생기셨군요. *,*

balmas 2006-01-24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아마존에서 주로 사지요. 제일 편리하고 사고도 거의 없고 하니까
아무래도 제일 애용하게 되더라구요.
숨은아이님/ 예, 저렇게 생겼답니다. 말년의 사진 ...

둥가 2006-01-2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번역하실 계획은? ^^ 아 글구 이번에 목소리와 현상이 재번역되서 출판되었는데 믿을만한 번역본인지요. 글구 앞으로의 출판 계획은 어떤지 물어도 될까요? 글구 연대 대학원 스피노자 강의안이 빨리 보고 싶네요. 미리 예습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이런........ 이것저것 마구 요청해서 죄송함다~~

balmas 2006-01-26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을 번역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ㅎㅎ 왜냐하면 분량이 너무 많은 데다가 데리다 저서도 아니기 때문이죠. 데리다 글들 중에서 한 두어 편은 나중에 선집으로 묶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출판 계획은 뭐, 일단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를 1학기 안에 내는 게 목표지요. 그리고 2학기 중에는 리오타르의 [Differend]를 내고, 그 이외에 공동 논문집 한 권 정도 내는 게 현재로서는 목표라면 목표겠지요.
스피노자 강의안은 지난 번에 올린 것과 비슷한데, 다음 주쯤 올리긴 올려야겠네요. :-)
[목소리와 현상]이 나왔군요. 제가 아는 후배가 번역한 건데,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읽을 만한 번역본일 것 같군요. 원래 후설을
공부한 친구인데, 석사 논문을 [목소리와 현상]을 주제로 썼거든요. 저도
한권 사봐야겠네요.

yoonta 2006-01-27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에티카라도 좀 재번역해주시면 안될까요..강영계교수님 번역은 읽기가 넘 힘들어요..오역도 종종 있는거 같공..

balmas 2006-01-27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yoonta님, "[에티카]라도"라뇨?
[윤리학] 번역은 정말 작심하고 달려들어야 겨우 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요.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윤리학]을 번역하고 싶은 마음이야
다 가지고 있겠지만, 쉽게 생각하고 할 일은 아니니까 선뜻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언젠가 하긴 해야 할 일인 건 분명합니다.

비로그인 2006-01-2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오타르의 Differend 을 번역하신다구요 @@ 근데 이 책 제목이 "분쟁" 인가요 "차이" 인가요?

balmas 2006-01-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ifferend]은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죠. 차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분쟁이 좀더
가깝기는 하겠지만, 글쎄요, 그게 좋은 번역어일지는 ...

2006-02-01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