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보니 무영님이 방명록에 질문을 남긴 게 2월 2일인데, 거의 한 달이 다되어서 몇 줄 안되는

답변을 올리게 되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은 며칠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입장들] 불어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만 더 늦어지고 말았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도 없더니, 역시 도둑 맞은 편지처럼, 책은 가까운 곳에 있더군요. ㅜ_ㅜ

(ㅎㅎㅎ 이게 변명이 되나요?)

어쨌든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질문하신 걸 보니까 상당히 꼼꼼하게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 대목을 읽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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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님의 질문


책을 읽다 궁금한 대목이 있어 여쭙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은 아닙니다. 데리다의 『입장들』이라는 국역본 대담집 중 「함의」 부분 입니다.


1) 앙리 롱스가 차이(差移) 개념에 대해 데리다에게 묻는 대목인데요. 데리다는 차이(差移)가 경제 자체라고 말한 후,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이항 대립 …… 의 요소"(32)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이는 동일한 것과 구분됩니다)의 요소"(같은 쪽)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差移) 개념이 왜 '동일자'의 요소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동일한 것'과 구분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2)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가 차이(差移)를 유한하게 결정짓는 것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존재사유의 차이(差移) 은폐는 "예를 들어 수많은 '음성적' 비유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우위나 늘 '진리의 실행'으로서의 예술로 연결되는 예술에 대한 성찰 속에서 인지"(34)된다는 것이 데리다의 생각입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진리의 실행이 예술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로고스나 음성과의 …… 연계"(같은 쪽)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데리다는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모든 예술들은 '예술의 본질'인 시의 공간이나 '언어'와 '말'의 공간 속에 펼쳐진다는 사실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건축과 조각은 말하기와 명명하기의 통로 속에서만 일어나며 그에 의해 지배되며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낭독법(혹은 발성법)과 노래에 매우 고전적으로 부여된 탁월한 가치나 문학에 대한 경멸은 이런 식으로 설명됩니다. 하이데거는 "낭독법을 문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같은 쪽)


저는 이 말들이 재구성이 잘 안 되는데요. 우선 1) 하이데거는 모든 예술들이 '말(=음성)'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고 보았다. 2) 이것은 시라는 문학예술 이외에 건축/조각예술의 경우―어쩌면 예술 일반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요약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학에 대한 경멸"은 오히려 엉뚱하게 들리거든요. 그럼 시와 문학은 서로 다른 범주인 것인지, 아니면 문학에'만' 적용되었던 낭독법이라는 가치는 다른 예술들에까지 펼쳐놓아야 하기에 경멸스럽다는 건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가 문학에 대한 철학의 일반적인 경멸을 오히려 정당화해준다는 건지, 어쨌든 이해가 안 됩니다 T.T


3)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음의 논의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앙리 롱스는 데리다의 해체론적 작업이 문학과 맺는 친화적인 관계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문학적' 실천"(35)이라는 말에서 '문학적'이라는 부분에 인용부호를 붙이며, "왜 문학적이란 말에 인용부호를 붙여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떤 애매모호함을 여기서 제거해야 하는가를 이해"(같은 쪽)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하는 '문학적' 실천이란, 어떤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같은 쪽)합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은, 문맥으로 볼 때 대표적으로 하이데거적 예술관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이러한 예술론의 음성중심주의적 성격에 반대하는 '문학적' 실천이 가지는 함의란, 차이(差移)로서의 기록을 부각시키는 예술론을 지지한다는 말인가요? 저는 이렇게 단순화시켜서만 말할 수밖에 없네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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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관한 답변


역자가 “동일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각각 “du même”와 “l'identique”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하이데거가 쓰는 두 개념에 상응하는 불어 단어들이죠. 하이데거는 “Selbigkeit"와 "Gleichheit 또는 Identität”를 구별하지요. 전자가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이라면(하이데거는 “나누어 놓으면서 묶음Zusammenhalten im Auseinanderhalten” 이라는 식으로 뜻을 풀이합니다), 이 후자는 차이와 대립하는 동일성을 가리키죠. 따라서 데리다는 하이데거 식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한다고 봐야겠죠.

 

다만 différance는 “동일성의 요소이기도 하다”고 말할 때 데리다는 “공통된 근원으로서”라고 한정을 하고 있죠. 이것은 différance가 이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데리다는 그 이전에 이미 différance는 첫째로 “유예, 위임, 연기, 이송, 우회, 지연, 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2)에 관한 답변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지만, 맥락은 이런 것 같습니다. 번역본에서 “낭독법”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불어로는 “diction”, 독어로는 “Dichitung”의 번역입니다. “Dichitung”은 원래 “시(詩)” 또는 “시작(詩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상에서 (특히 횔덜린의 시를 숙고하면서) 근원적인 사유를 “Dichtung”, 곧 “시작”과 동일시하지요. 시인들만이 주관과 객관의 구별에, 학문의 논리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세계 또는 존재의 근원적인 시원을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불어로 번역한다면 “poésie”가 됩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Dichitung”은 어원상 “diction”, 곧 “구술하다/말로 불러서 받아 적게 하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사실 하이데거 자신이 “Dichtung”과 “Diktat”를 결합해서 사용합니다. 시는 시인이 혼자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씌어진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시작에 대한 하이데거의 특권화는 음성에 대한 특권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문학”, 곧 “littérature” 또는 독어로는 “Literatur”는 어원상 “littera”, 곧 “문자”, “글자”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시”와 “문학” 또는 “Dichtung”과 “Literatur”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하이데거의 관점에는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보는 셈이죠.


(3)에 관한 답변


세 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내용과 관련된 것이죠. 데리다는 “문학적”이라는 말에 따옴표를 쓰고 있고, 그 이유를 "이러한 새로운 실천은 문학예술의 역사를 형이상학의 역사에 연결시켰던 것과의 어떤 단절을 가정"한다고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학예술의 역사와 형이상학의 역사의 연결, 양자의 연루는 반드시 하이데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고, 그보다 좀더 넓은 맥락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우선 문학적인 것을 이른바 “belles lettres”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문학적인 것”을 시와 수사학, 미학 또는 비평이론 같이 순수한 또는 고급한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태도는 “belles lettres”야말로 좀더 고귀하고 본질적인 어떤 내용을 표현하거나 재현하고, 따라서 진리에 좀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죠. 또는 시가 소설보다 아니면 소설이 시보다 좀더 본질적인 문학적 형태, 문학적 장르를 이룬다는 태도도 마찬가지겠죠.

 

  데리다가 (당대의 텔켈 그룹을 포함하여) 말라르메나 바타이유, 아르토 같은 전위 문학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구분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령 황지우(나 오규원) 같은 시인들이 80년대 초에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서 출발하자고 하면서, 이것과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죠. 그리고 구체적으로 신문의 “사람을 찾습니다”에 난 문안을 그대로 시로 옮겨적거나 글자의 크기를 달리 하거나 연의 배열을 파괴하는 등의 실험을 했던 적이 있죠. 이런 것들은 문학의 장르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적인 규범과 규칙 속에 포함시키기 힘든 것들인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않는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죠.

 

* 좋은 질문에 비하면 좀 부족한 답변인데, 혹시 추가 질문이 있으면 더 말씀해주세요.

이번에는 빨리 답변을 드릴게요.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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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lesas 2006-02-28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넘 감사드립니다. 불어와 독어까지 덧붙여주시니까 확 들어오네요! ^-^
다음에 또 질문 거리 생기면 또 올릴께요. 너무 감사드려요~

balmas 2006-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o^

cplesas 2006-03-02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의>부분을 다시 읽다 보면서 자잘하게 놓쳤던 의문이 다시 한 둘 떠오릅니다.
우선 저번 질문의 연장선에서 첫번째 답변해주신 부분인데요,

1)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동일성 그리고 차이와 대립되는 동일성이 구분되는 주장은, 왠지 하이데거의 책인 <동일성과 차이>에 담겨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해서 더 힌트를 주신다면 어떤가요. 복잡하다면 제가 찾아서 책을 읽겠습니다. ^^

2) 3번의 답변에 대한 질문도 있는데, 이건 제가 생각을 조금 가다듬어 다시 여쭐께요;;

3) <함의>의 번역본 바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절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특히 대담자인 앙리 롱스가 <기록과 차이>의 각주에 있다고 하는 구절을 말하면서 이어지는 말라르메의 책(Livre)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까지가요;

4) 이건 좀 찾아보고 안 여쭤보려 했는데,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 또 나오는 듯 보여서, 그리고 제 무능력으로 인해 그냥 여쭙습니다. 앙리 롱스가 옐름슬레우의 '표현실질'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내용은 이해되는데 정작 표현실질과 기표/기의 관계란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각주를 봐도 잘 모르겠네요;;

balmas 2006-03-0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에 대한 답변

예,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를 보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이 나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구별이 아니니까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3)에 대한 답변

롱스는 “문제점을 이동시켜놓는 작업은 틀림없이 어떤 체계를 이룬다.”는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은 당시에 데리다가 출간한 세 권의 책, 곧 󰡔목소리와 현상󰡕, 󰡔기록과 차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이 세 권의 책은 서로 상이한 주제, 상이한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것”, 또는 좀더 불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하나의 질문을 계속 전위(轉位)시키는 것”(ce qui reste le déplacement d'une ques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게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그것들은 물론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이동으로서 그리고 문제점을 이동시키는 작업으로서 이러한 체계는 자신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불확정적인 수단을 향해 어딘가에서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라고 답변하지요. 또는 약간 고쳐서 번역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겠죠. “그것들은 분명 어떤 체계를 이루지만, 전위로서, 그리고 하나의 질문의 전위로서 이러한 체계는 이 체계를 작동시키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을 향해 어떤 부분이 열려 있는 체계입니다(un certain système ouvert quelque part à quelque ressource indécidable qui lui donne son jeu).”


곧 데리다의 답변의 요점은, 세 권의 책이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체계는 어떤 결정 불가능한 원천에 의해 작동되는 체계이고, 따라서 이 원천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체계, 말하자면 자신의 타자 또는 자신의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는 체계라는 뜻입니다.


4)에 대한 답변

음, 이 질문은 사실은 대답하기가 좀 곤란한데요. 옐름슬레우의 이론을 설명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 ;;;

그리고 저같은 문외한이 어쭙잖게 설명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알기 쉽고 명쾌하게 해설해놓은 글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박인철 교수가 쓴 글들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박인철, [옐름슬레우], 김치수, 박인철 외, 󰡔현대 기호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박인철, 󰡔파리 학파의 기호학󰡕 민음사, 2003 중, 1장 2절, 63-99쪽.

(참고로 책값은 위의 책이 훨씬 싸고, 내용 설명은 아래의 책이 좀더 간명합니다. ^^)




cplesas 2006-03-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감사합니다. ^^ 그런데 선생님이 다시 번역하신 대목들은 왜 이렇게,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