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알튀세르를 공부해보려다가 좌절을 겪었군. ^-^

그레고리 엘리어트 책은 본 지가 꽤 오래 돼서 지금은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이 나지 않으니,

어쩌지? 그래도 이런 얘기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어트 책은 알튀세르의 여러 문헌들을 섭렵한

바탕 위에서 서술한 책이기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알튀세르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서 중 하나로 꼽히지.

하지만 이 책은 지난 1987년에 나왔고 (내 기억으로는 ... ;;;) 20대 후반의 젊은 연구자, 더욱이 철학자

라기보다는 역사학자로 볼 수 있는 연구자가 쓴 책이야.

1987년이라는 시간이 의미있는 것은, 그 때는 알튀세르가 부인을 살해한 뒤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

할 때였고 더욱이 알튀세르의 유고 같은 것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이지.

엘리어트의 책은, 사실 발리바르의 [계속 침묵하십시오, 알튀세르여!]라는 글(우리말로는, 아마

 [루이 알튀세르] 윤소영 옮김(민맥, 1991)에 번역, 수록되어 있는 것 같아)과 상당히 유사한 관점,

더욱이 발리바르의 글보다 좀더 외재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 글의 공통점은 알튀세르의 후기 작업을 초기 저작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작업, 더욱이 절망스러운

 해체 작업으로 본다는 데서 찾을 수 있어. 하지만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 오랫동안 긴밀하게 작업했

던 사람이기  때문에, 알튀세르 작업의 복합성과 다양한 면모를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 그래서 그 뒤에 쓴 몇 차례의 알튀세르에 대한 글에서는 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이 지니는 긍정

적이고 새로운 측면들에 좀더 주목하지. (가령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나 [철학의 대상: 절단

과 토픽] 같은 글들이 그렇지.)

이런 관점에 따르면 후기의 알튀세르는, 초기의 작업에 대한 절망적인 자기파괴를 수행한 사람이 아니

이전의 작업이 지닌 과학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측면을 좀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부단히 정정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지.

물론 발리바르가 보기에 알튀세르가 극복하지 못했던 한계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야. 가령 발리바

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 = "국가 바깥의 정치" 라는 테제를 받아들이지 않지.

그대신 인권의 정치와 민족 형태라는 개념, 그리고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개념을 가지고 알튀세르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공유하고 있던 한계, 다시 말하면 "이론적 무정부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어쨌든 사실 90년대 중반 이후 알튀세르의 유고들이 공개되면서 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이 어떤 맥락에

유래했는지 좀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후기의 알튀세르는 좀더

 광범위한 구도에 따라 초기 자신의 사상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개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지.

알튀세르가 말년에 말한 "불확실성의 유물론"이나 "마주침의 유물론" 같은 것들은, 물론 지극히 개략

적이고 때로는 모호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자기 파괴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어트의 평가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1980년대 영미권에서 알튀

세르를 수용하던 한 가지 방식(그것도 상당히 우호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거야.


알튀세르에 관한 개설서는 엘리어트 정도를 읽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또는 발리바르가 쓴 몇몇

 글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보다는 [마르크스를 위하여]나 [아미엥에서의 주장] 같은 것들을

읽어보면 어떨까? 알튀세르가 쓴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묶은 [마키아벨리의 고독] 같은 책을 한번 꼼

꼼히 읽어보는 것도 좋고. 알튀세르 작업의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자본을 읽자] 같은 책하고

유고로 나온 몇몇 중요한 글들을 읽어야 하는데, 지금은 좋은 번역서들이 없으니 일단 그나마 읽을 만

한(물론 좋은 번역이라는 뜻은 아니야) 위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까 그동안 알튀세르 저작은 하나도 번역을 못했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슐라르"가 겪

좌절감의 일부는 나한테도 책임이 있네. 이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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