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1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까닭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詩2 헐리우드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거짓을 사 주는 장터로 간다.
희망을 품고
나는 장사꾼들 사이에 끼어든다.

詩3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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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집권 이후 15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동베를린에 정착, 그러나 인민을 탄압하는 폭압 정부에 또다시 절망해야 했던 시인, 한마디로 말해 광기의 시대를 살다 간 불행한 시인.
오래 전에 읽었던 브레이트, 그의 시 세 편을 추려 보았습니다.

한마디1) 주장이, 견해가 틀리면 여지없이 아갈잡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승리가, 생존이 때로 치욕이 될 수 있음을 슬픔이 될 수도 있음을,
그들은 필시 죽었다 깨 나도 모를 테지요.

한마디2) 거짓도 자꾸 하면 는다고 했지요. 늘다 보면 어느 게 참이고 거짓인지
분간못하게 된다고 하지요. 굳이 거짓으로 분장하지 않아도 따스한
국밥 대 놓고 먹을 수 있다면 이 무거운 <철면피> 벗어놓을 텐데요.

한마디3) 나는 하루하루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몸을 내 몸에
수육(受肉)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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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4-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詩 1,
엔도우슈사꾸의 '침묵'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가 일본에 처음 전래될 때의 얘기입니다.
신자를 살리기 위해 답교(예수의 성화를 발로 밟음)한 신부로 인해 목숨을 보전한 신자들에게, 왜 당신은 우리가 순교하지 뫃하도록 했느냐 죽음 보다 강한 원성을 듣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아, 두 번 죽은 신부님....

詩 2,
옳은 장사꾼이 못되어
늘 이렇게 헤매는 어설픈 몸짓이라니

詩 3,
눈물겹다
산다는 건 모르고 지나다 어느날 문득 그리움으로 점점 깊어져 가는 것이 아닐지...


프레이야 2004-03-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레이트의 시못지않은 님의 감수성에 덩달아 눈물짓고 갑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반칠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더러 다른 신문에서도 아침마다 詩 한 편 감상하는 난이 있었지만 동아일보의 시 소개는 그 해설이 주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의 묘미가 두고 두고 기억에 남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함께 묶어져 나온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 반칠환이란 시인은 잘 몰랐지만 시 작품 선별에서 아침 시단을 맡고 있는 시 선정자로서의 고민과 노고가 함께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걸 대번에 간파해 낼 수 있었다.

특히 약력을 보고 알았지만'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에다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선정'을 받은 데다 최근 서라벌 문학상 수상의 이력이 이 시인의 외적인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칠환시인의 이번 아침詩 해설을 묶은 책자는 기왕 나온 잘 알려진 기존의 시들은 많이 배제된 가운데 작품 위주로 선별한 점이 많이 돋보인다. 게중에는 시에 많은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도 생소할(? 나만 생소한지도...) 이름모르던 시인이 꽤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작품성은 뛰어나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이란 책자는 반칠환 시인의 해설이 여타의 시 해설서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낼 만큼 뛰어나 보인다.

그것은 반시인의 고향이 시골(충청도?)인  점에도 힘입었겠지만 뛰어난 언어 구사와 적재적소에서 구사되는 사투리와 속담이나 명언들이 해설의 대상인 詩를 뛰어 넘어 경우에 따라선 시보다 낫기도 하다. 아니 조금 더 확대 해석하면 시를 질료로 해서 쓴 한 편의 뛰어난 꽁트거나 서사시의 구조와 얼개를 갖는 보고서 형식을 띠기도 한다.

시치미 뚝 떼고 괴발개발 풀어놓는 우리네 삶의 잊혀진 부분을 끄집어내는가 하면 일면 살아가는 일의 절실함과 간난의 세월을 서늘하게 들춰내 보이기도 하고 추억이 있고 그리움과 사랑과 안타까움이 두루뭉수리 되어 질펀하게 펼쳐 놓은 시의 향연에 기꺼이 동참해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던가.

63명의 빛나는 시편들을 읽으며, 아니 시보다 더한 위안과 가슴 뜨겁고도 훈훈한 해설의 절창! 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도식화되고 모범답안 같은 쉬 식상해버릴 듯한 해설이 아니라서 혹 어렵다고 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하고 매번 읽을 때마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詩보다는 그 해설에 무릎을 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는 끝끝내 시 보다도 뛰어나던 반칠환 시인의 시를 풀어가는 깊이와 안목에 박수를 보내며 이런 제 2, 제 3의 해설서가 거듭되기를  빈다.

어쩌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을 마주하여 그 앞에 선 이름모를 독자  그대에게 진정 복 있을진저.

*참고로 반칠환 시인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을 보면 어머니 얘기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시편들이 알싸한 아픔을 동반하면서도 훈훈한 감동의 무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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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7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가 어쩌면 시보다 더 진실되게 보이네요. 이 시집 꼭 보고 싶어집니다.
 

남들 다들 은퇴한다는 55세에 책상 두 개, 전화기 세 대 달랑 들고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한 사람. 화장품공업협회 회장을 세 번째 맡고 있는 일흔살 청년. 1988년 창업해 10년 만에 매출액 기준 장업계 3위로 도약, 국내 130여개 화장품제조업체와 수입업체 500여개가 난립한 가운데서도 마침내 우뚝선 당신와의 만남은 즐거웠다.

"회장님, 이 향유병 옆에 있는 향통류는 아무래도 우리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어떻게 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좀 낯설어 보이기는 한데..."
"회장님 박가분 나오던 시절에 여기 이 설화분이 나왔더라구요. 당시의 사용설명선데...."
"아모레가 이거 보고 만들었을 수도 있겠군..."
"이 조선경대는 장석을 절대로 닦지 마세요. 그리고 이 흉배는 빛 받으면 변색될 수도 있겠는데...그리고 연적은 4센티 이하라야 화장용구로 치더라구...이거 분접시에 물따루던 분물연적이 맞아요...."
"회장님은 화장용구 수집하시는데 반대는 없으셨습니까. 이거 집사람 눈치가 보여서....."
"다 그래요. 30만원 주고 사서는 10만원 줬다 그러고...마누라 몰래 사고는....때로 보너스 홀랑 털어서 사고..."

한시간 반 넘게 당신과 나눈 얘기를 어찌 다 옮길 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진작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엔 조금쯤 물기 배인 아련함이 묻어있다.

한 가지.
라미화장품 사장에서 박카스병을 만들던 유리공장 사장으로 좌천되어 한가한(?) 세월을 보내던 당신은 어느날 문득 월급장이 사장의 길을 박차고 창업을 하게 된다.
아마 퇴직금만으로는 턱없이 자금이 부족했을 터였다.
20수년 동아제약 사원시절부터 모아온 옛 화장용구는 친하게 지내던 화장품업계 오너 사장에게 양도되고, 그 오너 사장의 회사 직원이었던 필자는 본사 사옥의 화장품박물관을 보며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맛보았던가.

그러나 세상일이란 때로 얼마나 덧없고, 그 얽히고 설킨 인연의 굴레 또한 얼마나 깊고 끈끈한 것이랴!
퇴사하고 5년도 안되 필자가 다녔던 회사는 법정관리 기업이 되고, 다시 그 옛 화장용구는 그동안 많이 보태어져 코리아나에 되팔리고....아마 당신께서는 크게 두 번 울었으리...

아, 내가 십년을 넘게 모셨던 옛 회사 사장님이 어느날 술자리에서 하시던 말씀이라니.....
"박가분 만들던 두산의 손자 박O가 내 친군데 나한테 박가분 하나 돌라는 거라...그래서 내가 그랳지 이 사람아 니가 일억을 줘봐라. 내가 주는가..."
옛 회사의 사장님께서 박가분을 사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목포 다 쓰러져 가는 골동품 가게까지 치달려간 무용담(?)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또 한가지.
89년 매출액 14억원을 시작으로 99년 매출액이 3,000억원을 넘기면서 입사 초기부터 코리아나와 함께한 영업본부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 발전해가건만 코리아나 화장품을 만들던 부자재 업체는 조금도 변신의 몸부림을 꾀할줄 모른 채 무사안일하고 구태의연해 보였던 모양이다.
"회장님 부자재업체 몇 군데는 이 번에 바꾸어야 겠습니다."
"........"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시던 당신은 마침내 무겁게 입을 떼셨다.
"O군, 내가 동아제약부터 라피네 사장으로 있을 때까지 100군데가 넘는 부자재 업체와 인연을 맺었었는데....코리아나 창업하고 물건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모두가 바쁘다고 했는데...지금 그 사람들 열 군데도 안되는 업체가 그래도 날 보고 도와줬는데....자네라면 어쩌겠나...."
아마 그때부터 당신께서는 화장품박람회나 해외전시회때 부자재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독려하게된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도 8년간 박가분 인테리어를 맡아온 정사장을 데리고 프랑스 100주년 기념전시회에 참여한 랑콤이나 샤넬,부르조아,쟌피오베르...... 매장을 보여주러 삼성동 아셈전시장으로, 명동의 토다코사로 끌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는 해외에서 찍어온 화장품 매장의 사진을 즐겨 보여주지 않았던가.

"회장님, 박물관 짓는 일은 잘 되어 가는지요..."
"내년에는 개관을 해야 되는데...아직 더 보충할 것도 있고....
그런데 동호인을 만나서 즐거운데.....오늘 동호인을 만나서 참 즐거운데....."

이제 일흔이 되신 송파 유상옥회장님.
화장품업계 까마득한 말석의 필자도 감히 동호인을 만나 얼마나 즐겁던지....
먼 후일 박가분이 해야될 사회적 공헌 가운데 한가지가 문화적 공헌이라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박가분 수성점의 옛 화장용구전시관을 보시고 격려해 주신 고마움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하랴.
아, 그리고 55세에 코리아나를 창업해 화장품업계 살아있는 신화를 일군 당신을 생각하면, 외람되지만 나는 얼마나 더 큰 가능성의 시간을 예비해두고 있는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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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을 찾습니다

<다름이 안이라 저는 L.A에 살고있는 노인임니다. 전번에 전화로 대충 얘기는 햇음니다. 다름이 안이라 지금부터 엔날로 도라가 내가 정신여고 단닐 때 얘김니다.
정신여고 뒨문앞에 커다란 개와집에는 朴家粉이라는 간반이 부터잇엇죠.
그리고 저이 어머니가 朴家粉을 바르시는거슬 밧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는 화장품선전책(2000년 드봉 10월호)에서 朴家粉에 대해 나와잇기에 보고너무 방가왓음니다.
日本사람덜 앞에서 덧덧하게 팔든 화장품 소박한 우리나라 성을 내걸고 발든화장품 생각이만이 나서 아주방갑숩니다.
L.A 그리고 온 世界에 朴家粉이 선전대고 번창하기를 바람니다. 이 편질럴 바드시고 社長님이 우수실거애요. 朴家粉 잘대나가길 바람니다. 그럼 안영희기십시오.

大韓民國 대구市 수성구 마촌 1洞 639 20 
株 朴家粉社長님
KOREA

아마 11월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DeBON ShOP Story에 대구 "박가분"이라고 소개된 책자가 미국까지 가게된 모양입니다. 부장님이 시외전화를 받았는데 팔십된 할머니가 박가분 사진을 보니까 그렇게 반갑더라면서 미주알고주알 한시간 가까이 박가분 바르던 어머니 얘기며 우리나라 살때 정신고녀 다니던 시절의 한바탕 질펀한 그리움을 쏟아 놓았던 모양입니다.

월말인데 거래처에 수금도 해드려야 되고 할 일도 많았건만, 차마 절절한 그리움으로 엮어내는 할머니의 추억을 쉬 깨트릴 수 없어 한동안 맞장구 치고 애써 박가분이 팔리던 시절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던 게지요.

그런데 바다 건너 이민간 타국 땅에서 못내 그리운 그 무엇 있어 이렇게 비뚤비뚤 철자법이 틀리고 엉성한 사연을 일면식도 없는 대구에까지 보내는 건지요.

또 한 번은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제품교육 때문에 동성로점 문을 12시 반경에 연 9월의 어느날 일입니다.

대명동에 사신다는 주부 한 분이 문을 안열어 밖에서 두시간 동안 기다렸다면서 박가분 하나 돌라고 하더군요. 죄송하다면서 수요일 마다 교육 때문에 문을 늦게 연다는 안내문을 깜박 잊고 못붙인 모양이라면서 들어본 사연인즉 이랬습니다.

봉화에 사신다는 친정 어머니가 약전골목 입구에 가면 박가분 파는 데가 있으니까 사서 하나 소포로 부치라고 했다더군요.

"문 늦게 열어 죄송한데요. 박가분이 옛날 일제시대때 나오던 분인데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지 63년이나 되었는데요."
"어, 우리 어머니가 예전에 쓰셨다던데..... 여기가면 있을거라고.... 이거 어쩌죠 왜 감실에 위패모실 때 지방쓰는데....... 우리 집이 종손이라서 왜 조선종이 있잖아요? 박가분 그 덩거(어)리분 종이에 발라 붓글씨 쓰면 벌레 안먹는다면서..... 중동에 사는 우리 이모님도 여기가면 있다던데........"
"약전골목에 어른들 한약지으러 오시다가 박가분 간판을 보셨던 모양이지요?"
"이모님 연세가 지금 여든인데 우리 친정 어머니는 아흔이시거든요. 예전에 쓰셨다던데....
덩어리로 되가지고 가루 내어 썼던 모양이던데..... 지방 쓰는 거 하나도 허투루 않거든요...."

망연자실 난처해 하던 그 주부님은 결국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박가분을 찾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6년전 시지점 문을 열 때도 할머님 두 분이 어쩌면 얼굴에 홍조조차 띤 채 조심스레 그러더군요.

"정말 박가분 파는교? 울 엄마 쓰던 모습을 봤는데....."
"지금은 안나오거든요. 여기 사진 한 번 보실래요?"
"그래.보래이. 맞다 맞아 진짜 박가분이데이....."

화장문화사에 게재된 사진자료를 보곤 생각했었습니다.
어쩌면 삼단 같은 머리를 창포물에 감고, 다시 동백기름을 바르고, 녹두물에 세수하고, 얼굴에는 꿀을 섞어 찧은 팩을 하고, 박가분도 살짝 바르고, 홍화 연지로 단장한 그리운 얼굴이 당장에라도 나타날 듯 했습니다.


공고합니다.
"속지말자 조명발, 다시보자 화장발"이란 우스개 소리가 나도는 시대입니다.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재래식 화장법은 쉬 잊혀지고, 옛 화장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건만 문득문득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박가분" 실물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박가분과 함께했던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부자이고 풍성했던, 그 때 그 시절을 구하고 싶은 것인지도 딴은 모를 일입니다.

혹 박가분이나 근세 화장품 관계 유물을 갖고 계신 분이나,소재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충분한 사례를 하고, 귀하게 쓰겠습니다.


연락처; 011-545-5372 이 무 열
(053)745-5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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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항상준비하실것 이라는 광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죵래폐소에서제조발매하는박가분(朴家粉)은품질의우량함을취하와각부인화장게에대환영을밧게됨을인하야......원료를졍밀이하고위생에유익케하올뿐아니라.......쥬의하온결과폐소의영광이됨은물논이옵고부인화장게에일대행복일가하오니일층안심하시와더욱이이용하심을바라나이다....

박가분의 특색에 대한 설명은

얼골의모든풍증과죽은깨와여드름과땀띄가업서지며....박가분은 내외국어데든지내외국인각상점과약방에서특약판매함

이라고 되어 있고,

당시 小 一匣에는 金拾五錢이고
大匣金參圓 으로 되어있다.

1916년 박승직본점에서 포목전의 경품으로 나누어 주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박씨 집안에서 만든 분으로 우리나라 공산품 1호이기도 한 박가분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1994년 대구시 수성구 신매동에 첫 매장을 열며 이왕이면 한국장업사에도 남아있는, 결코 쉬 져버릴 수 없는 의미를 간직한 이름을 화장품전문점 상호로 내건 이래 나는 이름 모를 숱한 할머니들을 만났었다.

아이고, 여기서 박가분 파는교? 박가분 한 번 보입시더....참말로 그기 안즉도 있었디나? 우리 어무이가 옛날 바르던 모습 봤는데....... 내사 시집 갈때 한 분 발라보고는 다신 몬썼지 그기 어디 함부로 쓸수 있드나 비싸갔고 애끼 두고 우짜다가 덩어리로 된 거 쪼까 손바닥에 덜어가 물로 비비가 조금 발랐디라....그라고 와 알라놓고 배총(탯줄) 덜 떨어져가 그기 허물어 갖고 진물나몬 동네서 새댁이 얻으로 오는기라 ....그라몬 쪼까 띠주고 하면 알라 뱃총에 그 박가분 분가루 발르면 그게 히안하게 꾸들꾸들 낫는기라....그란데 그기 안즉 나오고 있나?

그럴때 박가분이 아닌 정작 박가분을 사용했던 그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의 추억(?)을 사고자 했던, 일면식도 없는 할머리들 앞에서 나는 자료에서나 봤던 박가분 사용설명서를 되새겨 보곤 했었다.

....신사슉녀를물논하고세수허실때먼저비누로씨신뒤의박가분으로비누질과갓치씨신후세수허시면제색깔대로희여지고모든잡틔가자연업셔짐니다

일제시대 분통인 박가분은 (朴)이라는 상표에 붉은 꽃잎이 피어 있는 포장지위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사선을 그으며 박朴가家분粉이라고 쓰여진 단순한 도안이었다.

그랬다. 지금 시대의 잣대로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무미건조해 보이기 까지 한, 낡은 화면위로 궂은 비 죽죽 내리는 흘러간 시네마스코프 흑백 영화같은 그런 한 시절의 분통(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찮게 서가화장품본포근제 금삼십사젼의 조선총독부규격품 家庭張粉을 만나고 부터는 박가분 하나 구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화장관계 자료를 찾고, 한국화장문화사를 뒤적이고,인터넷을 검색하고, 다시 근대사 사이트 경매에 참여하면서 박가분 실물 하나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그러나 옛 비녀를 만나고 고려시대 분합이거나 청동거울 동곳 귀이개 혹은 신라시대 곡옥이거나 귀걸이 목걸이를 손에 넣거나 조선시대 빗치개나 분물연적 경대나 빗접 목침 겸용 거울이거나 노리개를 구할 수는 있었어도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박가분은 늘 손에 잡힐듯 잡힐듯 내쳐 달아나기만 했다.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예천에서, 상주에서 어쩌다 나온 박가분 분통은 3만원에 사서 서울 장사꾼한테 30만원에 팔렸다거나, 반닫이 하나 샀는데 그 안에 있더라구요. 그때 꽤 받았지 아마, 한 50만원 받았을 껄.... 풍문으로만 존재하며 비아냥거리듯 빨간 혀를 날름거릴 뿐이었다.
예전에 한 두번 취급해 봤는데요. 일본에서 하나 구해서 줬는데...북경 갔다가 노전에 내놓고 파는 거 본 거 같은데....어떻게 생겼습디까? 왜 둥그렇게..작년에 하나 팔았는데요! 박가분이 뭡니까? 정작 박가분을 보지도 못하고, 그게 무얼 말하는 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척 했고 그런 돈(?)안되는 물건에는 관심도 없었다.

박가분 하나 구해야 되겠다는 내 욕심(?)은 따지고 보면,

"미치면(狂) 미친다(及)"했다. 한 일에 미치기(及) 위해서는 미치지(狂)않으면 않되었다.

여기 저기 박가분 하나 구해 달라며 주문을 넣고, 근대사 물품 취급 경매 사이트를 들락거리고, 그런 사이트 게시판에 이런 물품 없읍니까? 글을 올리고...
그러면서도 나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분통 하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자료가 되고 역사(?)가 되는 ...어쩌면 박가분 하나 구하는 일이 내겐 소장과 완상(玩賞)의 의미를 넘어 한창 인기있을 때 전국적으로 하루 2만갑이나 팔렸다는 분통을 기어이 찾아야 겠다는 오기와 소명의식 까지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더러는 구하고 싶은, 늘 간절한 기다림이나 소망 같은, 날이 갈수록 만만찮게는 쉬 맞딱뜨리지 못할 것 같은 가슴 허전한 기대나 꿈같은 그런 시간을 조금씩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하기야 서울 인사동 '시간여행'이라는 근대사 취급점에 가면 크기나 디자인이 다른 박가분이 진작에 두 개나 보관이 되어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200만원과 220만원 짜리 가로 세로 4.5센치의 다 낡은 종이 분통을 선뜻 거두어 들이기에는 도저히 마음이 편치가 않던 것이었다.

어쩌다 잘 아는 장사꾼이 그랬었다. 지방 가니까 가이다시(집집마다 물건을 거두러 다니는 사람)집에 박가분 하나 있던데, 아 그걸 50만원 달라 카잖아요. 미친 놈 그깐 종이 쪼가리 하나 갖고...웬만 하면 부탁하신거 말도 생각 나서 거둘까도 했는데..50만원이 뭡니까. 50만원이....
그래도 필요하니까 어떻게 조금 깍아서 구해 주시면...
한 번은 안양에서도 두차례 전화가 왔었다.
게시판에 글 올린 것 봤는데요. 갖고 있는 사람이 100만원은 더 줘야 팔겠던데....근데 설명서나 내용물은 없고 갑만 있는데...
.......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다시 이년이 다 가고 .....
정든 박가분! 그 간절한 그리움, 내 소망은 못내 지울 수 없는 병인양 깊어가고...

시조를 쓰는 박기섭형의 참 오랫만의 전화라니... 어이 이형, 옥션 경매에 박가분 하나 나왔던데... 이번에 못 구하면 상태 그만한거 힘들꺼 같던데...
거기 대구지요? 저 근대사 취급하는 ㅇㅇㅇ인데요. 이번에 권컬렉션에서... 옥션에... 박가분 때깔 정말 좋은 게 하나 나왔거든요.....
........ !

안동에서 나왔다는 박가분은 너무 보존이 잘 되어 우리나라 제일의 컬렉션임을 의심치 않겠다.
1916년 생산된 뎡가 금십오젼의, '총판매원박승직본졈'의 박가분은 86년이나 되고도 그토록 보존문화가 잘 발달(?)된 우리나라 땅에서 결국 살아 남았다.

그래 그래 그래 난 이제야 박가분이라는 한 상징(?)의 실물을 만났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정작 아니 만나고도 기필코 구하겠다는 소망 하나 만으로도 설레는 가슴, 그 벅찬 감동을 예비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건만....

나는 또 이제 무어 그리 애닯아 간절한 소망을 다시 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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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3-17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서재에 다녀가셨더군요?
박가분이 그런 뜻이 있었군요.
박가분에 쏟는 애정이 부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