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1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까닭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詩2 헐리우드

아침마다 밥벌이를 위하여
거짓을 사 주는 장터로 간다.
희망을 품고
나는 장사꾼들 사이에 끼어든다.

詩3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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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집권 이후 15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동베를린에 정착, 그러나 인민을 탄압하는 폭압 정부에 또다시 절망해야 했던 시인, 한마디로 말해 광기의 시대를 살다 간 불행한 시인.
오래 전에 읽었던 브레이트, 그의 시 세 편을 추려 보았습니다.

한마디1) 주장이, 견해가 틀리면 여지없이 아갈잡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승리가, 생존이 때로 치욕이 될 수 있음을 슬픔이 될 수도 있음을,
그들은 필시 죽었다 깨 나도 모를 테지요.

한마디2) 거짓도 자꾸 하면 는다고 했지요. 늘다 보면 어느 게 참이고 거짓인지
분간못하게 된다고 하지요. 굳이 거짓으로 분장하지 않아도 따스한
국밥 대 놓고 먹을 수 있다면 이 무거운 <철면피> 벗어놓을 텐데요.

한마디3) 나는 하루하루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몸을 내 몸에
수육(受肉)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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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4-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詩 1,
엔도우슈사꾸의 '침묵'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가 일본에 처음 전래될 때의 얘기입니다.
신자를 살리기 위해 답교(예수의 성화를 발로 밟음)한 신부로 인해 목숨을 보전한 신자들에게, 왜 당신은 우리가 순교하지 뫃하도록 했느냐 죽음 보다 강한 원성을 듣는 대목이 생각납니다.
아, 두 번 죽은 신부님....

詩 2,
옳은 장사꾼이 못되어
늘 이렇게 헤매는 어설픈 몸짓이라니

詩 3,
눈물겹다
산다는 건 모르고 지나다 어느날 문득 그리움으로 점점 깊어져 가는 것이 아닐지...


프레이야 2004-03-1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레이트의 시못지않은 님의 감수성에 덩달아 눈물짓고 갑니다.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반칠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더러 다른 신문에서도 아침마다 詩 한 편 감상하는 난이 있었지만 동아일보의 시 소개는 그 해설이 주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칠맛 나는 표현의 묘미가 두고 두고 기억에 남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함께 묶어져 나온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 반칠환이란 시인은 잘 몰랐지만 시 작품 선별에서 아침 시단을 맡고 있는 시 선정자로서의 고민과 노고가 함께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걸 대번에 간파해 낼 수 있었다.

특히 약력을 보고 알았지만'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에다 '대산문화재단 시부문 창작지원선정'을 받은 데다 최근 서라벌 문학상 수상의 이력이 이 시인의 외적인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반칠환시인의 이번 아침詩 해설을 묶은 책자는 기왕 나온 잘 알려진 기존의 시들은 많이 배제된 가운데 작품 위주로 선별한 점이 많이 돋보인다. 게중에는 시에 많은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도 생소할(? 나만 생소한지도...) 이름모르던 시인이 꽤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작품성은 뛰어나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이란 책자는 반칠환 시인의 해설이 여타의 시 해설서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낼 만큼 뛰어나 보인다.

그것은 반시인의 고향이 시골(충청도?)인  점에도 힘입었겠지만 뛰어난 언어 구사와 적재적소에서 구사되는 사투리와 속담이나 명언들이 해설의 대상인 詩를 뛰어 넘어 경우에 따라선 시보다 낫기도 하다. 아니 조금 더 확대 해석하면 시를 질료로 해서 쓴 한 편의 뛰어난 꽁트거나 서사시의 구조와 얼개를 갖는 보고서 형식을 띠기도 한다.

시치미 뚝 떼고 괴발개발 풀어놓는 우리네 삶의 잊혀진 부분을 끄집어내는가 하면 일면 살아가는 일의 절실함과 간난의 세월을 서늘하게 들춰내 보이기도 하고 추억이 있고 그리움과 사랑과 안타까움이 두루뭉수리 되어 질펀하게 펼쳐 놓은 시의 향연에 기꺼이 동참해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던가.

63명의 빛나는 시편들을 읽으며, 아니 시보다 더한 위안과 가슴 뜨겁고도 훈훈한 해설의 절창! 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도식화되고 모범답안 같은 쉬 식상해버릴 듯한 해설이 아니라서 혹 어렵다고 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하고 매번 읽을 때마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詩보다는 그 해설에 무릎을 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내게는 끝끝내 시 보다도 뛰어나던 반칠환 시인의 시를 풀어가는 깊이와 안목에 박수를 보내며 이런 제 2, 제 3의 해설서가 거듭되기를  빈다.

어쩌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내게 가까운 신, 당신'을 마주하여 그 앞에 선 이름모를 독자  그대에게 진정 복 있을진저.

*참고로 반칠환 시인의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을 보면 어머니 얘기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시편들이 알싸한 아픔을 동반하면서도 훈훈한 감동의 무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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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17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가 어쩌면 시보다 더 진실되게 보이네요. 이 시집 꼭 보고 싶어집니다.
 

남들 다들 은퇴한다는 55세에 책상 두 개, 전화기 세 대 달랑 들고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한 사람. 화장품공업협회 회장을 세 번째 맡고 있는 일흔살 청년. 1988년 창업해 10년 만에 매출액 기준 장업계 3위로 도약, 국내 130여개 화장품제조업체와 수입업체 500여개가 난립한 가운데서도 마침내 우뚝선 당신와의 만남은 즐거웠다.

"회장님, 이 향유병 옆에 있는 향통류는 아무래도 우리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어떻게 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좀 낯설어 보이기는 한데..."
"회장님 박가분 나오던 시절에 여기 이 설화분이 나왔더라구요. 당시의 사용설명선데...."
"아모레가 이거 보고 만들었을 수도 있겠군..."
"이 조선경대는 장석을 절대로 닦지 마세요. 그리고 이 흉배는 빛 받으면 변색될 수도 있겠는데...그리고 연적은 4센티 이하라야 화장용구로 치더라구...이거 분접시에 물따루던 분물연적이 맞아요...."
"회장님은 화장용구 수집하시는데 반대는 없으셨습니까. 이거 집사람 눈치가 보여서....."
"다 그래요. 30만원 주고 사서는 10만원 줬다 그러고...마누라 몰래 사고는....때로 보너스 홀랑 털어서 사고..."

한시간 반 넘게 당신과 나눈 얘기를 어찌 다 옮길 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진작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엔 조금쯤 물기 배인 아련함이 묻어있다.

한 가지.
라미화장품 사장에서 박카스병을 만들던 유리공장 사장으로 좌천되어 한가한(?) 세월을 보내던 당신은 어느날 문득 월급장이 사장의 길을 박차고 창업을 하게 된다.
아마 퇴직금만으로는 턱없이 자금이 부족했을 터였다.
20수년 동아제약 사원시절부터 모아온 옛 화장용구는 친하게 지내던 화장품업계 오너 사장에게 양도되고, 그 오너 사장의 회사 직원이었던 필자는 본사 사옥의 화장품박물관을 보며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맛보았던가.

그러나 세상일이란 때로 얼마나 덧없고, 그 얽히고 설킨 인연의 굴레 또한 얼마나 깊고 끈끈한 것이랴!
퇴사하고 5년도 안되 필자가 다녔던 회사는 법정관리 기업이 되고, 다시 그 옛 화장용구는 그동안 많이 보태어져 코리아나에 되팔리고....아마 당신께서는 크게 두 번 울었으리...

아, 내가 십년을 넘게 모셨던 옛 회사 사장님이 어느날 술자리에서 하시던 말씀이라니.....
"박가분 만들던 두산의 손자 박O가 내 친군데 나한테 박가분 하나 돌라는 거라...그래서 내가 그랳지 이 사람아 니가 일억을 줘봐라. 내가 주는가..."
옛 회사의 사장님께서 박가분을 사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목포 다 쓰러져 가는 골동품 가게까지 치달려간 무용담(?)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또 한가지.
89년 매출액 14억원을 시작으로 99년 매출액이 3,000억원을 넘기면서 입사 초기부터 코리아나와 함께한 영업본부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 발전해가건만 코리아나 화장품을 만들던 부자재 업체는 조금도 변신의 몸부림을 꾀할줄 모른 채 무사안일하고 구태의연해 보였던 모양이다.
"회장님 부자재업체 몇 군데는 이 번에 바꾸어야 겠습니다."
"........"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시던 당신은 마침내 무겁게 입을 떼셨다.
"O군, 내가 동아제약부터 라피네 사장으로 있을 때까지 100군데가 넘는 부자재 업체와 인연을 맺었었는데....코리아나 창업하고 물건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모두가 바쁘다고 했는데...지금 그 사람들 열 군데도 안되는 업체가 그래도 날 보고 도와줬는데....자네라면 어쩌겠나...."
아마 그때부터 당신께서는 화장품박람회나 해외전시회때 부자재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독려하게된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도 8년간 박가분 인테리어를 맡아온 정사장을 데리고 프랑스 100주년 기념전시회에 참여한 랑콤이나 샤넬,부르조아,쟌피오베르...... 매장을 보여주러 삼성동 아셈전시장으로, 명동의 토다코사로 끌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는 해외에서 찍어온 화장품 매장의 사진을 즐겨 보여주지 않았던가.

"회장님, 박물관 짓는 일은 잘 되어 가는지요..."
"내년에는 개관을 해야 되는데...아직 더 보충할 것도 있고....
그런데 동호인을 만나서 즐거운데.....오늘 동호인을 만나서 참 즐거운데....."

이제 일흔이 되신 송파 유상옥회장님.
화장품업계 까마득한 말석의 필자도 감히 동호인을 만나 얼마나 즐겁던지....
먼 후일 박가분이 해야될 사회적 공헌 가운데 한가지가 문화적 공헌이라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박가분 수성점의 옛 화장용구전시관을 보시고 격려해 주신 고마움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하랴.
아, 그리고 55세에 코리아나를 창업해 화장품업계 살아있는 신화를 일군 당신을 생각하면, 외람되지만 나는 얼마나 더 큰 가능성의 시간을 예비해두고 있는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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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을 찾습니다

<다름이 안이라 저는 L.A에 살고있는 노인임니다. 전번에 전화로 대충 얘기는 햇음니다. 다름이 안이라 지금부터 엔날로 도라가 내가 정신여고 단닐 때 얘김니다.
정신여고 뒨문앞에 커다란 개와집에는 朴家粉이라는 간반이 부터잇엇죠.
그리고 저이 어머니가 朴家粉을 바르시는거슬 밧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는 화장품선전책(2000년 드봉 10월호)에서 朴家粉에 대해 나와잇기에 보고너무 방가왓음니다.
日本사람덜 앞에서 덧덧하게 팔든 화장품 소박한 우리나라 성을 내걸고 발든화장품 생각이만이 나서 아주방갑숩니다.
L.A 그리고 온 世界에 朴家粉이 선전대고 번창하기를 바람니다. 이 편질럴 바드시고 社長님이 우수실거애요. 朴家粉 잘대나가길 바람니다. 그럼 안영희기십시오.

大韓民國 대구市 수성구 마촌 1洞 639 20 
株 朴家粉社長님
KOREA

아마 11월 말쯤으로 기억되는데, DeBON ShOP Story에 대구 "박가분"이라고 소개된 책자가 미국까지 가게된 모양입니다. 부장님이 시외전화를 받았는데 팔십된 할머니가 박가분 사진을 보니까 그렇게 반갑더라면서 미주알고주알 한시간 가까이 박가분 바르던 어머니 얘기며 우리나라 살때 정신고녀 다니던 시절의 한바탕 질펀한 그리움을 쏟아 놓았던 모양입니다.

월말인데 거래처에 수금도 해드려야 되고 할 일도 많았건만, 차마 절절한 그리움으로 엮어내는 할머니의 추억을 쉬 깨트릴 수 없어 한동안 맞장구 치고 애써 박가분이 팔리던 시절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던 게지요.

그런데 바다 건너 이민간 타국 땅에서 못내 그리운 그 무엇 있어 이렇게 비뚤비뚤 철자법이 틀리고 엉성한 사연을 일면식도 없는 대구에까지 보내는 건지요.

또 한 번은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제품교육 때문에 동성로점 문을 12시 반경에 연 9월의 어느날 일입니다.

대명동에 사신다는 주부 한 분이 문을 안열어 밖에서 두시간 동안 기다렸다면서 박가분 하나 돌라고 하더군요. 죄송하다면서 수요일 마다 교육 때문에 문을 늦게 연다는 안내문을 깜박 잊고 못붙인 모양이라면서 들어본 사연인즉 이랬습니다.

봉화에 사신다는 친정 어머니가 약전골목 입구에 가면 박가분 파는 데가 있으니까 사서 하나 소포로 부치라고 했다더군요.

"문 늦게 열어 죄송한데요. 박가분이 옛날 일제시대때 나오던 분인데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지 63년이나 되었는데요."
"어, 우리 어머니가 예전에 쓰셨다던데..... 여기가면 있을거라고.... 이거 어쩌죠 왜 감실에 위패모실 때 지방쓰는데....... 우리 집이 종손이라서 왜 조선종이 있잖아요? 박가분 그 덩거(어)리분 종이에 발라 붓글씨 쓰면 벌레 안먹는다면서..... 중동에 사는 우리 이모님도 여기가면 있다던데........"
"약전골목에 어른들 한약지으러 오시다가 박가분 간판을 보셨던 모양이지요?"
"이모님 연세가 지금 여든인데 우리 친정 어머니는 아흔이시거든요. 예전에 쓰셨다던데....
덩어리로 되가지고 가루 내어 썼던 모양이던데..... 지방 쓰는 거 하나도 허투루 않거든요...."

망연자실 난처해 하던 그 주부님은 결국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박가분을 찾는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6년전 시지점 문을 열 때도 할머님 두 분이 어쩌면 얼굴에 홍조조차 띤 채 조심스레 그러더군요.

"정말 박가분 파는교? 울 엄마 쓰던 모습을 봤는데....."
"지금은 안나오거든요. 여기 사진 한 번 보실래요?"
"그래.보래이. 맞다 맞아 진짜 박가분이데이....."

화장문화사에 게재된 사진자료를 보곤 생각했었습니다.
어쩌면 삼단 같은 머리를 창포물에 감고, 다시 동백기름을 바르고, 녹두물에 세수하고, 얼굴에는 꿀을 섞어 찧은 팩을 하고, 박가분도 살짝 바르고, 홍화 연지로 단장한 그리운 얼굴이 당장에라도 나타날 듯 했습니다.


공고합니다.
"속지말자 조명발, 다시보자 화장발"이란 우스개 소리가 나도는 시대입니다.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재래식 화장법은 쉬 잊혀지고, 옛 화장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건만 문득문득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박가분" 실물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박가분과 함께했던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부자이고 풍성했던, 그 때 그 시절을 구하고 싶은 것인지도 딴은 모를 일입니다.

혹 박가분이나 근세 화장품 관계 유물을 갖고 계신 분이나,소재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연락 주십시오.
충분한 사례를 하고, 귀하게 쓰겠습니다.


연락처; 010-3545-5372 이 무 열
(053)745-5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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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우리네 목수들은 집터의 부름과 더불어 살았다. 연장 망태를 걸머진 채 떠도는 시간이 길어지고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목수때는 갈앉아 척박한 직업의 조건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었을 연장들.

그 쓰임과 용도에 따라 소용되는 연모의 종류와 기능 및 이름은 얼마나 다양하고 많았던가. 백 가지가 넘는다는 목수 연장 중 우선 나무집에 날을 만들어 꽂아 일정한 두께로 나무를 깍아내던 대패를 보자. 변탕,개탕대패,옆훑이,장대패,뒤대패,둥근대패,배밀이대패,목귀대패,대팻집고치기대패,살밀이대패,표주박면대패,훑이기대패......

일정한 간격으로 날을 내서 나무를 자르는 연장인 톱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쇠톱,실톱,세톱,붕어톱,등대기톱,양날톱,중걸이,두덩톱,접톱..... 이외에도 나무를 찍어서 깍는 연장으로 날이 가로로 된 자귀,손자귀와 같은 소용이지만 도끼처럼 쇠로 만들고 나무자루를 해박는 까뀌,날을 오긋하게 내 앞쪽으로 들이깍게 된 옥까귀 등등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이런 용구들은 골동품이 된 옛가구처럼 마냥 그립기만 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굳이 가장 애착이 가는 목수 연장 하나를 든다면 나는 무엇보다 '먹통'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황당해서, 아니 첫눈에도 그것은 본때 없이 볼썽사나운 몰골을 하고 순무식으로 생겨 먹어서 외려 더욱 정감이 가도록 만들었던 것.

'먹통'은 보통 먹줄통이나 묵두라고도 불리던 것으로 목재 따위를 다듬거나 자를 때 목재 위에 줄 치는데 쓰는 기구이다. 먹솜그릇과 먹줄을 감은 도르래바퀴를 장치하고 흔히 먹통 밑바닥엔 홈을 파 끼워 보관하는 먹칼이 있다. 또한 먹칼은 대나무를 잘게 쪼개 깍은 댓개비의 한 끝에 빗살처럼 잔 칼질을 해 먹을 찍어 목재나 석재 등에 글씨를 쓰거나 표를 하는데 썼다.

혹 먹줄주는 방법을 지켜본 사람은 알 것이다.어찌 보면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 익숙한 탓인지 어슬렁어슬렁 때로 무심하게 보이기까지 한 그 무념의 동작을.

나무를 마름개질하여 먹줄을 치거나 톱질을 할 때 받쳐놓는 나무인 '말'위에 놓인 목재 한끝에 먹솜그릇 앞머리에 달린 조그만 송곳을 꽂아 고정시키고 눈으로 가늠하고는 먹줄을 잡아당겼다가 탁 놓는다. 그러면 잘 다듬어진 목재에 선명한 먹선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찮게 조선식 민대가리 모양을 연상시키는 먹통과의 만남 이후 장안평이나 예천의 출장길 혹은 애써 더듬어 본 시골 고방에서 맞닥뜨린 먹통들은 하나같이 나름대로의 재미를 갖고 있었다. 단순하게 먹물을 갈아 붓고 가는 끈으로 먹줄통 입구를 빠져나와 곧은 선을 얻도록 한 기구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개중에는 문양도 화려하게 거북이나 호랑이를 조각해 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허위단신 한 세상 힘이 겨워 마침내 질정 못할 그리움인 양 손때가 묻어,단순하고 질박한 모습으로 채 못다한 사연이나 곡절을 얘기하는 듯싶은 것도 있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연모의 사용방법,재질,만든 지방에 따라 독특한 형상으로 다가오곤 하던 먹통들.

내 기꺼이 책상머리에 필기구를 꽂아두고 쓰는,무작스럽고 막돼먹은 듯한 모습으로 맨처음 만난 먹통 하나 오늘 자못 새로운 모습으로 친근감을 더해 가기만 한다.

세월의 뒷켠에 버려진 채 켜켜이 먼지를 뒤집어쓴 먹통들이 그러할진대,생긴대로 나무를 마름질하고 부재를 어떻게 쓰고 어떤 법식의 건물을 세우든 튼튼하고 조화가 어우러진 모습을 연출해냈던 우리네 전통 목수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들에 의해 우리 건축은 잔재주나 세심함이 아닌 무심한 듯 소박한 아름다움을 빚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누구든 짬을 내어 보고자 한다면 쉬 만날 수 있고, 진정 알고자 하는 만큼 느낄 것이다. 가까운 절집이나 옛 한국의 살림집에는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네 옛 목수들은 건축을 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시작부터가 달랐다.

집은 대체로 높고 밝게 지었으며, 집터가 준비되면 기둥 세울 자리를 정했다. 그런 다음에는 서너 자 깊이로 판 기둥 세울 자리에 조선회와 잡석을 다져 넣으면서 달구질을 했다. 소리꾼의 소리매김에 맞춰 굵은 통나무나 쇠로 된 쇠달구 아니면 돌덩이로 된 돌달구를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공중 높이 들었다가 땅에 떨어뜨려 집터가 단단히 다져지도록 안간힘 했던 것이다. 달구질이 끝난 다음에는 주춧돌을 놓고 편편하게 고른 위에 고임돌을 괴고 다시 조선회를 다져 넣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나무 다듬는 일을 시작했다. 나무 하나를 베는데 있어서도 나무가 트거나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쾌청한 길일을 택하고, 심지어 4월이나 7월, 질기고 벌레 먹지 아니하는 날을 받아 벌목한 정성 앞에서 달리 더 무엇을 얘기하랴?

그러나 잠시 눈주어 돌아보라.
100년도 못갈 집 한 채 짓기 위해 최첨단 공법의 건축술로 시멘트와 철근을 우겨 넣는 이 시대에, 갖은 풍상의 몇백 년 의연하게 견뎌온 우리의 건축물들은 어떠했는가를.

언제부턴가 귀솟음이나 배흘림,안쏠림 등 우리 전통 기법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왜끌,왜대패,플라스틱 먹통를 든 목수들이 자가용 타고 아파트 현장으로만 달려가는 오늘.

요즘 다들 비 안 새면 잘 지은 집이라던데.....

그리워라 내 진정 그리워라.
어허 달구
어허 달구
집터의 부름은 없어도 옛 방식의 집터 하나 다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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