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들 은퇴한다는 55세에 책상 두 개, 전화기 세 대 달랑 들고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한 사람. 화장품공업협회 회장을 세 번째 맡고 있는 일흔살 청년. 1988년 창업해 10년 만에 매출액 기준 장업계 3위로 도약, 국내 130여개 화장품제조업체와 수입업체 500여개가 난립한 가운데서도 마침내 우뚝선 당신와의 만남은 즐거웠다.

"회장님, 이 향유병 옆에 있는 향통류는 아무래도 우리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어떻게 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좀 낯설어 보이기는 한데..."
"회장님 박가분 나오던 시절에 여기 이 설화분이 나왔더라구요. 당시의 사용설명선데...."
"아모레가 이거 보고 만들었을 수도 있겠군..."
"이 조선경대는 장석을 절대로 닦지 마세요. 그리고 이 흉배는 빛 받으면 변색될 수도 있겠는데...그리고 연적은 4센티 이하라야 화장용구로 치더라구...이거 분접시에 물따루던 분물연적이 맞아요...."
"회장님은 화장용구 수집하시는데 반대는 없으셨습니까. 이거 집사람 눈치가 보여서....."
"다 그래요. 30만원 주고 사서는 10만원 줬다 그러고...마누라 몰래 사고는....때로 보너스 홀랑 털어서 사고..."

한시간 반 넘게 당신과 나눈 얘기를 어찌 다 옮길 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진작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엔 조금쯤 물기 배인 아련함이 묻어있다.

한 가지.
라미화장품 사장에서 박카스병을 만들던 유리공장 사장으로 좌천되어 한가한(?) 세월을 보내던 당신은 어느날 문득 월급장이 사장의 길을 박차고 창업을 하게 된다.
아마 퇴직금만으로는 턱없이 자금이 부족했을 터였다.
20수년 동아제약 사원시절부터 모아온 옛 화장용구는 친하게 지내던 화장품업계 오너 사장에게 양도되고, 그 오너 사장의 회사 직원이었던 필자는 본사 사옥의 화장품박물관을 보며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맛보았던가.

그러나 세상일이란 때로 얼마나 덧없고, 그 얽히고 설킨 인연의 굴레 또한 얼마나 깊고 끈끈한 것이랴!
퇴사하고 5년도 안되 필자가 다녔던 회사는 법정관리 기업이 되고, 다시 그 옛 화장용구는 그동안 많이 보태어져 코리아나에 되팔리고....아마 당신께서는 크게 두 번 울었으리...

아, 내가 십년을 넘게 모셨던 옛 회사 사장님이 어느날 술자리에서 하시던 말씀이라니.....
"박가분 만들던 두산의 손자 박O가 내 친군데 나한테 박가분 하나 돌라는 거라...그래서 내가 그랳지 이 사람아 니가 일억을 줘봐라. 내가 주는가..."
옛 회사의 사장님께서 박가분을 사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목포 다 쓰러져 가는 골동품 가게까지 치달려간 무용담(?)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또 한가지.
89년 매출액 14억원을 시작으로 99년 매출액이 3,000억원을 넘기면서 입사 초기부터 코리아나와 함께한 영업본부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나날이 성장 발전해가건만 코리아나 화장품을 만들던 부자재 업체는 조금도 변신의 몸부림을 꾀할줄 모른 채 무사안일하고 구태의연해 보였던 모양이다.
"회장님 부자재업체 몇 군데는 이 번에 바꾸어야 겠습니다."
"........"
아무 말도 없이 한동안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시던 당신은 마침내 무겁게 입을 떼셨다.
"O군, 내가 동아제약부터 라피네 사장으로 있을 때까지 100군데가 넘는 부자재 업체와 인연을 맺었었는데....코리아나 창업하고 물건 좀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모두가 바쁘다고 했는데...지금 그 사람들 열 군데도 안되는 업체가 그래도 날 보고 도와줬는데....자네라면 어쩌겠나...."
아마 그때부터 당신께서는 화장품박람회나 해외전시회때 부자재 업체들도 적극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독려하게된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도 8년간 박가분 인테리어를 맡아온 정사장을 데리고 프랑스 100주년 기념전시회에 참여한 랑콤이나 샤넬,부르조아,쟌피오베르...... 매장을 보여주러 삼성동 아셈전시장으로, 명동의 토다코사로 끌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는 해외에서 찍어온 화장품 매장의 사진을 즐겨 보여주지 않았던가.

"회장님, 박물관 짓는 일은 잘 되어 가는지요..."
"내년에는 개관을 해야 되는데...아직 더 보충할 것도 있고....
그런데 동호인을 만나서 즐거운데.....오늘 동호인을 만나서 참 즐거운데....."

이제 일흔이 되신 송파 유상옥회장님.
화장품업계 까마득한 말석의 필자도 감히 동호인을 만나 얼마나 즐겁던지....
먼 후일 박가분이 해야될 사회적 공헌 가운데 한가지가 문화적 공헌이라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박가분 수성점의 옛 화장용구전시관을 보시고 격려해 주신 고마움을 어찌 다 글로 표현하랴.
아, 그리고 55세에 코리아나를 창업해 화장품업계 살아있는 신화를 일군 당신을 생각하면, 외람되지만 나는 얼마나 더 큰 가능성의 시간을 예비해두고 있는 것이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