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뇌 - 뇌를 치료하는 의사 러너가 20년 동안 달리면서 알게 된 것들
정세희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내 몸을 움직여서 하는 그 어떤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과는 담쌓고 산다. 그 것은 내가 '운전'을 하지 않거나, '편식'을 고치지 않는 이유와도 같은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 대체품이 존재하거나 하는 것이다. 일부러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운전'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많은 편이고, 운동 삼아 오르지는 않지만, '산'을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물론, 일반적인 '이동'과 슬렁슬렁 올라가는 '등산'이 운동이 될 리는 없다. 그렇지만, 굳이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것도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굳이 '달리기'를 권하는 책을 읽은 이유는 함께 읽고 이야기하기로 한 약속때문이다. 


서두에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왜 뇌신경 분야 재활의학 전문의인 나는, 재활에 대한 내용보다 평소 운동하라는 글을 더 많이 썼을까? 그 이유는 뇌가 병들고 다친 후에 뇌를 원상으로 돌리는 것보다 쉬운 것이 문제가 생기기 전에 병을 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뇌가 병들거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이다. 뇌의 병을 어떻게 막느냐고?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내 몸이 건강해야 뇌도 건강하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노력이면 된다. 그리고 이 노력은 몸과 뇌가 병들기 전, 노쇠해지기 전부터 일찌감치 시작해야 한다." p.20~21


좋아, 인정. 


문제가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란 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팔다리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이다보니 굳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조심하지만, 뇌에 생긴 문제는 터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분야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징후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면, 달리기를 하면 뇌에 생기는 병을 막아줄까? 하고 읽어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달리기를 해도 뇌에 병은 생긴다. 그러나 회복력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니 달리기를 하든 하지 않든 병에 걸릴 수는 있지만, 그 병에서 회복하는 데는 달린 사람이 빠르게 그리고 좀더 건강한 사람에 가깝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기'만 이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저자의 주장은 그러하다.


저자가 만난 환자들의 예를 듣다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달리기를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서도 달리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을 보면서도 달리고 싶지 않을까? 


"답은 '재미'에 있다. 달리기에 재미를 느끼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옆에서 뜯어 말려도 결국은 달리게 되어 있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달린다. 재밌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취미를 더 오래 유지하고 더 깊게 즐긴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로 입증된 사실이다." p.60


달리기에 대한 재미를 먼저 느껴야한다는 것. 물론 달리기를 해 봐야 그것이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게 되겠지. 달리기만 그러할까? 무엇이든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긴 시간 계속 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들(자연의 변화를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는, 운동 기구 위에서 뛰는 것보다 밖에 나가 뛰기를 권한다.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알려준다.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운동은 필요한 것이라고 인지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라는 운동을 따로 시작하고픈 마음이 아직은 없다. 체력이 좋아야 어려운 치료도 받을 수 있고,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려면 내 체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아직 그걸 찾지 못했다. 저자는 일생에 걸친 습관은 몸에 새겨져 위기 때 힘으로 발휘된다(p.244)고 하였다. 


나는, 암 치료를 하면서 내가 몰랐던 나의 긍정 마인드를 깨달았다. 그리고, 편식은 할지언정 입맛을 잃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람은 다 제각각의 건강 유지법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달리기를 시작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딱 싫어하는 움직임이거든. 


물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운동은 치매약이나 항암제, 수술 못지 않게 중요하고 효과적이다. 그렇지만 나처럼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 먹고 일어서지 않으면 운동이라는 좋은 약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달리기가 가장 효과적인 운동이라 할지라도 내게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내가 지속해서 할 수 있는 재미를 주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달리기'라는 좋은 약이 처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택은, 이제 나의 몫이 아닐까? 점점 늘어나는 수명에 따른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싶다면, 나의 시간과, 나의 경제력과, 나의 재미가 딱 어우러지는 그런 '처방'을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관련 책도 읽었고, 그림도 보았다. 뮤지컬 프리다를 보았을 때, 프리다 칼로의 삶에 대해 더 알아보고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의 저자인 서정욱은 대중이 미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썼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친절한 책이어서 약간 아쉬움이 있었다. 그림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과 프리다 칼로 본인이 말한 의미, 그리고 저자의 설명까지 더해지고 나면, 나의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어서 조금 아쉽다. 


얼마전부터 부산에서도 프리다 칼로의 그림 전시가 있어서 관심을 가졌는데, 레플리카전이기는하지만 한번 가서 보는 것도 좋겠다. 


1970년대 초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페미니스트들을 열광시켰다고 한다. 직선적이고, 자신감이 넘치고, 여자의 감정을 드러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는 이 그림들을 누군가가 봐달라고 그리기보다, 자신의 일기를 쓰듯이 그렸다. 그렇지만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 1926>은 자신을 떠나려는 남자 친구 알레한드로를 붙잡으려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이고, 교통사고로 인생이 바낀 때였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초상화를 보내기도 했지만, 알레한드로의 초상도 그렸다. 그 작품은 21살에 그렸지만, 45살이 되어서야 서명을 새로 하고 프리다 칼로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알렐한드로에게 보냈다. 그 그림은,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알레한드로가 죽은지 4년이 지난 후 1994년에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알레한드로에게 프리다 칼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알라한드로가 궁금해졌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는 민족주의 화가로 고대 아즈텍 문명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벽화로 유명해진 화가로 대중성이 있었다. 디에고의 벽화에는 사회계층의 실생활을 그리고, 계층 간의 격차, 불평등, 그리고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비판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프리다 칼로는 결혼 후부터는 남편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녹색, 하얀색, 붉은색(멕시코 국기에 사용되는 색)을 자주 사용하여 멕시코의 뿌리가 녹아든 그림을 그렸다. 


디에고 리베라는 왜 프리다 칼로와 결혼을 했을까? 결혼 생활을 하는 내내 바람을 피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혼을 했다가도 다시 재혼을 하면서까지 같이 살았다. 디에고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다. 하물며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도. 남편이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지만, 프리다 칼로는 오히려 디에고의 바람 상대와도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남편이 아무리 바람을 피워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제3의 눈이 있을 만큼 위대한 천재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리다 칼로는 그와 헤어지지 않았다. 물론 디에고도 프리다에 대해 "만약 내가 그녀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면, 나는 진짜 여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었을 거에요!"(p.127)라고 말한다. 범인인 나는 이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지만,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보다.  


초현실주의를 주장한 앙드레 보르통,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로부터도 극찬을 받았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있다. <두 명의 프리다, 1939>라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자 그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 미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렸다기 보다 자신의 안타까운 처지를 현실적으로 그렸냈을 뿐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결론은 그렇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아픈 현실을 그림을 그려냈고, 그 그림을 통해 그 자신이 위로를 받았고, 자신이 다짐이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바꾼 버스 사고로 인한 고통, 남편인 디에고의 끊임없는 바람, 계속된 유산, 그리고 고대 아즈텍 사상과 멕시코의 민속 문화를 떠올리는 소재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 책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프리다 칼로의 인생이 그려진 그림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다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가 책을 읽는 재미는 떨어뜨린다. 만약 프리다 칼로의 그림 중에서 각각의 소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면, 저자의 설명에서 한발짝 물러나 각자가 그림의 해석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견딜 수 있답니다."(p.3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제목은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이다. 그러나 책의 전면에는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라고 적혀 있어서, 그게 제목인 줄 알았다. 그럼으로써 이 책은, 내 시선을 끈 셈이다. 게다가, 저 여자는 왜 그런 일에 목숨까지 건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인데, 이 시리즈의 책들은 이런 표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단편소설 시리즈인 위픽도, 이혁진 작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독서동아리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전작들을 통해 작가는 계급적 차이에서 오는 개개인의 서로 다른 입장과 관계를 이야기해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현실 세계에서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해왔던 '윤리적 딜레마' 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완전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를 만든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세희와 그 자동차를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모든 것을 바친 재호, 재호가 없는 가정을 지키며 아들 건주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아내, 딸 애나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며 돈을 벌고 있는 매튜, 남편과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다 한 아이와 부딪쳐 교통사고를 당한 영인. 


모두의 입장에서 그들이 하는 행동은 정당성을 갖는다. 혹은 그렇게 해야 하거나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완전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든 재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그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동용 이동의자인 '무버'에 의존하여 살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건주는 걷기를 포기하고 '무버'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간다. 아내는 그런 건주가, 걸을 수 없을까봐 걱정을 한다. 그래서 건주와 아내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고, 학교에서는 '무버'로 인해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완전자율주행은 아니지만, 인간의 두 다리를 대신해서 이동하고 있는 '자동차'하고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아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뚜벅이이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차'를 운전해서 가지 않으면 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걸어가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결국 아이들이 무버에 의존해서 걷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절대 낯설지가 않다. 


최근에 자율주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보니, 자율주행으로 움직이는 이동수단들의 윤리적 선택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 책에서 세희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슈마허의 기능을 데이터에 입각한 경제논리로 학습을 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어떤 선택을 하였을 것이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되지만, 자동차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목적으로 가지고 정해진 선택지를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데이터를 학습시킨 사람, 즉 회사의 책임이 아닐까? 


"이걸로 슈마허에게 가르쳐줘. 전봇대를 받아 탑승자를 다치게 할 바에야 길고양이를 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애들한테 걷어차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가르쳐주듯, 세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 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p.19)


슈마허가 사고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직관이나, 돌발 상황에 따른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세희의 말대로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 이미 급이 나눠져 있고, 그 잣대에 따라 많은 것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 데이터를 이용해서 그 데이터가 정해준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듣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저자는 재호의 아내와 영인을 통해 다른 생각을 전한다.


"늘 그래, 사는 건 계획과 예상을 벗어나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내는 재호를 봤다. 그러니까 가르쳐줘야 할 건 기준이야.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이유가 어떻든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지. 이제 알겠어. 내가 제일 못했던 게 그거라는 걸, 그래서 애가 지금 이렇게 됐다는 걸. 아내는 후회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나부터 해야지, 기준을 지켜야지. 아무리 울고 떼쓰고 날 미안하게, 아프게 해도 상관없어. 나쁜 엄마라 해도 괜찮아. 맞는 건 맞고, 틀린 건 틀려, 멀쩡한 두 다리로 태어난 건 고마운 일이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p.53)


"우리가 가르치는 것도,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것도 원칙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완전하다고 착각하도록 떠받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작고 불완전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이끌어줘야 하는 사람들이죠."(p.78)


기준과 원칙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기준과 원칙,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인가를 남보다 더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남을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부모를 잃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물론 평균적으로) 좀더 쉬운 쪽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살면서 어떤 기준과 원칙을 정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도, 세상까지도 사랑"(p.163)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고통을 알죠. 사랑만이 고통에도 의미를 주니까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어 더욱 고통스러우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는 것도 의미가 있는"(p.164)것이므로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그 마음,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더 붙인다면 "용기"일 것이다. 


"그게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능력이고 자기 자신의 일부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무리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상황이 살다보면 생기니까. 할 수 있는 건 해야 해. 그걸 하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야." (p.195~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꽤 좋아하는 류의 책이다. 그래서일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다닥 읽어버렸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풍속화나 기록화 만큼 생생한 자료가 있을까? 사진이나 영상이 없었던 그 시절 이야기다. 


얼마 전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는데, 그 암각화의 그림을 통해 선사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듯이 조선의 풍속화와 기록화들도 그런 역할을 해낸다. 한국의 기록문화는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하는데, 그림이라고 덜할 리가 있나. 그러나,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듯이,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지면 이해도는 당연히 올라간다.  


이 책에서는 조선의 풍속화와 기록화들을 소개한다. 익히 알고 있는 그림들이지만 그 설명을 함께 읽으면서 그림을 보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미술관에 갈 때마다 도슨트 설명을 듣느라(설명 앱을 켜고) 그림 앞에 멈춰 있는 사람들 때문에 사실은 짜증이 날 때가 많다. 눈으로 보고 싶은 작품을 관람자의 머리만 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런 공부라면 이렇게 책을 통해 먼저 공부를 하고 가면 어떨까? 미술관에선 누군가의 설명보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감상을 했으면 좋겠다. 아, 이건 나의 개인적인 의견^^


풍속화가 사생활이라면 기록화는 공공생활이고 풍속화가 드라마라면 기록화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조선미술관에서는 궁궐 밖의 사생활을 담은 1관과 궁궐 안의 공공 행사 기록을 담은 2관으로 나누어 전시를 기획했다. (p.9)


새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생각이 바뀌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는 사람만이 새것을 만든다. (p.13)


놀이 장면을 그릴 때 '사람들을 다 앉히지는 않는다'는 법칙(p.20)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그런 법칙이 있다기보다 그런 구도와 구성을 통해 그림이 살아있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 같다. 놀이하는 선비들을 그린 그림을 '현이도'라고 부른다. 조영석의 현이도는 이후 조선 양반 풍속과 평민 풍속화의 출발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김홍도가 그린 <귀인응렵>은 관복을 입지 않았으니 선비가 아닌 관료 신분이며, 매사냥을 떠나는데 사냥개와 함께 있지 않고 사슴이 그려져 있다. 언덕이 사슴 다리를 가리고 사슴 다리가 말 다리를 가리고 있어서 '다 그리면 재미없다'(p.35)는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남자를 김홍도일 것이라고 말한다. 


겸재 정선의 <사문탈사>는 66세에 그린 것과 80세에 그린 작품이 있는데 저자는 이 두 그림을 비교하여 보여준다. 66세때 그린 그림을 뒤집으면 80세 때 그림의 구성이 되는데 이는 조선시대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방법이라고 한다. 그림의 좌우를 반전시켜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소를 탕 사람은 율곡선생이지만, 그림 속 배경은 정선이 살던 시절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름드리인 측백나무가 있다. 또한 정선은 중국물소를 그리던 66세 때와 달리 80세에 이르러서는 황소로 바꾼다.


이런 정보를 갖고 그림을 보면, 그림이 다시 달리 보인다. 


김득신의 <밀화투전>이라는 그림은 김득신이 그린 풍속화첩에서 유일하게 실내 장면이다. 아무래도 도박을 하는 장면이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김득신은 초상화에서 사용했던 명암법을 풍속화로 넓혀 사람들의 얼굴에 명암을 넣었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상류사회의 놀이장면이 나온다. 선비 숫자와 기녀 숫자가 짝이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임하투호>에서는 기녀가 한 명만 나와서 "짝 안 맞으면 결코 놀지 않으리'란 법칙에서도 예외가 있다고 알려준다. <납량만흥>을 설명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음주가무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덥지도 춥지도 않아야 술과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다며 그러한 풍토적 차이에서 우리의 음주가무가 성행했으리라고 한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납량만흥>에서는 우리 춤이 하체가 아닌 상체 중심의 춤임을 설명해준다. 신윤복의 그림에서는 기녀와 선비의 놀이에서 늘 주인공은 기녀이며, 그림 속 주인공들의 시선을 통해 그날의 분위기를 짐작해본다.


만약 내가 혼자서 그 그림들을 보았더라도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쓰며 보지 못했을 것 같다. 알고 보면, 그림에서 이런 장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저자가 2관에 배치한 조선 궁중기록화는, 솔직히 말해서 내 관심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어서 앞부분에 비해 재미가 덜했다. 다만, 문화절정기인 숙종 때와 영정조 시절의 그림에서 디테일한 차이가 나타나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상큼발랄할 에세이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책의 제목과 표지를 보고, 막연히 그런 책일 거라 생각했다. 최지은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건 완벽한 나의 실수이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작가의 마음이 읽혀졌다.


나는 가족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다. 다른 부분보다, 특히 나는 가족이나 집안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정한 편이다. 살갑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최지은 작가는,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를 흐릿하게 기억합니다. 처음은 나의 이름을 읽고 쓰는 것. 다음으로 할머니의 이름, 아빠, 언니, 돌아가신 할아버지, 큰아빠, 큰엄마, 작은고모, 작은고모부...... 가족들의 이름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호칭이 아니라 이름을 기억하는 것, 호칭과 이름을 연결하는 것, 그리고 나의 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적고 잠시 바라보는 것. 그것이 할머니와 나의 단란한 놀이였습니다." (p.22)


"나의 불행과 어머니의 부재를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의 이름을 나의 손으로, 나의 글씨로 받아 적어본 적 없으니까. 단 한번도 "엄마"라는 말을 소리 내어 불러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나에게 어머니는 '없는 세계'였습니다. (p.22)


어린 시절, '나'가 가지지 못한 것, '나'에게 없는 그것으로 인해 친척 집에 가면 늘 뭔가를 망가뜨리는 사람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벽하지 않은 것. 사람들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진실이고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면, 부족하거나, 정상이 아닌 것으로 결정해버린다.


작가에게 가난과,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조손가정이라는 '사정'은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형편에 무엇이든 망가뜨리면 할머니가 곤란해질 것'(p.73)을 걱정해야 하는 아이는 '만지는 것'보다 '보는 것'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밭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는 것보다 눈 내리는 정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고 파도 속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 저만치서 바닷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물건을 사러 가서도 "착용해보세요" 권하는 직원의 친절에 "그냥 볼게요"로 답하는 것이 편해졌다. 물론 내 것을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p.73)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 작가의 환경이나 작가의 주변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성향상 그렇게 되는 사람도 있다. 결국은, 그것이 나의 모자람과 나에게 없는 '부재'의 대상때문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작가는 글을 써서 내보낸 자신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송신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작가가 원하는 대로 읽지 않은 독자일 수 있다. 나와 작가의 상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지 않겠나. 많은 부분, 나와는 다른 상황인식, 그리고 다른 감정선을 느껴서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에는 좀더 밝고, 가벼운 글로 다시 만나고 싶다.


"어려서 할머니의 돌봄을 받고, 할머니로부터 스스로 돌보는 법을 배운 내가 이제야 할머니를 돌보는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예외 없이 완전한 타인의 돌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흙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다가 되어 완전히 되돌아갈 수 있도록."(p.84)


"한 사람의 부재는 세계를 전에 없던 방식으로 뒤흔든다. 한 사람이 스스로 사라진 구멍은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한 사람의 자살은 남은 사람의 세계를 틀림없이 파괴하고 영영 복구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만다. 녹지 않는 눈송이가 허공에 멈춰 있는 '겨울' 속에 한참을 가두어두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내가 또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봐. 이파리 하나라도 상하게 만들까봐. 나는 얌전히 조심한다. 사라지지 않는 누군가의 숨결이 내 안에서 흐르는 것을 느낀다."(p.105)


"나는 순한 어린이였습니다. 크게 말썽을 피우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는 어린이가 아니었어요. 조손가정의 어린이로서 '나는 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말자, 무엇이든 적당히 잘하자' 하는 마음이 늘 앞섰습니다. 조용하고 희미하지만 커다랗고 무변하게 늘 내 앞에 서 있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그때의 어린이는 몰랐지만 할머니는 걱정했을지 모릅니다. 내 앞에 서 있는 그것이 나보다 더 크게 자라날까봐."(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