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ㅣ 위픽
이혁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이 책의 제목은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이다. 그러나 책의 전면에는 "어느 늙고 미친 여자가 이 하찮은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고"라고 적혀 있어서, 그게 제목인 줄 알았다. 그럼으로써 이 책은, 내 시선을 끈 셈이다. 게다가, 저 여자는 왜 그런 일에 목숨까지 건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인데, 이 시리즈의 책들은 이런 표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단편소설 시리즈인 위픽도, 이혁진 작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독서동아리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전작들을 통해 작가는 계급적 차이에서 오는 개개인의 서로 다른 입장과 관계를 이야기해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서도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현실 세계에서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해왔던 '윤리적 딜레마' 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완전자율주행 자동차 '슈마허'를 만든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세희와 그 자동차를 개발하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모든 것을 바친 재호, 재호가 없는 가정을 지키며 아들 건주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아내, 딸 애나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며 돈을 벌고 있는 매튜, 남편과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직하다 한 아이와 부딪쳐 교통사고를 당한 영인.
모두의 입장에서 그들이 하는 행동은 정당성을 갖는다. 혹은 그렇게 해야 하거나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완전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든 재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그는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동용 이동의자인 '무버'에 의존하여 살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건주는 걷기를 포기하고 '무버'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살아간다. 아내는 그런 건주가, 걸을 수 없을까봐 걱정을 한다. 그래서 건주와 아내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고, 학교에서는 '무버'로 인해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읽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완전자율주행은 아니지만, 인간의 두 다리를 대신해서 이동하고 있는 '자동차'하고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아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뚜벅이이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차'를 운전해서 가지 않으면 가지 않으려고 하거나, 걸어가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결국 아이들이 무버에 의존해서 걷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절대 낯설지가 않다.
최근에 자율주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보니, 자율주행으로 움직이는 이동수단들의 윤리적 선택과 윤리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 책에서 세희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슈마허의 기능을 데이터에 입각한 경제논리로 학습을 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교통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간이라면 자신의 의지로 어떤 선택을 하였을 것이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되지만, 자동차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목적으로 가지고 정해진 선택지를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데이터를 학습시킨 사람, 즉 회사의 책임이 아닐까?
"이걸로 슈마허에게 가르쳐줘. 전봇대를 받아 탑승자를 다치게 할 바에야 길고양이를 치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는 걸. 애들한테 걷어차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가르쳐주듯, 세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 이미 다 있는 거, 우리 다 하고 있는 거야. 보험사에는 평가액, 은행에는 신용 점수가 있고, 결혼 정보 회사에도 입사 시험에도 학교 시험에도 다 있잖아. 등급, 석차, 점수. 우리 이마엔 이미 바코드가 찍혀있어. 리더기만 들이대면 '삑' 하고 얼마짜린지 다 나와.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p.19)
슈마허가 사고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직관이나, 돌발 상황에 따른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세희의 말대로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할 뿐이지 이미 급이 나눠져 있고, 그 잣대에 따라 많은 것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 데이터를 이용해서 그 데이터가 정해준대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인간은 '양심'의 소리를 듣거나,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저자는 재호의 아내와 영인을 통해 다른 생각을 전한다.
"늘 그래, 사는 건 계획과 예상을 벗어나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내는 재호를 봤다. 그러니까 가르쳐줘야 할 건 기준이야.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 이유가 어떻든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지. 이제 알겠어. 내가 제일 못했던 게 그거라는 걸, 그래서 애가 지금 이렇게 됐다는 걸. 아내는 후회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나부터 해야지, 기준을 지켜야지. 아무리 울고 떼쓰고 날 미안하게, 아프게 해도 상관없어. 나쁜 엄마라 해도 괜찮아. 맞는 건 맞고, 틀린 건 틀려, 멀쩡한 두 다리로 태어난 건 고마운 일이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p.53)
"우리가 가르치는 것도,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것도 원칙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완전하다고 착각하도록 떠받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작고 불완전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이끌어줘야 하는 사람들이죠."(p.78)
기준과 원칙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기준과 원칙,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인가를 남보다 더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남을 짓밟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와, 부모를 잃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물론 평균적으로) 좀더 쉬운 쪽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살면서 어떤 기준과 원칙을 정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도, 세상까지도 사랑"(p.163)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고통을 알죠. 사랑만이 고통에도 의미를 주니까요. 그 고통엔 의미가 있어 더욱 고통스러우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는 것도 의미가 있는"(p.164)것이므로 단단하고 녹슬지 않는 그 마음,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더 붙인다면 "용기"일 것이다.
"그게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능력이고 자기 자신의 일부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무리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상황이 살다보면 생기니까. 할 수 있는 건 해야 해. 그걸 하지 않는 건 선택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거야." (p.195~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