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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는 아이 ㅣ 장애공감 어린이
뱅상 자뷔스 지음, 이폴리트 그림, 김현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22년 3월
평점 :
그래픽노블 혹은 만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묘한 감동이 내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처음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을 때는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숨을 참는 아이"라는 제목은 이 책을 선택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원제가 Incroyable 인 것 같은데... 굳이 이런 제목으로 바꿨어야 하는지... 벨기에문학상 만화 부분에서 최고작품상, 브뤼셀 국제 만화축제에서 그래픽노블 최고작품상을 받은 작품이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그래픽 노블 최종 후보로도 올랐다.
어쨌든 이 책이 나의 눈길을 끈 건 바로 아이가 있는 공간 때문이다. 서재일까? 아니면 도서관? 우리는 책장을 넘겨서 루이의 방문을 연다. 특이하게 시작부터 막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1983년 가을, 사람들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 벨기에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아,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시절이 마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처럼 들리다니... 나의 기억 속에 카세트테이프는 음악을 듣고 음악을 녹음하던 훌륭한 미디어였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 이야기 속 배경은 1980년대이다. 벨기에는 3개 국어를 쓰며, 국왕이 있는 나라이다. 루이는 이곳에 사는 아주 평범한 아이다. '평범하다'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누군가 먹고 버린 바나나 껍질처럼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아이, 루이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P.6) 체호프가 "무대 위에 권총이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총을 쏜다."고 말한 것처럼.
루이는 열한 살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조잘조잘 떠들고 놀아야 할 나이의 루이지만, 학교에서도 는에 띄지 않으려는 듯 움직이고, 도서관에 푹 파묻혀 책을 읽으면서 오로지 혼자 있을 수 있는 집에 갈 시간만 기다린다.
자기만의 루틴을 지키며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루이. 코를 세 번 톡톡톡 친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없는 아이처럼 군다. 일생 생활에 하나하나 점수를 부여하고 그 점수를 계산한다. 엄마 생각을 안하면 200점, 하얀 선을 밟지 않고 건너면 60점, 정해진 시간 안에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500점을 넘기기 위해 이런저런 행동을 반복한다. 루이의 이런 행동은 '강박적인 반복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집으로 가면 루이는 자기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카드 기록하기. 갖가지 정보들을 작은 카드에 기록해서 주제별로 모아두는데 이 카드만 해도 무려 1500장이 넘는다. 루이의 카드함은 도서관의 대출카드보관함과 똑같다. 루이의 방은 하나의 도서관이다.
조금 '독특한' 루이는 벨기에 국왕과 친하다. 이 벨기에 국왕 필리프는 루이의 머릿 속에 살고 있다. 물론 필리프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뭐랴고? 머릿속이나리.... 아냐...인졍 못 해!"(P.24) 루이와 필리프는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다. 늘 루이 옆에서 함께 하는 친구.
물론 가끔 조상님 유령들이 나타낼 때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때도 있다. 루이는 언제나 형편 없는 녀석. 멍청한 녀석, 어디서든 대장이어야 한다고 다그침을 당한다. 점점 더 크게 루이를 위협하지만 필리프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루이는 "저리 가! 넌 그냥 내 머릿속에 사는 바보 장난감이잖아!"(P.33) 라며 화를 낸다. 그래도 필리프는 가만히 루이 옆에 눕는다. 루이는, 그렇다. 아픈 아이다. 마음이 아픈 아이다. 매일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사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루이는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 일주일동안 아주 열심히 자료를 준비했지만, 평소 루이의 관심을 끌던 주제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주제를 골랐다. 왜냐면 눈에 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아주 우연히도 진드기 한 마리 때문에 루이의 일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맨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대 위에 등장한 어떤 것이든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드기일지라도 말이다. 학교에 늦어버린 루이는 허둥지둥 달려가지만 발표자료를 집에 두고 간다. 발표 자료가 없는 루이는,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주제에 대해 원고 없이 발표를 시작한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눈길을 받지 않던 아이였는데, 루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로 발표를 시작하자 아이들은 루이에게 집중한다.
루이는 어쩌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살게 된 걸까? 좋아하는 주제를 신나게 이야기하던 루이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온 루이와는 전혀 다른 아이였다. 그렇게 신나게 발표를 한 루이도 하늘을 날아갈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물론 나머지는 평소와 똑같았다.
루이는 혼자서 집을 떠난 적이 없지만 새로운 주제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숨소리만 들리는 전화를 오늘도 받았지만, 루이는 다 잘 될거라며 길을 떠난다. 아빠가 역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오늘도 아빠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엄마의 유골함을 늘 곁에 두고 있는 루이는 길을 떠날 때도 가방에 넣어서 간다. 루이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없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순간 다시 조상님 유령들이 나타난다. 우울중, 불신, 자기비하... 루이의 의지를 꺾는 수많은 소리들.
발표대회를 무사히 끝내고 난 후, 루이는 여전히 강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지역 발표대회에서 잠깐 생기를 되찾았던 루이가 우연히 다시 전국 발표 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용기를 얻는다. 구겨 던져 놓은 발표 자료도 다시 꺼내고, 그동안 들어가보지 않았던 엄마의 서재에도 들어간다. 엄마 사진도 보고, 아빠의 편지도 본다. 엄마 아빠가 없었더라면 루이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리고 보려고 하지 않던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루이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점점 루이에게 빠져 들었다. 조금 독특한 행동을 하고, 남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루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생기가 넘친다. 자신을 옭아매는 조상님 유령들도 혼자서 통제할 수도 있는 아이다. 7막에 이르면 루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왜 루이가 그렇게 강박에 갇혀 살고 있는지, 늘 들고 다니는 엄마의 유골함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필리프는 왜 루이 옆에 있는지....
루이의 마음을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루이 곁에서 루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했지만 아빠는 그러지 못했다. 외삼촌을 통해, 그리고 학교 선생님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때로는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들이 내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를 믿고 이해해주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훨씬 가까워질 수 있다. 한 걸음 내 딛는 그 걸음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