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 읽은 게, 전권을 다 읽은 것으로는 10번쯤 되는 것 같다. 1부와 2부의 경우는 열번을 훌쩍 넘겨 읽었고. 토지를 잡고 읽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신기해 했다. 지겹지 않으냐, 물었던 사람들에게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었다. "하나도, 지겹지 않아."

지금에 와서 고백을 해 보자면, 사실 토지 4부는 몹시 지겨웠다. 당시에 읽을 때. 3-4부의 주축 인물이 되는 임명희, 조찬하, 조용하, 선우신, 유인성, 임명빈, 서의돈, 이상현- 이런 인물들을 나는 사랑할 수 없었고, 그들 사이에 간간히 나오는 서희와 길상의 이야기 덕분에 지겨운 이야기를 겨우겨우 읽어 갔다고 해야 하나. 처음 읽을 때에는 그랬다. 허나 워낙에 하나의 소설을 머리속에 집어 넣어 요약, 정리, 분석까지 마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의 성격상, 읽다가 젖혀 두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 토지를 읽을 때, 나는 토지와 씨름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게, 아마, 95년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 가기 귀찮아 하는 나를 대신해, 제 학교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주었던 친구는, 3부 2권을 읽다 포기하고 말았었고, 나는 하루 두시간씩, 꼬박꼬박 토지에 시간을 헌납했다. 토지의 마지막권을 덮던 순간에, 나는 토지가 지긋지긋 해 져서, 뭐랄까, 일종의 숙제를 해 치운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당시 최고로 유행했던 대하소설들을 읽어 젖히고 있을 때였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아리랑,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홍명희의 임꺽정, 등등이 95년도에 내가 읽었던 대하소설들이다.)

토지를 다시 잡은 건, 대학 2학년 때, 15-6세기 국어를 공부하면서였다. 15-6세기 국어의 흔적은 경상도 말에 많이 남아있다는 말씀을 하시던 중세국어 교수님은 늘 나를 탐내셨다. 조건이 갖추어 졌으니 중세국어 전공을 하라고. 나는 청개구리 심보로, '토지'를 전공하겠노라, 했었다. 나에게는 '토지'를 연구할 조건이 훨씬 더 잘 갖추어져 있노라고. 토지의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내 모태어인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유치하게도. 그래서 토지를 다시 읽었다.

토지를 이해하기에, 대학 2학년, 실제적 나이는 만 열여덟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너무 어렸다. 허나 한번 읽었던 가락이 있어서 인가, 3-4부의 고비도 쉽게 넘겼고, 나는 토지의 매력에 빠져들어, 마지막 권을 덮던 그날 바로 1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나의 무게 중심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읽을 때는 당연히, 최서희, 라는 한 인물의 매력에 푹 빠졌다. 토지는 서희를 위한 연대기였고, 모든 것은 서희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 같은 것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집중했던 사람은 최윤국, 서희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번째 읽을 때, 비로소 나의 눈에 김길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최서희의 남편'이 아니라 '김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김환, 윤씨부인의 불륜의 자식이자 서희의 씨다른 삼촌, 형수를 강탈해간 姦夫(간부), 김환- 구천이였다.

김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토지로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참으로 괴로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김환, 이라는 인물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허무, 그의 정열, 그는 왜 그리 살아야만 했나, 그의 매력에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들면서도 나는 그를 인정하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김환의 문제는 거의 2년간 나를 괴롭힌 숙제였다. 토지가 싫어질만큼.

토지의 인물들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거기에서 딱 멈추어 버렸다. 나는 김환을 이해할 수 없었고, 나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억지로 논문을 써야 했을 때도, 나는 김환의 이야기는 얼렁 뚱땅 넘겨버리고 말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 논문이 참으로 창피하다. 김환, 이라는 인물은, 토지의 중심축 중의 하나니까. '한의 정서'라는 말을 표현하는데 김환만큼 적절한 인물은 없고, 토지의 인물들 중, 손꼽을만큼 매력적인 인물의 하나이니까.

토지를 다시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건, 나남출판사에서 토지 출간소식을 듣고나서였다. 2002년 1월에 출시된다고 했었고, 나는 그걸 살 결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토지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받아서 제일 좋은 위치(침대 머리맡)에 예쁘게 꽂아 놓고도 나는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토지는 맛있는 과자를 아껴먹는 듯한 기분으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이번에 내가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또 있다. 송영광, 송관수의 아들, 백정의 외손자, 아름답게 생긴 남자(하기야, 토지의 주인공급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재자가인이다.), 눈에 띄지 않을만큼 다리를 저는, 관골에 보일듯 말듯한 상처가 있는, 그리고... 양현이 사랑하는. 양현을 사랑하는.

나는, 윤국이를 몹시 사랑했다. 그 윤국이 사랑하는 양현을 앗아간 남자, 영광을 나는 참 미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매력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으며 나는 김길상, 김환, 이용, 최윤국에 이어 또 한명의 연인을 얻었다.

토지를 읽을 때 마다 늘 설렌다. 이번에는 또 누구를 사랑하게 될까, 하는 기막히게 기분 좋은 설레임이다. 무심히 넘겼던, 단순한 엑스트라로 넘겨버렸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새로이 발견하고 사랑에 빠질 때 마다, 나는 가슴이 뛴다.

용이와 월선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전혀 새로운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고 김환과 별당아씨의 사랑을 읽고 김환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환희에 떨었었다. 서희와 길상, 양현과 영광, 인실과 오가다 지로, 명희와 찬하, 상현, 기화와 상현, 석이.

사랑의 깊이가 이렇게도 깊을 수 있나, 두번 세번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

집필 기간 26년, 원고지 장수 5만장, 회당 사용 잉크 10통. 그 동안 박경리는 유방암을 앓았고 사위(시인 김지하)의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홀로된 어머니와 딸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삶이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그의 삶이 불행했음에 감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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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보급판 문고본)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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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고달픈 일이다. 그것이 부모이든 형제이든 하늘의 도우심으로 나와 아주 잘 맞는 사람과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은 더 없는 행복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 된다. 우리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 있는데, 부부는 인륜이고 부모자식은 천륜이라, 부부관계는 끝장을 내고 돌아서는 순간 남이 될 수 있지만 부자관계는 그럴 수 없으니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끊어 내 버릴 수 없는 관계에 놓인 사람과 맞지 않는다면, 또, 부부관계는 끝장이 났다 해도, 내 아이의 아비, 또는 어미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계속 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고통에 빠진 나의 삶을 건져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무리 맞지 않는다 해도 가족은 가족이다. 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고 있고, 깊이 사랑하고 있기에 깊이 상처받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섬세한 테크닉을 요하는 일이다. 나이 먹어가며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상처주지 않는 방법, 내가 상처받지 않는 방법과 더불어 남과 함께 살아가는 테크닉을 연마해야 한다. 그것이 일종의 사회성 훈련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맞지 않는 사건, 맞지 않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 등등은 필사적으로 피해 가는 편을 택하는 사람이다.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춰 가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이고, 힘들게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붓느니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한가지 더 한다 주의다. 나와 잘 맞는 사람, 나와 잘 맞는 일 등등을 할 때는 그다지 특수한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다. 그건 그냥,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행동의 기반에 애정이 깔려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세상은 그다지 만만하지가 않다. 나와 맞지 않지만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이 있게되고-예를 들면, 중고등학교의 담임선생이라든지, 대학동기에 학번까지 붙어있어 끊임없이 같은 분임 토의조에 속하게 되는 친구라든지 직장동료라든지 하는- 나는 죽어라 피해 가는데 상대방이 괜히 나에게 달려와 시비를 건다든지 하는 경우. 사실 후자의 경우는 말할 데 없이 난감하다. 이럴 때 삶은 나름의 테크닉을 요구하게 된다.

틱낫한 스님의 이 책은 그러한 삶의 테크닉 하나를 알려준다. 가슴속에 일어나는 화로 인하여 나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 때에 나를 다독이는 방법,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이지만 피해갈 수 없는 사람일 때에 그 사람을 감싸안고 사랑하며 갈 수 있게 하는 방법 등을 가르친다. 물론 그것 뿐만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왜 화를 내는가에 대한 명상을 하게 하고,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래서 나의 삶을 평화롭고 안온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돕는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엄마나 언니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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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새
송우혜 지음 / 푸른숲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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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 또는 미래-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쓰는 소설이나 만화를 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이질감이다. 이 이질감은 한국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내가 일본의 사고방식이 드러난 소설을 볼 때의 이질감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역사물을 볼 때의 이질감은 배경과 주인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이질감이 아닌 괴리감이라고 표현을 해야겠다. 맞다. 정확한 표현이다. 괴리감.

이러한 괴리감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역사 소설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전에 썼던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에서도 여주인공은 19세기로 뛰어든 20세기의 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배경과 인물의 괴리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껄끄러워지게 만든다. 이러한 괴리감은 역사 로맨스 소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난다. 줄리 가우드의 역사 로맨스에 나오는 현대적으로 발랄한 여주인공들이나 김지혜의 『공녀』에서의 예영의 행동 양식, 20세기 초, 조선의 여인으로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던 이선미의 『경성애사』에서의 나경. (아, 경성애사는 정말 잊고 싶은 소설이다. 생각하면 괴롭다. 쯧.) 그러한 소설들에서의 여주인공은 매직아이의 영상 같다. 배경과 잘 버무려져 얼핏보면 숨겨져 있는 것 같으나 집중해서 읽다보면 완전히 도드라져서 배경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되고 마는.

그런 소설들의 틈바구니에서 송우혜의 『하얀 새』는 배경과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으로 가치를 가진다.

17세기,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대단한 명문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역시나 이름난 명문 거족의 집안 외며느리로 들어가게 되는 이승효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어설프게 독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시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 평등사상을 대입한다거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인공 승효는 17세기, 명문 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대부 가문의 며느리가 된 딱 그 차원에서 만큼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몸종이 도망을 치자 분노에 치를 떨고 자신의 몸종이 도망친 것에 수치스러워 하며, 집안을 위협하는 면천된 종의 이야기를 듣자 당장에 살의를 느끼고 실제로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거나 얌전만 빼는 양반가의 새아씨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적이 들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도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되, 뒤에 가서 그것이 사대부가의 아낙으로서 체통을 잃은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7. 불속의 길 中), 강화도까지 쳐들어온 몽고군에게 잡혀 인질이 될 때에는 앞서 도망치던 자신의 몸종 철원네에게 "달아나라! 둘 다 죽을 필욘 없다!"(p.220) 라며 그녀를 도망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 시대와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을 보여주었던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라 하겠다.

「"썩 나가거라! 네 예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감히 방자한 짓거리를 하느냐."
서릿발이 돋도록 차가운 옛 주인의 얼굴을 흘끗 본 유월이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서 불만스런 얼굴로 나갔다.
그 여자가 뉜가. 어떤 관계인가. 지금같이 어려운 때 그런 연줄을 만나면 잘 다독여서 덕을 좀 입어야 할 텐데 어찌 그렇게 야멸차게 내쫓는가.
주위에서 시끌쩍하게 말이 일어났지만, 승효는 먼저 자세로 도로 누워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데서 탄식이 일었다. 난세, 난세…… 하고 아우성치는 소리들이 높더니 내 이제 정녕 난세의 얼굴을 보았구나. 도망쳤던 종이 비단으로 몸을 감고 어엿하게 얼굴 쳐들고 제 발로 나타나 건들거려도 주인으로서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으니 이 이상 무엇을 더 볼 게 있으리요. 가슴에 커다란 얼음덩이가 들어앉았다.」
송우혜, 『하얀 새』, 푸른숲, 1996, p. 230


이 장면을 읽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견문이 넓고 도량이 활달하다 하나 평생을 규중에 갇혀 지내는 여인네의 몸이다. 읽은 책이라 해 봐야 공자왈 맹자왈 또는 내훈(內訓)정도가 다 일 것이니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난세란 고작, 도망친 종을 치죄하지 못하는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아는 만큼 보는 법이니까.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승효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끝까지 시대와 밀착되어 있는 승효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승효의 강인한 성품과 엄격한 유교 윤리는 '심양'이라는 한 지점과 '장쇠 일가'라는 한 노비의 일가를 통하여 시대에 맞게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참 괜찮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96년에 책방에서 빌려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뒤로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책대여점의 도장도 찍혀있고 스티커도 붙어있었지만 뭐 어떤가. 괜찮은 책을 다시 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괜찮은 책들은 다시 좀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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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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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요약본을 싫어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때도 시험을 볼 때, 족보라는 것을 보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렇다고 족보의 도움을 전혀 안받은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의 요약본들을 읽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 요약본을 읽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요약본을 읽고도 다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숱하게 많은 요약본을 정본인 것처럼 속여서 읽히는 우리 출판계도 원망스럽고(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쩔 수없이 요약본이 돌 수밖에 없다. 너무나 방대한 양이다. 그래도 나는 싫다.), 어쨌든 그렇다. 나는 정본을 읽고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역시 그리스 로마신화의 정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제목 『변신이야기(Metamorphoses:變形譚)』에서 알수있듯, 이 책은 AD 1세기경 로마의 서사시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변신에 관련된 삽화들만을 모아서 만든 서사시다. 그러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니체가 그랬던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들이라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제우스를 필두로 한 헤라,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르메스 등등-의 매력은 그들이 인간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성질급한 다혈질에 호색한에 질투심이 강하고, 자비라고는 모른다. 특히 아폴론의 행동을 보라. 자신 앞에서 팬플룻 솜씨를 자랑했던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산채로 벗겨버리지를 않나 누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어머니 레토를 모욕했던 니오베의 14명의 자식을 살벌하게 죽여버리지를 않나. 막내 딸아이를 남겨놓고 니오베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단 한 명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대단하지 않은가! 인간이라면 조금쯤 마음이 흔들렸을 텐데.

제우스의 호색 행각은 현대의 바람둥이들의 모범책이 될만하고 헤라의 질투 역시 인간의 아내들보다는 한단계 위다.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된 레토가 헤라의 질투로 아이 낳을 땅을 찾지 못해 헤메고 다니다 델로스에서 겨우 아이를 낳게 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중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에게 질투란 칠거지악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흡사, 지나치게 잘 드는 칼날을 손에 들게 된 갓난 아이와 같이 느껴진다. 엄청난 권능을 가졌으나 그 권능을 제대로 제어할만한 이성을 갖추지는 못한 존재랄까. 때문에 아이의 손에 들린 칼날이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처럼, 신의 권능 역시 그렇다. 자신의 권능 때문에 자신을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쉬케와 에로스의 이야기랄까. 또는 다프네와 아폴론의 이야기도.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그들의 대단한 권능으로 도덕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할 뿐이다. 누이와 결혼을 한 제우스는 스스로 근친상간을 했음에도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 근친을 사랑하게 되는자를 엄히 다스리고 있으며, 신들의 대부분이 혼외정사에서 태어난 자식이면서도 인간의 혼외정사에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

그들에게 자비와 자제력이란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의 경우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보이고, 마음에 들어하는 특정인간을 편들어주는 것 역시 서슴지 않는다. 신들끼리의 미모 다툼도 치열하고, 인간을 속이는 것은 물론 신들끼리 속고 속이는 일 역시 비일비재하다. 미인계를 쓰기도 하고, 그물을 쳐서 잡기도 하고.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라니. 신=위대한 도덕군자(공자가 신의 반열에 드는 것을 보라.)로 대접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나에게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야 나는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올 한 해는 신화의 재미에 푹 빠져 볼 생각이다.

불 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정복해 볼 생각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죄다 정복하고 나면, 북구의 신화와 동양의 고대 신화, 인도의 신화까지 공부해 볼 생각.

세상에는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다. 신화를 모르고 죽었다면, 죽고 나서도 너무 억울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윤기는 천재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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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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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은데, 나에게는 독일이라는 나라도 그런 신기한 나라중의 하나다. 그 실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나라에서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나왔고 대부분의 철학의 본거지이자 발상지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설적이다. 실생활이 지나치게 합리적이기에 정신세계가 그렇게까지 발달을 한 것일까? 『소설의 이론』을 쓴 루카치가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 출신이라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 중의 하나다. (정말이지 『소설의 이론』은 놀라운 책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심연이 생기면 소설이 발생한다" 라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비유를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이 쓸 수도 있는 건가?)

호어스트 에버스는 독일 출신의 작가다. 그의 자서전 또는 일기 격인 이 책에서 나타나는 그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독일인의 합리적이고 깔끔하고, 정확한 생활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원칙중의 하나가 새 양말을 신었을 때는 피자를 시켜먹지 않는다(왜냐면, 시켜먹고 전혀 치우지를 않으니까. 새 양말을 신고 있다가 먹다 남긴 피자를 밟는 것만큼 낭패인 일도 없다.)는 것일 만큼 그는 게으르다. 심지어 그는 죽는 것조차 게을러서 하지 못하는(p.56)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게으름을 그다지 창피하게도 나쁘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먹고 살 일만 해결이 된다면, 그러니까 먹고 살 최소의 조건만 갖추어 진다면 그는 평생이라도 백수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별로 나빠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소설가 김훈이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노는 게 신성하다. 노동엔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노동에 의해 구성돼 있다. 나도 평생 노동을 했다. 노동을 하면 인간이 깨진다는 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늘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 둘이 노는 거다. 」
문학인, 2002년 가을호, 시공사, 2002,  P262∼277


호어스트는 김훈 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는 것의 신성함을 알아 혼자 잘 놀고 있는 사람이다. "놀고 있다." 하니 비아냥 같은데ㅡ 수사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의 놀이다. 그래서 그는 파괴되지 않은 인간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뭐.

그처럼 살아라 하면, 살 수 없겠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하나 보는 것도 꽤나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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