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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나는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요약본을 싫어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때도 시험을 볼 때, 족보라는 것을 보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렇다고 족보의 도움을 전혀 안받은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의 요약본들을 읽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 요약본을 읽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요약본을 읽고도 다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숱하게 많은 요약본을 정본인 것처럼 속여서 읽히는 우리 출판계도 원망스럽고(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쩔 수없이 요약본이 돌 수밖에 없다. 너무나 방대한 양이다. 그래도 나는 싫다.), 어쨌든 그렇다. 나는 정본을 읽고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역시 그리스 로마신화의 정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제목 『변신이야기(Metamorphoses:變形譚)』에서 알수있듯, 이 책은 AD 1세기경 로마의 서사시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변신에 관련된 삽화들만을 모아서 만든 서사시다. 그러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니체가 그랬던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들이라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제우스를 필두로 한 헤라,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르메스 등등-의 매력은 그들이 인간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성질급한 다혈질에 호색한에 질투심이 강하고, 자비라고는 모른다. 특히 아폴론의 행동을 보라. 자신 앞에서 팬플룻 솜씨를 자랑했던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산채로 벗겨버리지를 않나 누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어머니 레토를 모욕했던 니오베의 14명의 자식을 살벌하게 죽여버리지를 않나. 막내 딸아이를 남겨놓고 니오베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단 한 명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대단하지 않은가! 인간이라면 조금쯤 마음이 흔들렸을 텐데.
제우스의 호색 행각은 현대의 바람둥이들의 모범책이 될만하고 헤라의 질투 역시 인간의 아내들보다는 한단계 위다.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된 레토가 헤라의 질투로 아이 낳을 땅을 찾지 못해 헤메고 다니다 델로스에서 겨우 아이를 낳게 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중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에게 질투란 칠거지악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흡사, 지나치게 잘 드는 칼날을 손에 들게 된 갓난 아이와 같이 느껴진다. 엄청난 권능을 가졌으나 그 권능을 제대로 제어할만한 이성을 갖추지는 못한 존재랄까. 때문에 아이의 손에 들린 칼날이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처럼, 신의 권능 역시 그렇다. 자신의 권능 때문에 자신을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쉬케와 에로스의 이야기랄까. 또는 다프네와 아폴론의 이야기도.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그들의 대단한 권능으로 도덕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할 뿐이다. 누이와 결혼을 한 제우스는 스스로 근친상간을 했음에도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 근친을 사랑하게 되는자를 엄히 다스리고 있으며, 신들의 대부분이 혼외정사에서 태어난 자식이면서도 인간의 혼외정사에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
그들에게 자비와 자제력이란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의 경우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보이고, 마음에 들어하는 특정인간을 편들어주는 것 역시 서슴지 않는다. 신들끼리의 미모 다툼도 치열하고, 인간을 속이는 것은 물론 신들끼리 속고 속이는 일 역시 비일비재하다. 미인계를 쓰기도 하고, 그물을 쳐서 잡기도 하고.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라니. 신=위대한 도덕군자(공자가 신의 반열에 드는 것을 보라.)로 대접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나에게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야 나는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올 한 해는 신화의 재미에 푹 빠져 볼 생각이다.
불 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정복해 볼 생각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죄다 정복하고 나면, 북구의 신화와 동양의 고대 신화, 인도의 신화까지 공부해 볼 생각.
세상에는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다. 신화를 모르고 죽었다면, 죽고 나서도 너무 억울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윤기는 천재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