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새
송우혜 지음 / 푸른숲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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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또는 미래-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쓰는 소설이나 만화를 볼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이질감이다. 이 이질감은 한국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내가 일본의 사고방식이 드러난 소설을 볼 때의 이질감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니까 역사물을 볼 때의 이질감은 배경과 주인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이질감이 아닌 괴리감이라고 표현을 해야겠다. 맞다. 정확한 표현이다. 괴리감.

이러한 괴리감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역사 소설에서 흔히 발견된다. 예전에 썼던 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에서도 여주인공은 19세기로 뛰어든 20세기의 여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배경과 인물의 괴리감은 소설을 읽는 내내 기분이 껄끄러워지게 만든다. 이러한 괴리감은 역사 로맨스 소설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난다. 줄리 가우드의 역사 로맨스에 나오는 현대적으로 발랄한 여주인공들이나 김지혜의 『공녀』에서의 예영의 행동 양식, 20세기 초, 조선의 여인으로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던 이선미의 『경성애사』에서의 나경. (아, 경성애사는 정말 잊고 싶은 소설이다. 생각하면 괴롭다. 쯧.) 그러한 소설들에서의 여주인공은 매직아이의 영상 같다. 배경과 잘 버무려져 얼핏보면 숨겨져 있는 것 같으나 집중해서 읽다보면 완전히 도드라져서 배경과 전혀 다른 모양이 되고 마는.

그런 소설들의 틈바구니에서 송우혜의 『하얀 새』는 배경과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으로 가치를 가진다.

17세기,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대단한 명문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역시나 이름난 명문 거족의 집안 외며느리로 들어가게 되는 이승효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어설프게 독자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시대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 평등사상을 대입한다거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인공 승효는 17세기, 명문 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대부 가문의 며느리가 된 딱 그 차원에서 만큼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몸종이 도망을 치자 분노에 치를 떨고 자신의 몸종이 도망친 것에 수치스러워 하며, 집안을 위협하는 면천된 종의 이야기를 듣자 당장에 살의를 느끼고 실제로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거나 얌전만 빼는 양반가의 새아씨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적이 들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도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되, 뒤에 가서 그것이 사대부가의 아낙으로서 체통을 잃은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7. 불속의 길 中), 강화도까지 쳐들어온 몽고군에게 잡혀 인질이 될 때에는 앞서 도망치던 자신의 몸종 철원네에게 "달아나라! 둘 다 죽을 필욘 없다!"(p.220) 라며 그녀를 도망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 시대와 인물의 완벽한 일치감을 보여주었던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라 하겠다.

「"썩 나가거라! 네 예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감히 방자한 짓거리를 하느냐."
서릿발이 돋도록 차가운 옛 주인의 얼굴을 흘끗 본 유월이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서 불만스런 얼굴로 나갔다.
그 여자가 뉜가. 어떤 관계인가. 지금같이 어려운 때 그런 연줄을 만나면 잘 다독여서 덕을 좀 입어야 할 텐데 어찌 그렇게 야멸차게 내쫓는가.
주위에서 시끌쩍하게 말이 일어났지만, 승효는 먼저 자세로 도로 누워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데서 탄식이 일었다. 난세, 난세…… 하고 아우성치는 소리들이 높더니 내 이제 정녕 난세의 얼굴을 보았구나. 도망쳤던 종이 비단으로 몸을 감고 어엿하게 얼굴 쳐들고 제 발로 나타나 건들거려도 주인으로서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으니 이 이상 무엇을 더 볼 게 있으리요. 가슴에 커다란 얼음덩이가 들어앉았다.」
송우혜, 『하얀 새』, 푸른숲, 1996, p. 230


이 장면을 읽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견문이 넓고 도량이 활달하다 하나 평생을 규중에 갇혀 지내는 여인네의 몸이다. 읽은 책이라 해 봐야 공자왈 맹자왈 또는 내훈(內訓)정도가 다 일 것이니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는 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난세란 고작, 도망친 종을 치죄하지 못하는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아는 만큼 보는 법이니까.

소설의 결말에서 작가는 승효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끝까지 시대와 밀착되어 있는 승효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승효의 강인한 성품과 엄격한 유교 윤리는 '심양'이라는 한 지점과 '장쇠 일가'라는 한 노비의 일가를 통하여 시대에 맞게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참 괜찮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96년에 책방에서 빌려서 한번 읽었었는데, 그 뒤로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책대여점의 도장도 찍혀있고 스티커도 붙어있었지만 뭐 어떤가. 괜찮은 책을 다시 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괜찮은 책들은 다시 좀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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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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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요약본을 싫어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때도 시험을 볼 때, 족보라는 것을 보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렇다고 족보의 도움을 전혀 안받은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신화의 요약본들을 읽었던 것 뿐이었다. 나는 요약본을 읽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요약본을 읽고도 다 읽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숱하게 많은 요약본을 정본인 것처럼 속여서 읽히는 우리 출판계도 원망스럽고(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쩔 수없이 요약본이 돌 수밖에 없다. 너무나 방대한 양이다. 그래도 나는 싫다.), 어쨌든 그렇다. 나는 정본을 읽고 내 나름대로 요약, 정리하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역시 그리스 로마신화의 정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제목 『변신이야기(Metamorphoses:變形譚)』에서 알수있듯, 이 책은 AD 1세기경 로마의 서사시인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변신에 관련된 삽화들만을 모아서 만든 서사시다. 그러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니체가 그랬던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신들이라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제우스를 필두로 한 헤라,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르메스 등등-의 매력은 그들이 인간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성질급한 다혈질에 호색한에 질투심이 강하고, 자비라고는 모른다. 특히 아폴론의 행동을 보라. 자신 앞에서 팬플룻 솜씨를 자랑했던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산채로 벗겨버리지를 않나 누이 아르테미스와 함께 어머니 레토를 모욕했던 니오베의 14명의 자식을 살벌하게 죽여버리지를 않나. 막내 딸아이를 남겨놓고 니오베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며 단 한 명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대단하지 않은가! 인간이라면 조금쯤 마음이 흔들렸을 텐데.

제우스의 호색 행각은 현대의 바람둥이들의 모범책이 될만하고 헤라의 질투 역시 인간의 아내들보다는 한단계 위다.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된 레토가 헤라의 질투로 아이 낳을 땅을 찾지 못해 헤메고 다니다 델로스에서 겨우 아이를 낳게 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중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에게 질투란 칠거지악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흡사, 지나치게 잘 드는 칼날을 손에 들게 된 갓난 아이와 같이 느껴진다. 엄청난 권능을 가졌으나 그 권능을 제대로 제어할만한 이성을 갖추지는 못한 존재랄까. 때문에 아이의 손에 들린 칼날이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처럼, 신의 권능 역시 그렇다. 자신의 권능 때문에 자신을 상처 입히기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쉬케와 에로스의 이야기랄까. 또는 다프네와 아폴론의 이야기도.

신화를 읽고 있으면 신들은 그들의 대단한 권능으로 도덕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할 뿐이다. 누이와 결혼을 한 제우스는 스스로 근친상간을 했음에도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 근친을 사랑하게 되는자를 엄히 다스리고 있으며, 신들의 대부분이 혼외정사에서 태어난 자식이면서도 인간의 혼외정사에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

그들에게 자비와 자제력이란 찾아보기 힘들며 대부분의 경우 매우 편파적인 입장을 보이고, 마음에 들어하는 특정인간을 편들어주는 것 역시 서슴지 않는다. 신들끼리의 미모 다툼도 치열하고, 인간을 속이는 것은 물론 신들끼리 속고 속이는 일 역시 비일비재하다. 미인계를 쓰기도 하고, 그물을 쳐서 잡기도 하고.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라니. 신=위대한 도덕군자(공자가 신의 반열에 드는 것을 보라.)로 대접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나에게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야 나는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올 한 해는 신화의 재미에 푹 빠져 볼 생각이다.

불 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정복해 볼 생각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죄다 정복하고 나면, 북구의 신화와 동양의 고대 신화, 인도의 신화까지 공부해 볼 생각.

세상에는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너무너무너무 많다. 신화를 모르고 죽었다면, 죽고 나서도 너무 억울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윤기는 천재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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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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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들이 많은데, 나에게는 독일이라는 나라도 그런 신기한 나라중의 하나다. 그 실리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나라에서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나왔고 대부분의 철학의 본거지이자 발상지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역설적이다. 실생활이 지나치게 합리적이기에 정신세계가 그렇게까지 발달을 한 것일까? 『소설의 이론』을 쓴 루카치가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 출신이라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 중의 하나다. (정말이지 『소설의 이론』은 놀라운 책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심연이 생기면 소설이 발생한다" 라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비유를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이 쓸 수도 있는 건가?)

호어스트 에버스는 독일 출신의 작가다. 그의 자서전 또는 일기 격인 이 책에서 나타나는 그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하는 독일인의 합리적이고 깔끔하고, 정확한 생활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원칙중의 하나가 새 양말을 신었을 때는 피자를 시켜먹지 않는다(왜냐면, 시켜먹고 전혀 치우지를 않으니까. 새 양말을 신고 있다가 먹다 남긴 피자를 밟는 것만큼 낭패인 일도 없다.)는 것일 만큼 그는 게으르다. 심지어 그는 죽는 것조차 게을러서 하지 못하는(p.56)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게으름을 그다지 창피하게도 나쁘다고도 여기지 않는다.

먹고 살 일만 해결이 된다면, 그러니까 먹고 살 최소의 조건만 갖추어 진다면 그는 평생이라도 백수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별로 나빠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소설가 김훈이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노는 게 신성하다. 노동엔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노동에 의해 구성돼 있다. 나도 평생 노동을 했다. 노동을 하면 인간이 깨진다는 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늘 보면 검사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거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 둘이 노는 거다. 」
문학인, 2002년 가을호, 시공사, 2002,  P262∼277


호어스트는 김훈 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는 것의 신성함을 알아 혼자 잘 놀고 있는 사람이다. "놀고 있다." 하니 비아냥 같은데ㅡ 수사적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의 놀이다. 그래서 그는 파괴되지 않은 인간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뭐.

그처럼 살아라 하면, 살 수 없겠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하나 보는 것도 꽤나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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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어 보이
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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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크리스마스에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란 쓸쓸한 법이어서, 아주 괜찮은 소설이 아니고는 나를 위로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유쾌한 기분을 가지고 싶어 선택한 책이었고, 그 선택은 적절하고도 탁월하였다. 뭐랄까, 여러모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이랄까. 크리스마스처럼 가볍고 유쾌하며 가슴 한켠이 따뜻해 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데는 주인공 윌 프리먼의 캐릭터 탓이 가장 크다.

우리 고전소설에서는 이름으로 사람의 미래를 보여주는 명명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자면 춘향(春香:봄의 향기-아름다운 여자), 몽룡(夢龍:꿈에 용을 보다-과거 급제의 암시) 이런 식의 이름으로 주인공의 외모와 성격과 이야기의 미래까지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런 이론으로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재미있다. Will freeman.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이름을 가진(뭐, 주인공 이름의 철자가 저게 아니라면 배째라. 날 더러 어쩌라고. ^^) 주인공은 36살의 부유하고 쿨한 백수다.

윌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작가는 잡지책을 펼쳐 자신의 쿨 지수(指數)를 세는 윌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윌의 평소 생활 패턴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까 윌의 평소 생활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옷 한 벌에 300파운드(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도대체 얼마지? 외국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가 없으니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이상의 돈을 쓰고, 머리 자르는데 최소한 20 파운드의 돈을 쓰고, 적어도 5장 이상의 힙합 앨범(36살에 말이다.)을 가지고 있고, 엑스터시(마약)를 복용한 적이 있고, 일년 연봉은 4만 파운드(그러니까, 이게 얼마냐구.)가 넘고, 죽도록 일'만' 할 필요도, 솔직히 일'을' 할 필요도 없는, 그런 (본심을 털어놓자면)부러워 죽겠는 백수다. 정말 유명한 캐롤 하나를 작곡한 아버지 덕분에 그는 하루의 시간을 주체 못해 꽉 막힌 런던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별난 취미까지 가지고 있다.

36살이 된 나이에 너바나를 듣고(왜 들으면 안되지?), 결혼은 끔찍하고 아이는 혐오스럽고(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이루어 놓은 거라고는 남성잡지에서 자신을 쿨하다고 판명해준 사건 정도일 뿐(음, 이건 좀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룩해 가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이지만 윌은 자신의 삶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가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출근해 버린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일 때도 있지만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못할 정도가 되면 차를 몰고 나가 꽉 막힌 런던 시내를 드라이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사회에 편입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낙오자라고 하기는 힘들고, 단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 어른의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혼, 직업, 아이, 책임 등으로 대변되는 성인의 사회에서 그는 자유롭기를 원하며, 충분히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작가 닉 혼비는 그렇게 살아가는 윌이 그다지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건데?" 라고 묻는 듯 하다.

만약 이 소설이 그런 윌의 이야기로 그쳤다면 소설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처럼 유쾌한 소설이라는 데는 별 변함이 없겠지만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한 소설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소설은, 이미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윌의 이야기와 아직도 아이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외부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고 스스로도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커스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가며 두 사람의 차이를 점점 좁혀가고 두 사람이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을 중심 축으로 전개된다.

조울증인 채식주의 히피 엄마 아래에서 살아가는 마커스는 덕분에 괴짜로 보인다. 실제로도 괴짜인 셈이고.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만 엄마 피오나는 그를 이해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그는 엄마가 그를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단 둘이니까,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처음 윌에게 접근하는 단 하나의 이유 역시 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가슴 아프다. 마커스의 선하고 어른스러운 성품은 그의 집에서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드러난다.

「윌은 마커스가 착한 아이라고 제대로 알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냥 괴짜에다 골칫거리 꼬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다른 면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착했다. 윌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순종적이고 불평이 없다는 면에서 착한 게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착했다. 쓰레기 같은 선물더미를 바라보면서 그걸 엄마가 사랑으로 정성스럽게 골랐다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반쯤 남은 유리컵을 보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뭐 이런 것도 아니었다. 마커스의 컵은 정말 철철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세상에는 이렇게 북슬북슬한 스웨터와 악보 따위는 부모의 면전에 던져버리고 닌텐도를 내놓으라고 떼쓰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면 정말로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닉 혼비, 『About a Boy』, 문학사상사, 2002, p. 202


하지만, 마커스의 그러한 장점은 93년에 초등학교 5학년인 그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착하지만, 뭘 어쩌라는 말인가. 마커스의 그러한 성품 덕에 그는 친구들에게 사탕세례를 당하고, 운동화를 빼앗기고 놀림을 당하고, 얻어맞는다. "어른"이자 "엄마"인 피오나는 자신의 확고부동한 삶의 철학 때문에 마커스의 문제가 그에게 그야말로 '실존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착하고 어른스러운 마커스는 그것을 엄마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마커스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이'이자 '남'인 윌이다.

윌의 옆에서 열심히 퇴행을 거듭한 마커스는 떼쓰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겁하던 아이에서, 노래를 부르려는 엄마에게 "아, 제발, 엄마. 그것만은 참아 줘."라고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되고, "왜 그러니. 넌 노래하는 거 좋아하잖아. 조니 미첼 좋아하면서." 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에게 "난 싫어. 이젠 아냐. 나는 빌어먹을 조니 미첼을 증오해."(p. 339)라고 쏘아붙일 줄 알게 된다.

윌이 마커스를 만나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면 마커스는 윌의 덕분에 아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좀 더 만사를 편안하게 보게 된 것 같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윌은 적어도 한 가지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는 건 현명하지도 못하고 친절하지도 못한 일일 터이다. 사실 요즘의 마커스는 그리 다루기가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자기 일을 해결 할 수도 있었고, 일종의 껍데기가―그러니까 그 껍데기는 방금 윌이 허물 벗어버린, 그런 껍데기였다―생겼다고나 할까. 그는 김이 빠지고 평범해졌으며, 다른 열두 살짜리들처럼 떠들썩하고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윌은 그의 껍데기를 잃고, 그의 쿨함을 잃고, 거리를 잃어버린 채 겁에 질려 상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첼과 함께 있어야만 했다. 피오나는 마커스의 커다란 일부를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외상환자 병동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게 되었다. 마커스는 자신을 잃어버렸지만, 학교에서 무사히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같은책, p.338-339


작가는 어른이 된 윌의 성장 역시 성장이라고 말하고, 아이가 된 마커스의 변화 역시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지 변화에 찬사를 보낼 뿐, 어른이 되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흔히 하는 이야기들처럼,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당시에는 유행가였다- 라는 말 그대로 지금은 '세월'이 덧칠해 주는 무게를 가지지 못한 갓 태어난 명작 같은 책이 한 두 권 나오는 데,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닉 혼비는 썩, 괜찮은 작가다. 가벼운 소재들에서 날카롭고 무게감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잘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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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
강인숙 지음 / 삶과꿈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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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은 그렇지 않은 책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특히 그 작가의 개인적인 말투나 취향, 성격 등에 관해 알고 있을 때는 책에서 느껴지는 육성이 더욱 생생하고 선명해 지는 것이다. 이 책은 나의 대학 교수님이자 영인문학관 관장님이신 강선생님의 최근작이다.

강선생님의 수필들은 상당히 재미있다. 선생님 특유의 자분자분한 말솜씨에 다양한 견문과 경험, 지식 등이 더해져 읽다보면 그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에 쉴 새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이 책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에서도 선생님의 그러한 글솜씨는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선생님의 표기 방법이다.

100달러→100불, 스팽글→스팡글, 피카소→삐까소, 게르니카→게르니까, 콩코드 광장→꽁꼬르드 광장 이런 식의 고풍스러운 발음을 그대로 살려 쓴 여행기는 한층 더 맛깔나고 재미있다. (우리 선생님은 고딕을 끝끝내 "꼬직"이라고 발음하신다. ^^) 뿐만이 아니다. 정육점이 아닌 "육고간" 이라는 표현이라든지 하는-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옛날식 표현법들이 가끔 나와서 재미있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 선생님은 4개 국어(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하시고, 서양 중세사에 능통하시고, 국문학에 불문학을 부전공 하셨다. 이러한 박식함이 이 책에서는 화려하다 할 만큼 잘 드러난다. 각 지역에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색, 가르시아 로르까와 헤밍웨이와 같은 문학가, 이슬람에 대한 지식들이 적절한 곳에서 교차되며 나와, 일견 여행 안내서 같은 느낌을 주는 여타의 다른 기행문들과 구별을 짓는다.

이러한 박식함과, 동행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네 명의 자매라는 데서 오게 되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 나이 먹은 것에서 오는 삶에 대한 통찰과 빠지지 않는 유머 등등이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따뜻하게 만든다. 읽고 있으면 머리는 꽉 차 오르고, 가슴은 훈훈해져 오는 느낌이랄까.

선생님께서 직접 찍으신 사진들이 칼라로 여러장 삽입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우리 선생님 책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 아름다운 책이다. 참, 참 많이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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