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웃 어 보이
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스마스에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란 쓸쓸한 법이어서, 아주 괜찮은 소설이 아니고는 나를 위로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유쾌한 기분을 가지고 싶어 선택한 책이었고, 그 선택은 적절하고도 탁월하였다. 뭐랄까, 여러모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는 소설이랄까. 크리스마스처럼 가볍고 유쾌하며 가슴 한켠이 따뜻해 오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데는 주인공 윌 프리먼의 캐릭터 탓이 가장 크다.

우리 고전소설에서는 이름으로 사람의 미래를 보여주는 명명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자면 춘향(春香:봄의 향기-아름다운 여자), 몽룡(夢龍:꿈에 용을 보다-과거 급제의 암시) 이런 식의 이름으로 주인공의 외모와 성격과 이야기의 미래까지도 결정짓는 것이다. 그런 이론으로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재미있다. Will freeman.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이름을 가진(뭐, 주인공 이름의 철자가 저게 아니라면 배째라. 날 더러 어쩌라고. ^^) 주인공은 36살의 부유하고 쿨한 백수다.

윌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작가는 잡지책을 펼쳐 자신의 쿨 지수(指數)를 세는 윌을 보여줌으로써 주인공 윌의 평소 생활 패턴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그러니까 윌의 평소 생활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자고, 옷 한 벌에 300파운드(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도대체 얼마지? 외국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면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가 없으니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이상의 돈을 쓰고, 머리 자르는데 최소한 20 파운드의 돈을 쓰고, 적어도 5장 이상의 힙합 앨범(36살에 말이다.)을 가지고 있고, 엑스터시(마약)를 복용한 적이 있고, 일년 연봉은 4만 파운드(그러니까, 이게 얼마냐구.)가 넘고, 죽도록 일'만' 할 필요도, 솔직히 일'을' 할 필요도 없는, 그런 (본심을 털어놓자면)부러워 죽겠는 백수다. 정말 유명한 캐롤 하나를 작곡한 아버지 덕분에 그는 하루의 시간을 주체 못해 꽉 막힌 런던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별난 취미까지 가지고 있다.

36살이 된 나이에 너바나를 듣고(왜 들으면 안되지?), 결혼은 끔찍하고 아이는 혐오스럽고(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이루어 놓은 거라고는 남성잡지에서 자신을 쿨하다고 판명해준 사건 정도일 뿐(음, 이건 좀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룩해 가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이지만 윌은 자신의 삶이 상당히 만족스럽다. 가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출근해 버린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일 때도 있지만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못할 정도가 되면 차를 몰고 나가 꽉 막힌 런던 시내를 드라이브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아서는 사회에 편입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낙오자라고 하기는 힘들고, 단지 자라서 어른이 되어 어른의 사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혼, 직업, 아이, 책임 등으로 대변되는 성인의 사회에서 그는 자유롭기를 원하며, 충분히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작가 닉 혼비는 그렇게 살아가는 윌이 그다지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건데?" 라고 묻는 듯 하다.

만약 이 소설이 그런 윌의 이야기로 그쳤다면 소설의 가치는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처럼 유쾌한 소설이라는 데는 별 변함이 없겠지만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한 소설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소설은, 이미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윌의 이야기와 아직도 아이이지만 어른이 되기를 외부에 의해 강요당하고 있고 스스로도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커스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가며 두 사람의 차이를 점점 좁혀가고 두 사람이 서로를 닮아 가는 것을 중심 축으로 전개된다.

조울증인 채식주의 히피 엄마 아래에서 살아가는 마커스는 덕분에 괴짜로 보인다. 실제로도 괴짜인 셈이고.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만 엄마 피오나는 그를 이해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고 그는 엄마가 그를 이해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단 둘이니까,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처음 윌에게 접근하는 단 하나의 이유 역시 홀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가슴 아프다. 마커스의 선하고 어른스러운 성품은 그의 집에서 벌어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드러난다.

「윌은 마커스가 착한 아이라고 제대로 알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냥 괴짜에다 골칫거리 꼬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다른 면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착했다. 윌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순종적이고 불평이 없다는 면에서 착한 게 아니라, 마음가짐 자체가 착했다. 쓰레기 같은 선물더미를 바라보면서 그걸 엄마가 사랑으로 정성스럽게 골랐다는 사실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반쯤 남은 유리컵을 보면서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뭐 이런 것도 아니었다. 마커스의 컵은 정말 철철 넘치도록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세상에는 이렇게 북슬북슬한 스웨터와 악보 따위는 부모의 면전에 던져버리고 닌텐도를 내놓으라고 떼쓰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면 정말로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닉 혼비, 『About a Boy』, 문학사상사, 2002, p. 202


하지만, 마커스의 그러한 장점은 93년에 초등학교 5학년인 그에게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착하지만, 뭘 어쩌라는 말인가. 마커스의 그러한 성품 덕에 그는 친구들에게 사탕세례를 당하고, 운동화를 빼앗기고 놀림을 당하고, 얻어맞는다. "어른"이자 "엄마"인 피오나는 자신의 확고부동한 삶의 철학 때문에 마커스의 문제가 그에게 그야말로 '실존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착하고 어른스러운 마커스는 그것을 엄마에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마커스의 문제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이'이자 '남'인 윌이다.

윌의 옆에서 열심히 퇴행을 거듭한 마커스는 떼쓰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기겁하던 아이에서, 노래를 부르려는 엄마에게 "아, 제발, 엄마. 그것만은 참아 줘."라고 이야기를 할 줄 알게 되고, "왜 그러니. 넌 노래하는 거 좋아하잖아. 조니 미첼 좋아하면서." 라고 이야기하는 엄마에게 "난 싫어. 이젠 아냐. 나는 빌어먹을 조니 미첼을 증오해."(p. 339)라고 쏘아붙일 줄 알게 된다.

윌이 마커스를 만나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면 마커스는 윌의 덕분에 아이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좀 더 만사를 편안하게 보게 된 것 같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윌은 적어도 한 가지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는 건 현명하지도 못하고 친절하지도 못한 일일 터이다. 사실 요즘의 마커스는 그리 다루기가 어렵지 않았다.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자기 일을 해결 할 수도 있었고, 일종의 껍데기가―그러니까 그 껍데기는 방금 윌이 허물 벗어버린, 그런 껍데기였다―생겼다고나 할까. 그는 김이 빠지고 평범해졌으며, 다른 열두 살짜리들처럼 떠들썩하고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윌은 그의 껍데기를 잃고, 그의 쿨함을 잃고, 거리를 잃어버린 채 겁에 질려 상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첼과 함께 있어야만 했다. 피오나는 마커스의 커다란 일부를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외상환자 병동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게 되었다. 마커스는 자신을 잃어버렸지만, 학교에서 무사히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같은책, p.338-339


작가는 어른이 된 윌의 성장 역시 성장이라고 말하고, 아이가 된 마커스의 변화 역시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지 변화에 찬사를 보낼 뿐, 어른이 되는 것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흔히 하는 이야기들처럼,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당시에는 유행가였다- 라는 말 그대로 지금은 '세월'이 덧칠해 주는 무게를 가지지 못한 갓 태어난 명작 같은 책이 한 두 권 나오는 데,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닉 혼비는 썩, 괜찮은 작가다. 가벼운 소재들에서 날카롭고 무게감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잘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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