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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결혼 2년 전에 아버지 환갑이 있었다. 큰아버지와 울 아버지는 쌍둥이인지라, 두분의 환갑잔치를 하느라 사촌형제들이 다같이 모였다. 펜션을 빌려 1박 2일의 잔치를 하고 다음날 아침 사촌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때, 당시 이슈가 되던 뉴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아버지가 한강 다리에서 자식 둘을 한강물에 던져넣었던 사건.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당시 둘째가 돌즈음이었던 사촌언니의 충격은 유난했다. 눈물까지 보이며 자기는 그 뉴스를 보는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 저녁 내내 울었다고. 솔직히 그땐 그럴것까지야 있나. 했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해 첫째를 낳고 누워있을 땐 영아 유기가 한참 이슈가 되었었다. 지금도 궁금한 건, 그해에 유난히 영아 유기가 많았던 건지, 내가 그런 류의 뉴스에 예민해서 자꾸만 들렸던지 하는거다. 갓 태어난 신생아를 병원 화단에 버린 사건, 아파트 화단에 유기되어 죽은채 발견된 신생아. 그 뉴스들을 접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그제서야 나는 아버지 환갑 무렵 사촌언니의 유난했던 충격이 이해되었다. 그건 그냥 뉴스가 아니었다. 그 참담했던 심정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중에, 첫째가 돌이 지난 다음에 읽었던 루안 브리젠딘의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 이라는 책을 읽고서야 사촌언니와 나의 그 유난한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그 책에 의하면, 출산 후 2년까지 여자의 뇌는 그런 류의 충격(영아 유기, 아동 학대, 아동 살해, 유괴 등등, 아동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 평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호르몬 덕분에.
사람이 자기가 현재 처해있는 환경이나 처지에 따라 어떤 사건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이겠지만,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 책이 주는 감동은 전혀 달라진다. 나는 이 책을 신경숙의 소설 중 가장 인상깊게 읽었고, 지금까지 써 온 신경숙의 소설중에선 가장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말 그런건지 나의 상황이 그러해서였는지는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건, 2009년 1월 4일. 내가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였다. 첫째도 둘째도 산후조리는 친정 엄마가 서울로 올라와서 해 주셨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밥 먹고, 애 젖먹이는 것 외엔 꼼짝도 안하고 엄마의 수발을 받던 시기였다. 내 생애 두번째로 엄마를 독점하던 시기. (처음으로 엄마를 독점했던 시기는 당연히 첫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던 한달이었다.)
그 시기는, 그렇게도 힘들다는 산후조리를 해 주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엄마에겐 휴식의 시기이기도 했다. 가장 적은 양의 빨래를 하고, 가장 적은 양의 밥을 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 외엔 오롯히 휴식할 수 있던 시기.
첫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의 산후조리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엄마가 차려주던 하루 일곱끼의 밥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었다. 새벽 4시가 되면 엄마는 남편과 내가 자고 있는 안방으로 살그머니 들어와 사위의 잠을 깨울까 저어하면서도 나를 흔들어 깨워 밥을 먹였다. 수북하게 고봉으로 담은 밥과 냉면 사발 가득 담긴 미역국을 다 먹이고서야 다시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끼니(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새벽참)는 오전 7시 30분경, 정식 아침, 오전 10시-11시경 오전 참, 오후 1시 점심, 오후 4시 오후 참, 저녁 7시 저녁, 밤 10시-11시 밤참까지, 꼬박 일곱끼였다. 참과 식사의 양의 차이는 없었다. 머슴밥같이 고봉으로 담은 밥에 냉면사발 가득한 미역국. 반찬이라고는 간장에 백김치였고 국은 한달 내내 미역국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려준 엄마보다 먹은 내가 더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이고보면 난 결국은 이기적인 자식일 뿐이고. 먹기가 힘들어 짜증을 부리면 엄마는 매번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안먹으면 젖이 안나고, 많이 먹어야 회복이 된다고. 덕분에, 애 가지고 찐 살이 하나도 안빠졌지. 그래봐야 6kg지만.
엄마의 무지막지한 산후조리는, 말하자면 당신의 한풀이이기도 했다. 넷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지만, 엄마는 단 한번도 산후조리라는 걸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나의 할머니이지만 참 잔인하고 심성이 나쁜 사람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할머니의 구박은 자심했고, 셋째 딸이었던 내가 태어났을때는 절정에 달해 아이를 낳고 첫국밥도 첫기저귀도 엄마가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 찢어지는 가난속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엄마는 젖이 제대로 돌지 않아 아이는 죽자고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았고, 분유 한 통 살 돈이 없었던 엄마에게 그건 그것대로 공포였다. 내가 배 부르다고 밥을 남길때 엄마의 얼굴에서는 그 공포가 여전하게 드러났다. 꾸역꾸역, 식도에서 항문까지 모든 내장에 미역국과 밥이 그득 차 있어, 밥 먹다말고 화장실을 다녀와야했던 지경에 이르러서도 엄마가 주는 밥을 끝내 다 먹었던 건, 엄마가 하지 못했던 한풀이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느껴져서였다.
엄마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몸이 아팠는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즉,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을 뿐, 자신의 심정을 말해주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아이를 낳아 누워있으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난 다행히, 아이를 낳고 바로 젖이 돌았고, 매번 젖이 남아 괴로웠던 젖에 관한한 축복받은 체질이다.) 그때의 엄마 심정이 와닿았다. 이런 몸으로 밥을 하고, 수도 시설도 없어 개울가로 기저귀를 빨러 다니고. 이건 50년대 이야기가 아니라 70년대, 그것도 후반기의 이야긴데도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나,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떻게 엄마는 내가 27살, 할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 명절마다 인사를 드리고 살았을까. 그분,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주신 그분,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참 나쁘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의 이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다.
도둑맞은 함지를 찾으러 왔다가 나는 그 어둡고 좁은 부엌에서 벽에 걸린 솥을 내려 물을 붓고 데웠소. 출산중인 아내 곁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당신을 밀치고 생전 처음 보는 당신 아내의 손을 잡고 힘내오! 힘을 내오!라고 외쳤소.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리오. 미역 한가닥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집. 당신의 노모는 앞을 못보는 사람이었재요. 게다가 이미 저세상 사람인 듯했소. 아이를 받아놓고 함지에서 밀가루를 퍼내 반죽을 만들어 수제비를 끓여서는 몇그릇 퍼놓고 국물을 산모가 있는 방에 디밀어 놓고......
(..........)
칠팔일 지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미역가닥을 마련해 당신 집에 들렀을 땐 산모는 없고 갓난쟁이만 있었소이. 당신 아낸 아이를 낳고 사흘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 종내는 세상을 떠났다고 했소. 극심한 영양실조라 출산을 감당하지 못했을 거라 했소.
(...............)
전날 내 함지에서 퍼서 남겨놓은 밀가루를 또 반죽해서 미역을 넣어 수제비를 끓여 한 그릇씩 퍼서 상에 올려주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방 안의 갓난쟁이에게 내 젖을 물렸소. 내 딸애에게 먹일 젖도 모자라던 때였네.
(p.229-231)
소설의 주요 내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엄마의 "인생의 동무" 였던 은규씨의 죽은 아내와 남겨진 아이의 이야기가 그 순간에 그리 가슴이 아팠던 건, 아마도 내가, 아이를 낳은 직후였기 때문이고, 아내가 출산을 하는데 미역한가닥 마련해 놓지 못하고 극심한 영양실조에서 아이를 낳았던 엄마의 산후조리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어찌 그리 마음이 아프던지.
그럼에도 그 아프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던 건 이기적이게도 이 구절이었다.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엄마는 네가 있어 기쁜 날이 많았으니.
(p. 223)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 빚쟁이 관계라던가. 부모가 전생에 자식에게 진 빚이 있어 이생에 다 갚고 간다던가. 부모는 그래도 끝내 네가 있어 기쁜 날이 더 많았다, 라고 말하고 자식은, 이기적인 자식은 결국 신에게,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책은 내내, 결국 자식들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재발견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엄마에 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나의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서의 감정에 대해, 한 인생에 대해. 저런 일들을 견뎌내는 동안 엄마가 했던 생각들에 대해.
난 그간 엄마에게 참 모진 딸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모진 딸이었는데, 이 리뷰를 쓰다보니 내가 나쁘다 욕하는 그 할머니나 나나 다를게 뭔가 싶다. 엄마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주지 않고 나의 감정만을 중요시하는 면에서는 도대체 뭐가 다른가. 저런 과정을 거쳐 낳아 길렀는데 잘못을 했기로서니 무조건 용서받아야 하는 거 아닌지.
그래서 이 리뷰는 상투적인 결말을 맺고 끝난다.
엄마에게, 잘 해줘야 겠다. 정말로. 엄마를 부탁해, 라고 눈물흘리고 싶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