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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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읽으면서도 내가 느낀 것은 작위성이었다. 본디, 신파랑 가장 만만하게 잘 팔리는 재료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신파를 만들기 위한 작위성이 지나치다. 집을 나간 엄마, 일하러 가서 자식들을 버린 아버지, 부두 하역일 중에 죽어버린 아버지, 암으로 죽은 어머니, 본드를 부는 형, 점심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아들, 피자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가난한 청년……. IMF로 망가진 서민의 생활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기획은 좋은데 이런 불행의 나열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기획'에 의해 쓰여진 소설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동기야 어쨌건, 소설은 잘 쓰여지고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이 소설은 별로 재미도 없고 잘 쓰여지지도 않았다.

이야기 구조는 엉성하고, 각각의 인물과 그 인물에 따른 에피소드는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을 모아놓은 것처럼 따로 놀고 있으며, 아이들을 책임지게 되는 영호의 행동에는 타당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스물 여남은 살의 청년이 문제아 남자아이를 셋이나 거둔다,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터인데 작가는 '감동'을 창출하기에 골몰한 나머지 그런 억지는 그냥 휘-익- 넘어가고 만다.

문장은 설익었다. 어설픈 수기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이 짧은 분량의 소설 안에서 숙희, 숙자, 동준, 동수, 명환, 영호, 명희 그리고 숙희 숙자의 어머니 이야기까지 모두 담으려 하다보니 소설은 중심 줄기를 잃고 더욱 산만해지게 된다. 문체도 산만하고 이야기는 식상한데 구성까지 산만하면 도대체 이 소설에서 무엇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

소설이 줄 수 있는 감동은 억지스런 신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참한 사람만이 고귀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비참해지는 길로만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청준이 2002년 동인문학상 제 3차 독회에서 한 이야기. 조선일보 02.1.7일자 발췌)이 이야기를 작가에게 꼭 해주고 싶다. 좀 더 묵힌 다음에 오래오래 고민해서 글을 쓰시라고. (그런데 괭이부리말 아이들 2까지 나왔다고 하더군. 차암... 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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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유용주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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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인생을 체험한 작가가 써내려간 글이라는 점을 크게 광고하는 책이었다. 읽어보면 과연, 이 작가는 참 처참하고 처절하게 살아왔구나 싶다.

책의 첫 문장은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삶에 기초한 문학이란 튼튼한 뿌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법, 유용주의 문학이 튼실하고 아름다운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예민한 촉수를 가졌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것들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 낼 줄 안다. 시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재능을 지닌 것이다. 그의 비유법은 독특하고 생동감 있으며 낯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강은 소름이 돋았다.(p.28)"라고 표현해 내는 능력은 압권이다. 그의 촉수는 예민하고 그의 문체는 섬세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연을 꼼꼼히 관찰한다. 땀을 흘리며 길을 걸어 거기에서 얻은 지식과 감성으로 글을 쓴다. 당연히 튼실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본디, 시를 좋아하거나 읽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산문집을 읽고 나니 그의 시를 꼭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그가 좋아한다는 이성부 시인의 시집도. (사실, 이성부 시인은 나도 좋아한다. 이성부 시인의 『봄』은 절창중의 절창이다.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그가 하도 극찬을 하기에 소설가 이문구의 소설집도 두 권 샀다.

남의 독서목록을 훔쳐보기도 오랜만이다. 참 좋은 글.

「좋은 작품은, 온 몸으로 일하고 치열하게 삶을 밀어붙인 사람에게서 나온다」
유용주,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솔출판사,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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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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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그녀의 단편들 덕분이다. 장편도 괜찮은 편이지만 은희경의 단편은 순간순간 빛을 확 발하는 것이 한편씩 있다. 물론, 전혀 아닌 것들도 있고. 최근 소설집 『상속』에서 《꽃피는 봄날 누가 리기다 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와 《딸기도둑》은 은희경 단편 소설의 장점을 잘 살린 작품이라 하겠다. 이쯤되면 은희경의 장점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은희경의 가장 큰 장점은 소설적 세련됨에 있다. 은희경은 세련되었다. 어휘나 문장상의 세련됨 뿐만이 아니라 소설적 처세 역시 세련되었다. 그녀는 핵심을 짚는 예리한 말을 한마디씩 던지지만 결코 깊이 푸욱 찔러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흐음,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분은 있으되 그 부분으로 인하여 가슴을 싸안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헌데 그것은, 그녀의 사유가 깊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처세술의 일환으로 보인다. 소설적 처세술. 그녀가 택하고 있는 소설의 위치는 깊이 들어가 함께 어울려 바닥까지 보여주는 굿판이 아니라 칵테일바에서 처음보는 남녀가 만나 세련되고 쿨한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기민하고 예리한 통찰이 오고 가기는 하지만 서로가 낯선 사람들끼리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는.

김형경의 소설은 그 반대다. 은희경이 가진 것이 은빛 바늘이라면 김형경이 가진 것은 무시무시한 장도다. 그것도 별로 잘 들지도 않는. 김형경은 그 칼을 들고 내내 죽을 힘을 다해 내리친다. 잘 피해가면, 쯧쯧, 잘못 휘둘렀어, 라고 측은함을 곁들인 비웃음을 줄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않게 한방 맞으면 돌이킬 수없는 치명상을 입는다. 칼날이 무뎌 잘 들어가지도 않는 그 칼을 김형경은 집요하게도 쑤셔넣는다. 소설을 읽다가, 타악- 하고 덮어버리게 될 정도.

이쯤 되면, 상을 줄만한 소설은 당연히 은희경의 소설이지, 싶지만-소설적 기법이 훨씬 뛰어나고 세련되었으니까- 아무래도 깊이 싸안고 가게 만드는 소설은 김형경이다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김형경보다는 은희경이 취향에 맞는다 싶기도 하고.

은희경은 세련되고 날카로움에 조금만 더 깊었으면 좋겠고-『새의 선물』에서 보여주었던 통찰의 깊이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형경은 소설적 기법을 좀 더 연마해 그 무딘 칼날을 조금만 더 날카롭게 갈아줬으면 좋겠고.

소설전 잡설을 너무 길게 깔았다. 김형경의 책을 읽으면서부터 하고 싶던 이야기였는데. 어쨌든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서.

은희경의 소설답게, 날카롭고 예리한 문장이 여러구절 있는 소설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고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은희경 『마이너리그』창작과 비평사, p.53


「나는 유능한 카피라이터는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고가 되지 못할 바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자존심을 지켰던 것이다. (......) 결국 나는 '안해서 그렇지, 하면 잘할 텐데'라는 말을 듣는 결로 자족했다. 한마디로 씨니컬한 어조로 이류를 자처함으로써 경쟁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뜻이다. 일류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경계심을 살 필요가 없었으므로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기도 했다.」
같은책, p.132


논란이 아주 많았던 책이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몹시 괜찮게 읽었던 책이다.

이 세상엔 10%도 안되는 메이저와 메이저가 존재하기 때문에 마이너로 전락하는 90%가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4명의 "만수산 4인방"은 저마다 속으로 나머지 셋을 마이너로 깔아뭉개 스스로를 메이저로 끌어올리는 알고보면 똑같은 마이너리그의 인물들이다. 10%도 안되는 메이저들에게 내내 비교를 당하며 피해를 보고 끝내는 사기까지 당해가며 사는. 그들의 인생은 이 땅의 90%에 해당하는 나머지 인물들의 삶이기 때문에 감히 비웃거나 나무랄 수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은, 읽다보면 이들의 전락기라는 느낌이 든다. 사춘기의 남자아이가 어떻게 사기비슷한 것까지 당해가며 늙어가는지를 모여주는 그들의 성장은 조금 서글프기까지 하다. 이 서글픈 비애감을 은희경은 그냥두지 않는다. 작가는 여기에 날카로운 유머를 투입함으로써 풍자의 극으로 소설을 끌어올린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두환은 소희에게 수백번 되풀이했던 맹세를 얼마 전에 또 했다 이제 다시는 고생 안 시킬게. 그리고 매우 파격적인 방식으로 그 맹세를 지켰다. 죽여버린 것이다.」
p. 139


비애와 유머의 적절한 리듬감이 18살부터 40살 까지의 좀, 지루할 법도한 이야기를 꽤나 맛깔스럽게 바꾸어놓고 있다. 인물 하나하나의 개성도 꽤 잘 살았고, 화자로 선택한 김형준(나)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역시, 은희경의 소설적 재능의 승리.


추가 : 김형경의 사랑을......이 페미니즘 소설로 읽혔다면 이 소설은 남성을 위한 소설로 읽혔다. 마지막에 승주와 조국의 대화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그나마 조금 재미있다 싶은 건 월드컵하고 박찬호지."라는 말에 울 아부지 생각나서 콧등이 찡해졌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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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맘 2009-12-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전에 읽은것같은데..그당시에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서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그때당시에는 책방에서 빌려봤는데...헤헤 그때는 이것저것 많이 빌려서 보고했는데 지금은 왜이리도 책욕심이 많이 나는지...ㅇㅇ
 
운명의 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3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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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는(이 표현이 적당한가?) 것은 서너가지의 정해진 루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는 누구나 그렇듯 '베스트셀러'의 작가인 경우, 일단 한번쯤은 손이 가서 한 권쯤은 구입하게 된다. 둘째, 내가 좋아하는 작가 또는 비평가가 어떤 지면에서 새로운 작가의 이름을 들어 칭찬하는 경우. 셋째, 문학상 수상 작가. 김훈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보통 한 달에 두 번 2주일 치를 몰아서 하는 신문 스크랩을 하면서 읽게 되는 신문 기사들을 통해. 다섯째, 다른 사람의 독서 목록에서 보고.

음, 이사벨 아옌데, 라는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가 73년 피노체트에 의해 정권을 찬탈(또는 전복)당한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딸이라는 기사를 보고서 였으니 네 번째 경우에 해당하겠다. 

작가의 출신 지역이나 나라를 알고 그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은 작가와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특히 처음 접하는 작가일수록.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전정보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칠레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 전 세계에서 가장 길다란 나라, 남미의 왼쪽 바다 접경 사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뱀 같은 형상의 나라, 이런 정보가 도대체 작가 이해와 작품 해석에 무슨 도움을 준다는 거지? 겨우겨우,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의 조카딸이라더라,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책에 접근.

이야기는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이주한 영국인의 집안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당시(1884년경) 칠레는 정치적 형식으로는 독립국가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예속된 상태의 국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칠레에 정착한 영국인 집안'의 위치와 권위쯤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머스 집안은 <대영제국 수출입 회사>에 다니고 있는 장남 제레미 소머스, 선장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둘째 존 소머스, 막내딸 로즈 소머스가 모두 미혼인 채로 살고 있다. 이 집안에 엘리사가 비누상자에 담겨 이 집안의 현관 앞에 놓인 것은 물에 고인 듯 조용하고 교양넘치는 생활을 하던 이들 가족에게 큰 활력소가 되어 준다.

로즈 소머스는 엄마와 같은 관심과 극단적인 이기적 무관심 사이를 오고가며 엘리사를 "인형같이" 꾸미기도 하고 "칠레 원주민 아이 같이" 더럽고 헐벗은 모습으로 뛰어놀게 내버려 두기도 하며 엘리사를 키운다. 로즈의 이 극단적인 양극에 닿아있는 양육방법은 엘리사의 성격 역시 얌전하면서도 저돌적인 양극단을 달리게 된다.  

이 소설은 조금쯤 산만하다. 처음부터 이야기의 종결을 알고 시작하는 작가의 시점은 중간중간에 뒤의 이야기를 미리 툭툭 던져버림으로써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고, 중간에 느닷없이 삽입되는 타오 치엔의 중국 이야기는 그야말로 겉돈다는 느낌이랄까. 영국적 분위기의 칠레 상류사회에서 미국의 골드러시로 따라 가는 것만도 소설의 스케일이 커진다는 느낌인데 거기에 중국의 이야기가 갑자기 뛰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 싶고, 지나치게 다양한 이력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모두 카메라를 들이대려 하다 보니 정장 중심줄기는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특히 위장과 변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고가는 인물들은 인간의 본성을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매력을 지닌다.

평탄한 삶을 팽개치고 뛰어나온 엘리사는 중국인 종이(뛰어난 의사라는 뜻 정도?)의 도움을 받아 호아킨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다. 여기서 엘리사는 변질이 아니라, 위장이다. 본래의 성정이 바뀌지는 않으니. 자존심 강하고 똑똑했던 칠레 남자 호아킨은 사랑하는 여자 엘리사와의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욕심으로 돈을 벌기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골드러시에 한몫 볼 욕심으로 회사의 돈을 훔쳐서. 여기까지만 해도 그 역시 위장이다. 그의 본성은 여전히 순결하고 부드럽다.

이들에 비해 영국에서 성경을 팔기 위해 칠레로 넘어온 제이컵 토드는 위장이 아니라 변질이다. 그의 본성은 본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였고, 사기가 들통나 칠레의 상류사회에서 쫓겨나 미국의 신문기자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거짓에 거짓을 거듭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질"이란 인간 본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진실된 알맹이, 가치있는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을 이 글에서는 변질된 인간으로 칭하기로 한다면, 호아킨 역시 변질되고 만다. 순박했던 청년은 미국 서부의 무법 천지 속에서 최악의 범죄자가 되어 가고, 제이컵 토드는 변질된 속에서 나오는 거짓과 거짓으로 삶을 영위한다.

그 속에서 의지적이고 순결한 인간들 엘리사와 타이 치엔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타이 치엔과 엘리사는 결합하게 되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산만하고 정신없는 이야기 구조속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풍속사의 자세한 묘사다. 칠레로 이주한 영국 상류사회의 풍속사, 골드러시가 막 시작되었을 때의 미국 서부의 풍속, 막 개방되기 시작하던 중국의 풍속(펄벅의 대지에 비해 그야말로 겉핥기 식이지만.)등등이 여성 작가 특유의 필치로 세밀하게 묘사됨에 따라 소설은 인물들의 상투성, 식상함 속에서도 발바닥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소설이다, 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던데. 글쎄. 말만 갖다 붙이면 죄다 페미니즘이냐? 글의 어디에서도 엘리사의 자아 실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고집 세고, 19세기의 기준으로는 제법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일 뿐 그것을 페미니즘 적 요소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19세기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 엘리사의 20세기 여성에 가까운 사고는 외려 겉도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야말로 19세기에 뛰어든 20세기의 여성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비슷하게 읽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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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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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이란 헤브라이어의 베엘제버브(Ba'alzevuv: 희랍어의 Beelzebub)를 번역한 말로 직역하면 <곤충의 왕>이란 뜻이다. <악마>를 암시하는 신랄하고 암시적인 말인 것이다.

쥘 베르느의 『15소년 표류기』정도의 소설을 상상하고 책을 펼친 나에게 『파리대왕』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5소년 표류기』가 어른의 눈으로 본 아이들만의 이상향 건설에 관한 이야기라면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 이야기랄까.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아이다움을 드러내는 한 요소는 숫자를 셀 수 있는 나이의 누구도 외딴섬에 표류하게 된 자신들의 일행이 몇 명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5소년"이라는 규칙의 세계와 이 얼마나 완벽한 대조인가.

작가는 아직 '규칙'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10대 초중반과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을 '규칙부재'의 무인도에 던져 넣음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이며, 그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법률이 필요하고, 끊임없는 공부와 수도로 악한 본성을 순화시켜 나가야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순자의 그러한 주장이 유감없이 진리로 드러난다.

고전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작품이 수없이 많은 의미의 텍스트로 변주해 가며 읽힌다는 데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파리대왕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로 읽을 수도 있고 풍부한 상징을 통한 정치학 교과서로 읽을 수도 있다. 또한 소년들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이 여타의 가벼운 소설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 완벽하고도 풍부한 상징성이라 할 수 있다.

본디, 지나치게 상징적인 소설은 재미없고 촌스럽다. 풍자나 패러디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온갖 조잡한 상징을 이리저리 가져다 기워놓은 작품은 읽기조차 역겨워진다. 하지만 월리엄 골딩은 그러한 함정을 완벽하게 피해 가는 것으로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이야기의 중심 축을 형성하는 인물은 셋 정도다.

규칙과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는 처음 아이들에 의해 지도자로 선출된다. 키가 크고 몸집이 단단한 금발머리인 랠프는 외면적 아름다움과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소라로 처음으로 아이들을 집결시키는-그것은 물론 돼지(끝까지 본명이 나오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도)의 생각에 랠프가 따른 것에 불과하지만- 것으로 아이들의 신뢰를 획득한다.

두 번째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 그가 문명의 세계에서는 누구보다 규율에 복종하고, 규율 그 자체로 아이들을 지휘했던 성가대의 통솔자였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놀라운 역설을 제공한다. 또한 그는 힘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세 번째 지성과 이성을 상징하는 돼지. 그는 누구보다 똑똑하지만 천식과 보기 흉한 외모로 지도자의 브레인 트러스트 역할만을 맡을 뿐이다.(그나마 지도자는 그를 별로 위해주지도 않는다.)

나머지, 작품 전체를 통털어 가장 잔인한 인물로 등장하는 잭의 오른팔 로저-그는 현대에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살자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규칙과 문명을 사랑하고 그에 감정적으로 동조하지만 폭력과 야만의 위협과 고기의 달콤한 유혹에 그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약한 존재인 쌍둥이 샘과 에릭. 예언자 사이먼.

등장인물 하나하나는 현대의 사회에서 투쟁하고 있는 세력 하나하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완벽하고도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파리대왕"이 폭력과 야만을 상징하는 '잭'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읽어내려 갈수록 '파리대왕'이란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무지와 공포 그 자체를 일컫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어린아이들에 의해 말해지는 두려움. 조금 큰-랠프 또래의- 아이들은 겉으로는 콧웃음을 치지만 역시 똑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 두려움은 아이들을 분열시키고, 좁은 섬은 문명과 폭력의 세계 양쪽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 두려움에 대한 의도적 외면과 축제의 격앙된 상태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그로 인하여 더욱 야만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우발적(과연 우발적이었을까?) 살인과 달리, 아이들은 이제 의도적 살인을 계획하고 사람 사냥에 나선다. 돼지(지성, 이성)이 죽고 난 뒤, 혼자 남게되는 랠프(문명)은 폭력에 의해 잔인하게 사냥되어지기(이런 이상한 피동태를 쓰는 것은 싫지만.) 시작한다. 로저는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랠프를 찾아다닌다. 창의 양끝을 뾰족하게 만든다는 것은 랠프의 목을 잘라 창의 한쪽에 끼우고 다른 한쪽을 바닥에 꽂아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의도적 살인" 인 것이다.

마지막, 위대하고 거대하며 완벽한 권위를 지닌, 아니, 무엇보다 문명으로 가장 된 "힘"을 가진 어른을 만나는 순간 아이들의 야만성은 순식간에 거세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실해 버린 순진함에 대한 고통으로. (이 장면은 13일의 금요일에서도 자주 보이는 장면이다. 살인마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하나의 청소년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 결국,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은 그렇게 무섭도록 잔인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소설은 또한 성장소설로서의 위치도 획득하게 된다.

고전은,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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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네요. 저 이거 영화로 보고 완전 충격받았었어요. 그런 상징의 틀로까지 이해는 못하고 그저 경악스럽다는 감정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는 아무래도 깊이있는 감상이 안되는 것 같아요. 책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아시마 2009-12-03 09:3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의 충격은 컸어요. 영화는 아무래도 이런 성찰을 담기는 힘들죠. 매체의 차이랄까. 영화는 영화대로 좋았고, 소설은 소설대로 좋더라구요.
이렇게 많은 메타포를 담은 소설은 아무래도 좀 재미는 없어질때가 많은데, 이 소설은 재미라는 부분에서도 정말 압권의 성과를 거둬요. 어떤 깊이나 가치의 문제와는 별개로, 진짜진짜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니 꼭 읽어보세요. ^^